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0.日. 미세먼지 걷힌 채 맑고 따뜻하고 추억하기 좋은 날
11월20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3.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일요법회를 생략한 채 사시마지가 끝나자 선방스님, 일요법회 도반님들, 수덕사에서 지원 나온 보살님들, 천장암 일요법회에 한 번 들려본 신도님들 모두 공양간에 모여 점심공양을 했습니다. 장정과 훈련병을 포함해서 군대시절 식사시간뿐만 아니라 언제고 어디에서라도 식사시간은 참으로 즐겁습니다. 내가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으로 연병장을 박박 기고 있을 때 토요일 점심으로 유일하게 밥이 아닌 라면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라면도 물에 넣고 팍팍 삶는 게 아니라 밥처럼 커다란 통에 넣고 증기로 쪄냈습니다. 그래서 스텐 식판을 군기 있게 내무반 침상 삼선에 나란히 정렬해놓으면 라면 국물을 한 국자 떠주고 그 위에 쪄낸 라면을 두 개씩 올려주었습니다. 거기에 날달걀 한 개가 따라왔습니다. 일식 삼찬이니 반찬은 언제나 세 가지가 나왔습니다. 뭐 군대식 쪄낸 라면이 특별히 맛이 있다거나 라면을 무지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라면을 먹을 때마다 일주일이 지나갔다는 그 즐거움에 찐 라면발을 국물에 잘 풀어서 훌훌 먹었습니다. 그런데 달걀 한 개가 문제였습니다. 훈련병마다 각자 자기방식대로 달걀을 먹어치웠는데 나는 이빨에 콕콕 두드려 달걀 끝 부분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쪽쪽 빨아먹었습니다. 요즘 21C 달걀과는 달리 6,70년대의 달걀은 달걀 천연의 맛이 온전하게 살아있었습니다. 요즘에는 날 것이란 뭔가 건강에 좋지 않을 듯한 기분이 들어 대량 사육방식의 닭이 낳은 날달걀 먹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하는데, 그 시절에는 날달걀 먹는 것도 건강식의 한 가지였고 날달걀을 먹으면 목청이 갑자기 좋아져서 노래를 잘 부르게 된다는 속설이 파다했던 정감어린 세상이라 날달걀을 곧잘 먹었습니다. 어쩌다 시골 큰집에 내려가면 큰어머니나 작은 어머니께서 암탉이 금방 낳아놓은 따스한 달걀을 먹으라고 손에 쥐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읍내 장터에서 이따금 콩쿨대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거나 홍보지가 날아오면 각 부락단위로 노래선수를 뽑아 부락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아주는 의미로 콩쿨대회 전날까지 날달걀을 먹였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운이 좋으면 노래선수는 상품으로 냄비나 솥단지를 받아들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하기도 했습니다. 소싯적少時的에 목포인근 여러 읍내 장터 콩쿨대회를 휩쓸었던 콩쿨대회 출신 가수로 이수미가 있습니다. 1952년생으로 여진, 박인희와 함께 내가 무척 좋아하는 가수입니다. 여고시절, 사랑의 의지, 내 곁에 있어주 등으로 ‘70년대를 추억하게 해주는 좋은 가수입니다. 이수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타고난 가수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어렴풋한 감상이 듭니다. 약간 허스키한 낮은 목소리로 축축이 젖어있는 듯한 저음처리는 아마 국내 여가수 중 최고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진은 1958년생으로 본명은 남궁은영입니다. 1979년도에 꿈을 꾼 후에, 그리움만 쌓이네 등 몇 곡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가수인데, 선택의 기로에 서자 아낌없이 가수의 길을 포기하고 음악교사로 재직을 했다고 합니다. 나도 그녀의 노래들을 1982년에 테이프를 통해 처음 들어보고 깜짝 놀라서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몹시 궁금했습니다. 여자가수로는 드문 작사, 작곡, 노래까지 하는 싱어 송 라이터인 셈인데, 노랫말이 성숙成熟하고 유려流麗할뿐더러 고급진 창법과 세련된 기교가 당대의 으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 줄곧 가수생활을 했더라면 같은 시기에 활동을 했을 혜은이나 이은하가 한 무대에서 숨을 쉬기가 조금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1994년에 후배 싱어 송 라이터인 노영심이 리메이크를 해서 그리움만 쌓이네.