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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위의 신앙, 반석 위의 신앙
마태복음 7:24~27
이 말씀은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이 말씀을 매우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신앙의 자세나 신앙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잘 생각합시다. 그리하여 신앙의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신앙의 허리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달려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첫째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신앙인의 삶에는 반드시 시험이 온다는 점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태풍, 홍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을 뒤흔드는 시험의 태풍, 홍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개인적 시험입니다. 그러한 태풍과 홍수와 창일하는 물결의 시험들이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이러 저러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사업의 실패, 만남의 실패, 질병, 궁핍, 삶의 진로의 선택의 문제, 늙음, 외로움, 그리고 죽음 등의 개인적인 시험이 다가옵니다. 이러한 구비 구비마다 과연 우리의 삶에 신앙의 힘은 어떻게 대응할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의 순간에 어떻게 응답을 할 것인가가 시험대에 오를 것입니다.
사회적 시험이 있습니다. 세상의 악의 존재, 정의의 실종, 불법의 창궐함 등의 사회적 부조리의 시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위험을 보면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과연 정의는 있는 것인가,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그는 세상에서 통치자로서 일하고 계신가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종교적 시험이 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와 각종 철학과 종교들의 영적 시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을 이용하여 영혼과 삶을 도적질합니다.
신앙의 박해의 시험이 있습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다가오는 가족의 핍박과 세상의 박해의 시험도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대가를 치르면서 신앙의 길을 끝까지 갈 만한 가치는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사명 감당의 길에서 겪는 시험이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의 시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각 사람의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온전히 잘 감당하기 위해서 달려갈 때 모든 것이 다 순탄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일들 역시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행해야 할 터인데, 인간의 방법과 수단에만 의지하고 내 영광만 추구하며 행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사명의 길에서 어떻게 해야 끝까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해주신다는 언약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하는 믿음과 순종의 시험을 겪게 됩니다.
영적 연단의 시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시험, 곧 그 믿음의 순전함을 시험하려고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준엄한 시험처럼 완전한 순종,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는 시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동일한 방식은 아닐지라도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지순함과 온전함을 하나님 앞에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뒤로 물러갈 것인가 하는 시험도 당할 수 있습니다. 혹은 욥처럼 무서운 연단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더 견고해지고 순전해지는 과정을 겪는 시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시험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가 하는 여부는 그 신앙의 기초가 튼튼한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둘째로, 그러면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비유 되어 있는 기초가 허약한 신앙인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당시의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책망을 내리면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일곱 교회 중에 신앙의 기초가 약하여 책망들은 교회가 5교회요 기초가 튼튼하여 칭찬받은 교회가 2교회가 있습니다. 이처럼 현실 성도와 현실 교회 중에서 모래 기초 성도가 5명이요 반석 기초 성도가 2명 비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둡시다.
먼저 기초가 허약한 다섯 교회를 살펴보면서, 기초가 허약한 신앙인의 다섯 가지 유형을 살펴보겠습니다.
