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전 혹은 식후 / 신용목
빠르게 앞서 걷다가 휙 돌아보았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뒤집히듯이,
빨갛게 익은 얼굴로
너는 말했다. 등 뒤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타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그림 속 창문을 하나하나 셀 수 있는 것처럼 네 목소리를 다 셀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어차피 세상은 망할 건데, 뭔가 고장 나고 오염되고 부딪혀서 망하는 게 아니라 아름답지 않아서 망할 건데,
나는 우리의 유쾌함과
기쁨과
사랑이 그것을 유예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어.
라고 말할 때,
나는
양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와 양 예순일곱 마리쯤에서 사라지는 불빛처럼,
네 목소리 속에서 사라질 것 같다.
머릿속이 끓고 있으면 무엇을 넣으면 좋을까? 그림 속 창문이 물감을 끓이고 있듯이
그리고,
미역국에서 멸치를 건져내며 머리에서 생각을 건져내는 방법을 생각했다.
생각은 오래된 거지만,
여전히 뜨겁다.
모든 비법이 불 속에 있다는 말은 꼭 사랑에 대한 비유 같다고, 뒤집히는 고기 옆에서 졸아드는 국물 같다고,
누군가 내 머릿속을 부드럽게 저으며
농담을 건넨다.
밤은 필요하다 /
조금씩 비에 젖는 창문을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비의 그림자를 본 일 있나, 어쩌면 센서 등이 켜졌다 꺼지는 저녁 현관에서
깜빡 잊은 우산을 생각하는 사이
다시 불이 들어오고
어쩌면 새벽 두 시의 창가에서,
빗방울 속에는
오늘의 문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밤이 미리 기입해놓은 별빛이 들어 있어서,
건너편 창문을 바라보며
비의 그림자란
저 불빛 속에 빗방울처럼 맺혀 있는 사람에 대한 이상한 연대감 같은 것일까.
그는 유리컵에 따라 물을 마신다.
유리창을 타고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일은 있고
탕비실에서 일회용 숟가락을 씻으며 생각했다,
일회용 식사에 대해.
어느 날 비닐하우스,
비닐을 툭 치면
후드득 물방울들이 떨어져 내렸다. 태양을 둘러친 것처럼 눈부신 천장이
또한 구름이 되어 뜨거운 비를 내리고 있었다.
날마다 삼겹살을 싸 우적우적 씹으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가 사라진 곳에서
자라나는 상추와 비 맞는 가축과
내 몸의 홍수를.
바닥에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쏟아져 나온 주름을 보며
이 비들을 다 어떻게 씻나,
일회용 식사 말고 다른 식사를 생각하고 싶었지만
병원에서는 쉽게 알게 된다.
일회용 식사 말고 다른 식사는 없다.
그리고 알게 된다.
투명한 잠과 차갑게 이불을 적시는 땀과 눈 뜨면 꿈으로 변해 있는 순간과
비닐하우스에 찾아오는 추위를.
그래서 안녕,
밤의 아름다운 주름이 다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안녕, 마음은 때로 물에 담가둔 고깃덩이 같아서
아무리 온도를 낮춰놓아도 조금씩 상해간다.
슬픔에 고용당한 사람들은 밤에 관한 수백 가지 말을 알고 있지만
그는 물을 뿐,
아직 지상에 도착하지 못한 별빛을 본 일 있나, 불을 끄고
모두가 그림자로 돌아간 순간에도
비는 멈추지 않는다.
