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ㅡㅡㅡㅡㅡ 2024.1.6 오늘 킨텍스에서 열린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유투브 중계로 보았습니다.
참석자들의 규모나 면면을 보아도 김대중 대통령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인사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는 연설을 하였으나, 더욱 인상적인 것은 외국으로부터의 축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하여 김대중 대통령과의 각별한 인연과 존경심을 가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구스마오 전 동티모르 대통령, 노르웨이 노벨상 재단 등의 육성 영상 또는 서한이나, 넬슨 만델라 재단, 고르바쵸프 재단, 빌리 브란트 재단 등으로부터의 축하 서한이 형식적이지 않고 김대통령과의 인연이나 면모, 업적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단군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지고 존경 받는 한국의 정치지도자임은 틀림없습니다.
20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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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입니다. 전에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저의 생각과 짧은 글들은 보내드린 적이 있기에, 다른 글을 하나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김대통령 퇴임 후에 어느 기자가 인터넷신문에 쓴 글을 저의 PC에 받아두었던 것입니다. 김대중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읽어볼만 합니다.
2024.1.6. 박종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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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에 대한 어느 기자의 고백> 안녕히 DJ... (2003. 6. 10)
"참 힘들고 불운한 인생"입니다.
생과 사의 문턱까지 갔던 절대 절명의 죽을 고비를 네 번이나 넘겼습니다.
납치와 연금, 투옥의 나날이 20년 이상 계속됐습니다.
고의성 짙은 교통사고로 30여년간 다리를 절게 됐습니다.
수십년간 뿌리깊은 반대세력의 음해와 공격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장남은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이고 차남과 삼남이 나란히 구속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과연 그의 일생은 행복한 일생입니까, 불행한 일생입니까. 잘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저는 그를 떠나 보내면서 그동안 못했던 얘기를 몇가지 하고 싶습니다.
3년 동안 이 이야기를 못했던 것은 그가 아직 현직에 있었기 때문이고 제가 아직 청와대에 출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 얘기를 미루는 것은 저의 기자적 양심에 거리끼는 일인 것 같아 더 주저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사실 청와대에 출입하기 전까지 DJ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제가 정당에 출입할 때는 그가 정계를 떠나 있을 때였고, 그가 정치에 복귀한 뒤에는 제가 주로 사회부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8학번인 저는 후보단일화 논쟁이 치열했던 87년 대선에서 비껴 서있었고, 기자가 되기 전까지 호남지역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DJ의 이미지는
"매우 노회하고 독선적인 정치인"이라는 것 이상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지켜본 DJ는 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여리고 수줍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관이 확고하고 고집이 세지만 자기 고집을 무조건 강요하기보다는 설득하고 토론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측근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는 섬세한 결벽성이 있는가 하면, 자기 철학과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관철시키는 추진력을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젊은 시절의 그는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8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야당투사가 아닌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여유를 가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가 좀더 유연하고 유머러스하고 쇼맨쉽도 갖춘 대통령까지도 돼주길 바랐지만 이미 80을 바라보는 그에게는 무리한 기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외에 나갔을 때 DJ가 받는 대우는 제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선진국에 갈수록 그는 넬슨 만델라와 동격인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 '20세기의 영웅'이었습니다. 현지 언론들은 그의 방문에 맞춰 DJ 일대기를 특집으로 제작하고 특집면을 만들었습니다.
APEC이나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처럼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DJ는 거의 언제나 첫 번째의 발언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지난해 덴마크에서 열린 아셈 때는 주최국인 덴마크의 라스무센 총리가 각국 정상들을 소개하면서, 오직 DJ에게만 "excellent leadership, President Kim"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블레어와 시라크, 주룽지와 고이즈미 같은 쟁쟁한 인물들도 아무 수식어없이 이름만 소개됐는데 말입니다.
그만큼 DJ에 대한 특별대우는 국제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였습니다.
DJ가 참석하는 기자회견이나 투자유치설명회는 그의 이름만으로도 일단 대 성황을 이뤘습니다.
정상들간의 외교적 수사(修辭)는 늘 과장되게 마련이지만 DJ에 대한 것은 수사라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김대중 대통령은 나에게 살아가야 할 힘, 살아가야 할 도덕적 스승이자 길잡이다" (조스팽 프랑스 총리),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 (라우 독일 대통령) 하는 식이었습니다.
현 정부에 다소 비판적이었던 한 선배 기자조차도 이런 모습을 보고는 "머리색 검고 얼굴 노란 황인종 중에서 백인들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은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다. 오직 DJ 뿐이다"고 하더군요.
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한 이런 대접에 "너무나 자랑스럽다"며 눈물을 글썽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국내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동행한 30여명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누구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입니다.
'대통령을 칭찬하는 기사는 낯 뜨겁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국내의 뿌리깊은 반 DJ 정서를 눈치 보느라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CEO인 그가 이런 'DJ 브랜드'를 갖고 있었으니 이것이 한국에 대한 투자유치와 IMF 극복, 그리고 우리나라의 외교적 위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네임밸류에 만족하지 않고 발로 뛰면서 한국 경제와 햇볕정책을 세일즈했습니다.
해외순방 때마다 저는 80에 가까운 DJ가 강행하는 빡빡한 일정에 먼저 넉 다운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DJ의 공식일정은 전임 대통령들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유력 언론들이 자신의 국정이념을 제대로 전해주지 않으니 직접 뛰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연설문은 밤을 세워가면서 직접 작성했고 지난해 2월 '악의 축' 발언으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됐을 때는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DJ가 2001년말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치 불개입을 선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정당에 출입하는 선배 기자들의 상당수도 "DJ는 어떤 식으로 건 대선에 개입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옛날의 DJ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의 DJ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고 해외에서는 세계적인 위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남은 욕심이 있다면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는것 뿐일 겁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성공하고 싶어했지만, 그의 반대파들은 그를 여전히 특정 정파, 특정 지역의 수장으로만 간주하고 끊임없이 흠집을 내려고 했습니다.
몇 몇 보수언론들의 노골적인 왜곡보도는 같은 기자입장에서 부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가치관과 이념을 달리하는데서 나오는 비판이 아니라 오직 DJ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실 자체를 왜곡하고 호도하는 나쁜 보도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제 그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저물어 갑니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습니다.
다만 경제개혁과 남북협력, 그리고 IT 육성이라는 그의 기본방향이 옳았다는데는 큰 반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실패가 너무나 극적으로 강조돼 온 반면 성공에 대한 평가에는 지나치게 인색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공과(功過)는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단지 저는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그의 열정과 진심만은 우리가 인정하고 그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