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지역은 옛 6개가야(금관가야/대가야/아라가야/고령가야/성산가야/소가야)중 가야국들의
맹주였던 금관가야가 번성했던 곳으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탄강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매년4월 "김해가야문화축제"가 수릉원의 중심으로 김수로왕릉, 대성동고분군 일대애서
열렸는데 2020년부터 코로나19땜에 중단됐다가 2022년엔 10월개최예정이랍니다^*^
오랫만에 김해의 가야역사유적들을 둘레길처럼 도보하이킹하면서 구경할수 있는 가야사누리길을
따라 화사한 봄꽃과 상쾌한 봄바람을 느끼면서 Go Go!!
가야역사유적들이 서로 가까이에 인접해 있어서 도보산책으로 둘러보는데 안성맞춤입니다^^
(기행코스) 3.3km
(단, 유적 곳곳과 박물관을 탐방하는 거리를 감안하면 약 6Km정도 됩니다)
봉황대유적~대성동고분박물관~대성동고분군~김해박물관~구지봉공원~수로왕비릉
1.봉황대유적(경남 김해시 가락로63번길51) 사적제2호(2001.2.5 지정)
우리나라에서 1907년 최초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회현리패총과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생활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 확대 지정된 곳으로 고인돌,조개무지,항구시설,봉황토성 등이 발굴되어 청동기시대부터 가야시대까지의 복합유적의 성격을 지니며 가야인의 생활상과 더불어 가야왕권의 존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2003년 왕궁추정지 동쪽에서 봉황토성의 일부가 확인되었으며 2015년부터 진행되고있는 왕궁추정지 발굴조사에서는 4세기의 대형건물터와 화로모양 그릇받침, 원통모양 토기, 굽다리 접시, 유리구슬, 굽은 옥 등 가야왕릉에서 볼수있는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었고 2019년에는 왕궁추정지 인근에서 대형적심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약 20m높이 왕궁관련시설로 추정되어 가야왕궁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회현리패총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만들어진 조개무지로 이곳에서 발견된 각종 철기,골각기,토기,탄화미 등은 가야시대 생활모습을 엿볼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이곳에서 발견된 중국화폐 화천은 당시의 국제교역상황을 잘 보여주며
대체로 기원전후시기부터 4세기대에 걸쳐 형성된 패총이지만 하나의 층위에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뒤섞여있고 취사용 토기, 골각패제품, 중국계유물, 일본계유물, 탄화미, 동물뼈, 패각 등 인공유물과 자연유물이 같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풍습과 자연환경에 대한 중요한 해명근거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봉황대
조선시대 김해부사를 지낸 정현석이 "언덕모양이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하여 대를 쌓고 봉황대라 부른 것에서 유래하며 구릉주변에서는 가야시대의 다양한 생활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구릉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어린시절 함께 지냈다고 전해지는 황세바위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봉황대 서쪽에는 가야시대 토성과 대규모 창고형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옛 봉황초등학교 남쪽에는 가야시대의 배가 발견되어 당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던 가야의 해상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엿볼수 있습니다.
1)패총전시관 및 발굴현장모형
2)패총발굴유물
3)고상가옥 주거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 주거는 봉황대유적에서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한 것으로.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이고,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써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용도의 건축물이 많으며,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
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습기,침수 등으로부터 방해,방제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볼수 있습니다.
4)여의각(如意閣)
출여의 낭자의 정절을 추모하는 사당으로, 가락국의 9대임금인 겸지왕(숙왕)때 출정승의 딸로써 아버지와 친구
사이인 황정승의 아들 황세와 어릴적 혼약한 사이였으나 황세는 신라군을 물리친 공로로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고 여의낭자는 다른 남자와 혼인하라는 출정승의 권유를 뿌리치고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가 24세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말았고, 황세장군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다 그해 병을 얻어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여의각은 1973년 회현동민들의 힘으로 사당을 건립, 매년 단오날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현재의 사당은 2002년 봉황대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보수 정비하였습니다.
