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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經世遺表)
창름지저(倉廩之儲) 2
무릇, 환상하는 법은 초야에서 일찍이 불편함을 논의했고 조정에서도 이미 그 떳떳하지 않음을 관찰했으면서도 오히려 그럭저럭 질질 끌기만 하여 증가된 것은 있어도 감손된 것은 없다.
고 유신(儒臣) 이익(李瀷)이, “환상하는 제도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에 창안되었다. 고려 초기에 이창(里倉)을 설치했고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명칭을 의창(義倉)이라 고쳤다. 호마다 미곡을 거두었는데, 때에 따라 거두어 쌓아서 급한 경우에 대비하였다. 충선왕(忠宣王) 때에는 유비창(有備倉)을 또 설치했고 연화미(烟火米)도 설치하였다. 대개 풍년이 들면 호의 대소를 요량하고 곡식을 차등이 있게 내서 고을 창고에 갈무리했다가 오는 해의 흉년을 구제하던 것인데, 곧 《주례》의 조속(耡粟)ㆍ옥속(屋粟) 제도를 본뜬 것이었다. 그러나 십일(什一) 외에 까닭없이 가혹하게 거두면 원망과 나무람을 막기 어려우니, 사창(社倉) 제도의 완전함만 같지 못하다.
이것은 주자가 일찍이 시행한 것인데 그 시초에는 관곡을 꾸어줘서 민사(民社)에 저축하고 해마다 10분의 2의 이식을 받았고 남은 곡식을 쌓은 다음에는 그 꾸어온 원곡(元穀)을 상환해도 남은 곡식으로 백성을 구제하기에 족했다. 내가 여러 고을을 보니 혹 지역이 넓어서 관아와 100리나 떨어진 먼 거리에도 관곡을 억지로 떠맡기고 있었다.
지금 만약 관아와의 거리를 요량해서 유순(由旬) 이외에 각각 사창을 설치한다면, 억지로 떠맡기는 폐단이 반드시 없어져서 백성이 모두 기꺼이 따를 것이다. 10분의 1을 더 거두면서 명목을 작서모(雀鼠耗)라 하며 받아들일 때에는 큰 말로 하고 내어줄 때에는 작은 말로 하여, 쥐와 벌레가 먹어서 줄어든 것이라면서 그것을 계산하여 관가 용도로 하니 이것은 국모(國耗)이지 작서모는 아니다. 하물며 오고가는 다리 품삯과 두곡(斗斛)의 잉여분 등 여러 가지로 허비하고, 떠돌아 없어진 호에게 받아낼 것을 배정해서 징수하는 것이 거의 온 마을에 미쳐, 빚을 징수하는 해독이 더욱 심한데 있어서랴?” 하였다.
나는 환상을 설치한 것이 본디 백성을 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읍창(邑倉)을 없애고 사창을 세우면 혹 폐막을 구제하는 방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환상은 위로는 나라의 용도를 보충하고, 중간으로는 온 관청의 용도를 유지하며, 아래로는 영ㆍ읍(營邑)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는데, 백성은 생각지도 않는 것이다. 그 본뜻이 이와 같은데, 사창을 세워서 이 폐막을 구제하고자 하니, 이것은 사리에 밝지 못한 언론이었다. 만약 모곡을 받지 않는다면 본디부터 환상이라는 것이 없었을 것이니, 작서모라는 말은 지금에 반드시 말할 것도 아니다. 큰 곡, 작은 곡은 나라에서 마련한 법이 이와 같지 않으니, 이것은 수령이 적임자인가 아닌가에 달렸을 뿐이며 마땅히 말할 바가 아니다.
고 유신 이익은 “10분의 1의 모곡은 7년이 지나면 본곡 수량과 같게 된다. 그러나 7년을 지나는 동안에 불법으로 거두는 것이 몇 천만 석인데, 이 물건들은 과연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봄에 받는 것이 비록 15두라 하나 실상은 13두에 불과한데, 모곡은 15두 턱을 그 해 안에 바쳐야 하며 길 양식, 다리품도 거의 곱절이나 증가된다(생략). 유반(劉攽)이 왕개보(王介甫)에게 보낸 편지에, “백성이 관에 청묘전(靑苗錢)을 받아가는 것은 그 사람이 어찌 넉넉해서 바치기를 좋아해서였겠는가? 공사(公私) 간에 부채가 급박하여 자기에게 없는 것을 받아가기 때문에 이식을 내더라도 칭대(稱貸)해서 그 급한 경우를 넘기는 것인데, 개보는 정사를 하면서 능히 백성에게 집마다 사람마다 넉넉하게 해주지 못하고, 칭대하는 법을 베풀어서 백성에게 유익하다고 하니 또한 부끄럽지 않은가?” 하였으니, 아아! 이 언론이 백성을 다스리는 요점이 되겠다.
생각건대, 이 논설에 간색미ㆍ낙정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다만 10분의 1인 모(耗) 조만 말했으며 또 봄에 갈라주는 것이 13두라 했음은 모두 태곳적 말이었다. 간색미ㆍ낙정미ㆍ타석미 따위가 꼭 2두를 넘는데 봄에 갈라주는 쭉정이도 8두에 차지 못하고 그의 논한 바가 이와 같으니, 그때의 여러 가지 학정이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던가 보다.
고 유신 이익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환곡의 제도를 없애고 상평하는 제도를 만들고자 하였다. 상평이란 화적(和糴)인데, 시중 곡식이 만약 큰 흉년이 아니면 봄에도 오르지 않으니 화적도 역시 시행하기 어렵다. 임진년 이전에는 여러 고을에 모두 상평곡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환상으로 변해버렸다.” 하였다.
봄에 갈라주었다가 가을에 거둔다는 것이 《주례》에 분명하게 기재되었으니 환상도 무리한 법은 아니다. 특히 법규가 엄하지 않아서 난잡하여 통솔됨이 없기 때문에 백성에게 큰 해가 되었을 뿐이니 반드시 상평이 지극히 좋고 폐단 없는 법이라 할 것은 아니다. 무릇 곡물은 1년만 묵혀도 벌써 먹을 수가 없게 되는데 하물며 곡식을 사서 쌓아두고 기약 없는 흉년을 기다리니, 어찌 썩어서 버리게 되지 않겠는가? 상평하는 법도 가볍게 논의할 수는 없다.
무릇, 환상법의 폐단은 선조(先朝)의 책문(策問)보다 자세한 것이 없다. 이 점을 잘 강구한 다음이라야 폐단을 바로잡는 것을 논의할 수가 있다.
을묘년 어책(御策)에 “옛사람이 시행하던 화적(和糴)ㆍ평적(平糴)ㆍ태적(兌糴)도, 포백(布帛)ㆍ전도(錢刀 : 돈)에서 다(茶)ㆍ염(鹽)ㆍ절초(折草 : 담배)까지 곡식과 서로 준하지 않던 것이 없었다. 곡식이 귀할 때에 내고 흔할 때에 들이며, 값이 중할 때에 발산하고 가벼울 때에 거두어서 한결같이 그 해의 흉풍을 보았고 이가 남는 것은 생각지 않았는데, 이렇기 때문에 상평이 성립된 것이다. 환상은 곡식이 흔해도 내어주고 귀해도 받아들이며 값이 중해도 거두고 가벼워도 발산하여 해마다 이가 남는 것은 취하고 풍흉(豊凶)은 묻지도 않으니, 《대전(大典)》의 본뜻과는 서로 반대되는 듯하다.” 하였다.
또 “여기에 해자를 파고 여기에 성을 쌓아서 금성 탕지(金城湯池)를 두르면 급한 변고에도 족히 믿을 만하다. 그러나 성곽 없는 산골짜기와 들판에 천종 만유(千鍾萬庾)의 곡식을 쌓아두면 도둑들을 도와주는 데에 가깝지 않은가?” 하였다.
또 “전지(田地)에 대한 삼세(三稅)는 오직 정당하게 내는 것이고 노비공(奴婢貢)은 수납(輸納)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혹 환상과 혼동되고 혹 주창(州倉)ㆍ군향(軍餉)으로 들어가서 뜻밖의 수용에 대비한다. 그러나 거두어서 본읍에 유치한다는 것이니 산성(山城)에는 빈 껍데기 문부만 갖고 있다. 남한ㆍ북한과 심도의 군량은 한 해 걸러서 첨가하거나 매년 첨가해도 곡식이 더 많아지지 않고, 흔히 미려(尾閭)로 돌아간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봄에 갈라주었다가 가을에 거둔다는 것이 《주례》에 분명히 기재되었으니, 화적ㆍ태적이라 하는 외에, 귀하고 흔한 것을 불문하고 때에 따라 갈라주고 거두었던 것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명칭을 군향이라고 한 것은 산성에 저축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기 때문이며, 명칭을 진곡(賑穀)이라 한 것은 본뜻이 다만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데에 있었고 이미 사변에 대비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니, 들판에 쌓아둔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은 전세(田稅)와 비공(婢貢) 외에 간사한 아전이 많이 사들인 곡식과, 서원(書員)이 불법으로 거둔 곡식이 환자 첩지(還子帖紙)에 섞여 나오지 않은 것이니, 이것은 오늘날에 마땅히 고칠 바입니다.” 하였다.
