恩居堂重新記(은거당 중신기) - 이익/星湖全集53권
사람이 태어난 것은 부모에게 근본을 두고 있으니 언제 어디서든 부모를 봉양하여 낳고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는것을 효(孝)라고 하고, 영예로운 벼슬은 임금에게서 나오니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서 은총과 복록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것을 충(忠)이라고 한다. 아비를 섬기는 마음에서 취하여 임금을 섬기니 공경하는 마음은 같다. 신하가 출중한 정성을 보이면 임금은 반드시 세상에 드문 은총을 더해 주기를 마치 아비가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하니, 이 두가지는 천리(天理)의 바름이고 인사(人事)상 반드시 그렇게 되는것이다.
내가 듣건대, 연수(漣水)가에 수풀을 벗어난 산자락이 있는데 산자락에 은거당(恩居堂)이 있으니, 바로 미수(眉叟) 허선생(許先生)이 거주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처음 선생이 연수 가에 거주할 적엔 하늘의 뜻을 즐거이 따르고 명을 알아 편안히 여기며 그렇게 평생을 마칠 듯하였는데, 하루아침에 군신 간의 만남에 감응하여 출사해서 세 조정(효종,현종,숙종)을 섬겼고, 이윽고 또 호연(浩然)히 치사(致仕)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대개 벼슬에 나아가기를 예(禮)에 따라 하고 물러나기를 의(義)에 따라 한 것으로는 근세에 첫째가는 사람일 것이다. 조정에서 유사(攸司)에 명하여 이곳에 당을 지어서 선생이 기거하기에 편하게 하였으니, 군신 간의 정의(情誼)가 또한 근세에 찾아볼수 없을 정도였다. 연천 사람들이 모두들 탄식하고 감탄하기를 “우리 선생이 조정에 출사하여 세운 덕업(德業)이 틀림없이 이에 걸맞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깊은 은총을 내렸겠는가.”라고 하였다.
옛날 나의 선대부(先大夫. 성호의 부친 이하진)께서 곧고 바른 지조로 선생을 도와 청의(淸議)를 주장하여 선생과 출처(出處)를 함께하셨으므로, 참여하여 들은 것이 있었다. 대개 선생이 조정에 나아가서는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설이 아니면 어전(御前)에서 진술하지 않았고, 한 세상을 우(虞), 하(夏), 은(殷), 주(周) 같은 태평성대로 올려놓고자 생각하여 이것 말고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라도 편안한 곳을 얻지 못하면 자기의 수치로 여겼으니, 그 일은 역사에 명백히 실려있고 사람들이 환하게 보고 들은 바이다. 당시 인사들이 중하게 기대하고 우러르기를 마치 경성(景星)이 나타나고 경운(卿雲)이 일어난 것처럼 하였으며, 우는 봉황(鳳凰)이 내려오고 상서로운 기린(麒麟)이 나온 것처럼 여겼다. 그러므로 또 안목이 작은 자가 의심하고 마음이 각박한 자가 꺼리는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비록 말세의 폐단을 제거하고 옛 도(道)를 만회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계획이나 계책 어느 한 가지도 차선책으로 낮추려고 하지 않았으니, 어찌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느라 부질없이 분주하기만 한 뒷사람들에 비하겠는가.
선생의 도가 세상에 크게 행해지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고 운명이니,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이 당(堂)이 축조된 것은 요행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다. 당이 오랫동안 낡고 무너진채 있었는데 그 후손 아무개가 중수(重修)하여 면모를 일신하였다. 내가 즐거이 그 기문을 지으며 대략 역사적 사실을 들어서 연천(漣川)의 유민(遺民)에게 고한다.
跋眉叟先生篆隷三帖(미수선생께서 전서와 예서로 쓴 세 서첩에 대한 발문) - 李瀷(이익)/星湖全集56권
미수(眉叟)선생은 매사에 옛것을 좋아하여 사소한 편지나 만필(漫筆)이라 하더라도 과두문자(蝌蚪文字)의 획으로 예서(隸書)를 썼다. 벌레 주둥이 새 발톱 모양의 글씨가 완연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참으로 기이하다. 나의 벗 최용여(崔用汝)는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선생의 글씨를 모아 서첩으로 만들어서 간간이 나에게 보여 주기에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단지 선생의 지엽적인 부분이다. 내가 선생의 유집(遺集)을 읽어 보았는데, 조정에 나가서 임금을 섬길 때는 반드시 경전에서 의리를 끌어내어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진언하지 않았으며, 물러나 집에서 지낼 때는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좋아하여 한 가지 선(善)을 행하는 정도로 이름나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선생의 본모습이다. 원컨대, 그대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선생의 자취가 아닌 그 마음을 구하고 이러한 기호품이 아닌 경전을 존중하고 자신을 단속한 법도를 찾아낸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나도 장차 그대와 함께 힘써 보겠다.”
미수 선생의 전서체(篆書體)는 사방에 널리 퍼져 집집마다 병풍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는데, 재상(宰相) 아무개가 조정에 아뢰어 그 글자체를 금지하였다.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시를 짓기를,
아침 해가 동산에 솟아오르니 / 朝日上東嶺
구름 사이 붉은 노을 창가에 서렸네 / 雲霞生戶牖
산 밖의 일이야 알 까닭 없고 / 不知山外事
갈필에 먹을 찍어 과두를 쓴다네 / 墨葛寫蝌蚪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 시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였다. 선생이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가 동해비(東海碑)를 세웠는데 시어가 예스럽고 글자체가 기이하여 귀신까지도 조종할 정도였다.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이마저도 부수어 버려 나중에 다시 새겨 놓았는데, 내가 그 탁본을 얻어다가 마주하니, 그때마다 경건한 마음이 들곤 하였다. 아, 저들 몇몇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런 짓을 하였단 말인가. 이번에 이 서첩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기록해 두는 바이다. (끝)
첫댓글 죽헌이 편저한 은거당기를 여기에 첨가해 주면 좋겠음.
성호 선생께서 ‘恩居堂重新’의 記文과 ‘眉叟先生篆隷三帖’의 跋文을 쓰신 데는 그만한 학연의 내력이 있어서 였으리라. 마침 고정께서 좋은 자료를 올렸고 사형이 채근하여 창화의 의미로 은거당의 소사와 선생 자찬의 은거시를 찾아내어 감의를 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