를 부른 뒤 이 노래가 세간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두 가수의 한 노래를 들어보면 타고난 가수와 만들어진 가수의 차이가 들어나 보입니다. 청아淸雅하고 신비神祕로운 목소리로는 역시 박인희가 최고입니다. 1945년생으로 이해인 수녀와는 풍문여자중학교 동기라고 합니다. 박인희의 노래는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중 일등으로 치는 것은 노래가 아닌 시낭송입니다. 마리서사茉莉書舍 주인장이자 1940,50년대를 풍미했던 모더니스트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시낭송은 지금도 즐겨 듣고 있는 곡입니다. 박인희 가수는 미국에 거주 중이지만 얼마 전에 한국에 와서 공연을 했다고 했는데 직접 가보지는 않았으나 그런 목소리가 아직 동시대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가수입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게 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세 여자가수 이수미, 여진, 박인희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거기에다 불법佛法을 알게 되어 청정하고 복 받은 정신생활을 가꾸어 나갔으면 하는 합니다.
우리나라 T.V 드라마에는 유별나게 밥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미드나 영드에서는 밥 먹는 장면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꼭 우리처럼 밥상을 차리지 않아도 음식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어디서든 식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저 장면을 밥 먹는 장면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야기하거나 일하는 장면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혼동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밥상을 차려놓고 정색을 하고 앉아서 또박또박 밥을 씹는 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자리에 둘러앉아 자주 밥을 먹어야 넉넉하고 행복하게 보이는 장면들은 우리사회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친밀한 관계와 일손을 중요시했던 농경사회였음을 알려주고 있는 탄탄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국은 각자 따로 먹지만 찌개나 탕은 함께 수저를 넣어 공유하듯이 먹는 우리들만의 음식문화도 너와 내가 따로 없는 두레나 품앗이에서 유래한 식사예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그 방식 그 예법대로 우리들도 공양간에서 점심공양을 했습니다. 점심공양을 마친 후 선방스님들께서 오후1시부터 김장시작을 공지하고 선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렇지만 오후1시까지가 너무 길었던 일요법회도반님들은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먼저 시작하자는 중론이 돌아 햇깔 좋은 정오正午경에 팔을 걷어 부치고 성우당 마당으로 몰려나갔습니다. 락화보살님이 한쪽을 담당하시고 김화백님과 무진행보살님이 필승조로 앞장을 섰습니다. 정덕거사님과 묘길수보살님과 길상화보살님과 예천동보살님이 안 계셔서 조금 불안은 했지만 이왕지사已往之事 벌어진 일이니 옜다 모르겠다, 일단 벌려놓고 보자! 하는 마음이었으나 생각 밖으로 전열戰列이 안정되고 사기士氣가 높았습니다. 둥글게 비닐을 깔고 양념 속과 고춧가루와 과일육즙을 쏟아부어놓고 함께 섞었습니다. 의외로 일의 가닥을 잡아가면서 순서 있게 사분사분 매조지는 일솜씨가 김화백님의 손끝에서 나풀거렸습니다. 거기에 무량덕보살님과 무진행보살님의 손끝이 가세를 하니 일이 순조롭게 풀려갔습니다. 조금 있다 우루루~ 선방스님들이 동참을 해서 배달조와 비비기조로 양동작전을 실행했더니 금세 금세 노란 배추가 붉은 김장김치로 바뀌어갔습니다. 미세먼지 걷혀나간 하늘은 맑고 푸르고, 햇살은 은빛 청명하게 눈을 찌를 듯 어깨에 비스듬히 쌓여갔습니다. 이런 날에는 김장김치비비기를 안 했더라면 ‘걸어서 가을까지’ 라는 제목으로 시라도 써야할 듯한 감상 돋우는 11월의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이상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앵커맨 밸라거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