어책에 “상평청과 진휼청을 합쳐 한 청으로 만들어서 5도(道)는 그렇게 시행하고 있으나 관서ㆍ해서ㆍ관북만은 아직도 상평이라는 옛 명호가 있고, 해서에는 진휼청이 또 없으며, 균역청 곡식이 6도에 쫙 깔렸으나 해서ㆍ관북만은 이 명색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산성 곡식은 모두 비국의 관할인데, 영남의 조령(鳥嶺)ㆍ성산(城山)ㆍ독용(禿用)ㆍ천생(天生)의 군향곡(軍餉穀)은 호조(戶曹)에서 관할한다. 월과미(月課米)는 한 가지인데 혹 비국에서 관리하고 혹은 호조에서 관리하며 혹은 각자 그 영(營)에서 관리한다. 훈국미(訓局米)는 그 명칭을 훈국이라 하면서 상진청에서 관리함은 무슨 까닭인가?
같은 통영곡(統營穀)으로서, 함께 회계에 들어갔는데 회내(會內)와 회외(會外)로 구별하며 호남ㆍ관북의 군향과 관서 관향(管餉)에도 회외라는 것이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군자곡(軍資穀)은 8도에 다같이 있는 것인데(《文獻備考》에 나타나 있다), 지금 해서ㆍ관서에만 없음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나는 생각하기를, 관할하는 법이 이와 같이 어지러우니 지금에 만약 법을 세운다면 서울에는 오직 호조가 주관하고 외방에는 오직 감영에서 주관하며 무릇 모(耗)를 받아서 쓰고자 하는 자는 모두 호조와 감영에 관유(關由 : 공문을 경유함)할 것이며 감히 그 현(縣)에 바로 관유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영(令)이 여러 갈래로 나가는 폐단이 조금은 그칠 것이다.
어책에 “곡식 명칭은 대미(大米)ㆍ소미(小米)ㆍ정조(正租)ㆍ황조(荒租 : 이두문자에 稻를 租라 한다)ㆍ대두(大豆)ㆍ소두(小豆)ㆍ대맥(大麥)ㆍ소맥(小麥)ㆍ서(黍)ㆍ직(稷)ㆍ촉서(薥黍)ㆍ교맥(蕎麥)ㆍ패자(稗子)ㆍ녹두(菉豆) 등속이 있어 그 종류가 일정하지 않은데, 관북ㆍ관동ㆍ해서에는 대미 이외에 별도로 조미(糙米)가 있고, 영남에는 소미 이외에 따로 전미(田米)가 있으며, 호남만은 서ㆍ직ㆍ촉서ㆍ패자가 없음은, 그 땅에 알맞지 않아서 당초부터 경종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있기는 하나 수량이 원래 적어서 환상곡 안에 넣지 않았기 때문인가? 동두(東豆)는 어떤 곡물인데 경기에만 보이며 조도(早稻)는 무슨 까닭으로 관동에만 있는 것인가? 미모(米牟)는 쌀보리 같은 것이며 모미(牟米)는 보리를 찧어 보리쌀로 만든 것인데, 맥조(麥租)라는 것은 과연 어떤 곡식이며, 어느 지방에 나는 것인가?” 하였다.
나는 우리나라 이두문자에 도(稻)는 조(租), 숙(菽)은 태(太), 소맥(小麥)은 진맥(眞麥 : 그 가루를 참가루라 함), 교맥은 목맥(木麥), 작맥(雀麥)은 이모(耳牟 : 鈴鐺麥), 촉서는 당(糖)이라 하며, 심지어는 패(稗)를 직(稷), 직을 속(粟)이라고까지 해서 9곡 명칭이 반 이상이나 그릇되었으니 본디 이름으로 고쳐서 속된 버릇을 없앰이 마땅하며, 오직 도(稻)가 조(租)가 된 것은 서로 전해내려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비록 그대로 해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책에 “여러 곡식 중에 이것은 풍년인데 저것은 흉년이어서 서로 대신 징수하는 것을 준절(準折)이라고 칭한 것이 《통편(通編)》에 기재되었으나 그 중 두어 종류가 빠짐을 면치 못했음은 무슨 까닭인가? 8도의 곡식 값을 가지고 수년 동안을 비교한 다음, 상정법(詳定法)을 만들어서 중외에 반포했으니, 공평하고 균정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서도ㆍ남도와 경기가 각각 같지 않고, 또 한 도 안에도 각 아문에서 관할하는 것이 또한 같지 않다. 이미 상정법이 있으니 상정법에 빙준(憑準)함이 마땅하다. 서울과 외방에서 돈으로 장만할 때는 시가대로 인정하여 시기를 타서 이(利)를 노리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무엇인가?” 하였다.
나는 대신 징수하고 준절하는 법은 곡식 문서를 가장 어지럽히는 것이니 매우 부득이한 일이 아니라면 허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상정법례가 도마다 같지 않음은, 그 땅에 알맞고 알맞지 않음에 따라 곡식에 귀함과 흔함이 있기 때문이니, 진실로 시중에 명하여 값을 조정해서 다 실정에 알맞도록 한다면 서로 어긋남이 있어도 해로울 것이 없다. 다만 관리하는 데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한 도 안에도 높고 낮음이 고르지 않다면 큰 잘못이니 바삐 개정하여 인습하지 말 것이다.
어책에 “그 분배하고 유치하는 규정은, 반은 분배하고 반은 유치하는 것이 진실로 대경(大經)이며 대법(大法)인데, 다 분배할 때가 있으며 두 몫을 유치하고 한 몫을 분배할 때도 있으니 이것은 첫째로는 백성을 해롭게 하고, 둘째로는 썩히기 쉬운 것이어서 모두 알맞지 않은데 변통할 줄 모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혹은 전결(田結)로, 혹은 통방(統坊)으로, 혹은 호(戶)로, 혹은 곡(斛)으로, 혹은 말[斗]로 분배하여 고을마다 예가 다른데 어느 쪽이 더 좋은가?
종자와 양식이 모자람을 고하면 조정에 보고해서 더 분배함이 떳떳하다. 비공(婢貢)과 승번(僧番)을 견감(蠲減)하고 받아들일 모를 더 분배하여 그 대신에 충당함은 또한 백성으로써 백성을 돕는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순영(巡營)의 빚과 운감(運監 : 조운을 감독하는 관원)이 축낸 것을 어찌 위에까지 번거롭게 하여 더 분배하는가?” 하였다.
나는 환상을 설치한 그 명목은 진자(賑資)이며 군향(軍餉)이었는데, 묵고 썩는다는 이유로 출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반은 남기고 반을 분배하는 것은 변할 수 없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또 오직 그 모(耗)를 받기에 급해서 다 분배하는 예가 있으나 법의 청렴하지 못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그 이른바 반을 남긴다, 두 몫을 남긴다는 곡식도 또한 헛이름뿐이다. 옮겨갈 때에 휴실이 있고, 바꿔 만들 때에 결손이 있어, 남은 것이 이미 반이라 분배할 것이 없고, 남은 것이 겨우 두 몫이니 분배할 것이 없는데 그 남은 반 가운데에서 또 반을 분배하고, 그 남은 두 몫 가운데에서 또 한 몫을 분배하는 사이에 아전은 이를 인해 간사한 짓을 하고 관에서도 그 이를 받아먹으니 구름이 흩어지고 안개가 걷히며 물결이 쳐서 모래가 없어지는 듯하여, 필경 창고 안 곡식은 다 분배되어서, 남은 것이 반도 없는데 하물며 두 몫을 남기겠는가?매양 봄ㆍ여름 무렵에 여러 창고가 다 비어서 한 부대도 남은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혹 우연히 남아 있는 것은 곧 간사한 아전이 장삿속으로 사서 둔 물건인데 반고(反庫)해서 적간(摘奸)하는 자가 속여서 공곡(公穀)이라 한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계를 엄하게 세워서, 어느 아문의 소관인가를 묻지 말고 무릇 곡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 반은 남겨두고 반만 분배하는 것을 천경지의(天經地義)로 삼아 변동해서는 안 된다. 다 분배하던 것을 반만 분배하면 모곡이 줄어들고 모곡이 줄면 지용(支用)이 부족하여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그거나 큰 법을 세우고 큰 제도를 세우는 자가 사소한 사정으로 하는 말에 이끌리면 반드시 왼쪽으로 비뚤어지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서 모양이 되지 못할 것이니 오직 한 칼로 결단해서 논란할 필요도 없는데, 하물며 둘을 남기던 것을 반은 남기고 반만 분배하면 이리저리 보충하는 데에 모자라는 바가 또한 많지 않겠는가?
