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해체되다시피 한 모 그룹 3세와 대학 동기인 재계의 한 인사는 학창시절 황당한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어느날 그룹 3세가 학교 주차장 한가운데 차를 세워 놓고는 야구 방망이로 마구 내려치면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
“체면이 있지, 국산차를 어떻게 계속 타고 다니라는 말이야!” 당시 그의 주변에는 다른 그룹 후손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던 선후배들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인사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학창시절부터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다른 학생들은 그들을 다른 세상 사람들로 여겼다.
■ 경기초등에서 특정 대학까지 ‘학연 커뮤니티’ 형성
■ 누가 어떤 모임에서 누구를 만나나?
■ 그들이 모임에서 하는 공부와 사업의 전모
지난달 말 저녁 무렵 서울 논현동 한 빌딩의 30평 남짓한 회의실에는 낯익은 재계 2~3세와 벤처기업 경영인 20여 명이 차례로 모여들었다. 이날은 2000년 9월 출범한 재계 모임인 ‘브이소사이어티’의 포럼이 열리는 날이었다.
최태원 SK(주) 회장,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이홍순 전 삼보컴퓨터 회장, 김각중 전 전경련 회장의 장남 김준 (주)경방 부사장 등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먼저 전속 요리사가 제공하는 뷔페로 간단히 저녁식사를 했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재계 2~3세들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 시간가량 보낸 뒤 저녁 8시부터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했다.
외부강사의 강연이 있은 뒤 각자의 사업분야에 따라 나뉜 분과위원회와 전체 모임 등이 이어졌다. 식사시간 때와는 달리 대부분 진지한 표정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토론은 밤 11시가 돼서야 끝났다. 와인 미팅으로 진행된 뒤풀이 행사까지 끝났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긴 뒤였다.
브이소사이어티는 재계 2~3세들의 ‘이너서클’ 중에서 가장 큰 모임이다. 대기업은 물론 밴처기업 CEO까지 포괄한 사교클럽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반면 정치인·공무원·국회의원에게는 회원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브이소사이어티는 재계 모임 중 보기 드물게 공개적인 모임도 연다. 1년에 두 번 정도 열리는 ‘공개 포럼’은 외부인들에게 자신들의 관심사를 알리는 대표적 활동이다. 2003년에는 영화관에서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이라는, 내놓고 보기에는 다소 민망한 영화를 단체관람하면서 개방적인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브이소사이어티는 주식회사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 초대 주주인 최태원 회장, 신동빈 롯데 부회장, 이웅열 코오롱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 이홍순 전 삼보컴퓨터 회장, 김준 경방 부사장 등 재계 2~3세와 안철수 안철수연구소이사회 의장, 변대규 휴맥스 사장,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사장 등이 각각 2억 원씩 출자해 설립됐다.
21명으로 시작한 이 모임의 회원은 현재 60여 명으로 늘었다. 그동안 김원 삼양사 사장, 윤재승 대웅제약 사장, 이홍선 전 두루넷 부회장, 김영진 한독약품 부회장 같은 2~3세들이 새로 합류했다. 이들은 대부분 자유로운 사고와 글로벌한 감각, 디지털 문화를 특징으로 갖고 있다. e비즈니스 분야에서는 합작회사를 만들고, 유사 업종에서는 사업부문 매각 협상을 직접 벌이기도 한다.
브이소사이어티 초대 사장을 지낸 이형승 CJ경영연구소장은 “대기업 2~3세들과 벤처 CEO들이 긴밀한 네트워크와 전문지식으로 무장해 경영 변화에 능률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이 목표”라며 “단순한 친목모임이 아니다”라고 말햇다. 특정 주제를 정해 연구하고 공부하는 데 주력한다는 설명이다. 이들은 매달 특정한 날짜를 정해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정기 모임을 갖는다. 모임은 하나의 주제를 놓고 회원들이 자신의 경험을 발표하는 토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학연으로 얽힌 재계 후손들
재계 후손들은 많게는 서너 개씩의 모임에 가입하거나 자신이 직접 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특히 이웅열 회장, 최태원 회장, 이홍순 전 회장, 정몽규 회장 등은 모임활동에 가장 적극적이다. ‘호형호제’하는 관계인 이 네 사람의 인연은 학연이 중심이다. 네 사람은 모두 고려대를 졸업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태원 회장과 이홍순 전 회장은 물리학과, 이웅열 회장과 정몽규 회장은 경영학과를 나왔다. 絹湧?서로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끈끈한 연대감으로 뭉쳐 있고, 수시로 만나거나 전화, 이메일 등을 통해 신규사업을 상의하고 첨단 정보를 나누는 것으로 전한다.
