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다다르면서 비가오고 눅눅한 기운 속에 집안구석마다 애들의 향내가 빼곡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애들 목욕을 시키고 배변한 곳에 향락스까지 풀어서 빡빡 닦고 공기청정 스프레이를 뿌려도 애들의 특유 냄새는 없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눈뜬 아침에 베란다에 싸둔 애들의 배변 개수를 세어서 서로 몇 개씩 치울 것인가 다투느라 평안한 아침을 맞지 못했고
포옹이와 푸키와 노느라 공부는 이미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노래라도 듣노라면 어느새 포옹이와 푸키가 와서 내 다리위에 서로 올라오려고 으르렁대며 싸웠다.
그러다가 한 녀석이 다리 위를 차지하고 누우면 나머지 녀석은 발목을 베고 누웠다.
애들이 점점 자라고 체중이 늘면서부터 다리 위를 차지한 녀석의 무게에 눌려서 쥐난 다리를 푸느라 한참을 주물러야 다리 근육이 풀어지고는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날리는 애들의 털은 청소기로 아무리 청소를 해도 없어지지가 않았다.
컴고하면서 쿠션에 드러누운 남편의 얼굴 위에도 하얀 털이 붙어 있었고
세탁한 빨래를 개다보면 옷 솔기마다 털이 달려있었으며
청소기를 털어보면 털방석처럼 털이 뭉쳐져 있었다.
새벽잠이 없어서 그 시간대에 책이라도 볼라치면 기다렸다는 듯 두 녀석이 마라톤을 하면서 싸움질을 해대었다.
말리기도하고 달래기도하고 그러다가 매로 혼을 내기도 했으나
눈치만 늘었을 뿐 녀석들의 장난기는 없어지지 않았다.
함께 오래 살면 닮아간다고 했다.
미식가 남편에게 거의 질력이 난 삶을 살고 있는 나의 서러운 입장을 녀석들 또한 교묘히 악용했다.
무엇을 해도 잘 먹지 않았다.
개밥을 먹이면 그만이라고 생각을 하고 한 포대 넉넉하게 사 두었던 애들의 양식에는 거미가 살고 있었다.
남편 찬거리 걱정에다가 아이들 기호에 맞는 반찬에다가 두 녀석들의 먹 거리까지 고민하다보니 드디어 나의 앞머리에 흰 새치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하튼,
그 즈음에 우리 여섯 가족은 여름의 끝자락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응당 포옹이와 푸키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두고 갈 수도 없고 데려가자니 부담스러웠고
휴가를 앞둔 남편과 나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데려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널따란 마당이 있는 친정 부모님 댁에 맡길까 고민도 했었으나 이미 거절당한 입장이었다.
대전에서 울산까지 세 시간에서 세 시간 삼십 여분 걸리는 거리지만 애들과의 첫 여행이라 차안에서 실례라도 할까봐 마음이 좀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내려가는 길에 다행히도 끙끙거리며 배변의사를 밝혔고
별 어려움 없이 울산까지 잘 내려갔었다.
식당에서 애들은 멀미를 했는지 전혀 먹지 않았었다.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간절곶’ 등대에서 남편과 아들은 낚시하느라 바빴고
나는 딸아이와 벤치에 앉아서 몰리어 드는 강렬한 파도와 쓰러뜨릴 듯한 바람의 애무를 받으며 바다를 느꼈다.
두 밤 자고 올라오는 차 안에서 맏이가 포옹이와 푸키를 자기 집에 다시 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무엇보다 나를 배려한 열 살 된 딸아이의 배려였다.
늘 힘들고 지치고 짜증만 내는 어미를 안타까워한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지만 가족이 다 된 녀석들을 그리 쉽게 보낼 수 있을까 고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나 자신이 문제였다.
애들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눈물부터 그렁그렁 해졌다.
일주일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녀석들만 껴안고 있었다.
포옹이와 푸키를 내 아이들 인양 생각했었고 여하한 미운 행동도 다 배려를 하며 지내지 않았던가?
막내가 푸키 목욕을 시키면서 장난으로 떨어뜨려 울렸을 적에 내가 얼마나 야단을 쳤었든가?
두 번째로 푸키를 떨어뜨려서 다리를 절며 비명 지르듯 울어대는 푸키의 절망스런 표정을 보았을 적에 아이는 내게 모질게 맞았다.
근처에 매가 보이지 않아서 그냥 손으로 때렸었다.
남편이 말리다가 돌아가고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에 아이는 구석에서 떨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 손톱에 긁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난 화가 가시지 않았었다.
개들을 아이들보다 더 사랑한다던 남편의 비아냥거림도 불쾌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실이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포옹이와 푸키를 그 집에 다시 보내던 날.
포옹이와 푸키는 이미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하는지 며칠째 밥을 먹지 않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불과 1Km 안의 거리에 있는 그 집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서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았다.
토요일의 특강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미리 챙겨두었던 애들 물품을 남김없이 차에 실었다.
두 애들을 다른데 보내지 말 것이며 이름을 그대로 불러 달라고 언니게 부탁을 하고 푸키를 내 품에 꼭 안았다.
녀석은 허둥대며 울더니 치마에다 오줌을 싸고 말았었다.
푸키의 눈가에도 물이 고여 있었다.
그 저녁에 우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세수를 하고 온 맏이의 눈 주위가 빨갰다.
그렇게 어설픈 이별을 했던 두 녀석들을 맏이와 막내는 쉼 없이 들락거리며 보고 또 보고 왔다.
처음에는 야위어 간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지나고부터는 포옹이가 살이 찌고 푸키도 좀 자랐다는 말을 전했었다.
그리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먹고 난 음식이 고기일 때는 늘 포옹이와 푸키가 생각이 났다.
과자도 잘 먹던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먹을 것을 간간이 챙겨 아들 편으로 보내기도 했었다.
그 날도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아들이 다른 데로 보내진 포옹이와 푸키 얘기를 한 것이다.
영어학원에서 막 돌아온 맏이는 그 말에 풀썩 주저앉더니 엉엉 울었다.
마당이 없어서 개도 키울 수 없는 집이 싫다고 아들은 말했다.
첫댓글휴..... 전 이런 글 못 봐요. 서울로 떠나면서 결국 다른 곳에 입양시킬 수밖에 없었던 우리 '솔이'(말티즈) 때문입니다. 잘먹던 음식을 보면 생각이 나는 것까지 어찌 저와 심정이 이리도 같으신지.....생명 있는 건 절대로 키우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네요. 달필이세요. 잘 읽었습니다.
첫댓글 휴..... 전 이런 글 못 봐요. 서울로 떠나면서 결국 다른 곳에 입양시킬 수밖에 없었던 우리 '솔이'(말티즈) 때문입니다. 잘먹던 음식을 보면 생각이 나는 것까지 어찌 저와 심정이 이리도 같으신지.....생명 있는 건 절대로 키우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네요. 달필이세요.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요..눈물이 흐르네요..그러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