더 분배하는 습관에까지 이르게 되면 엄금함이 마땅하며, 큰 흉년 끝이 아니면 종자와 양식으로 하는 것도 불가한데 하물며 그 이외이겠는가?
어책에 “한곳에 쌓아두면[露積] 작모(雀耗)가, 창고에 두면 서모(鼠耗)가 있다. 그 모축(耗縮)을 잡아서 되[升]ㆍ약(龠)을 계산하고 따로 곡(斛)으로 만들어서, 아래로는 고을 용도로 하고, 중간으로는 감영 용도로 하며, 위로는 국가 용도로 하는데, 지방(支放)과 경비를 여기에서 많이 자뢰한다.
경사(京司)에서는 상평곡에다 1승 5홉, 4승 5홉, 6승, 8승 5홉, 1두, 1두 2승을 받는 것이 있고 이것 외에 또 전모(全耗)를 회록(會錄)하는 것이 있다. 외영(外營)에서는 성향(城餉)에다 3승, 1두를 받는 것이 있으며, 이것 외에 또 전모를 수용(需用)으로 하는 것이 있어서 어수선하게 섞여져나옴을 좀처럼 깨뜨릴 수 없다. 이리하여 마땅히 혁파해야 한다는 논의가 김응조(金應祖)에게서 시작되었으나 명신(名臣) 석보(碩輔)의 진언(進言)이 엇갈리고 정연하지 못해서 그럭저럭 지금에 이르렀다.
무릇 폐막을 구제함에는 모두 모곡으로 돌리는데 균역청ㆍ진휼청ㆍ준천사(濬川司)의 지용(支用)과, 추조(秋曹)ㆍ경조(京兆) 및 5부(部)의 서리(胥吏)ㆍ조례(皁隷)의 요포(料布)와, 공해(公廨)ㆍ성첩(城堞)의 영신(營繕)과, 전선(戰船)ㆍ집기(什器)의 준비도 오직 모조라 말한다. 결전(結錢)을 탕감(湯減)하는 큰 혜택도 모곡으로 대신하고, 조사(詔使)의 접대와 산릉 역사(山陵役事)를 위해 거둘 것도 모곡으로 충당한다. 저의 돈과 나의 곡식이 쓰이는 데가 다르건만 저의 이식과 나의 모조를 받는 것은 같으니, 희령 소인(熙寧小人)에게 비웃음을 당하지 않겠는가? 임진년 이전에는 모조가 없었다는 말을 문헌에서 상고할 수 없고 5승을 영영 면제했음은 대구(大丘)에만 좋은 명예를 독차지하게 했다. 그렇다면 썩은 곡식에 모를 줄이도록 특허함과, 오래된 환곡에 모조를 다시 첨가하지 않음도 오히려 백성에게 미치는 혜택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생각건대, 송(宋)나라 사람이 모미(耗米)라 이르던 것은 10두마다 3승을 거두었고(주자의 법임), 청(淸)나라 사람이 식곡(息穀)이라 이르던 것은 10두마다 1두를 거두었으니 진실로 모축(耗縮)을 보충하는 데에 뜻이 있었다면 명칭을 모미라 해도 되지만 이식 거두는 것을 이롭게 여긴다면 명칭을 식곡이라 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 법은 10두마다 이미 1두를 거두고 간색미ㆍ낙정미ㆍ타점미(打苫米)를 또 15두마다 2~3두까지 거두어서 이식이 매우 많으면서도 오히려 모곡이라 부르니, 청나라 사람의 노실(老實)함만 같지 못하다. 당ㆍ송 시대 옛 규례는 10두에 2두까지 거두었으나(주자의 말로 위에 기록했음), 이것은 정당한 법례가 아니라 하속(下屬)들이 침어(侵漁)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간색미ㆍ낙정미와 같은 것이었다. 청나라 사람은 여비[盤糧]와 식량으로 줄어든 모자람과, 창고를 수리하고 바닥을 까는 것과 지필(紙筆) 따위 비용까지도 모두 징수한 1두 안에서 보소(報銷 : 會減이라는 말과 같다)하도록 허가했으니, 이것은 주자가 3승을 거두어서 모조로 하던 것과 다름이 없다. 조남성(趙南星)은 “여섯을 방출해서 열을 거두는 것을, ‘간사한 폐단이 층층으로 나온다.’ 했다.” 하였다. 실제 피해가 이와 같으므로 또한 당시에도 바로 4두 이식을 거두던 것을 그르게 여겼던 것이다.
총괄해서 말한다면 한나라 안에는 일정한 규례를 씀이 마땅하다. 3승이면 모두 3승으로 함이 마땅하고, 1두면 모두 1두로 함이 마땅하며, 2두면 모두 2두로 함이 마땅하되 10분의 1을 회록하고, 3분의 1을 회록하며, 4분의 1을 회록하고, 절반을 회록하며, 전모(全耗)를 회록하여 서로 어긋나고 착란해서, 오직 조례가 문란해지지 않을까 염려해서야 되겠는가? 나는, 10분의 1로 이식을 거둔다면 여러 아문과 여러 곡식을 일정한 법으로 하여 이에 징수한 액수 안에서 낭비된 수량을 양감(量減)해서 어두운 관원이라도 속임을 당하지 않고, 간사한 서리라도 농간할 수 없게 한 다음, 명칭을 식곡(息穀)이라 하여 그 실상을 나타냄이 마땅하며 이것은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살피건대, 임진왜란 이전에는 일찍이 모곡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명종 9년(1554), 호조에서 환상 모곡을 수령이 제마음대로 쓰지 않고 별창(別倉)에다 회록해서 10분의 1의 수에 충수한 자는 차례대로 논상하기를 계청하자, 영경연사(領經筵事) 윤개(尹漑)가 상주하기를, “수령의 용도는 다만 모곡에 있는데 쓰지 못하게 하니 그 형세는 반드시 명목을 교묘하게 만들어서 그 과렴(科斂)을 중하게 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하니, 상은 앞서 논의한 것을 중지하도록 명하였다(《國朝寶鑑》).
어책에 “그 전수(典守)하는 방법은, 체대(遞代)하게 되면 관원을 차견(差遣)해서, 분배된 것과 유치되어 있는 것을 번열(反閱)하며, 찌를 뽑아서 적간(摘奸)하는데 비랑(備郞 : 備局郞廳의 준말)과 어사(御史)가 또 시기에 따라 나가서 휴실(虧失)되어 모자라거나 제마음대로 분배했거나 미수를 거짓 기록했거나 번작(反作 : 反의 음은 번이며, 作은 晊로 읽음)을 한 수령은, 처리한 곡식의 다소를 비교해서 죄의 경중을 분간하여 모두 율이 있어 상위(象魏)에 달았으면 법은 엄중하고 또 정밀하다 할 수가 있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내가 오랜 시일을 읍내에 있으면서 창간(倉奸 : 창 일로 인해서 간사한 짓을 부리는 것)을 익히 보았는데, 무릇 번열ㆍ적간으로는 간사한 짓을 적발하기에 모두 부족하였다. 그래도 옛적 아전들은 순박하고 정직해서 그 간사함이 쉽게 발견되었는데, 지금의 간사한 아전은 모두 흥판(興販 : 곡식 따위를 많이 사들임)해서 조적(糶糴)한다. 장삼(張三)이 나라의 곡식을 포흠(逋欠)하니, 이사(李四)는 개인의 곡식을 쌓아서 창고에 가득한 것이 매양 본디 액수(포흠한 원래 액수)보다 많다.