5)황세바위
가락국의 9대임금 겸지왕(숙왕)때 황정승의 아들로, 황정승과 친구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
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서로 결혼시키기로 약속하였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고,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여의는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날 황세가 여의에게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제의하자 여의는 삼대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고 이 시합을 한 곳이 황세바위임.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 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하였는데 여의는 할수없이 자기가 여자임을 밝히고 서로 결혼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여의낭자는 다른 남자와 혼인하라는 출정승의 권유를 뿌리치고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가 24세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말았고, 황세장군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다 그해 병을 얻어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6)봉황대언덕위에 있는 가락국 천제단비
2.대성동고분박물관(경남 김해시 가야의 길 126)
(현재 내부 리모델링공사중이라서 휴관중)
3.대성동고분군(대성동고분박물관 앞에 위치하며 넓은 평지가 있는 언덕형태를 하고 있음)
1)고인돌(지석묘)
애구지 구릉중심부의 평탄한 면에 위치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로 무덤구덩이를 파고 돌널을 설치함.
9단으로 쌓아올린 돌널석벽은 정교해 보이나 엉성한 부분도 보이며 무덤구덩이와 돌널사이의 공간을 충전석으로 채웠고 충전석위에 뚜껑돌 7장을 덮고 뚜껑돌 틈새와 위에는 밀봉석을 덮어둔 형식으로 고인돌과 인접한
70호덧널무덤 상부에서 확인된 거대한 돌은 이 고인돌의 덮개돌로 추정되고 있음.
돌널내부에서 붉은 간토기1점, 돌화살촉28점이 출토되었고 돌화살촉 가운데 10점이 화살대흔적이 발견되었고
충전석사이에서 붉은 간토기,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 고인돌이 애구지 언덕정상에 단독으로 위치하
여 상당히 공을 들여 매장시설을 만들고 많은 양의 돌화살촉이 함께 묻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김해지역의 청동기문화를 이끌었던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
2)93호분
애구지 구릉중심부에 자리한 5세기초 덧널무덤으로 주곽 한쪽바닥에 장방형으로 부장용 구덩이를 만든 독특한 구조로 주곽은 길이6.6m, 너비3.8m이며 부장용 구덩이는 가로0.9m, 세로2.07m임.
무덤주인의 관이 안치되었던 공간에는 자갈돌을 평평하게 깔고 부장용 구덩이에도 자갈을 깔았으며 순장자와
토기를 넣었으며 5명의 순장자는 무덤주인과 나란히 누워있으며 관외부에 3명, 부장구덩이에 1명, 무덤주인의
발치에 1명이 발견되었는데 으뜸덧널에서 토기, 말갖춤새, 갑옷 등의 철기류가 발견되었으며 금동제 말방울과
푸른 빛의 옥으로 만든 대롱옥이 출토된 바, 5세기초의 중소형 무덤들은 이전에 대부분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93호분은 규모와 출토유물로 보아 대형왕릉급의 지배자무덤으로 추정됨.
3)70호분
애구지언덕 북쪽 노출전시관 근처에 위치한 4세기후반의 주부곽식 덧널무덤으로 고인돌 둘레에 쌓아놓은
돌무지를 훼손하고 조성된 것으로 주곽과 부곽이 T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주곽과 부곽의 바닥깊이가
1m정도 차이가 나 이는 김해지역의 주부곽식 덧널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으로 주곽외벽에서는 갈대로 엮은 돗자리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것임.
주곽의 바닥전체에 납작한 돌을 깔고 무덤주인의 목관을 안치한 것으로 보이며 순장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리옥과 철검3점 등이 확인된 점으로 보아 최소 3명의 순장자를 매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토기류, 철제무기, 농기구 등이 출토되었으며 도굴로 훼손된 상부에서는 금동제 말갖춤새와 유리용기 등이
발견되었고 철제판갑옷,투구와 함께 무려 429점에 달하는 철화살촉과 12점의 철도끼가 출토되었으며 가락바퀴, 일본계통의 소형그릇받침 등이 출토되었고 토기아래에서는 상어이빨 7개가 확인되었는데 이를 통해 상어
머리가 함께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의 유물들이 도굴되어 사라졌으나 중국제 청동거울, 금동제 허리띠, 원통모양의 청동기와 같은 위세품이 출토되어 왕릉급의 고분으로 추정됨.
4)91호분
애구지 북쪽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4세기초 덧널무덤으로 길이6.6m, 너비2.85m의 덧널을 설치한 초대형무덤.
무덤중앙에서는 무덤주인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무덤내 토기가 집중적으로 묻혀 있었던 곳의 주변에는
순장자3명이 나란히 누워있었고, 무덤구덩이와 덧널사이를 채운 충전토에도 성인남성과 여성이 1명씩 순장
되어 있었는데 5명의 순장자는 모두 남쪽에 머리를 두고 있었음.