특히 어릴 적부터 친형제 못지않은 우의를 쌓아 온 이웅열 회장과 정몽규 회장은 거의 매일 통화하는 등 각별한 친분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국제투자금융회사와 벤처기업에 공동투자하는 등 각종 사업에서 보조를 맞추며 우의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웅열 회장과 최태원 회장, 이홍순 전 회장은 서울 신일고 출신이라는 또 하나의 학연으로 얽혀 있다. 이들은 신일고 출신 재계 후손들을 모아 ‘신수회’를 조직했다. 서울 신일고는 이들 외에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재계의 ‘로열 패밀리’들이 수두룩하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신수회 6기로 가장 선배 축에 들고, 신동원 농심 부회장이 7기, 이홍순 전 삼보컴퓨터 회장과 김상범 이수화학그룹 회장은 9기로 동기다. 최태원 SK 회장(10기)과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12기) 형제는 비교적 젊은 멤버다. 이들 외에는 송재빈 전 타이거풀스 인터내셔널 사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의 동생인 신문재씨,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막내동생인 구본식 희성전자 사장, 김현배 전 삼미그룹 회장 등이 신수회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신수회 멤버들은 가끔 골프 회합과 부부 동반 송년회 등을 통해 만난다. 후배 장학금 지급 등 모교 지원사업도 활발한 편이다.
초등학교 동문 모임도 막강
동문 관계로 얽힌 재계 모임을 논할 때 ‘푸른회’와 ‘크림슨 포럼’도 빼놓을 수 없다. 1993년 발족한 푸른회는 서울고와 중앙고 출신 재계 후손들의 모임이다. 관·언론·법조·학계 등도 포함돼 50여 명으로 구성돼 있다. 서경배 태평양 사장, 이종철 풍농 사장 등이 회원이다. 크림슨 포럼은 고려대 출신 40대 오너 경영인들이 주축인 단체.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 김태형 전 한신공영 회장, 유상덕 삼천리그룹 회장, 이재현 CJ 회장, 이재관 전 새한 부회장 등이 멤버로 가입돼 있다.
이들 모임은 과거 일부 멤버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 씨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 때문에 ‘줄대기용’ 모임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들의 활동은 제한적이고 비밀도 많다.
푸른회는 일부 멤버가 특혜의혹 등으로 곤욕을 치른 뒤 외부활동이 거의 노출되지 않고 있으며, 크림슨 포럼도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며 회원 명단 공개를 꺼리고 있다. 크림슨 포럼은 회원을 애초 60명으로 제한했지만, 최근 모임을 확대해 100명으로 늘린 것으로 전한다.
재계 후손들의 학연 모임은 초등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경기초등학교 졸업생 모임이 대표적 사례. 현재까지 모임 이름이나 만나는 장소 등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만나교분을 쌓고 있다는 것이 이 학교 출신 인사의 귀띔이다.
경기초교 모임은 특히 21회(1986) 졸업생들이 사실상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동기들이 이끌다 보니 결속력 측면에서 보면 그동안 알려진 어떤 재계 2~3세 모임보다 끈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의 장남 김지용 용평리조트 상무, 박성철 신원그룹 회장의 차남 박정빈 씨,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손녀 정유희 씨,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 아들 신기준 씨 등이 모두 경기초등학교 동문회 멤버다.
최근 LG그룸의 사위가 된 윤관블루런벤처스(전 노키아벤처파트너스) 사장(23회)의 누나 윤지현 씨, 신정일 전 한온그룹 총재의 아들인 신세원 HI&T 사장 등도 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이 밖에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가문의 이모 씨, 종근당 가문으로 알려진 백모 씨 등이 이 학교 출신으로 21회 졸업생이다.
우연히 이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는 한 인사는 “동문 모임이 아니라 수입차 전시회가 열리는 줄 알았다”면서 “재계는 물론이고 정·관계 자제들이 망라돼 있다”고 전했다.