1)주님에 대한 사랑이 냉냉한 신앙인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두고서 부활의 주님은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주후 100년 정도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입술로는 사랑하지만 마음은 차가운 신앙인의 유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토록 뜨거웠던 첫 사랑의 바울 시대가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틈엔가 그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냉냉하게 식어버린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도 드러내는 영적인 감별사 역할도 했습니다. 니골라 당 이단도 물리치는 교리적인 분별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뜨겁고 순수한 첫 사랑의 감격과 뜨거운 헌신의 마음, 구속주의 은혜에 감격하며 십자가를 뜨거운 마음으로 마음에 품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식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삶의 시험이 오면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을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인기 있고 병을 고치는 분이요 가르침의 권세가 있기에 그를 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했지만 마음은 뜨거운 사랑이 없이 냉냉하였고 예수님을 판단하는 마음을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식사가 진행되는 중에 그 동네에 죄인으로 소문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식사하는 자리 뒤로 다가와서 예수님의 발에 엎드려 눈물로 그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을 풀어 그 발을 닦으며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을 보면서 그 집 주인 바리새인 시몬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만일 참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 곧 소문난 창기인 줄알 알았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속으로 멸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을 향하여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그러자 시몬이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기를,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 판단이 옳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계속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런 후에 그 여자에게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눈물이 가득히 흘린 그 여인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다시 한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을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성경을 교리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을 잘 안다고 그것들의 규정들을 토씨까지 잘 지킨다고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은 냉냉하였던 것입니다. 정통주의 교리를 붙들고 있으면서 정작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대하여 아무런 감동도 없고 첫 사랑의 뜨거움도 없이 지식적인 종교인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 시몬과 같은 사람이요 에베소 교회 교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때가 되면 우리들에게 주님을 사랑하는가 여부가 결정적으로 결정하는 시험이 올 것입니다. 교리만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주님을 위하여 모든 핍박과 시련을 끝까지 견딜 것이요 순교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죄인이 되어 죄사함을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주님의 은혜에 가슴이 뜨거운 자로 평생 살아가는 것이, 율법을 토씨까지 지키는 냉냉한 정통주의자, 교리주의자가 되어 주님 사랑이 없는 종교인보다 낫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가슴에 주님에 대한 뜨거움이 있습니까? 베드로는 믿음이 약했기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고 말했지만, 주님의 눈동자가 마주친 후에는 닭이 두 번 운 다음에는 너무 죄송스러워서 자신이 너무 미워서 어둔 골목으로 뛰쳐나가 거기서 통곡했습니다. 그는 사랑했기에 통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도 무엇입니까?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없는 신앙은 가짜 신앙입니다. 박제처럼 생명 없는 신앙이요 향기 내지 못하는 조화처럼 죽은 것입니다. 말만 많았고 잘난체만 했고 교만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마지막 장 마지막 단락의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절절히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반석 위에 선 집처럼 이 세상의 모든 풍랑과 홍수를 너끈히 물리칩니다. 죽음의 태풍이 불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16:37) 할렐루야.
2)영적인 음란을 범하는 신앙인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이 있었습니다(계시록 2:14). 즉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당시에 헬라 사람들이 많이 찾아다니는 더러운 마술사, 요술가, 우상 숭배, 점집 등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그들은 잡신 숭배와 기독교 신앙을 겸하여 가진 혼합주의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은 이런 자들과 맞서 자기의 입술의 검 말씀으로 싸우시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셨습니다. 어느 시대나 더러운 영적 음행의 유혹이 주님의 백성들을 유혹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면서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그의 거룩하심과 그의 능력을 배웠지만,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둔 모압 평지에서 이방 민족 모압 족속과 미디안 족속들이 연합하여 마술사 발람의 술책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인들과 바알 숭배 잔치로 미혹하자 그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사회가 불안하고 미래가 불안하고 삶이 힘들어지지 않습니까? 이러할 때에 사람들이 무당집에 찾아가고 내일의 운세를 묻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귀신에게 자기의 미래를 맡기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그런 일은 우리 하나님께서 극히 혐오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코 동참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일체 그러한 가증한 일에 눈도 주지 아니할 줄 압니다만 주변에서 그러한 유혹이 다가올 때 단호하게 거절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제 일 계명,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근본적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물리치기 바랍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이 그런 일을 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엄히 꾸짖고 단호하게 경고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무서운 징계가 임할 것이라고 전하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계속 경고하되,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과 일체 상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음란을 행하는 신앙인은 인생의 회리바람이 불어오면 흔적조차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든든한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을 섬기겠다는 신앙의 지조가 분명한 사람은 결코 만군의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므로 요동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3)세속주의에 물든 신앙인입니다.
