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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테나 굴렁쇠나/박철영
도롱 테를 걸어주는 걸쇠를 만들 굵은 철사가 필요했다. 굴렁쇠를 우리 동네에서는 도롱 테라고 말했는데, 굴리고 놀려면 꼭 걸쇠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 당시 굵은 철사를 어디서 구했는지 생각해봐도 신기하다. 시골에서 굵은 철사는 귀했다. 그 시절은 고무로 만든 바께스를 집마다 한두 개씩은 갖고 있었다. 그것으로 물을 긷는다거나 쇠죽을 퍼다 주는 운송수단이었다. 그 고무 바께스 윗부분에 금속으로 된 테를 둘러 쪼그라들지 않도록 바로잡아 주었다. 운 좋게 시궁창에 버려진 고무 바께스의 동그란 금속 테가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장난감이 되어 주었다. 이제 도롱 테를 걸어 굴리고 놀 수 있는 굵은 철사만 있으면 되었다. 어떻게든 궁리를 하면 다 이루어진다. 어린아이에게 도롱 테는 장난감이 없는 시골에서 놀이로는 딱 그만이었다. 어머니가 늦은 저녁 동네 심부름을 시켜도 좋았고 어디든지 나설 땐 꼭 챙기는 소중한 놀이기구였다. 요즘의 게임기 이상으로 보면 된다. 내 손에 쥐어진 도롱 테는 구르지 못한 곳이 없었다. 동로골 골목은 누워서 떡 먹기였고 아랫물 방앗간 뒤 논길을 따라 희순이네 집 심부름도 거뜬했다. 논길은 겨우 사람 정도 지나가는 길이었고 중간쯤에는 물꼬가 나 있었다. 그 널따란 물꼬에서 물이 아래 논으로 흘러가는데도 굴렁쇠는 그곳을 거뜬히 굴러갔다. 난이도가 있는 그런 곳을 굴렁쇠가 단숨에 건너갈 땐 굴렁쇠에 대한 애착이 더해졌다. 도롱 테를 굴릴 때 방향을 잡아주는 걸쇠에 손에 힘이 들어갈 땐 어김없이 길을 벗어나 저만치서 팩 꼬꾸라져 버렸다. 눈이 없는 도롱 테도 제 갈 길을 보고 가는 것이다. 세상살이란 것이 무리하게 몰아 붙이다 보면 그렇게 순간 뒤집히는 것이다. 도롱 테를 굴릴 때는 가볍게 걸쇠를 들이대며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신나게 동네를 뛰어다니다 보면 몸이 땀에 흠뻑 젖었고 평소에 싫어하던 심부름 가는 길이 오히려 좋았다. 나와 도롱 테가 굴러가며 내는 금속성의 소리가 길에 어우러진 방앗간 뒤 논길은 어린 시절의 긴 추억이 되었다.
굴렁쇠를 굴리며 심부름을 갔다 온 뒤 며칠 후면 희순이네 아버지가 우리 집에 일을 오셨다. 희순이 아버지는 택호도 계산 양반이다. 그래서인지 공학적인 일을 잘하였다. 동네에서 집을 지을 때는 몇 명의 목수 중 주로 총책을 맡아 거뜬히 일을 해냈다. 그때 우리 집 일은 집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큰방과 가운데 방에 장판을 까는 일이었고 단순한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장판이란 것이 요즘 같은 장판이 아니었다. 모양새가 합판은 아니지만, 두터웠고 좀 딱딱하게 생긴 것이었고 힘을 잘못 주면 부러져 결국은 못쓰게까지 될 수 있었다. 장판을 깔 때는 두 장을 맞대 가운데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쫄대기에 파인 홈에다 끼워 맞춰야 했다. 방에다 딱딱한 장판을 보통 두 장을 덧대야 했다. 그러기 위해 쫄대기 홈에 장판의 끝 선단을 끼우는 것이 여간 어려워 요령이 필요했다. 그런 일을 주로 희순이 아버지는 쉽게 해냈다. 장판이 깔리고 나면 어머니는 부산하게 물걸레질을 해낸 뒤 저녁상을 들였다. 저녁밥을 먹고도 아버지와 계산양반은 한참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어린 귀에도 졸리지만, 그냥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좋았다. 귀가 솔깃해져 듣다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는 쪼금 알아들었다. 그러는 사이 따라온 희순이는 방 한쪽에서 곪아 떨어졌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희순이를 업은 채 희순이 아버지는 아랫물 집으로 내려가셨다. 어머니는 그때서야 방을 다시 깨끗이 닦고 생콩으로 낸 기름을 장판에다 두세 번을 칠했다. 그렇게 하고나면 장판에 기름기가 먹어 잘 부스러지지 않았고 반들거렸다. 비릿한 생 콩기름 냄새는 나의 코를 불편하게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후에도 희순이 아버지를 동네에 집을 짓는 곳에서 몇 번을 더 뵌 기억이 있다. 춘선이네 집을 새로 지을 때였다. 