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마음
이 진 숙
“진숙 씨, 나 다음 달에 이사 가요.” “네?” 연옥 언니가 이사 간다는 말에 먹던 밥이 목에 걸렸다. 전화기를 든 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코인을 정리하는 중이라며 휴대폰으로 인증번호 갈 테니 알려달라 한다.
몇 해 전 내게 코인을 사두면 좋을 거라면서 권한 적이 있다. 설명과 함께 관련 영상도 보내주었다. 언니의 적극적인 권유에도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내가 안타까운지 몇 달 뒤 내 이름으로 조금 샀다며 비밀번호와 함께 선물로 보내주었다. 언니가 아우에게 선물하는 것이니 받아달라 한다. 어쩔 수 없이 받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끔 현 시세도 알려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냥 흘려들었다.
언니를 알게 된 건 십오 년 전 통기타를 배우면서였다. 어느 날 솔이 언니와 연옥 언니 세 명이 함께 팀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다. 메인 보컬은 노래를 잘 부르는 솔이 언니, 피아노를 전공한 연옥 언니는 키보드를 담당하기로 했다. 나는 기타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어서 뭘 담당하냐고 물었다. 언니들은 “진숙 씨는 우리 팀의 비주얼 담당이야.”라고 한다. 그 말에 우린 한바탕 웃었다. 연옥 언니는 목 수술을 한 적이 있어 솔이 언니와 내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기로 했다. 의상 코디와 소품 담당도 내가 맡기로 했다.
어느 가을날, 솔이 언니가 노래 경연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응원 도구로 피켓을 만들었다.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있는 한적한 국도를 달려 대회장에 도착했다. 참가자들은 무대 뒤에서 각자 이어폰을 낀 채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솔이 언니는 연습도 하지 않고 여유를 부린다. 드디어 무대에 올랐다.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가 가을 들판을 곱게 물들인다. 연옥 언니와 난 피켓을 들고 목청 높여 응원했다. 결과는 ‘대상’이었다. 우린 뛸 듯이 기뻐 서로 부둥켜안으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몇 달 후 솔이 언니 조카 결혼식이 있었다. 그 결혼식 축가를 우리 팀이 불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우린 매일 연옥 언니 집에 모여 연습했다. 요리 솜씨가 뛰어난 연옥 언니는 아우들을 위해 늘 맛있는 점심을 차려주었다. 음악을 전공한 언니네 악기 방에는 다양한 악기가 있어 이것저것 연주해 보는 그 시간이 참 즐거웠다.
드디어 우리의 첫 공연 날이다. 결혼식장이 있는 경주에 도착했다. 축가를 부르자 식장 분위기는 기대 이상이다. 환호성과 함께 앙코르가 쏟아진다. 먼 길 와줘서 고맙다며 출연료도 두둑하게 주셨다. 하지만 차 기름값 정도만 받고 돌려드렸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경주 보문단지에서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관계자를 찾아가 우리 팀도 공연할 수 있도록 해달라 하여 허락을 받고 무대에 올랐다.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뜨거웠다. 우린 그날 늦은 시간까지 함께하며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다.
언니들은 내가 직접 만든 의상과 나비넥타이가 큰 역할을 했다며 팀 이름을 ‘나비 소리’로 정하자 한다. 이름이 너무 촌스럽지 않냐고 하니, 그날 의상을 갖춰 입고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을 불러왔다며 모든 공을 팀의 막내인 내게 돌렸다. 우린 그렇게 매일 만나 늘 웃음꽃을 피웠다. 언제나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그토록 행복했던 그 시간은 이제 옛 추억이 되었다. 연옥 언니는 우리 팀에서 제일 큰언니로 별명이 천사이다. 언니는 아우들에게 언제나 든든한 산과 같은 존재이다.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언니, 그런 언니가 우리 곁을 떠난다니 한순간에 모든 걸 다 잃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멀리 떠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영영 이별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아려온다. 그건 아마도 언니가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지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자식들도 그 게 염려되어 큰 병원이 가까운 곳으로 모시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린 기타로 맺은 인연답게 어디서든 기타 하나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가끔 버스킹을 하기도 하였다. 여름엔 바닷가에서, 가을엔 어느 멋진 벤치에 앉아 낭만을 즐기기도 하였다. 또 정기적으로 노인복지시설에 음악 봉사를 다니기도 했다. 그곳에 어르신들은 우리가 갈 때면 언제나 하시는 말씀. “아이구! 오늘 십 년은 젊어졌데이.” 하시며 두 손을 꼭 잡으신다. 그런 어르신들에게서 어머니의 향기를 느끼곤 했다. 그러다 솔이 언니가 바빠지면서 몇 해 전부터 더 이상 팀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가끔 기타를 메고 가까운 곳에 여행을 가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마저 코로나가 오면서 못 하게 되었다. 이제 코로나도 풀려 자주 만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느닷없는 이사 소식에 마음속 비가 내린다.
띵동! 입금 문자가 왔다. 코인을 정리하면서 원금만 보낸 거라 한다. 난 받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언니는 오히려 좋은 아우를 만난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재산이고, 행복이라 한다. 언니가 주는 선물이니 그냥 받아 달라 한다. 감동과 서운함이 함께 밀려와 어느새 안개비가 시야를 흐린다. 난 언니한테 별로 해드린 게 없어 마음이 저려온다. 언니는 언제나 늘 베풀기만 하는 천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 훌륭한 성품에 절로 고개가 숙어지곤 한다.
얼마 후 언니와 단둘이 만나기로 했다. 난 언니가 준 그 돈을 손때 묻지 않은 빳빳한 신권으로 찾아 손편지와 함께 정성스레 포장했다. 언니가 화장실에 간 사이 언니 가방에 봉투를 살짝 넣어두었다. 언니는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화장실 간 사이 그 봉투를 내 가방에 다시 넣어둔 것이다. 언니는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 준 것이라지만, 그 돈을 그냥 받을 수 없어 언니의 마음만 받겠다며 결국 돌려드렸다.
언니가 이사 가기 며칠 전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한적한 커피숍에 앉아 기타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그때 그 추억들을 되새긴다. 팀원들은 아쉬운 마음을 담아 작별의 노래를 부른다. 언니와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언니가 부디 건강을 되찾아 예전처럼 천사의 날개를 펼치며 우리들의 우정도 영원히 빛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기철 시인의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란 시를 읊조려 본다.
……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