그런데 영문 비장(營門裨將)이나, 비랑ㆍ어사가 무엇으로써 그 간사함을 적발할 것인가? 지금 정사하는 자는, 주ㆍ현의 창고를 모두 나라 환곡을 저장한 집으로 알고 있으나, 나는 이것을 아전들의 상평창이라 생각한다. 나라에서는 환상하는 법을 시행하는데 아전들은 상평하는 권한을 잡고 있으니 나라에서는 그 궤(櫝)만 안고 있을 뿐이고 아전이 그 구슬을 환롱(幻弄)하며, 나라에서는 그 칼집만을 잡았을 뿐이고 아전들이 그 칼날을 사용한다.
번열하는 것은 아전이 상평하는 곡식일 뿐인데 어찌 나라의 물건이겠는가? 벼가 익으면 벼를 사고 보리가 익으면 보리를 사서, 창고 문도 열지 않았는데, 문부는 벌써 변경되어 있다. 벼값이 치솟으면 벼를 내다팔고 보리 값이 치솟으면 보리를 내어파는데, 이것이 경수창(耿壽昌)과 이회(李悝)의 여습(餘習)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한창 사들일 때에는 먼저 쭉정이라고 으르대고 썩은 것처럼 여겨서, 벼는 50을 넘지 못하고(벼 1석을 불과 닷 돈이나 엿 돈으로 사들인다) 보리는 30을 넘지 않는데, 그것을 팔 때에 이르면 벼는 혹 300(3냥)에 이르고 보리는 혹 200을 넘어서 시기를 타고 이를 노림이 한계가 없다. 그런데 포흠을 냈던 자는 삼가 모곡(耗穀)을 준비해서 영문 관자(營門關子 : 영문에서 발송한 공문)에 대응하며, 이 창고의 것을 빌려서 발각될 것을 막는다. 포흠을 안고 주선하는 것이 말똥구리가 말똥을 굴리듯 하고, 동료와 간사한 짓을 함께 하는 것이 새끼 새우가 어미새우를 짊어지듯 하는데 무엇으로써 그 간사함을 적발해내겠는가?
근래에 한 비랑이 문부를 상고하면서 번열하였는데 원액보다 곡식이 수백 점(苫)이나 많았다. 낭관이 물으니 아전은 정성스러운 말로 대답하기를 “늘 나라 곡식에 모자람이 있을까 염려되어서 간색미와 낙정미를 감히 먼저 쓰지 못했다.” 하자, 낭관은 “어질구나, 아전이 모두 너와 같으면 나라에서 장차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낭관이 떠나가자 서로 더불어 크게 웃으며 배를 움켜잡았다. 아아! 폐단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그대로 답습하며 고치지 않을 것인가?
어책에 “한봄에 하루를 굶주리기며 넘기기가 한 해와 같다. 창고에 가서 전대[櫜]를 받았으나 집으로 돌아와서 꾸러미를 풀어보니, 속(粟)이나 쌀이나 온통 빈 껍질뿐이며, 명칭은 1두라는 것이 3분의 1은 줄어들어 입에 풀칠하기에도 계책이 없는데, 농사를 어느 여가에 짓겠는가? 그러나 실어다바치는 날이 되면 좁쌀은 반드시 키로 까부르고 쌀은 기름이 흐르듯 번질해야 하며 한 곡 위에다가 간색미ㆍ낙정미를 첨가해서 여러 가지로 토색(討索)하는데 한 포(包)에 더 바치는 것이 매양 7두를 넘는다. 그렇다면 10분의 1세는 10분의 5세가 되어 실상 바치는 것은 갑절이나 된다. 힘을 다해 나의 정실한 곡식을 바쳤으나, 그것이 변해서 다른 사람의 거친 곡식을 받게 되니 백성의 뼈에 사무치는 억울함이 또 이러하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받은 것이 1두이나 3분의 1은 줄었고, 바치는 것이 1석이나 7두를 더 바친다 했으나 이것은 오히려 옛날 일이다. 지금은 곡식 1석에다 섞는 겨[穅]가 꼭 10두를 넘으니 받은 것은 3분의 2가 줄었고 한 차례 갈라줄 때마다 반 이상이 온통 반백(半白)이니(아전은 공연히 그 반을 받아가고 백성은 공연히 그 반을 바치는 것을 이름인데 《목민심서》에 자세히 밝혔음) 이것은 근거도 없이 바치는 것이다. 서원(書員)의 고급조(考給租)와 저졸(邸卒)의 근수조(勤受租)와 민고(民庫)의 추등조(秋等租)와 저리(邸吏)의 역가조(役價租)와 약포(藥鋪)의 약채조(藥債租)와 족징(族徵)의 미수조(未收租)와 이가(吏家)의 사채조(私債租) 따위가 시끄럽게 일어나고 명목도 혼동되어 거두는데, 공인지 사인지, 거짓인지 사실인지도 구별하지 못한다. 따라서 백성은 일찍이 한 낟 곡식의 까락[芒]도 보지 못했으나 가을이 되면 속절없이 변상하는 것이 반드시 6~8석에 이르게 되니 모자라고 더하는 데의 많고 적음과, 바치고 받는 데의 정함과 거침을 어느 겨를에 계교하겠는가? 아아! 원통하다.
어책에, “상급 영문에서 돈을 장만하라는 영이 나오면 시기를 타서 값을 치올리고 정해진 기한은 급박하니 고을이나 마을 시장에서는 힐끔힐끔 곁눈질하고 민심이 소란하며 발이 부르트고 눈썹이 불이 타듯 한다. 그런데 고을 환곡도 겨우 반쯤 수납했는데 산성 군향(山城軍餉)을 또 독촉하며, 제 몫을 겨우 없애자 이웃 일가의 몫이 또 달려들며, 새 환곡을 겨우 끝내자 연조(年條)도 알 수 없는 묵은 환자가 천서 만단으로 잇달아 일어나서 지탱해 견딜 수가 없다. 돌다리 얼음길에 사람이 지고 소에 실어서 열 번 엎어지고 아홉 번 넘어지며 심혈을 다해 바쳤으나 퇴짜를 당해, 다시 찧으니 계획이 처음 요량과 어긋나버렸다. 그리하여 조금 수확이 있는 자는 곳간을 기울고, 전혀 수확이 없는 자는 전지를 잡히고 송아지를 팔게 되며, 가난한 선비는 땅을 파고 들어가고라도 싶어하고, 고독한 자는 하늘을 쳐다보고 부르짖어도 호소할 길이 없다.
인생의 삶이 이 지경에 이르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는가? 이에 그해가 저물어가면 불같이 재촉하며 관리가 사방으로 나와서 개ㆍ닭도 편치 못하고 빙설(氷雪)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곡식을 긁어모을 방책이 없어 허덕이며 채찍 아래에서 딩구는데, 비록 수납을 정지하라는 영이 내려와도 백성에게는 아무 혜택도 없다.” 하였다.
나는 대하기를 “궁한 마을과 가난한 집의 원통하고 절박한 정경을 환하게 살피심이 이와 같으시니 진실로 백성에게 이 성책(聖策)을 읽게 한다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면서 성덕(聖德)에 감읍(感泣)할 것입니다.” 하였다.
어책에 “또 가짜 호와 헛 호에 사사로 받아가고, 도합해서 받아간 것을 덧붙여 기록하고 겹쳐 기록하는데 무릇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롭게 하는 술책은 없는 데가 없다. 전환(錢還)으로 요량해 사서 어려워함도 없이 함부로 범하고, 번잉(反賸)을 이리저리 옮겨가도 능히 개혁하지 못함은 진실로 수령들의 죄인데 감사도 간혹 그 잘못을 답습한다. 각항 곡식에 본곡만 세우고, 이식은 비록 적게 한다 하나, 영모(營耗)는 곡가가 비쌀 때에 팔아넘기면서 오히려 예전대로 하여 산에는 높이 쌓고 물가에는 텅 비게 하는데, 한 호에 수십 석의 곡식을 무엇으로써 주변하겠으며 여덟 식구에 2~3두만 가지고 어떻게 김매고 심고 하겠는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니 곤란함은 다 같다.
마음대로 분배함이 비록 모자람을 돕는 것 같으나 그 속마음은 부극(掊克 : 조세를 함부로 받아서 백성을 못살게 함)에 있고, 단리(單利)로 대신하는 것이 비록 힘을 펴게 하는 것 같으나 그 시초는 환롱(幻弄)하는 데에 있다. 가지가지 고황(膏肓)에 든 병은, 사람을 바꾸어가면서 헤아려도 많은 것을 다 들어 말하기 어려우니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가엾고 슬픈 마음이 든다.” 하였다.