소나무에다 신중하게 먹물을 퉁겨가며 각을 잡고 모서리를 따내 척척 아귀를 맞추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그분의 손으로 지어진 집이 동네에 많았다. 상태네 집도 공사를 크게 했다. 본래 상태네 집은 본채가 아주 작았다. 새로 지은 상태네 집이 우리 집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모양새도 처마 끝이 수려해 그만하면 수작이라 할 만했다. 당연히 동로골에서 아랫물로 이사가면서 집을 희순이 아버지가 손수 지었을 것이다. 계산양반은 평소에도 귀에다 연필을 걸치고 다니곤 했다. 말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귀에 연필을 꺼내 걸었다. 묘하게 계산 양반이라는 택호 이미지와 실제로 하는 일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목수 일의 재능도 상당해 동네에서는 상목수로 인정받은 전통 한옥을 짓는 장인匠人인 셈이다.
시골에서 백여 호가 사는 동네라면 작은 동네가 아니다. 한 집에 삼 대가 사는 집이 많았다. 당시는 자녀도 많게는 일곱 이상도 흔했다. 요즘처럼 한두 자녀가 있는 집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는 없었다. 어림잡아도 우리 동네가 오백 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당연히 처녀 총각이 많다 보니 새벽부터 중신아비가 동네를 부리나케 드나들었다. 나중에 우리 집에도 누나 둘이 중신아비가 큰 역할을 했다. 처녀나 총각의 인생 팔자는 중신아비가 어떤 배우자와 연결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때는 으레 자유연애란 것 자체가 흠이 되는 풍토여서 그런 일이 있으면 동네 부끄럽다며 야단을 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식도 해마다 있었고 봄 가을 이후 어른이나 아이들에게는 그처럼 좋은 구경거리가 없었다. 누구 집에서 시집이나 장가를 가는 날이면 동네는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그때는 결혼을 예식장에서 하는 것이 보편화하지 않았고 집에서 거의 혼례를 치렀다. 집 마당에다 초례청을 꾸며 사모관대를 쓰고 치른 것이 일상이었다. 요즘엔 전통이란 말을 붙여 전통 혼례라고 따로 구분 짓지만, 그 당시는 당연하였다. 신부는 동네 앞 신작로까지 차로 들어왔고 골목을 들어올 때는 가마를 타고 시집으로 들어섰다. 그러면 집집마다 어른이나 아이나 골목에서 지켰다가 꽃가마를 구경했다. 지켜보면 운 좋게 가마 안 신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연지곤지를 찍은 얼굴에 다소곳한 신부는 예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시집온 신부는 마당에서 혼례를 치르는데 첫날부터 신부는 집안 어른에게 큰절을 올리느라 앉을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저녁까지 통과해야 할 순서는 끝이 없었다. 장난기 가득한 동네 신랑 친구나 선배들이 단단히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신부를 울리거나 웃게도 할 수 있는 꾼들이 신랑을 가만두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 놀이는 이어지고 있지만, 그 시절에다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결혼식이란 행사가 동네잔치다 보니 신랑집의 방은 당연하고 마당에도 밀려오는 손님들로 빈 곳이 없었다. 상차림이 하도 많아 혼례를 치르는 집에서 손님을 다 맞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옆집을 빌려 잔치를 치러야 했다. 우리 집 뒤 상태네 단순 고모가 시집갈 때도 그랬다. 상태네 집에서 도저히 손님을 감당할 수가 없어 우리 집에다 잔칫상을 올렸다. 우리 집이 동네에서 크고 넓었다. 마루는 물론이고 넓은 마당에도 가득했다. 그렇게 몰린 손님 중 동네 분도 많았지만, 상태네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 더 하객이 많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양복 입고 구두에다 넥타이까지 맨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동네에서 잔치하면 어른들도 그렇지만 어린아이들도 우선 평소에 먹기 어려운 음식 맛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 당시 결혼 때는 빠지지 않는 것이 요즘 말하는 잔치 국수 한 그릇이면 왔다였다. 