소아시아 교회 중 두아디라 교회는 음란한 여인 이세벨이 들어와서 어지럽혔습니다. 그 여인은 당시 헬라의 이교 사원에서 흔히 일하는 무당 여사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것처럼 포장했지만 실상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여인이었습니다. 결국 두아디라 교회는 그 헬라 사회의 음란한 풍조에 물들어서 음행이 교회에 들어왔으나 이것을 단호하게 물리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께서 경고하기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침상에 던지겠다 곧 병들게 하겠고,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그 자녀들까지 죽이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만 해도 도덕적인 수준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대낮에도 식당에서 여인들이 소주와 막걸리를 반주삼아 마시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풍조입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보면 젊은 여자들이 담배를 휴게소 담배 피는 장소에서 부끄러움 없이 마구 피어대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술 담배를 해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옆에 사무실을 가진 분이 다른 교회 집사님인데, 늘 줄담배를 피고 있어서 저만 보면 슬그머니 한쪽으로 숨어버립니다. 초신자라면 이해하겠는데 오래 된 신자인데도 그러합니다. 물론 술담배 피운다고 지옥간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맞은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전으로 삼은 우리 몸 안에 그토록 성경에서 위험성을 경고한 술을 늘 부어 넣어서 정신과 마음과 몸이 좋지 않는 것을 성령께서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담대도 몸에 좋지 않은 것이니 끊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또한 음란함도 점점 이 나라에 편만해진 형편이 아닙니까? 그래서 점점 더 성도들과 우리 자녀들이 음란함과 부도덕한 성적 풍조에 노출되곤 합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나 케이블 티브이나 영화 드라마 등 각종 매체들이 음란한 영상들이 즐비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영적으로 매우 더러운 것으로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역겹게 하고 노엽게 하여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성품을 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거룩한 주의 일에 능력을 빼앗아버립니다. 음란한 마음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사랑의 비밀을 다 내몰아 버립니다. 그래서 선지자 호세아도 경고하기를,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호 4:11)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음란한 세상 풍조에 물들고 세속주의 풍조에 물들어서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결국 경건의 모양만 있으나 경건의 힘을 잃어버려 시험의 강풍이 불면 세상과 함께 휩쓸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음란한 생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세상적 일락에 물들지 않도록 두려워하십시오. 그것들은 야금야금 영혼을 좀먹습니다.
삼손의 능력의 비밀인 언약의 머리칼까지 마침내는 잘라버리게 될 것이고 결국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한 채 원수의 노리개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회개함으로 머리칼이 다시 자라나고 다시 힘을 얻었던 것처럼, 이러한 세속적인 유혹이 넘어진 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십시오. 그러한 세속적인 유혹을 단호히 물리칠 수 있도록 성령께 도와달라고 청하고 끈질기게 죄와 싸우십시오.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이요 반드시 승리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신앙의 집은 든든하여 어떤 세상 풍파가 창일하게 밀어닥쳐도 끄덕없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4)영적인 맥박이 거의 뛰지 않는 신앙인입니다.
소아시아 교회 중에 가장 최악의 교회는 사데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향하여 부활의 주님이 그 실상을 말해준 내용은 충격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사데 교회는 영적인 체온도 느낄 수 없고, 영적인 호흡이 없는, 그래서 신앙인이라는 이름만 있는 교회였습니다.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지만 그나마 죽어가고 있는 소생의 불씨는 아직 조금 남아 있는 교회였기에, 주님은 그 죽게 된 것나마 속히 굳건하게 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아마 이 교회는 새벽 교회가 있어도 그 새벽 교회가 썰렁한 교회인 것 같습니다. 주일 예배에 모이기는 하지만 찬양도 기도도 맥이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봉사도 정말 하기 싫어서 억지로 의무로 하는 교인들만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간판은 있고 교역자도 있지만 교회는 불이 꺼진 채 늘 아무런 활동도 없고 그 지역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형편에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교인일지라도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가정에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영광을 돌리거나 나쁜 일이 있다고 목회자에게 기도 부탁을 간절히 하거나 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신앙은 맥박없는 죽은 신앙입니다.