나는 대하기를 “여러 가지 폐막 중에 영모(營耗)가 곡식이 귀한 때의 값을 따르는 해가 가장 크다. 이것이 백성의 뼈에 사무치는 병통으로 되었으니 교정(矯正)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한 호가 받는 것에 일정한 액수가 있고 돈을 바치는 데에 일정한 규례가 있도록 하여 해마다 일정하게 하고 조금도 증감하지 않으면 1년 동안 계획하였다가 그 기한에 미쳐서 변통할 터이니 백성에게 무슨 괴로움이 있겠는가?
가령 한 호가 해마다 벼 60두를 받으면 그 모(耗)는 6두이고, 벼 1두마다 상정(詳定)이 15이면 그 돈이 90이다. 풍년에도 줄이지 않고 흉년에도 보태지 않아서 해마다 한결같이 하며 언제든지 고치지 않으면 구전(九戔)이라는 돈을 백성이 담착(擔著)해서 신역(身役)으로 할 터이니 무엇에 현혹되고 무엇이 두려워서 어리둥절하겠는가?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한 호에서 받는 것이 해마다 같지 않으며, 상급 영문이라는 데는 오직 이(利)만 노리고 시기만 타서 한 도(道)를 통틀어서 반드시 곡식이 귀한 고을에 비싼 값으로 바치기를 요구하니 명목은 비록 모를 만든다는 것이나 원곡까지 다 파는데, 갑자기 영을 내리므로 어찌할 줄을 모른다. 곡식 값이 치솟으면 원곡이 변해서 모곡이 되고 곡식 값이 헐하면 모곡이 변해서 원곡으로 돌아간다. 구름이 흩어지듯, 모래가 없어지듯 하여 머리와 꼬리가 모두 변해버리는데 이것이 감사가, ‘곡식을 걸린(步)다.’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어진 사람의 정사이겠는가?” 하였다.
어책에 “이에 정돈하는 뜻으로 먼저 부익(裒益)하는 정사를 시행해야 하는데, 영남과 관서가 가장 고르지 못한 곳이다. 헐한 값으로 발매하고, 값이 좋은 데로 옮겨 무역한 지가 수년인데, 그동안에 비싼 값으로 녹아 없어지는 걱정도 많이 있었다. 함양(咸陽) 곡식을 많이 울유(鬱攸 : 불의 별칭)에 넣었음은 어지러워지는 계제(階梯)를 끊기 위함이고, 풍기(豊基)의 곡식에 승색(升色)을 영구히 중지함은 고질된 폐막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요행을 넘보는 문을 열어서 후일에 폐단이 될까 염려되므로 3도에 저축된 곡식을 위해 돈 50만 꿰미를 내었는데 이는 예비하기 위함만이 아니고 겸해서 화폐(貨幣)를 유통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나, 아직까지 유통되는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나는, 획일(畫一)하는 것을 법이라 이르는데 획일하지 않으면 법은 끝내 시행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부익(裒益)하는 정사가 비록 백성을 하나로 보는 어진 마음에서 나왔더라도 끌리는 병통이 매양 지비(支費)하는 데에 있으니 끝내 획일하는 것으로 능히 법하지 못하면 모래로 성을 쌓는 것 같고, 기름으로 불을 끄는 것 같은데, 어찌 모두 새롭게 하는 효과가 있겠는가? 함양에서 곡식을 불태운 것도 잇달아 할 수 있는 방도가 아니며, 풍기의 폐막을 혁신한 것은 상거가 얼마 되지 않으므로 획일의 정사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개혁하는 논의에 대해서는 갑과 을이 서로 어긋나고 이해가 분명하지 않으나 옳고 그름을 상확(商確)함도 또한 어책 안에 있다.
어책에 “혹자는 말하기를 ‘환상이라는 명칭이 있으면 환상으로 인한 폐단이 있다.’ 하니 일체 그를 없애고 다만 상평창이라는 이름만 두고 이회(李悝)가 시행하던 평적(平糴) 제도를 써서 상ㆍ중ㆍ하 세 등의 풍년과 대ㆍ중ㆍ소 세 가지의 기근(饑饉)이라는 법을 세워서, 풍년이면 거두고 기근이면 발산할 것을 상례로 하고 또한 이식 남기는 것을 허가하지 말 것이며, 서울과 외방에 모(耗)로써 수용(需用)하던 것은 구전(口錢)과 호포(戶布)로써 별도로 조처(措處)하는 것만 같음이 없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미 저축된 곡식을 그 명칭이 싫다는 이유로 없애고 별도로 민전(民田)에 덧붙여서 징렴(徵斂)함이 가하겠는가? 이회 때에는 정전(井田)이 아직 남았었기 때문에 이랑[畝]을 상고해서 받았던 것이나 지금에는 경계가 이미 어지러워져서 삼수량(三手糧)ㆍ결전(結錢)ㆍ전부(田賦)도 오히려 높고 중함을 걱정하는데 또 상평을 위해서 징렴할 것인가? 나는 그 급한 때를 구하기 위해 장래를 고려할 수 없기 때문에 시행해내지는 못할 줄 안다. 만약 주자의 사창 제도를 회복하려면, 지금, 현재 곡식을 방리(坊里)에 갈라주고 창사를 세운 다음, 그 고을 군자(君子)에게 주관하도록 하여 때에 따라 거두고 발산하며 이식 남기는 것을 한결같이 성규(成規)에 따를 것이며, 조정에서는 그 잘하고 못하는 것을 살필 뿐이고 그 이(利)는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울과 외방에서 모조로서 급대하던 것은 상량(商量)해서 조처[區畫]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구전과 호포는 군역(軍役)을 없애지 않으면 두 번 징수할 수 없으니, 전곡(錢穀)을 넉넉히 떼어서 각각 아둔(衙屯)ㆍ영둔(營屯)을 두고 해마다 그 세를 수입해서 그 대전(代錢)을 지급함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평적법은 더 징수하는 데에 가까우니 논의할 수 없고 사창 제도가 진실로 아름다우나 그 거두고 흐트리는 일에 장리(長吏)가 채찍과 영어(囹圄)로 다스리기 때문에 결국에는 저항을 많이 받는데 같은 마을 관자가 어찌 액수에 맞추어서 거둘 수 있겠는가? 급대(給代)하기 위해서 둔전(屯田)을 설치한다는 논의는 그 수용(需用)하는 바로서 그 수입되는 바와 비교하면 비록 한 아문(衙門)에서 1만 경(頃)의 전지를 가지고 있고 한 영문(營門)에 열 고을의 토지를 개설하더라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니, 예전대로 폐단을 구제함이 가장 편리하다.” 하였다.
나는, 《맹자》에 단속[檢]할 줄 모르고, 헤칠 줄 모른다는 경계(警戒)가 있으니, 선왕 때에도 상평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본다. 한ㆍ위(漢魏) 시대에도 경용(經用)과 진제(賑濟)를 오로지 상평에 의뢰했으니 상평은 과연 좋은 법이다. 사창(社倉)이 비록 수ㆍ당(隋唐) 시대에 생겨났으나 민간이 사사로 저축하는 데에 불과했고 상평법이 여전히 주(主)가 되었다. 아래로 변송(汴宋)과 명ㆍ청(明淸)의 평적ㆍ태적(兌糴)도 모두 상평의 한 종류였다. 또 고려에서 우리나라 초기에 미치기까지 상평창에 대한 말이 사서에 끊이지 않았으니 상평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봄에 나누어주었다가 가을에 거두는 것이 이미 《주례》에 기재되었고 사창과 의창(義倉) 제도가 명ㆍ청(明淸) 때까지 끊이지 않았으니 환상을 전폐하고 상평으로 만든다는 것도 통하지 않는 논의이다. 비록 하물과 구전(口錢)과 호포(戶布)를 창설하더라도 다만 군포(軍布)를 대충하기에 족할 뿐이니 무엇으로써 환상을 보충하겠는가?
다만 “민전(民田)에 세금을 더 거둔다.” 하는 것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회(李悝) 때에는 없는 가운데서 창안했기 때문에 밭이랑을 조사하여 곡식을 거두었으므로 마치 장손평(長孫平)이 마련한 사창의 초기 같았지만, 이제 환상을 변경해서 상평으로 만든다면 환상 곡식이 상평의 곡식이 되고 환상 쌀이 상평의 쌀이 되어 그 실상은 그대로이나 명칭만을 변경하여 부서(簿書)를 고치는 것뿐일 것인데, 나는 “민전에 더 거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상평법은 환상과 서로 도움이 될 뿐이니 반드시 하나는 없애고 하나는 세우고자 함은 또 무슨 이유인가?