지금도 동네 어머니들이 음식을 차려주느라 눈코 뜰 새 없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더욱이 상태네 단순 고모는 우릴 예뻐했었는데 서운한 기분도 들었다. 그렇지만 그것보단 상태네 집이라서 좋았다. 맛있는 것을 더 얻어먹을 수 있었기에 말이다. 밤늦도록 상태네 집 주변을 기웃거렸다. 중간중간 신랑을 다루는 소리에 웃음소리가 마당까지 번져 나왔다. 그러다 기어이 신랑이 몽둥이로 맞는 소리가 들리고 어쩔 수 없이 단순이 고모의 노래가 수줍게 문지방을 넘는듯했다. 단순 고모는 도통리 못 미쳐 천사동이란 곳으로 시집을 갔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면서 천사동 들어가는 길을 지나칠 때마다 상태네 단순이 고모를 떠올리곤 했다. 물론 거기서 쭉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서울로 이사를 했다고 들었다. 아마 상태네 단순이 고모가 오랫동안 기억 속에 있는 이유가 있었다. 상태네 집엘 놀러 가면 우릴 예뻐해 주었다. 메주를 끓이는 날이면 춥다고 방으로 밀어 넣은 뒤 잘 삶아진 메주콩을 사발에다 챙겨주었다. 우린 따신 방에서 맛있게 먹고 놀았다. 시집 가기 전까지 우리 집 앞을 지나가다 만나면 항상 웃어주었다. 한 번은 예쁜 투피스 차림으로 멋을 내고 골목을 내려오고 있었다. 마침 내가 집에서 딴 감을 손에 들고 있을 때였다. 그 감이 무척 먹고 싶었나 보다. 걸음을 멈추며 허락을 구한 뒤 감을 한입 맛있게 베어 물고는 골목을 내려갔다. 걸어 내려오는 그때 모습이 참 갸름하고 예뻤었다. 당시 우리 동네에 감나무가 세 집 정도 밖에 없었고 감이 그만큼 귀했다. 거기다 우리 집 감나무는 가을 서리만 맞아도 무척 달았다. 우리 아버지 감을 따서 읍내 장에 나가면 감탄을 한다고 했다. 나중 커서 보니 더 맛있게 생긴 감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하여간 떫은맛이 없고 달짝해 생 감을 먹어도 그만이었다. 가을이면 쇠죽 솥이 걸린 뒤안에는 감이 빨갛게 주렁주렁 달렸다. 까치는 홍시가 된 감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마음대로 골라 먹었지만, 나이 어린 나는 그렇질 못했다. 형들이 간짓대로 따 줘야 맛을 볼 수 있었다. 간덩이가 작은 나는 감나무를 올라갈 수 없었다. 조금씩 힘이 생기고 커가면서 나름 꾀가 났다. 돌멩이를 받침돌로 딛고 작은 간짓대로 감을 딸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맨발로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내렸다. 감나무가 하도 커서 하루에 다 따기는 어려웠다. 감을 따러 내가 쉽게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세월이 흘렀을 때는 감나무는 고목이 되어갔다. 간혹 상해버린 가지가 버거웠는지 스스로 우지끈거리며 부러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간덩이가 졸아들었고 땅을 내려다보면 아찔했다. 감나무 아래에는 나보다 더 작아진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날 쳐다보고 있었다. 떨어지는 감이 일부 깨지거나 박살이 났다. 여름 태풍을 견뎌온 탐스러운 감이 그럴 땐 왠지 감에게 미안했다. 이제는 감나무에 올라간다면 잘 따 내릴 수 있을 텐데 추억 속의 아쉬움일 뿐이다. 집이 팔려 주인이 바뀐 뒤안의 감나무는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 고향 집에는 두 그루의 감나무가 그대로 자라고 있다. 추억 속 감나무는 해마다 우리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았다. 어김없이 봄이 되면 감꽃이 피웠고 여름이면 태풍에 찢어진 가지에 매달린 땡감을 모아 물에 우렸다 먹기도 했다. 땡감을 먹다 옷에 감물이 들어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감물은 빨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감잎에도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때맞춰 산과 들에 무서리가 내릴 때면 꼭지부터 감도 빨갛게 익기 시작했다. 그때는 하루가 다르게 모양이 달라졌다. 소싯적 아이는 감나무 아래를 서성이며 간혹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감이 떨어지는가를.