왜 이렇게 신앙이 죽어 있는 것일까요? 주님은 사데 교회에게 어떻게 복음을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고 권하였는데, 이 말씀은 과거에 한 때 살아 있었던 적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데 교회 성도같은 사람도 한 때는 신앙이 생생하게 살아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가 뜨거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힘을 다해 봉사한 적도 있었습니다. 예배에 열심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생활에 지치고 말았습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지쳤습니다. 사람에게 시험당해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습니다. 그 긴 시험에 그만 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신앙 생활을 뒷방으로 밀려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먼저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요 신앙은 이차 삼차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오래 되면서 이제 서서히 성령의 감화 감동도 식어버리고 영혼의 호흡도 그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하여 부활의 주님은 네가 살았지만 사실 영적으로는 죽어 있구나 하시고 안타까워하며 어서 깨어나라고 경고합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런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하)고 하시면서 지체 말고 그나마 살아 있는 믿음의 불씨를 속히 다시 되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영혼이 살지 아니하면 우리 육신의 삶은 아직 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여, 영혼의 깊은 잠에 빠진 자여, 어서 깨어나십시오.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못박힌 주님의 손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옆구리에 창자국이 난 상처많은 따뜻한 가슴을 열어놓고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 품에 안길 때 이 세상의 고단한 삶의 무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영혼의 생기를 찾아야 이 세상의 모든 거친 풍파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어서돌아오오 어서 돌아만오오
채찍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5)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신앙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러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재물이 많음을 자랑하고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교회를 향하여 영적인 실상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재물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거나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들의 영혼은 이처럼 가련하고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일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의 부요함은 믿음에 있습니다. 연단받아도 흔들림 없는 정금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야말로 진정한 부자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했지만 세속적인 성도는 영적으로 헐벗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옷은 초라한 것을 입었지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의지하여 의의 세마포 흰 옷을 입은 성도가 훨씬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한 성도입니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당시 최상의 안약을 만드는 의학 도시로 유명했는데, 진정 자신의 영혼은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진짜 눈이 밝은 자인가 하면 성령의 안약을 발라 영안이 밝아서 자신의 영적인 가난함과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크심을 알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성도야말로 영적으로 밝은 자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온통 물질 제일주의의 열풍이 불어서 무엇이든지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려고 온갖 사기와 범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이 있다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좀 가난해도 행복합니다. 반면에 사랑 없이 돈만 많으면 오히려 더 가정도, 사회도, 교회도 불행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도리어 가장 불행한 교회요 역겨워서 주님이 입에서 토해버리겠다고 한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맙시다.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돈이 필요한 것을 주님이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면 하나님은 물질도 때를 따라 주십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제일 우선입니다. 곧 굶어죽는다 해도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는 진짜백이 신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지고 살리시고 채우시고 그 자녀들을 책임지고 길러주시고 부요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돈만 쫓아가는 사람이 절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히 자기의 일에 힘쓰십시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내 모든 삶의 첫째가 되게 하십시오. 그분을 잃어버린다면 억만 금을 번다고 해도 단호하게 우리는 그 기회를 내던져야 합니다. 오빌의 금을 강가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가장 귀한 보배로 삼으면 하나님도 반드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끝까지 책임져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이 기초가 든든한 신앙인은 어떤 유형일까요?
계시록에 나온 그 당시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칭찬받은 승리한 교회로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 둘을 둘 수 있습니다. 이 두 교회는 큰 교회도 아닙니다. 부유한 교회도 아닙니다. 평안하기만 한 교회도 아닙니다. 시련과 역경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환난과 궁핍 중에 있지만 환난 중에 죽도록 주님께 충성함으로써 인정받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이 하신 칭찬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유한 자니라”(계 2:9)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칭찬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시록 3:8)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교회들도 시험이 있었습니다. 환난과 궁핍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라고 하는 가혹한 압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부자였던 것도 아니고 능력이 많았던 것도 아닌데, 그들은 말씀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론과 교리만 붙든 것이 아니요 주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으로 그 생명의 말씀을 진정한 사랑으로 붙들었습니다. 눈물과 무릎으로 싸웠습니다. 새벽마다 밤마다 성전에 기도하면서 뒹굴면서 성령의 위로를 받아 승리했습니다. 신앙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노예 주제에 일 안하려고 예배당 다닌다고 주인에게 매 맞으면서도 굴욕과 고통을 참으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교회와 신자가 된 것입니다.
