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은 집 근처에 본당이 있는데 주소지로 보자니 관할 본당은 오히려 집 근처에 있는 성당보다 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성당으로 교적을 옮길까 했더니만 성당 사무실에서는 관할권 안에 있는 주소가 아니라는 이유로 교적을 옮겨 드릴 수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본당으로 가는 게 아무래도 편하겠죠. 하지만 안 된다고 하니 어찌할까요?
다른 이유에서 교적을 옮기고 싶다는 분도 있습니다. 주일에도 일 때문에 일터에 갔다가 가까운 성당에 더 자주 가는데, 아예 일터 주변 본당으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 답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교적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교회 행정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잃어버린 교적을 찾아서”를 읽어 보세요) 그러다 보니 각 교구의 행정이 주소지를 기준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집에서 가까운 성당, 주로 활동하는 지역에 있는 성당에 교적을 두지 못하고 주소지에 따라 교구에서 정해 놓은 관할 구역에 따라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적을 옮기고 싶은 분에게는 그것을 옮기려고 애쓰지 마시고 그냥 다니기 편한 본당으로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신 교적이 있는 본당(소속 본당)에서 책정한 교무금을 충실히 내시기를 권합니다. 그 본당의 누가 꼴 보기 싫어서 못 내겠다 하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비록 내가 싫어서 소속 본당을 거부하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기본적으로 소속 본당을 지탱해야 할 물적인 지원은 하시기 바랍니다.
행정구역상 교적을 둔 본당이 따로 있어도, 요즘은 “거점 본당”이라고 해서 청소년들이 모이는 본당, 청년들이 모이는 본당 등 특화된 본당들이 운영되기도 합니다. 마을의 인구분포가 여러 이유로 균형을 잃다 보니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각 동네 본당에 청소년들이 점점 줄어 갑니다. 그러다 보니 각 본당의 청소년 활동이 침체되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은 또래가 많아야 신나죠. 그래서 거점본당에 청소년들을 모아 미사와 다양한 활동이 일어납니다. 교적이 있는 본당이 서로 달라도 활동은 거점본당에 와서 하는 것입니다.
인구가 줄고 있고, 노령화되는 한국사회에서 본당들은 여러 가지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세대를 분리하여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다양한 연령대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이 필요할까요? 청소년들이 교회에 지속적으로 나오도록 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히려 집이 멀어도 우리 본당에 신자들이 불평 없이 오도록 하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각 본당에서 대답해야 할 것들입니다.
교적은 족쇄가 아닙니다. 어느 본당이든 맘 편한 곳에 다니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성당이 뜨문뜨문 있는 농촌지역은 선택지가 많지 않겠습니다만, 도시에서는 멀지 않은 곳에 본당이 여러 개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 가는 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환대받는다는 기분을 느끼도록 해 주는 본당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인이지 종교인은 아니라고요?
얼마 전에 ‘오키나와 평화기행’이라는 짧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안내인 포함 열한 명이 오키나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기지 반대운동 현장을 직접 보고 평화운동가들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전쟁(태평양전쟁의 끝 부분)의 참혹함을 가장 심하게 경험해야 했던 이들은 정작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희생자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는데,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 3분의 1이 죽음을 당했고 장대비처럼 내리는 포탄으로 인해 대부분 형체를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본 본토를 대신해 미국과 대리전을 치른 땅, 오키나와의 사람들은 군대가 민간인을 보호하는 집단이 아니라 죽이는 집단이라고 이해합니다. 당연히 조상과 자신들과 아이들의 땅에서 군대가 없어야 진정 평화가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귀국하기 전날 평화운동에 대해 그곳 운동가들과 만나 활동 설명 및 질의응답을 할 수 있는 간담회 형식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때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가톨릭 사제라고 소개했는데 우리 그룹의 여행 가이드 친구는 자기 차례가 오자, 자기는 종교인이 아니라고 말하더군요. 순간 제게는 ‘그 친구가 가톨릭 신자인데 왜 종교인이 아니라고 하지?’ 하는 질문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종교인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고 저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인은 특정 종교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사제, 목사, 수도자 등과 같이)을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도 종교인의 개념을 세속적으로 직업과 연결해야 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했던 것입니다. 인터넷 상의 계정을 만든다거나 이력을 요구하는 서류를 작성하다 보면 직업란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직업군 목록에 ‘종교인’ 부류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지만, 없을 때는 그냥 기타로 표시합니다. 그러니 저 역시 종교인을 일정 부분 직업으로 이해하도록 유도됐던 셈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종교인은 직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 즉 소명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를 물어 오신 분이 있습니다. 솔직히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특정 종교는 특정 신앙을 바탕에 두고 세워진 제도이니……. 둘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신앙이 좀 더 큰 거겠죠. 집보다 집이 들어서는 땅이 더 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가지고 있지만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은 사랑하는데 집에는 안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안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단 신앙인이라고 해두죠.
이에 정반대로 대비되는 사람들, 즉 교회에는 나가는데 신앙이 없는 사람, 집에는 열심히 들어오는데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결혼은 했으나 배우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엔 이런 사람들을 종교인이라고 해두지요.
제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들은 ‘종교인’보다는 ‘신앙인’이란 말을 선호하실 것입니다. 아무래도 전자가 규범적인 틀을 더 요구하는 인상을 준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의식해야 할 것은 전자나 후자나 균형을 잃고 위에 언급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인다면, 세속적인 삶, 곧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왠지 딱딱하니) 참된 신앙인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나가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는 현장에도 나가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과 끊임없이 함께하고 화해를 시도하는 사람, 자신과 이웃이 맺은 약속(하느님과 맺은 약속)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국 기도와 실천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는 수도자는 종교인일까요? 여러분이 한 번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