유물 대부분이 도굴되었지만 금동삿갓방울, 용무늬 말안장장식, 사슴뿔장식 등의 위세품을 비롯하여 화로형
그릇받침 등의 토기류, 각종 철기, 말갖춤새 등이 다수 출토되어 왕릉급무덤의 위상을 짐작할수 있음.
서역계통의 로만 글라스조각, 중국 동북지방의 삼연계통 금동제 말갖춤새와 청동그릇, 일본 오끼나와 아열대
해역에 서식하는 고호우라와 이모가이조개를 사용한 말안장장식도 발견되었음.
5)88호분
애구지 북쪽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4세기 중후반의 덧널무덤으로 길이5.9m, 너비2.7m규모의 덧널을 설치한
초대형급 무덤인데, 덧널부분에 V자 모양의 홈을 파서 닷널을 고정하고 바닥에는 납작한 돌 10여장을 동서로
늘어놓아 6열의 시상을 마련하고 중앙부에는 무덤주인을 안치하고 껴묻거리를 배치하였으며, 덧널에서는 무덤주인과 더불어 1명의 순장자가 확인되었고 무덤구덩이와 덧널사이를 채운 충전토내에서도 3명의 순장자가 발견되었는데 충전토내에서 발견된 순장자는 노년여성, 어린여성, 장년남성으로 추정되고 어린여성과 장년남성
머리뒤에 뼈로 만든 빗모양의 장식품을 꽂고 있었음.
유물 대부분이 도굴되었지만 다양한 형태의 철화살촉 207점, 뼈화살촉 292점, 철도끼 14점, 원통모양의 청동기 3점, 구슬목걸이 등 많은 양의 위세품이 출토되어 왕릉급 무덤으로 추정되며,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된 금동
제 허리띠고리, 말굽모양 고리와 화초모양이 장식된 허리띠드리개는 중국 서진에서 유행하였던 최고급위세품
으로 서진-요녕-백제-금관가야-왜의 지배층간 교류를 보여주며, 일본계통 유물로는 청동창과 가락바퀴모양의
석제품, 당시 일본의 지배층 무덤에서만 나오는 청동 화살촉4점과 바람개비모양 청동기 13점이 출토된 바,
그 당시 금관가야와 일본왕권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임.
6)7호분
애구지언덕 중앙부에 위치한 5세기전반의 주부곽식 덧널무덤으로 덧널바닥 전체에 작은 깬돌을 깔았는데 도굴로 대부분 흩어지고 무덤주인이 안치된 중앙에는 작은 깬돌을 비교적 가지런히 깔았던 흔적이 확인되고,
3면의 무덤내벽을 따라 5명의 순장자를 매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컵모양의 토기, 각종 무기, 수정으로 만든
목걸이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부곽에서는 긴 철판을 세로로 이어만든 갑옷인 종장판갑이 출토되었
는데 이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함.
7)1호분
애구지언덕 남동쪽 정상부에 위치한 5세기초의 초대형 주부곽식 덧널무덤으로 주곽에는 무덤주인과 5명의
순장자가 매장되어 있고 동쪽에서는 철제무기가 주로 출토되었으며 동북쪽 모서리에서는 도굴로 원래의 형태가 훼손되어 있으나 2열5겹으로 쌓아올린 덩이쇠가 출토되었고, 북서쪽 모서리부근에서는 금동제 말띠구미개
와 말안장장식, 발걸이 등의 말갖춤새가 발견되었는데, 창자루 끝부분에 붙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통모양의
통형 동기 8점은 청동막대가 들어잇는 것도 있어 맑은 소리를 내던 주술도구의 역할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이는 일본 긴끼지역에서도 출토되어 그 당시 일본수장과의 교류를 짐작할수 있게 하며 부곽에서는 목과 허리를
보호하는 철제 갑옷과 투구가 출토되어 무덤주인이 가야왕국의 지배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됨.
8)73호분
애구지언덕 남동쪽비탈에 위치한 5세기후반의 돌덧널무덤으로 대성동고분군 돌덧널무덤중 가장 큼.
돌덧널은 다양한 크기의 돌을 사용해서 만들어졌으며 그 사이에 생긴 틈새는 점토로 채웠고 북쪽이 남쪽보다
깊게 파여 있으며 돌덧널벽위에 뚜껑돌 3장을 덮었으며 뚜껑돌 사이는 사람머리크기만한 돌을 깨부수어 채웠고 벽면아래에서는 돌벽을 쌓거나 버티기위한 나무구조의 흔적이 확인되었음.