우울과 경청 / 이민하
넌 귀가 제일 예쁘단다 내가 말을 걸면 배 속에서 똑똑 두드렸다니까 그 깜찍한 것을 종이배처럼 밀면서 물결을 가르듯 내 배를 가르고 세상에 온 거지
꽃을 아끼는 나비의 마음으로
알을 품는 조류의 심정으로
엄마는 내 귀를 보석함에 넣어두고 천사가 되어 날아갔다
천사 새끼인 나는 몰래 비누칠을 하고 고막까지 닦았다
귀를 핥는 애인이 있었다고 고백한다면 엄마는 총 맞은 새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질까
귀에는 흠뻑 사랑의 거품이 넘치고
물줄기를 맞으며 봄날을 떠내려 보내고
축 늘어진 지느러미를 베고 누워 잠만 자던 여름날
먹물 같은 흐느낌이 머리맡에서 철철 흘렀다
밖에는 붉은 비 내리고 아물 때까지 기다리는데
발음이 잘린 목소리가 절뚝거리며 귀를 두드렸다
당신도 아프고 그녀도 아픈데 왜 두 사람은 적이 되었나
또 다른 부상병이 찾아오고 귓속이 포화로 가득한 날
순간순간 눈을 비볐을 뿐인데 두 사람은 언제 전우가 되었나
졸면서도 끄덕끄덕 나는 종군기자도 아닌데
실타래처럼 부푸는 이야기 속에서
(어디서 끊어야 하나)
귀가 너무 얇아져서 각이 지게 접을 수 있는데
그러나 뾰족하게 날리면 내 가슴에 꽂히고
귀를 기울일수록 못 들은 말이 늘어나고
내가 잠든 새벽에 주방에서 소리가 나요
귀는 아무래도 치매에 걸린 것 같아요 등을 구부리고 혼자 앉아
무얼 되씹는지 켁켁거리고 무얼 까먹었는지 실실거리고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흘린 것들도 주워 먹어요
이봐요, 집이 어디예요? 누군가 물어봐주면 좋을 텐데
차력사처럼 귀에다 끈을 묶었어요 잠이라도 집에서 자라고
미래에 피가 고인 엄마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눈은 이미 감긴 채 팔을 잘라달라고만 웅얼거렸다
내 손에 피를 묻혔다면 지상에 머물렀을까
천사 새끼인 나는 듣지 않았다 날개를 자르면 벌받을 것 같아서
병원에 오면 교회 가는 기분이에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헌금을 하면서 구걸하니까
입을 열 때마다 죄가 샘솟으니까
입이 열 개라도 오진이라고 따질 순 없으니까
죽음 앞에서 손 붙잡고 할 수 있는 것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니까
선생님,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세요?
손을 자를 순 없으니까요
절필할 수는 없으니까요
밤에 거울을 들여다보면 귀가 보이지 않아요
그리다 만 자화상처럼
죽은 사람들은 죽어서도 할 말이 남아서
꿈속의 빈 의자를 찾아다니고
또 악몽 꾸었니? 엄마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천사 새끼인 나는 그녀의 아버지를 믿지 않았지만
엄마는 나보다 그와 더 친해서 밀담을 나누고
사탄 사탄 속삭이면 사탕 사탕 맴돌아서
귀에는 흠뻑 사랑의 거품이 넘치고
우리는 풀리지 않는 기억을 엮으면서 죽도록 속삭입니다 창밖에는
모르는 인생이 쌓여가고 모르는 인생의 귀퉁이가 조금씩 닳고
한 번도 펼쳐진 적 없는 책들이 꽂혀 있는 도서관처럼
오늘은 무너지듯 폭설이 오고
사람들은 외국어처럼 겉돌아서
나는 귓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끝없는 복도에는
베낄 수 없는 문장들이 달빛도 없이 흐르고
검은 총알 하나 어디에도 찍히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는 혼자서도 흘러가는데
(어디서 끊어야 하나)
어느 날 천사 새끼인 나는 내 귀에 대고 물었다
엄마의 날개를 자르면 벌받았을까
날개 잃은 엄마를 가졌다면 그래도 사랑했을까
귀를 기울일수록 빨갛게 달아오르고
귀와 귀 사이
무심한 행간이 물처럼 펼쳐진다면
우리의 인생보다 길 텐데
너의 귀는 아름답구나 귀뿌리에 대고 누가 속삭여준다면 붉은 꽃잎처럼 종이에 곱게 싸서 주고 싶은 밤입니다
그러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나의 귀일까
일요일의 낮잠 / 박상수
살짝 잠들었는데 눈 떠보니 깜깜하잖아
그래, 여긴 낮이 없는 곳이지 잠을 깨면 새벽이고 쥐가 나서 부은 다리를 주무르면 날이 밝아오던, 혼자 오래 울던 나의 방이지, 오랜만에 깨지도 않고 잠을 잤다면 그건 잠이 아니라 죽었다 살아난거…… 밥을 먹자 열무김치랑 멸치조림, 갓 지은 밥 위엔 스팸을 구워 올려서 나도 혼자서 밥을 먹어보자
첫날부터 회사 인간들이랑 밥을 먹어야 했지 순댓국 설렁탕 알탕, 다대기를 풀어 먹으면 미웠던 사람도 땀을 흘리면서 용서하게 된다고, 팀장을 따라 지하 아케이드를 무한 순례했어 점심부터 저녁 회식까지, 집에 오면 여러 식당 냄새가 같이 나서, 입은 옷을 가위로 잘라 팀장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있었지 소금이랑 다대기를 잔뜩 뿌려서
밥이라도 따로 먹으면 안 될까요?
