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友堂) 이회영 평전/[2장] 명문대가의 자손, 자유인으로 성장 2010/12/26 08:00 김삼웅
이 시기에 이회영은 아우 이시영을 비롯하여 이상설 등 동문수학의 벗들이 속속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갈 때에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상설은 1894년(25세) 갑오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4월 승정원 비서랑(6등)에 임명되었다. (6월에 면직) 이상설은 27세 때인 1896년에는 성균관 교수겸 관장에 임명,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이시영은 1885년(17세) 봄 식년감시(式年鑑試)에 급제하여 생원으로 출사하여 1887년 형조좌랑, 1891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8년 동안 세자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나 이회영은 달랐다.
약관(弱冠)이 지나면서부터는 선생 스스로 솔선하여 불평등한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하려 하였다. 아전(衙前)과 노비에 대한 차별적인 낮춤말을 평등한 높임말로 고치려 하였고, 적서의 차별을 없애고, 개가와 재혼을 장려한 것이다. 이런 일은 당시의 권문세가의 출신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이것으로써, 현대 민주주의의 특징인 자유, 평등의 이념이 선생에게는 선천적으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혁명적인 기질과 천품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석 10)
이와 같은 이회영의 특성은 어디에서 근원하는 것일까.
구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시대조류가 무서운 속도로 밀려들고 있었지만, 상류계층의 자제들은 여전히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이 출세의 코스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이상설이나 이시영의 경우가 이를 보여준다. 조선 말기까지 성리학 체제는 여전히 유효한 국본의 질서였다.
성리학은 고려후기부터 한국에 전래되고 조선 왕조에서는 국학 또는 관학이 되어 양반사회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세기의 격변, 격동을 맞이하여 성리학의 현실극복 능력에 회의를 갖게 되는 학자들이 늘어나면서, 성리학이 지나치게 형식주의, 공리공론으로 간주되고, 탈성리학의 시각에서 실학이 발아하였다.
유학의 한 줄기인 양명학은 조선사회에서 정재두(鄭齊斗)에 의해 독자적으로 형성되고 그의 문류(門流)로서 강화학파의 양명학은 조선후기 실학과 일정하게 제휴하기도 하였다. 실학파 가운데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중심인물들은 사민평등관에 따른 근대지향적인 철학사상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이 영달과 공리로 흐르는데 반성을 촉구하면서 실용주의를 수용하였다.
이회영과 이상설 등은 조선 말기의 문신, 대문장가 이건창(李建昌, 1852~1898)과 아우 이건승으로부터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다. 양명학 강화학파의 맥을 이은 이건창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으로 강위, 김택영, 황현 등 당대의 문인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암행어사와 여러 관직에서는 임무수행에서 추상과 같았다. 임금도 지방관을 보낼 때에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공사를 집행하는 자세가 엄정하고 강직하였다. 이런 성격 때문에 몇 차례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는 관로에 발을 끊고 학문연구와 후학교육에 열정을 바쳤다.
당시 이회영 집안은 양명학자 이건승, 홍승헌, 정원하 집안과 세교(世交)가 돈독하였다.
이회영 가문이 교유했던 집안들 역시 당시 쟁쟁한 명문거족이었다. 이건승 가문은 이건창, 이건방 등 쟁쟁한 학자를 배출한 가문이며, 홍승헌은 이계 홍양호의 5대 증손이었다. (‥‥) 정원하 가문은 바로 한국 양명학 곧 강화학(江華學)의 거두이며 숙종, 경종, 영조 삼조빈사(三朝賓師)의 영예를 누린 하곡 정제두를 배출한 집안이었다. 이건승, 홍승헌, 정원하는 모두 이회영 가문과 마찬가지로 만주로 망명한 우국지사들이었다. (주석 11)
양명학의 수용자들은 “일의 성패를 문제 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고 한 왕양명의 가르침, 시작과 끝을 오직 진실과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의 가르침” (주석 12)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이회영과 이상설 등 일군의 의식청년들은 성리학의 적폐에서 벗어나 점차 기울어져가는 국가의 명운을 살리기 위해 양명학에 관심을 보이고 탐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실천이념으로서 수용하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치지’는 지식을 닦는 것이 아니고 지(知)를 실현한다고 해석하고 실천하였다. 이들은 양명사상에 따라 주자의 대학(大學)에 나오는 ‘친민(親民)’을 주자학에서처럼 ‘신민(新民)’ 즉 백성을 새롭게 한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백성을 친하게 한다라고 그대로 해석하고 실천하였다.
이들보다 300여 년 전 정3품인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등 주요한 벼슬을 지내며 6남매를 길렀던 허엽의 아들로 태어난 허균은 성리학과 봉건제도에 얽매인 양반사회의 벽을 깨뜨리고자 분투하였다. 허균은 명문가 정실의 소생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시대의 서자’가 되어 서얼들과 어울리면서 사회 모순의 울분을 토로하고 사회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허균의 집안도 고려 때부터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초당 허엽, 알록 허성,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으로 이어지는 ‘오문장가’(五文章家)를 이루었다.
허균에게는 서얼 출신의 스승 이달(李達)의 학문과 정신이 흘렀고, 멀리는 명나라 말기 반유교 저항인으로 살다가 ‘유교반도’의 죄목으로 옥에 갇혀서 자살한 이탁오(李卓吾)의 자유주의 혼을 이어 받았다. 허균은 주어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민중뿐이다”로 시작되는 <호민론(豪民論)>을 펴면서 민중혁명을 시도한 시대의 선각자, 반체제의 저항인이었다. 자유주의자이고 아나키스트였다. 그의 현실화하기 어려웠던 꿈은 소설 <홍길동전>으로 나타났지만, 기득세력의 장벽을 넘지 못한 채 반역으로 몰려 1618년(50세) 그의 동지들과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다.
300년의 시차를 두고 허균과 이회영의 옹골찬 신념과 기골찬 생애는 닮은 점이 적지 않았다.
이회영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양명학을 탐구하며 ‘이단’의 길로 들어섰다. 허균의 ‘이단’은 호민이 중심이 되는 평등사회였지만, 이회영의 ‘이단’은 우선 빼앗긴 조국의 자주독립을 찾는 길이었다.
이회영은 자신의 일관된 정견은 자유사상이라 밝힌 적이 있다.
“나는 본래 벼슬을 싫어한다. 그 때문에 나는 독립한국을 반드시 사민평등한 만인의 자유평등을 누릴 수 있고, 따라서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자유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 나의 독립관이며 정치 이상이니만치‥‥” (주석 13)라고 피력할 만큼 자유, 평등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