보험업계에서 만들어진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유명한 법칙이 있습니다. 가만히 통계를 내보니까, 자그마한 여러 조짐과 신호들이 300번의 사고 위험들이 생겨날 때, 29번의 경상을 입는 사고가 생기고, 1번의 중상자가 생기는 통계적 수치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번의 사고의 위험 징조가 생기고 작은 사고 발생 빈도가 높아지면 그 만큼 대형 사고가 터질 확률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작은 지진이나 태풍이나 비나 추위 등으로 건물이 금이 가거나 창문이 뒤틀리거나 보일러가 터지거나 집 안에 결로가 생긴다면, 나중에 큰 충격의 지진이 일어나거나 추운 겨울이 닥치거나 하면 그만큼 집에 큰 타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그 집을 보수 공사를 충분히 하고 기초를 다시 닦는 보강 공사를 착실히 해야 큰 지진이나 큰 홍수가 닥쳤을 때 그 시험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집에도 반드시 때가 되면 큰 홍수의 시험의 때가 옵니다. 인생의 집을 뒤흔드는 큰 지진이 일어날 때가 옵니다. 큰 나무도 부러뜨리고 전봇대를 뽑고 유리창을 박살내고 집이 종이짝처럼 날려버리고 아파트가 통째로 기울게 만드는 거대한 폭풍의 시험이 우리 인생과 신앙의 집에 불어닥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러기 이전에 작은 풍랑과 작은 비와 소형 태풍, 중형 태풍이 닥쳐 옵니다. 그러한 것들을 맞이하여 집수리를 잘하고 기초를 튼튼하게 보강 공사를 하고 더 깊게 파고 반석 위에 집을 잘 지어놓으면 나중에 아무리 큰 초강력 폭풍이 불어닥치고 창수가 나서 집을 덮칠찌라도 반석 위에 지은 우리 신앙의 집은 끄떡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초가 약한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합니다. 잠언 10장 25절에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세 반석이신 하나님께 우리 신앙과 인생의 기초를 둡시다. 풀은 시들고 그 꽃은 떨어지나 변함없이 항상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 걸고 붙드는 성도가 됩시다. 주의 말씀을 단지 머리로만 알지 말고, 여러분의 인생의 대들보요 기둥으로 삼으십시오. 입술만의 신앙이 되지 말고 교리만의 종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주님에 대한 사랑이 가슴에서 뜨거운 신자가 되십시오. 내 모든 죄를 사해주시려고, 저 지옥의 형벌에서 날 건져내려고 친히 십자가에 매달려 끝까지 그 고통과 모욕을 견디어주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이 세상 어떤 더러운 정욕도, 이 세상 재물에 대한 욕심도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빼앗지 못하도록 잘 지켜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가난도 궁핍도 핍박과 박해도 주님에 대한 펄펄 끓는 사랑을 빼앗을 수 없도록 하십시오. 그런 사람은 어떤 무서운 풍파도, 창일한 강풍도, 온 세상을 뒤흔드는 지진도, 어떤 개인적인 시련도, 신앙적인 박해도, 세상의 유혹도 결코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평생 집 짓는 자들입니다. 평생 우리의 신앙의 집을 순결한 믿음으로, 진실한 사랑으로, 자원하는 섬김으로, 겸손한 순종으로 잘 지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런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주님은 친히 예비하신 아름답고 영화롭고 복된 영원한 천국의 내 집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그 영원한 집은 실상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지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평생 천국의 집을 이 땅에서 잘 지어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