나도 모르게 지껄인 날, 이 분위기 뭐야, 그날부터 부자가 됐어 사무실에서 가장 일이 많은 일 부자, 휴일에도 사무실에 나와 컴퓨터를 켰지 일하다 졸리면 의자에서 자고 자다가 일어나면 위장약을 먹고 두통약을 먹고…… 사람들은 알까? 아무리 자판을 두드려도 미션 리스트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미운 인간들의 이름을 쓰고 엑스표를 치며 지우다 마침내 내 이름 위에서 멈추게 된다는 것을, 어디서 열차가 달려왔다가 나를 치고 가버리는데, 관절 꺾인 개구리 인형 탈처럼 들판에 내팽개쳐지는 거지 지퍼가 없어서 벗을 수 없고, 잡을 데도 없어서, 열이 오르도록 개구리 우는 소리를 흉내 내며 내 이름에 엑스표를 덧칠하기 시작하는 거지 종이가 뚫어지도록
그게 제일 쉬우니까 이게 가장 편하니까
여기서 밀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무효가 되는 거지, 이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야, 멋진 책을 읽으면 거기, 삶이 아주 풍성하고 아름답게 그려지지만 구체적인 일상용품들은 보이지 않지,⁕ 나는 일상용품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고개를 저으며 새벽밥을 차리고 있구나 냉장고를 열고 반찬 통을 꺼내고 밥을 푸고 스팸 뚜껑을 따고 팬에 기름을 두르며 나는 알아버렸어
무서운 일이 벌어졌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야.
⁕레이첼 커스크, 『브래드 쇼 가족 변주』
무호흡 /
언제나 조금 부족한 공기, 호흡이 머문 곳마다 습기가 퍼지고 모래가 떨어지고, 누가 산호 조각들을 모으고 있구나 기억하는 기장 작은 등으로, 가장 작은 무릎으로, 벽과 풍경이 뒤섞이고 있어 햇빛이 쏟아지는 창문, 불탄 기름의 가죽 냄새가 쏟아지고 있어 얼굴을 파묻은 채로 나는 생각해 한 사람이 제외되어도 돌아가는 세상을, 그 사람을 제외시키면서 고요해지는 세상을, 언제나 조금 부족한 공기, 어디서 버스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고 사거리의 신호들이 바뀌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알고 있지 내가 맡은 책상 위에는 찢어진 파일과 함부로 던져진 저주들이 가득하겠지만 숨이 막힐 때마다 몸이 부풀어서 단추가 터지고, 펼쳐진 열 손가락, 그게 점점 길어져서 녹슨 혈관이 여길 덮어버리는 풍경을, 내가 있는 자리만 철조망이 둘러져서 녹색 피가 번져가고 그래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세상을, 아이야, 나는 네가 웃기를 바라지만 네가 찾는 산호 조각은 여기 없을 거야 가장 작은 등과 무릎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갈 수 없겠지 아니 흔들려도 조금만 숨 쉴 수 있다면 갈 수 있겠지 철제 의자에 묶여서 진공 속으로, 언제나 조금 부족한 공기, 언제나 조금 부족한, 살아 있다는 기분.
첫댓글 아스트라이아님 감사합니다. 좋은 시 올려주셔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