주자의 사창법은 본뜻이 백성을 구제하는 데 있었는데 오늘날 환상법은 본뜻이 경비를 지출하는 데에 있다. 경비를 지출하는 것도 나라의 큰일이니 명분만 훌륭하다면 그것이 백성의 절실함을 구제하는 것만은 못하나 역시 나라를 경영하는 데 관계되는 것인데, 지금은 다만 고담 준론으로 체면(體面)만 보려 하니 나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아문 둔전(屯田)과 영문 둔전을 설치한다는 논의가 있는데 누가 전하(殿下)를 위해서 이런 계획을 했는가? 오늘날의 매우 심한 폐단과 해독은 둔전보다 더 심한 것이 없어서 이 나라를 좀먹고 이 백성을 병들게 하였다. 백 갈래의 미려혈(尾閭穴)을 파서 놀고 먹는 젊은이와 모리(牟利)하는 사람을 살찌우니 법으로 부당한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장차 일체를 혁파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더 보탠다는 것인가? 수용 여부는 나는 미처 계교하여보지 못했다.
어책(御策)에 “간사한 구멍이 쥐구멍 같음은 아문 곡식의 명칭(名稱)이 너무 많은 데에 연유한다. 만약 이제 각 아문에서 관리하는 것을 다 없애고 모두 탁지(度支)에 붙여서 그 출납(出納)을 관장(管掌)하도록 하고, 곡식 이름도 다만 쌀ㆍ좁쌀ㆍ벼ㆍ조ㆍ콩ㆍ보리 여섯 가지만 남긴다. 서울과 지방의 모조(耗條)로서 아무 아문 아무 곡식 몇 섬은 아무 고을에 영구히 떼어주어 감히 값의 높고 낮음으로써 옮겨 바꾸지 못하게 한다면 여러 곳에서 영(令)이 나와서 아전이 이로 인해 농간하는 것이 오늘날 같지는 않을 것이다.” 했다.
혹자는 “여러 곡식이 그 땅에 알맞고 알맞지 않음은, 물고기는 물에서 생산되며, 사슴은 산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으니 억지로 정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흉작이라도 저것은 풍작이 되어 흉풍이 서로 교대하므로 백성이 살 수 있는 것인데 이제 만약에 이 여섯 가지만 남긴다면, 팥ㆍ수수ㆍ피ㆍ귀리ㆍ메밀 따위는 장차 없애고 심지 않을 것인가? 아문 곡식의 종류가 많다는 것은 진실로 그 말과 같으나, 다 분배하고 반만 분배하고 더 분배하고 2분은 남기고 1분만 분배하는 것에 변통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일반이다. 지금 획일적으로 법을 만들어 모두 반만 분배하고 종량(種糧)에 더 분배하는 법을 일체 금지하고, 서울과 외방에 다 분배하고 더 분배한 모조로 수용하던 것을 환향(還餉)과 통계해서 모두 반만 분배하여, 모조에 부족한 양을 환향으로 대충해서 그 용도에 지급한다면 진실로 사리에 합당할 것이다.” 했다.
혹자는 “모두 반만 분배하고 더 분배하는 것을 금한다면 겉으로는 조금 나아지는 듯하지만 백성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다. 아랫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정사를 시행하고자 한다면 공가(公家)에 딸린 환향의 모조를 3분해서 2분은 회록(會錄)하고 1분은 그 곡식이 있는 영곤(營閫)과 읍진(邑鎭)에 주어서 염방(廉防)을 기르게 함만 못하다. 이어 영곤ㆍ읍진의 서리와 노예에게도 파급되어 얻어먹는 것이 있게 한 다음 그런 모든 백성이 침해하는 일을 특별히 금단한다면 반드시 면목을 일신하는 성과가 있을 것이다.” 했다.
혹자는 “사람의 청렴하고 탐욕함은 관름(官廩)이 후하고 박한 데 관계되지 않으므로 높은 관리라 해서 반드시 모두 청렴하지 않고 낮은 서리라 해서 반드시 모두 탐욕하지 않다. 지금 비록 이와 같이 한다 해서 일조에 탐욕이 변하여 청렴이 된다는 것은 알 수 없다. 만약 혜택이 아래까지 미치게 하려 한다면 영모(營耗) 외에 환향까지도 섬마다 모(耗)를 받는데 큰 흉년에는 한 말을 감하고 중간 흉년에는 일곱 되 반을 감하며 작은 흉년에는 닷되를 감해서 기근(饑饉)을 세 등으로 분간하던 옛뜻을 본뜬다면 백성이 그 혜택을 받을 것이다.” 했다.
혹자는 “민생의 절박한 원통함은 모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정(精)한 것과 거친 것을 서로 바꾸고, 차는 것과 모자라는 것이 서로 동떨어져서 허다한 주구(誅求)가 그 사이에서 싹트는 데에 있다. 이런 것을 그대로 둔다면 비록 모곡 전부를 감하더라도 고통은 여전할 것이다. 더구나 흉년에 원곡(元穀) 분수를 정감하라는 은택이 자주 내린 때를 당했으니 모조의 사소한 줄임이 족히 문제가 되겠는가?” 했다.
나는, 우리나라에 두 가지 폐막(弊瘼)이 있는데 하나는 군첨(軍簽)에 아문(衙門)이 있음이고 하나는 곡부(穀簿)에 아문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군첨은 진실로 혁파함이 마땅하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아문이라도 먼저 없앰이 마땅하고, 곡부를 개정함이 당연하나 고칠 수 없다면 아문이라도 먼저 없앰이 마땅하다. 만약 건국 초기에 문무 대신에게 이 두 가지 법을 세워서, 온 관청 용도에 지출하게 하자면 반드시 온 나라에 군보(軍保)로 기재된 50만 명(영종이 均役할 때에 8도 군보의 총수가 50만 명이었음)에게 베 1필씩을 거두어 병조에 바치도록 해서 여러 아문에 나누어주어야 할 것이며, 또 온 나라에서 치부된 1천만 석(지금 8도 곡부의 大總)에다가 모조로 10분의 1을 거두어 호조에 바치도록 해서 여러 아문에 나누어주었을 것이니 반드시 오늘날의 난잡함과는 같지 않았을 것이다.
임진왜란 뒤로부터 억지로 끌어당기고 덧붙여서 금년에 군문(軍門) 하나를 증설하면 군보를 여러 도에 배정하고, 명년에 폐단의 구멍 하나를 막으면 곡식 명목(名目)을 여러 도에 분파(分播)하여 백성 보기를 구렁(壑)으로 여겨 장마 물을 쏟아넣고 백성 보기를 광산(礦山)으로 여겨 금은을 캐듯 하는데, 오직 나의 쓸 곳이 급함만 알고 저들의 내는 것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생각지 않아 증가함만 있고 감(減)함은 없으며, 나감만 있고 물러남은 없어서 다 오늘날에 와서는 폐단의 물결이 넓게 퍼졌으니 한이 있는 백성의 힘으로 어찌 견디어내겠는가?
나는 들으니 “짐을 싣는 자는 수레를 요량하고, 곡식을 심는 자는 전지를 요량한다.” 한다. 나의 화물(貨物)이 비록 만 균(萬鈞)이나 되더라도 한 수레의 힘이 백균(百鈞)을 넘지 못하면 더 싣지 못하고 나의 씨앗이 비록 천 섬이나 되더라도 한 휴(畦)의 넓이로는 다만 열 말을 심을 뿐이라면 더 뿌리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 이 두 법은 민호(民戶)는 요량하지 않고 해마다 새 군오(軍伍)의 첨기(簽記)를 증가하며, 민호는 요량하지 않고 해마다 새 아문의 곡식만을 첨가(添加)하여 마침내는 한 몸의 첨기가 서넛에 이르고, 한 호에서 내는 곡식이 수십 석에 이르니 천하에 비리위도(非理違道)가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또 고르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함은(不均不傭) 시인(詩人)이 경계한 바인데, 혹은 열 새[升] 베를 바치고, 혹은 일곱 새 베를 바치며, 혹은 돈 두 냥을 바치게 하여 다 같은 군첨(軍簽)인데도 고통은 경중이 있고, 혹은 모(耗) 한 말을 회록하고 혹은 모 5승을 회록하며 혹은 전모(全耗)를 회록(會錄)하여 다 같은 곡부(穀簿)인데도 취하는 데에 다소가 있으니 모두 고르지 못한 법이다. 나는 두 법을 모두 개혁함이 마땅하다고 생각되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아문의 명색만이라도 합해서 하나로 만들어야 된다고 여겨진다.
