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란 어떤 나이일까?
아직 30대 중반인 내가 생각할때 50이란 나이는 그다지 상상할만한 것이 없다.
다만, 주위의 50이 되신 어느 분을 통하여 잠시 그 나이의 무게를 짐작해 본다.
우리 집 옆에 있는 정비 공장에 점심을 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
그 분은 자신을 5학년이라 칭한다.
즉 연세가 딱 50이 되셨다는 얘기다.
여자 나이 오십이라...
신세대도 그렇게 구세대도 아닌 연세에 그분은 맏며느리로 시집을 가서
83되신 시어머님을 모시고 만만치 않은 시집살이를 견디며 살고 계시다.
힘들어도 내색 안하고 가볍게 웃으며 표현하실 줄 아시는 분이다.
맡은 임무만 한다면 점심에 밥을 해 주고 가시면 되는 일인데 그 분은
그러지 않고 일하는 총각들의 옷을 다 세탁해서 말려 개고 수건도 다 빨아
널고 심지어는 더러워진 운동화조차 빨아 주실 때도 있다.
옆에서 보는 나는 그런다.
"아 자기들이 알아서 하게 놔두면 다 잘 할텐데 뭣하러 다 해 줘요."
'첨부터 버릇 잘 못 들이면 골치 아파요. 아줌마 일이 점점 많아지잖아요"
내 말에 아줌마는 빙그레 웃으시며
"다 내 자식같고 새끼같으니께 해 주는 것이지."
"이거 봐 내가 안 걷으니께 지 운동화 밑창 빤 것도 사흘이 넘게 안걷잖여."
"그럼 총각들이 엄마라고 해야 되겠네요."
"그렇잖아도 엄마라고 불러."
일하는 총각 혹은 나이든 유부남이 자기 자식같아 예뻐보이고
또 스스로 마음이 우러나와서 옷가지를 빨아 주고 싶은 나이!
한번은 남편이 돈을 몰래 쓰려고 비상금을 넣어 둔 것을 발견했단다.
보너스가 현금으로 나올때면 으례 주지 않고 용돈으로 쓴다는 것이다.
허튼데 쓰지 않고 때로 딸아이에게 선뜻 내 주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하는지라 알면서도 시치미 뚝 떼는 남편말을 고이 믿어 주었단다.
바가지를 박박 긁지 않고 몰래 빼 내어 쓰지 않고 슬며시 미소 지으며
제자리에 흐트러지지 않게 비상금을 인정하며 넣어 줄 줄 아는 나이.
그래 나이 오십은 정말 그런 아름다운 나이인가 보다.
내가 종업원을 데리고 있을당시 난 그 애를 동생같이 여겼었다.
의무적으로 부양해야 할 가족으로 여겼었다.
그 애는 깔끔하여 언제나 자기 빨래를 매일 빨고 우리 가족 빨래도 통에
담겨 있을땐 그 애가 해 주었었다.
난 가끔 세탁 된 그 애의 옷을 널어주고 빨래도 빨아 주기도 했지만,
우린 서로 일방적인 것이 아닌 상호 보완적이었다.
자기 옷을 빨지 않고 며칠씩 그냥 입는 총각들이 있을때 난 혼자 빨아주는 대신
빨래를 가져오게 해서 하라고 명령했었다. 그 애들 역시 둘이서 빨래를 잘 했었다.
일이 있을때 가족 혹은 타인간에도 분담시키고 나누어 하는 스타일인
내가 볼때 옆 집의 아줌마의 빨래를 도맡아 해 주시는 모습은
분명 희생이다. 거룩한 모성 본능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희생!
그런 모습은 나같은 30대엔 결코 간직할 수 없는 덕목인 것처럼 보인다.
남의 자식도 내 자식같이 사랑하고 도와주고 아껴주는 모습!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50대라는 나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와 보였다.
누가 나이 드는 것이 서럽다 했던가?
우린 나이만 드는 것이 아니었다.
세월! 쌓인 세월의 무게많큼 우린 연륜과 경험 그리고 아름다운 덕을
하나 하나 쌓아가고 있었다.
우리 더이상 나이든다는 것에 대하여 서러워 말자.
세상 모든 것은 공평하여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는 법
인생의 경험은 그 유익한 배움은 세월이 쌓이고 삶을 몸소 느껴야만
얻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게 아름답게 50대를 향하여 나아가고 싶다.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남의 자식도 내 자식만 같아 뭐든지 해 주고픈
아름다운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는 그런 향그러운 내음이
솔솔 풍기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싶다.
청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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