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상식이라고 믿고 의심치 않는 것들이, 막상 그 뿌리를 파헤쳐 보면 사실과 다르거나 아예 근거조차 없는 경우를 종종 마주하곤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때로 기록된 텍스트보다, 그 텍스트를 읽는 사람들의 간절한 필요에 의해 재구성되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매 주일 교회 문턱을 넘으며 건네는 이 익숙한 호칭의 근거를 자연스럽게 사도행전 6장에서 찾습니다. 실제로 그 장에는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분배에서 소외되었다는 문제가 등장하고, 사도들은 식탁을 섬기는 일과 말씀의 사역을 구분하며 일곱 사람을 세웁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 원문 어디에도 그 일곱 사람을 직접적으로 집사(διάκονος)라고 명명한 구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분명히 나오는 것은 집사라는 직함보다, 오히려 διακονία와 διακονεῖν이라는 직제가 아닌, '섬김'과 '섬기다' 더 넓고 역동적인 어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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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그렇다면 이 일곱 명의 리더들이 어쩌다 일곱 집사라는 고유한 이미지로 굳어지게 되었을까요. 이 역사적 연결 고리를 아주 이르게, 그리고 분명하게 말해 주는 교부 가운데 하나가 2세기 후반의 이레니우스(Εἰρηναῖος)입니다. 그는 스데반을 “Stephanus autem iterum qui electus est ab apostolis primus diaconus”(한편 스데반은 사도들에 의해 첫 번째 집사로 선택되었다)이라고 불렀습니다(Adv. haer. 3.12.10). 이런 해석과 전승이 교회의 직제 이해와 맞물려 흐르면서, 사도행전의 일곱 사람은 점차 집사 직분의 기원처럼 읽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거치며 전승은 성경의 여백을 채웠고, 우리는 어느덧 기록된 말씀보다 전해진 해석을 더 단단한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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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사실 이 일곱 사람의 선출은 단순히 구제 업무를 전담할 행정 요원을 뽑는 차원으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문제의 발단 자체가 히브리파와 헬라파 사이에서 벌어진 긴장이었고, 그 이름들을 살펴보면 일곱 사람 모두 헬라식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언급된 니골라(Νικόλαος)는 안디옥 출신의 개종자로 소개됩니다. 이것은 적어도 초대 교회가 공동체 내부의 균열을 봉합하는 자리에서, 헬라어권과 긴밀히 맞닿아 있는 인물들을 전면에 세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어쨌든 이 일곱을 선출한데에는, 유대교적 경계 안에 머무르기보다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몸을 돌리기 시작한 교회의 기미가, 이미 이 장면에 어렴풋이 스며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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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이들을 집사라는 이름 아래만 가두어 두기에는, 그들이 보여준 영적 권위와 능력이 너무도 두드러집니다. 현대의 우리에게 집사라는 호칭은 세례를 받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표시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그들은 결코 그런 수동적인 명예직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스데반(Στέφανος)은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으며, 공회 앞에서 펼친 그의 연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꿰뚫는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었습니다. 빌립(Φίλιππος) 또한 사마리아와 광야에서 복음을 전하고,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말씀을 풀어 주며 세례를 베푸는 독립적이고 역동적인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아도 이들은 단순히 재정을 관리하거나 식탁 봉사를 맡는 보조자라기보다, 현장의 최전선에서 복음의 생명력과 야성을 드러낸 사역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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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최근의 성서학적 연구는 이들이 수행한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를 단순히 비천한 하인의 심부름으로 축소해서 이해하는 데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물론 이 말이 언제나 고귀하고 공식적인 사절직만을 뜻한다는 식으로 밀어붙일 수도는 없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사도행전 6장의 문맥에서 이 사역은 하찮은 잡무로 축소될 수 없는 무게를 지닙니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에서는 “식탁을 섬기다”는 정도의 표현도 애찬을 주관했다는 것보다 재정을 담당했다로 보기도 하더군요. 당시 표현에서 테이블에 앉아있다가 세리나, 환전상 등에 사용되었음을 보면 근거 있는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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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분명한 것은 섬기는 자의 일은 공동체의 균열을 돌보고, 사도적 사명의 흐름을 이어 가며, 실제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질서를 세워 가는 책임 있는 봉사였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사도들의 허드렛일을 대신하는 비서나 하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과 선교의 움직임을 떠받치는 본질적인 일꾼들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본문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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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깨에 붙은 직분의 타이틀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디아코네인(διακονεῖν), 곧 삶으로 증명되는 섬김의 본질일 것입니다. 매 주일 서로를 집사님이라 부르는 그 익숙한 인사 속에, 우리가 정말 담아야 할 진심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호칭의 역사와 직분의 유래를 아는 일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데반이 바라보았던 열린 하늘과 빌립이 걸어갔던 광야의 길을 우리 또한 묵묵히 뒤따르는 일일 것입니다. 타이틀은 풍성해졌는데 정작 섬김의 내용은 빈곤해진 시대 속에서, 우리가 정말 구하는 것이 그럴듯한 이름표인지, 아니면 낮은 곳으로 향하는 그리스도의 발자취인지,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김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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