9곡(穀)을 문부(文簿)에 잡다하게 기록하는 것이 진실로 번거로워서 남쪽 지방 이밥 먹는 곳에는 잡곡이 요긴하지 않을 듯하나 옛사람이 “비록 명주실과 삼[麻]이 있더라도 왕골과 띠를 버리지 말라[雖有絲麻毋棄管蒯].” 하였으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가 전일에 호남에 있으면서 기사년(己巳年)과 갑술년(甲戌年) 흉년을 보았는데 삼복이 벌써 지났으나 모내기를 하지 못해서, 대파(代播)할 만한 것은 오직 메밀과 차조(黏粟) 두 종류뿐이었다. 영암창(靈巖倉)에 메밀 200석이 있었는데, 만민이 앞을 다투어서 밟혀 죽기까지 했다. 장흥(長興)에 차조 서른 섬을 가진 백성은 시기를 타서 모리하여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그때 차조 한 되 값이 15돈이었음). 이를 말미암아 본다면 비록 호남 같이 기름진 곳이라도 이와 같으니 두 종류는 저축하여 심기를 권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동ㆍ서ㆍ북 3면의 자갈밭과, 강변(江邊)의 땅에는 오직 수수와 피를 뿌려서 목숨을 이어가고, 삼수ㆍ갑산과 6진(鎭) 지역은 곧 오곡이 익지 않고 오직 봄보리와 귀밀만을 일상 양식으로 하고 있으니 만약 이 물건을 없앤다면, 드디어 곡식이 없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없애서야 되겠는가? 나는, 한 주ㆍ현마다 각각 그 땅에 알맞은 여섯 가지 곡식을 선택하되 여러 도를 모두 공통된 예(例)로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경우, 한 주만을 본다면 오직 여섯 가지 곡식만 있을 뿐이지만 온 나라를 통해서 본다면 이에 온갖 곡식이 갖춰지는 것이 되어 곡식을 다스리는 정사가 잘 될 것이다.
분배하는 것과 남기는 것을 혹 반만하고 혹은 다하며, 모 받는 것을 혹 반만 받고 혹 다 받기도 하는데 만약 아문의 명색만 없앤다면 저절로 한결같은 법이 되리라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관리의 염방(廉防)을 기름과, 흉년에 견감(蠲減)하는 혜택과 간폐(奸弊)를 방지하는 금령(禁令) 같은 것은 바로 이른바 윤색이라는 것이니 큰 강령(綱領)이 이미 바르게 되었는데 여기에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어책에 “혹자는 ‘이노고(吏奴庫)ㆍ민인고(民人庫)를 동ㆍ서에 따로 설치해서, 나누어주는 것과 거두는 것을 전혀 서로 상관하지 못하게 한다면 아전들이 손을 쓸 수 없어서 백성이 이에 혜택을 받게 된다.’ 한다.” 했다.
혹자는 “만약 우리 백성에게 풍흉의 구별이 없고 빈부의 차등이 없는 은택을 고루 입히려 한다면 서울과 외방 수용(需用)에 곡식 대신 돈으로 바치는 것을, 영수(營需)ㆍ관수(官需) 외에는 모두 상정(詳定)한 값에 준하여 증감하지 못하게 하고, 가을에 징수할 때에는 예를 상고해서 거두어들이면 집집마다 도시락 밥을 먹이고 사람마다 항아리 장을 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혜택이 될 것이다.” 했다.
이노고(吏奴庫) 곡식을 봄에 나누어주는데 아전과 하노(下奴)가 받는 것인가, 아니면 백성이 받는 것인가? 아전이나 하노가 받는다면 이미 농사를 짓지 않았으니 바치지 못할 것이고, 만약 백성이 받는다면 전연 상관이 없으니 형편상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데, 고기만 먹는 사람들이 계획하는 것은 옛날부터 이와 같으니 장차 무엇으로써 큰 의논을 확정하겠는가?
모조로 돈을 만드는데 모두 상정례(詳定例)에 준한다면 백성이 입는 혜택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논의는 가장 좋으니 시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수신(守臣)이 제멋대로 환롱(幻弄)하고, 서리(胥吏)가 간사함을 부리는 것은 그 방법이 매우 많아 다 기술할 수 없다. 모두 《목민심서》에 밝혔다.
수령이 제멋대로 환롱하는 것에 그 명목이 대략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번작(反作), 둘째 가분(加分), 셋째 허류(虛留), 넷째 입본(立本), 다섯째 증고(增估), 여섯째 가집(加執)이다.
서리가 간사함을 부리는 것은 천방 백계(千方百計)에서 구멍이 수도 없으나 그 명목은 대략 열둘이다. 첫째 번작, 둘째 입본, 셋째 가집, 넷째 암류(暗留), 다섯째 반백(半白), 여섯째 분석(分石), 일곱째 집신(執新), 여덟째 탄정(呑停), 아홉째 세전(稅轉), 열째 요합(徭合), 열한째 사혼(私混), 열둘째 채륵(債勒)이다. 총괄해서 말하면 환상이란 하리(下吏)의 상평창(뜻은 앞에 기록했음)인데, 아울러 저 책(《목민심서》)에 밝혔으므로 지금 겹쳐 기술하지 않는다.
무릇 곡식을 다스리는 도(道)는 먼저 액수와 저축하는 율(率)을 정해야 한다. 액수만 한번 정해지면 만 가지 폐단이 아울러 맑아질 것이다. 국법은, 사람을 쓰게 되면 천거하는 데에 정원(定員)이 있고, 재물을 다스리게 되면 곡식에 정액(定額)이 있어, 예부터 전해내려온 것이 이와 같았다. 대저 사람을 쓰고 재물을 다스리는 두 가지는 《대학》 평천하장(平天下章)에서 거듭거듭 경계한 바이다. 그 근원이 맑아지면 조정(朝廷)은 발라지고 야인(野人)은 편해지지만, 근원이 맑지 못하면 조정은 어지러워지고 야인은 원망하게 되어 나라의 흥망이 여기에서 결판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법은, 과거(科擧)는 고을에 정원이 없고 곡식 저축은 창(倉)에 정액이 없어서 사기(沙器) 장사와 소금장사 자식이 글을 사고 글씨를 빌려서 과거를 엿보며, 간사한 서도(胥徒)와 교활한 아전의 무리가 필묵(筆墨)으로 갖은 농간(弄奸)을 부려서 나라 양곡(糧穀)을 도적질한다. 매양 창회(倉廥)를 조사한 문부를 보면 파리 머리 같은 작은 글자를 수천백 줄이나 늘어놓아 행(行) 상진조(常賑租)가 345석 6두 7승 8홉 9작이니 군자미(軍資米)가 765석 4두 3승 2홉 1작이니 하여 모래가 흩어지듯, 구름이 변환하듯 어지러워서 단서를 알아낼 수 없으니 비록 유안(劉晏)이 문부(文簿)를 상고하고, 양염(楊炎)이 산가지를 잡는다 해도 장차 어떻게 그 간사함을 밝혀내겠는가?