대부분 도굴되어 사라졌지만 무덤주인이 지배층이었음을 나타낸 금동관 일부와 금귀걸이, 금동제 화살통, 큰칼
의 은제장식 등이 출토되었으며 토기는 부산 복천동53호분 출토품과 비슷하며 금관가야의 토기형식과 함께
경산, 창녕, 진주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토기형식들도 있음.
대성동고분군에서 가장큰 돌덧널무덤이지만 다른 가야지역의 대형무덤과 차이가 나고 딸린 덧널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금관가야 쇠퇴기의 모습을 보이지만 금동관이 함께 묻혀 있었다는 점에서 금관가야의 왕권이
여전히 잘 보존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임.
9)야외전시관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분중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당시 모습그대로 복원,전시하여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축조방법과 유물부장상태를 생생히 보여줌.
*29호분:3세기후반에 마들어진 왕묘로 추정되는 중요한 무덤이며 청동솥, 최초의 가야도질토기 등 출토
*39호분:4세기후반의 무덤으로 29호분을 일부 파괴하고 축조한 일종의 중복축조이며 금관가야 무덤축조
방식의 주요 특징으로 지배계층의 세력교체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
4.김해박물관(경남 김해시 가야의 길 190)
(현재 상설전시실은 개편공사로 인해 휴관중)
#현재 기획전시기간이라서 "가야인 바다에 살다"관람(가야누리3층 특별전시실)
여기 올린 사진들은 다양한 전시물중 극히 일부임
1)가야누리 건물전경(김해박물관옆에 위치)
2)특별전시실 입구
2)바다와 함깨 한 가야인 이야기를 3D영상으로 표현
가야왕도 김해에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너른 평야가 있고 드넓게 펼쳐진 논과 밭,갈대숲 그리고 활주로가
잇는 김해평야는 옛날 바다였던 곳으로 영남 각지를 잇는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이곳에 삶의 터전을 일군
가양인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으며 바다는 가야인에게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주변지역과
교류할수 있는 뱃길을 열어주었고 먼 바다건너 여러 이웃나라와의 활발한 해상교역과 낙동강 뱃길을 이용한
내륙지방과의 교역은 가야인의 가장 중요한 생업활동이 되었으며 바닷길로 연결된 여러 지역의 문화와 전통이
공존하고 때로는 융합되기도 한 가야의 문화에는 다양성, 개방성, 역동성, 개척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3)고기잡이 채집도구
인류는 신석기시대부터 낚시바늘,작살,그물을 사용했는데 주로 짐승의 뼈와 뿔,돌로 만들었고 청동기시대를
지나면서 금속으로 만든 도구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부터 어로,채집도구도 대부분 철제품으로 바뀌었고
갈고리역할을 하는 쇠미늘이 달린 작살은 고기잡이에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갯바위,갯벌,얕은 바다의 암초 같은 곳에 서식하는 조개와 해조류를 채취하고 손질하는데 쇠로 만든 도구를 사용했음.
4)굴함지와 조새
5)그물추와 그물바늘
6)조개캐는 도구
7)결합식 낚시바늘
8)흙으로 표현한 바다생물
1926년 경주 황남동에서 발견된 신라토기 뚜껑에는 사람이나 동물 등애 각양각색의 장식물을 흙으로 만들어
붙였는데 그중에는 해양생물을 표현한 것도 많아 불가사리,가재,게,넙치 등과 같은 작은 생물뿐만 아니라 거북
,상어,물개와 같은 대형 바다동물도 보이며 물고기비늘, 게의 집게다리모양,거북등껍질,상어의 입과 지느러미
등 바다생물의 독특한 특징들을 세밀하게 잘 표현했음.
9)조개무지에서 발견된 바다먹거리
가야사람들은 물이 빠진 갯벌에서 쉽게 조개를 채집했는데 이것은 먼 바다로 나가는 고기잡이보다는 부담이
훨씬 적은 일이어서 옛 김해만의 깊숙한 안쪽이었던 지금의 회현동,부원동,유하동,신문동 등 곳곳에서 사람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 더미가 발견되는데 이를 조개무지(패총)이라 부름.
10)택리지(擇里志)
이중환(1690~1752)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인문과 자연지리, 인간관계를 저술한 내용을 옮겨적은 필사본임.
