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上院寺)
2024. 10. 23.
천고의 지혜 깨어있는 마음의 가람 상원사
한암스님의 수행오법(修行五法)으로 정진(精進)하는 문수보살 화현(化現)의 지혜도량으로 1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불교성지다. 신라 성덕왕 4년(705년)에 신라의 보천과 효명태자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이 었다. 이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오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와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왕자와 함께 천명을 거느리고 여의(如意) 원년(元年)애 함깨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두 형제는 중대 남쪽 봉우리 끝에 푸른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함께 수행 하면서 매일 오대에 나아가 예배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702년 효소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어나자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끝까지 고사함에 효명왕자가 귀경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상덕왕(聖德王)이다. 효명은 오대산에서 수도하던중에 문수보살이 여러모습으로 몸을 나타나 이던곳에 진여원을 세우니 이곳이 지금의 상원사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거세어진 척불(斥佛)정책은 승려의 도성(都城) 출입을 금지하고 11조이던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였으나. 태종은 상원사 중대사자암을 중건(重建)하고 자신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ㅏ기 위해 많은 불사(佛事)를 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ㅅ치하여 불경(佛經)의 간행(刊行)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두 번이나 이적(異蹟)을 체험하였다. 지병(持病)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동자를 친견(親見)하고 병이 나았으며, 참배(參拜)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지금도 상원사 모든 불자(佛子)의 귀의처(歸依處)로서 오대광명이 가득한 가람으로 누구나 고요한 마음 고요한 생각 고요한 몸가짐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聖)스러운 천고의 지혜와 깨어있는 마음의 청량한 가람이다.
문수동자
조선 단종을 폐위한 세조가 즉우아한지 10년째 되던 해인 1464년 등창(부스럼병)을 얻게되자 신미대사의 권유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오대산에 향차하게 되었다. 상원사에 도착한 다음 날 계곡물(오대천)에 몸을 담그던 중 지나던 동자에게 등을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자가 등을 밀어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자 기뻐하며 임긍의 몸을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동자가 미소를 지으며 대왕도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말라며 홀연히 사라졌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동자는 사라지고 어느새 자신의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문수보살의 도움으로 등창 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기뻐하여 궁에 돌아와 화공을 불러 만났던 동자으 모습을 그리게 하였으나 제대로 그리는 화공들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 보겠다고 하여 새조가 그 모습을 설명하자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서 그려 보겠다고 하여 설명도 듣지 않고 그려온 동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아 세조는 놀라 스님이 오신곳을 묻자 노스님은 영산회상에서 왔다고 하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 즉, 세조는 동자와 노스님으로 화현하여 나타난 문수보살님을 두 번이나 친견한 것이다. 이 후 의숙공주와 효녕대군의 발원으로 세조의 수복(壽福)을 빌기 위해 문수동자상이 조상되어 1466년 상원사에 모셔졌다. 이렇듯 문수보상 감응설화는 조선시대까지 전수된 문수정토의 신앙과 문수화현사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鐘)
범종은 벌에서 시각을 알리거나 의식을 치를 때 사용한다. 종소리가 장엄하여 종교적인 분위기를 한껏 높이며, 종소리를 듣는 자가 자신이 저지른 악한 행위를 깊이 뉘우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이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친다는 뜻도 있다. 상원사 동동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한국의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따. 본디 어느 사찰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동 지역의 역사 문화 등을 기록한 읍지인 “영가지“에 따르면 안동에 있던 종을 조선 예종 원년(1469_에 왕명에 따라 상원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종의 꼭대기에 용 모양으로 장식된 부분은 용뉴라고 하며 이곳에 쇠줄을 연결하여 종을 매단다. 용뉴 옆에는 연꽃과 덩굴무늬로 장식한 몸통이 있다. 몸통은 일종의 음향 조절 장치로 추정하며,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구조물이다. 종의 몸통 위아래에는 구슬 장식 테두리가 있는 넓은 띠를 둘렸고 띠에 있는 덩굴무늬 안쪽 곳곳에는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하늘에 살며 부처를 예찬하는 존재)들의 모습을 새겼다.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에는 구슬과 연꽃무늬를 장식했으며, 당좌 좌우에는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을 대칭으로 새겨 놓았다. 경쾌한 모습의 비천상은 8세기 전반의 불교 조각 양식을 잘 보여 준다. 몸통의 위아래가 안으로 좁아지는 항아리 같은 형태를 비롯해 한 마리의 용으로 장식한 용뉴와 음통을 갖추고 있는 등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보여준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에 만들어지는 범종들의 밑바탕이 되었다. 2008년 지금의 자리에 새로운 종각(종을 달아 두는 건물)을 지은 뒤 유리 안에 종을 두었으며 옆에는 본떠 만등 종을 걸어 두었다.
봉황보당(鳳凰寶幢)
보당(寶幢)은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거니 의례용으로 거는 깃발을 경내로 들어오는 불자들에게 장엄한 화염세계를 보여주는 상징걱인 성모물입니다. 당간(幢竿)에 보당을 달아 걸며 당간을 지탱하는 기둥을 지주(支柱)라 합니다. 왜 만드는지? 상원사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주 1가 남아 있는데 세조가 이곳을 참배하였을 때 왕의 상징인 어룡기(御龍旗)를 걸어두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많은 불교 문화유산 가운데 당간지주는 다수 남아 있으나 완전한 보당은 단 1점만이 있으며. 용두(龍頭)는 2점만이 나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장엄불사의 전통미와 사상을 재해석하여 봉황으로 보당을 조성하는 인연을 모으게 되었다.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모든 존재가 함께 살아가는 화엄세계를 이루고, 지주에 용교ㅏ 호랑이를 조각하여 화엄성중님의 항마력(降魔力)으로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기원하였으며, 지주 기단에 거북으로 당간을 세워 공덕을 지은 불자들의 가정에 오대광명이 충만하길 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