창오(倉廒)의 폐단을 고치고자 한다면 먼저 액수를 정해서 금석(金石) 같은 법전을 만드는데 의심없이 딱 결단 처리하여 고(觚)를 새기고 군더더기를 깎아서 보태지도 줄이지도 않아 혼연히 저절로 된 것처럼 되어서 바라볼 적에 칠성(漆城)같이 더위잡을 방법이 없으면 천 가지 멍(痏)과 백 가지 폐단이 장차 깨끗하게 맑아질 것이다. 지금 청국(淸國)과 일본은 그 주ㆍ현의 저축하는 곡식에 다 정액이 있어 도적(圖籍)에 나타나 있으니, 어지럽고 거칠어서 따질 수 없음이 우리나라의 예 같은 것은 천하에 없다. 지금 채집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청국(戶部則例) 강소성(江蘇省) 상평창 액저표(額貯表)〉
강녕부(江寧府)
상원현 곡(上元縣穀) 3만 석
강녕현 곡(江寧縣穀) 3만 석
구객현 곡(句客縣穀) 3만 석
율수현 곡(溧水縣穀) 2만 석
강포현 곡(江浦縣穀) 1만 6천 석
육합현 곡(六合縣穀) 1만 6천 석
고순현 곡(高淳縣穀) 2만 석
회안부(淮安府)
산양현 곡(山陽縣穀) 2만 석
부령현 곡(阜寧縣穀) 2만 석
염성현 곡(鹽城縣穀) 2만 석
청하현 곡(淸河縣穀) 2만 석
안동현 곡(安東縣穀) 2만 석
도원현 곡(桃源縣穀) 2만 석
양주부(揚州府)
강도현 곡(江都縣穀) 2만 석
감천현 곡(甘泉縣穀) 2만 석
의징현 곡(儀徵縣穀) 3만 석
고우주 곡(高郵州穀) 3만 석
흥화현 곡(興化縣穀) 3만 석
보응현곡(寶應縣穀) 2만 석
태주 곡(泰州穀) 2만 석
동대현 곡(東臺縣穀) 2만 석
서주부(徐州府)
동산현 곡(銅山縣穀) 3만 석
숙현 곡(肅縣穀) 2만 석
탕산현 곡(碭山縣穀) 2만 석
풍현 곡(豊縣穀) 2만 석
패현 곡(沛縣穀) 2만 석
비주 곡(邳州穀) 3만 석
숙천현 곡(宿遷縣穀) 2만 석
수령현 곡(睢寧縣穀) 2만 석
해주(海州)
본주 곡(本州穀) 3만 5천 석감유현 곡(贛楡縣穀) 2만 1천 석목양현 곡(沐陽縣穀) 2만 석통주(通州)본주 곡(本州穀) 3만 석
여고현 곡(如皐縣穀) 2만 석
태흥현곡(泰興縣穀) 3만 석
소주부(蘇州府)
오현 곡(吳縣穀) 3만 석
장주현 곡(長洲縣穀) 2만 석
원화현 곡(元和縣穀) 2만 석
곤산현 곡(崑山縣穀) 2만 석
신양현 곡(新陽縣穀) 2만 석
상숙현 곡(常熟縣穀) 2만 석
소문현 곡(昭文縣穀) 2만 석
오강현 곡(吳江縣穀) 2만 석
진택현 곡(震澤縣穀) 2만 석
송강부(松江府)
화정현 곡(華亭縣穀) 2만 석
봉현현 곡(奉賢縣穀) 2만 석
누현 곡(婁縣穀) 2만 석
금산현 곡(金山縣穀) 2만 석
상해현 곡(上海縣穀) 2만 석
남회현 곡(南匯縣穀) 2만 석
청포현 곡(靑浦縣穀) 3만 석
상주부(常州府)
무진현 곡(武進縣穀) 2만 석
양호현 곡(陽湖縣穀) 2만 석
무석현 곡(無錫縣穀) 2만 석
금궤현 곡(金匱縣穀) 2만 석
강음현 곡(江陰縣穀) 3만 석
의흥현 곡(宜興縣穀) 2만 석
형계현 곡(荊溪縣穀) 2만 석
정강현 곡(靖江縣穀) 2만 석
진강부(鎭江府)
단도현 곡(丹徒縣穀) 3만 석
단양현 곡(丹陽縣穀) 3만 석
금단현 곡(金壇縣穀) 3만 석
율양현 곡(凓陽縣穀) 3만 석
태창주(太倉州)
본주 곡(本州穀) 2만 석
진양현 곡(鎭洋縣穀) 2만 석
숭명현 곡(崇明縣穀) 2만 석
가정현 곡(嘉定縣穀) 2만 석
보산현 곡(寶山縣穀) 2만 석
위에 기록한 강소성은 천하 재부가 모이는 곳이니, 다만 한 성만 거론해도 나머지는 추측할 수 있다.
〈호북성(湖北省) 상평창 액저표〉
무창부(武昌府)
통산현 곡(通山縣穀) 3천 석
무창위 곡(武昌衛穀) 5백 석
한양부(漢陽府)
효감현 곡(孝感縣穀) 1만 8천 석
면양위 곡(沔陽衛穀) 5백 석
안륙부(安陸府)
경산현 곡(京山縣穀) 7천 석
당양현 곡(當陽縣穀) 3천 석
양양부(襄陽府)균주 곡(均州穀) 6천 8백 석양양위 곡(襄陽衛穀) 5백 석운양부(鄖陽府)
보강현 곡(保康縣穀) 2천 석
운서현 곡(鄖西縣穀) 4천 4백 석
덕안부(德安府)
응산현 곡(應山縣穀) 6천 석
덕안소 곡(德安所穀) 5백 석
황주부(黃州府)
황주위 곡(黃州衛穀) 5백 석
기주위 곡(蘄州衛穀) 5백 석
형주부(荊州府)
원안현 곡(遠安縣穀) 3천 석
형주위 곡(荊州衛穀) 5백 석
의창부(宜昌府)
귀주 곡(歸州穀) 3천 2백 석
장양현 곡(長陽縣穀) 2천 석
시남부(施南府)
통판 곡(通判穀) 1천 5백 석
내봉현 곡(來鳳縣穀) 1천 6백 석
이상 호북성에는 오직 작은 현(縣)과 위(衛)ㆍ소(所) 등의 곡식 액수를 기록해서 그 다름을 나타낸 것이다.
여러 성 곡식 액수에 혹 몇십 몇석(石), 몇말 몇되, 몇홉 몇작(勺)이 있기도 한데 이것은 다른 곡식을 아우른 것이고 그 원액(原額)은 아니다.
〈일본(日本) 여러 군(郡) 곡저표(穀貯表)〉
비전주(肥前州)
송평화천 곡(松平和泉穀) 7만 석
대촌인번 곡(大村因幡穀) 2만 7천 석
송포비전 곡(松浦肥前穀) 6만 3천 석
오도좌도 곡(五島佐渡穀) 1만 2천 석
축전주(筑前州)
흑전시정 곡(黑田市正穀) 4만 7천 석
흑전갑비 곡(黑田甲斐穀) 5만 석
예도섭진 곡(
입화주선 곡(立花主善穀) 1만 석
풍후주(豊後州)
중천좌도 곡(中川佐渡穀) 7만 4천 석
모리인부 곡(毛利靭負穀) 2만 석
송평선정 곡(松平船井穀) 3만 2천 석
도엽우경 곡(稻葉右京穀) 5만 석
비전주(備前州)
천야내근 곡(淺野內近穀) 5만 3천 석
목하비후 곡(木下肥後穀) 2만 5천 석
구세출운곡(久世出雲穀) 5만 석
삼대마 곡(森對馬穀) 1만 5천 석
근강주(近江州)
죽중좌경 곡(竹中左京穀) 7천 석
정이소부 곡(井伊掃部穀) 30만 석
소굴화천 곡(小堀和泉穀) 1만 2천 석
시교하총 곡(市橋下總穀) 1만 80석
삼하주(參河州)
관소주수 곡(管沼主水穀) 7천 석
송평비전 곡(松平備前穀) 2만 20석
본전탄정 곡(本田彈正穀) 1만 석
송평이하 곡(松平伊賀穀) 5천 석
상륙주(常陸州) 상마탄정 곡(相馬彈正穀) 6만 석
내발좌경 곡(內發佐京穀) 7만 석
송평대취 곡(松平大炊穀) 2만 석
송평인번 곡(松平因幡穀) 2만 2천 석
이상 일본 여러 군 곡저(穀貯)에도 각각 일정한 액수가 있는데 대략 수십 군을 들었으니 나머지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주D-001]유순(由旬) :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으로서 제왕(帝王)의 하루 행군 길을 이르던 말. 40ㆍ50ㆍ60리라는 말이 있고, 80ㆍ60ㆍ40리라는 말이 있음.
[주D-002]화적(和糴) : 파는 쪽과 사는 쪽이 서로 의논해서 양쪽에 손해가 없는 선에서 곡식을 사들임.
[주D-003]평적(平糴) : 곡식 값이 헐할 때에 시가보다 비싸게 사들였다가, 곡식 값이 비쌀 때에 시가보다 싸게 팔아내는 것.
[주D-004]태적(兌糴) : 세용(歲用)에 남은 양곡을 백성에게 널리 사도록 했다가 가을에 곡식이 나오면 정부에서 사들이는 것.
[주D-005]희령 소인(熙寧小人) : 희령(熙寧)은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1068~1077). 그 시대 소인이란 왕안석(王安石)을 일컬은 말임.
[주D-006]상위(象魏) : 서울 성문(城門). 상(象)은 법상(法象), 위(魏)는 높다는 뜻. 옛적에 법률을 성문에 높게 달았던 데에서 나온 말.
[주D-007]전환(錢還) : 곡식으로 환상하지 않고, 곡식 대신 돈으로 환상하던 것.
[주D-008]번잉(反賸) : 번작(反作), 즉 쌀로 콩과 바꾸든지 콩으로 쌀과 바꾸든지 거기에서 남게 된 수량
[주D-009]염방(廉防) : 염(廉)은 염치(廉耻), 방(防)은 예방(禮防), 즉 예법으로써 중정(中正)을 잃지 않도록 예방(豫防)하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