갈치에서 흘러 내려온 물길이 모테 논을 지나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 물줄기는 장승배기 들판을 적시는 물길이 되었다. 또 한 줄기는 아랫물 앞을 지나 정기 섬들 논을 적시고 다시 요천수로 흘러들어 합수가 되었다. 아랫물 앞을 지나는 물길을 마을에서는 도랑이라고 했었다. 도랑을 건널 때는 징검다리를 이용했다. 그 징검다리 바로 건너편에 오쟁이 형님네가 살았다. 그 옆으로 병준이 선배네가 살았고 그 옆집에는 광모 선배네가 살았다. 세집이 도랑을 뒤로하고 나란히 담을 맞대고 있었다. 우리는 풀을 베러 간다거나 요천수로 멱을 갈 때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뛰어 도랑을 건넜다. 어린아이 다리로는 징검다리의 간격이 넓었기 때문이다. 말이 도랑이지 그래도 제법 넓어 큰물이 날 때는 주변 집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지금은 죄다 헐려 일부는 동네 안으로 이사를 들어왔고 일부는 아예 타지로 떠나갔다.
다들 연줄로 들어와 살았다는 것을 나이 들어 알았다. 오쟁이 양반네도 알고 보니 영곤이 친구네 작은 아버지였다. 그렇게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들 동네에 들어와 살다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갔다. 사람은 떠났지만, 사람이 살았던 곳은 헐려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도랑 건너에 있던 물레방아가 그랬다. 동네에 그 당시로 최신 설비를 갖춘 방앗간이 신작로에서 가까운 아랫물에 들어섰다. 그러다 보니 경쟁에서 밀린 물레방앗간은 헛 방아를 돌렸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이학년 전후까지는 간혹 물레방아를 돌렸다. 방앗간 집 아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강 짝귀라는 아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아이는 말수도 적었고 어렵게 말을 할 때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것 때문 별명이 그리 붙었고 귀 생김새도 그런갑다고 여겼다. 언젠가 그 집이 시내로 훌쩍 떠나갔고 짝귀라는 아이를 다시 본 기억이 없다. 그 친구와는 별로 어울리질 못했고 물레방아가 물을 담아 돌아가는 것이 더 신기했다. 물레방아가 돌면서 물이 비워지면 채워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마다 방앗간 집 아저씨는 느려터진 물레방아에 속깨나 탔을 것이다. 쌀 방아든 보리 방아든 사람이 붙어 있어야 되었다. 누가 온종일 물레방앗간에 붙들려 쌀 방아를 찧겠는가. 당연히 새로 생긴 최신식 편리한 방앗간으로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신식 방앗간이 들어선 이후 도랑 너머는 더 조용해졌다. 사각형의 징검다리도 간혹 거친 물살에 어긋지 거나 휩쓸려가도 금방 복구도 잘 안 되었다. 당연했다. 이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징검다리가 되어버렸다. 물론 시간이 지나 누군가의 수고로 제자리에 다시 놓이긴 했었다. 도랑에 큰물이 잠잠해지면 물도 맑아졌고 동네 엄마들은 밀린 빨래를 하느라 바빴다. 본 동네 쪽으로 빨래터가 있었고 밤이면 그곳에서 엄마들은 더위를 식히느라 물놀이를 했었다. 간혹 동네 누나들도 남자들의 눈을 피해 물놀이를 하였다. 그런 밤이면 누나들의 은근한 말소리에 도랑이 환해졌다. 물론 나는 작은 누나를 따라가 한참 아래쪽에서 물놀이하다 오곤 했다. 그런 여름날엔 마을 앞 도랑이 한동안 들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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