경기초등학교 모임은 졸업생만 갖는 것이 아니다. 학부모 모임도 정기적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물론 모임 구성원 중 상당수는 재계 안방마님이다. 이들은 자녀들이 재학 중이던 198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라 온 환경과 배경이 비슷한 동문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혼담이 성사되기도 한다. 경기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정유희 씨와 김지용 용평리조트 상무의 결혼이 대표적 예다. 초등학교뿐 아니라 유치원 동창이기도 한 두 사람은 김 상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한동안 떨어져 지냈지만, 후일 정씨도 미국으로 유학 가면서 자연스럽게 재회한 뒤 결혼했다.
동문 모임에서는 본래 취지와 다른 일에 끼어들었다 말썽이 빚어지기도 한다.
최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게이트의 장본인인 진승현 씨에게 돈을 건넨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이 사건에는 정 회장이 가입한 모임의 다른 멤버들도 연루된 것으로 전해져 주목받고 있다.
또 재벌을 상대로 한 사기극으로 관심을 모았던 ‘베스트사건’ 역시 재계 후손들의 모임인 ‘베스트’ 멤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베스트사건은 이 모임 총무로 있던 외국계 은행 간부가 745억 원대의 사기행각을 벌인 사건을 일컫는다.
베스트는 386세대들이 주축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은행 간부는 1980년대 미국 버클리대에서 금융학을 전공한 인연으로 정식 회원으로 가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처음 베스트 멤버들의 자금을 끌어모아 높은 수익을 올려 주면서 호감을 샀고, 한때 200억 원대의 자금을 운용해 60억 원의 시세차익을 올려 주는 등 적당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고심하던 재계 후손들 사이에서 큰손으로 떠올랐다.
이후 베스트 멤버들이 너도나도 거액을 맡기면서 일이 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동문 모임과 달리 특별한 이해관계 없이 친목 도모와 경영정보 공유 등을 위해 모이는 순수한 조직도 많다. ‘한국YPO(Young President‘s Organization)’는 폐쇄적 재계 모임에 속한다. 미국 텍사스에 본부를 둔 YPO는 ‘미니 전경련’으로 통한다. 40세 이전에 대표이사를 맡은 사람으로 회원 2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입회가 가능하다. 50세가 넘으면 명예회원으로 물러나게 된다.
재계 모임의 본산 YPO·YEO
까다로운 조건의 한국YPO에는 강문석 동아제약 사장과 김상범 이수화학 회장, 김윤 삼양사 회장,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장, 김준 경방 부사장,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 김영진 한독약품 회장, 민선식 YBM시사 사장 등이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젊은 경영자들끼리 경험을 나누고 선배들의 조언을 받아 선진 경영을 실천하자는 뜻에서 만나는 친목단체라는 것이 한국YPO 측의 설명이다. 주로 경영 관련 세미나 등을 통해 만나며 이따금 친목 차원에서 부부 동반으로 공장 견학을 하기도 한다.
YPO에 버금가는 조직으로는 ‘서울YEO(Young Entrep reneurs’ Organization)’를 들 수 있다. YEO는 미국 버지니아에 본부를 둔 비영리 단체로 1987년 설립해 연간 100만 달러 이상 매출액을 기록하는 40세 이하 기업가들을 회원으로 한다.
YEO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10명 미만의 재계 2~3세들의 친목단체로 있다 2000년 김준 경방 전무가 회장을 맡으면서 벤처기업가들을 영입해 규모가 확대됐다. 멤버는 대략 30∼40명 선. 모임은 매월 셋째 주 화요일에 정기적으로 갖고 있다. 임성욱 세원그룹 회장과 허기호 한일시멘트 부사장, 조현상 효성그룹 상무 등이 참가하고 있다.
이들 외에 소규모로 모이는 사교모임은 수없이 많다. 대부분 유학시절의 인연이나 학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유학시절 친구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한 벤처기업 사장은 “모임의 성격은 비즈니스보다 네트워크 강화 목적이 더 강하다”면서 “가끔 골프를 즐기기도 하지만, 보통은 간단한 술자리를 가지며 국제경제와 경영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고 말했다.
재계 2~3세들은 사교모임 장소로 특급호텔의 멤버십 레스토랑이나 스노우맨·베이직 등 서울 강남의 멤버십 술집을 주로 이용한다. 유명 피트니스 클럽도 이들이 자주 모이는 곳 중 하나다. 대표적인 곳은 서울 남산의 서울클럽, 신라호텔 멤버십, 롯데호텔 멤버십 등이다. 남자들만 모일 때는 골프를, 가족 동반 모임일 경우에는 테니스를 주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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