*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星州世宗大王子胎室)
- 국가지정 사적 제444호 /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태실로 오르는 길)
세종대왕자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의 태봉(胎峰)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胎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금성대군 등 다섯 왕자의 태실은
연꽃잎이 새겨진 네모난 대석을 제외한 다른 석물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대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및 안평대군의 태와 태실비는 파내어 태봉 아래로 버렸다고 하는데
1975년에 태실을 보수 정화하면서 5기의 대석을 찾아서 제 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석조물이 모두 없어진 안평대군의 태실과 부러진 태비)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세조가 등극한 뒤 세조의 태비 앞에
홍윤성이 글을 짓고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웠으나
지금은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세조로 등극한 진양대군(수양대군)의 태실과 태비, 그리고 가봉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금성대군의 태실)
화강암으로 깍은 19기의 태실은
조선태실 의궤(儀軌) 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호(胎壺)를 넣었다.
태호 속에는 태항(胎缸)과 태주(胎主)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誌石)을 넣고
지상에는 기단, 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각 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외롭게 삼촌들의 태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세손 단종의 태비)
이 태실은 조선 세종 20년(1438년)에서 24년(1442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에는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을 태실로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왕자들의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 보수시 발견된 분청인화문대접과 분청상감연화문 뚜껑 1벌,
명기가 있는 지석 2점이 현재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밖의 것들은 1929년에 왕가로 모두 옮겨갔다고 한다.
(명당으로 알려진 왕자들의 태실 가는 길에 근래에 몰래 만든 민간인의 무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왕자태실이 이렇게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것으로는 유일하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왕자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인 선석사)
문종실록에 보면,
풍수학(風水學)에서 말하기를
"태장경(胎藏經)에 '하늘이 만물(萬物)을 낳는데 사람으로써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胎)로 인하여 장성(長成)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盛衰)가 모두 태(胎)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명당을 가리고 때에 맞춰 태를 묻어야
자신의 일생이 복을 받고 후손에게 복이 온다는 풍수적 믿음을 굳게 지녔던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 자궁 속 태아의 생명줄이었던 태를 소중히 여긴 이유인 것이다.
첫댓글 꽃사진 자료를 만들지 못해 다른 것을 자꾸만 올리고 있습니다.^^
이제 역사까지 ... 선생님 모르시는게 없으세요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에구, 그냥 여기 저기에 있는 걸 베껴온 것입니다요.^^
왜 전주에 태실을 두지않고 성주에 두었을까요 .. 태 하나에도 온 정성을 다해 모시는 .. 생명의 귀중함을 잘 일깨워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잘 보고갑니다 ^^
조선시대의 왕릉은 왕궁에서 100리 안쪽에 써야 했으나 태실만큼은 거리 제한을 두지 않았답니다. 아무리 멀더라도 풍수의 명당을 찾아 태를 묻을 자리를 정했으니,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성주까지 온 거랍니다.
어릴적 초가집 작은방 천장 가까이에 높게 못을 박아 탯줄을 거기에 매달아 놓으면 까맣게 바짝 마른 그 탯줄이 이건 누구거여..저건 큰놈 것이여...이러던 어머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귀퉁이에 외롭게 자리한 단종의 태비를 보니 왕위다툼에 피비린내 나던 세월의 상흔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다는 생각마저 드네요..
가까이에 있는데도 못들려봤는데 상세한 설명을 읽고나니 이제 가보면 뭔가 느낌이 다를것 같습니다. 상세한 설명에 귀한자료들 감사합니다.
아쉽게도 저는 저의 태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요즘처럼 병원에 함부로 버리지는 않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