본문은 사민총론, 팔도총론, 복거총론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민총론에서는 사농공상의 역할을 논했고
팔도총론에서는 조선 팔도지역을 설명했으며 복거총론에서는 사람이 살만한 조건을 풍수,인심,토질,기후,역사의 여러 관점에서 분석했으며 복거총론의 운송과 무역을 다룬 내용에서는 강이나 바다로 운송하면 이로운 점을 설명하며 남해안 해운망의 중요한 곳으로 김해를 설명하고 있음.
"배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파는 상인은 반드시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화물을 매매하여 이익을 얻는다.
경상도에서는 낙동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김해 칠성포인데, 여기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주에
이르고,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진주에 이른다. 길목에 있는 김해가 경상도 전페의 물길입구에 위치하여
남쪽과 북쪽, 바다와 육지의 이익을 모두 챙긴다. 여기서는 관청이나 개인 할것없이 소금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
11)배모양토기
12)희소자원 유리와 옥
유리와 옥은 귀걸이나 목걸이를 만드는 소재로 푸른색 유리구슬을 한데 꿰어 목걸이를 만들고 수정이나 옥을
달아 펜던트로 사용했는데, 당시 유리와 옥은 재료의 희소성으로 인해 쉽게 구하기 어려워 유통과 분배가 통제
되는 교역품으로 유리그릇과 구슬은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비취 경옥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함.
13)송풍관
14)덩이쇠(鐵鋌 : Ingots)
15)특수한 취사도구
이동식 부뚜막은 위에 난 구멍에 솥을 올려놓고 가열하며 전면에는 연료를 넣기위한 구멍이 있는 취사도구임.
솥모양 토기와 시루도 많이 발견되며 남해안을 이동하면서 장사하던 상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됨.
5.구지봉공원(경남 김해시 구산동 150) : 사적429호
김해박물관 뒤쪽산책로로 올라가면 됨
구지봉(龜旨峯)은 서기42년 수로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장소로 구릉의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
구봉 등으로도 불리는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린 수로왕의 탄강설화에 의하면, 서기42년당시 이지역을 다스
렸던 구간과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보라색줄에 매달린 황금상자가 내려왔으며 상자에서 나온 6개황금알을 깨고 나온 분들이 6가야를 세운 왕들이 되었다고 함.
이 설화는 구지봉이 가야500년역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고대국문학상 중요서사시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주며 수로는 가장먼저 태어났다는 뜻으로 수로왕은 태어난지 10여일만에 장성하여 가락국(금관가야)를
세운 분으로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음.
1)구지봉 표지석
2)구지봉 고인돌 : 구지봉(해발42m) 정상에 위치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크기는 240x210x100(Cm)로 작은 편이지만 특이하게 구릉의 정상부 부근에 위치
하며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되지않아 정확한 축조시기 등을 알수 없으나 주변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
유적 등의 사례로 보아 기원전 4~5세기경 이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상석에 새겨진
"구지봉석"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짐.
3)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지 표지석
6.수로왕비릉(경남 김해시 가락로190번길 1) : 사적74호
구지봉공원에서 내리막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구지문이 나오고 이 문을 지나면 수로왕비릉 사적지가 바로
나옵니다. 일종의 수로왕비릉으로 가는 옆문인 셈이고 정문은 따로 있습니다.
가락국 수로왕비의 능으로 조선시대 세종때(1446) 김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는데 능비와 상석은 1647년에
설치되었으며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16~18m, 높이5m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고 능주위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는 낮은 단의 축대가 있고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이라 되어
있음. 경내에는 숭보재, 돈종문, 구남문,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으며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파사석탑이 있는데 김해시내에 있는 호계사에서 옮겨온 것이라 하며 삼국유사에는 서기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로 닭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해시의 향토사학자가 이를 확인하였다고 함.
1)수로왕비릉 사적지전경
2)구남문(수로왕비릉 사적지정문)
3)고직사
4)돈종문
5)숭보재
6)파사석탑(婆娑石塔)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
삼국유사 등의 고서에 수로왕비 허황옥이 수로왕7년(48)에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때 싣고 왓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탑의 부재 5층만 남아 있으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같은 것이 남아 있어 신농본초에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탑이어서 신비를 더하고 있음.
파도를 진정시켜 준다는 신령스러운 탑으로 일명 진풍탑으로 불리우며 원래 호계사에 있던 것을 1873년에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역으로 옮겼고 이를 영구보존하기 위해 1993년5월에 다시 이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움.
7)수로왕비릉
|
첫댓글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