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문제연구소 40년,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북한전문연구소로 발전하였고 그 중심에는 박재규 경남대학교 총장이 있다. 박재규 총장은 연구소의 과거이며, 현재이고, 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뜻한 4월의 봄날, 종로구 삼청동에 소재한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북한연구에 대한 박 총장의 열정과 삶, 그리고 남북관계의 해법에 대해 들어 보았다.
극동문제연구소가 올해로 40돌을 맞았는데, 설립자로써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1972년 9월 ‘통한문제연구소’로 개소한 이후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자료수집과 북한연구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강산이 네 번 변하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4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북한 자료를 보는 것조차 불가능해서 북한연구가 어려웠던 시절에 민간이 주도하는 북한 전문 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지금 돌이켜 봐도 역사성을 갖는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74년 1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주제로 첫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던 일입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주제로 진보학자를 망라한 국내외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함으로써 북한연구에 새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구소를 설립할 당시와 현재 연구소의 모습을 비교한다면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한마디로 ‘상전벽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북한자료가 거의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가된 장소나 외국에서만 자료를 보고 필사를 하던 시절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학술적·정책적 기여를 하겠다는 목표가 아니었다면, 시작조차 불가능했던 일들입니다.
그 때와 비교하면 현재는 상황이 좋습니다. 연구소 시설도 국내 대학부설 연구소로는 최고의 수준이라고 자부합니다. 우리 연구소와 연계된 북한 전문 교육기관으로서 ‘북한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해서 이제 교육과 연구가 상호 선순환적으로 결합되고 있습니다. 북한 원 자료를 포함하여 북한연구를 위한 국내외 자료들도 국내 최고 수준이며, 쉬지 않고 북한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연구진도 다양한 전공분야의 연구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북한을 넘어 미국, 중국, 러시아 등 동북아 전체 영역을 커버하는 전문 연구자들이 연구소에 포진해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중점연구소로 선정되어 연구비 지원을 받고 정부와 민간단체의 연구용역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북한연구자가 늘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길도 앞당겨질 수 있다”
지난 40년 동안 연구소를 이끌어 오시는 과정에서 아쉬운 일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재정이 충분하지 않아 더 많은 북한전문가들을 양성하지 못한 점입니다. 상대적으로 타기관보다 많은 북한연구자들을 양성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조금 더 다양한 분야, 북한주민들의 일상생활이나 북한권력의 미시적 작동영역 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북한전문가들을 양성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북한연구자가 늘면 늘수록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길이 앞당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을 모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재정적 기반이 탄탄해야 합니다.
둘째로 북한의 폐쇄적 속성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겠습니다만, 연구소가 남북한 학술교류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다면, 정부의 대북정책과 남북관계에도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여도면에서 아직은 만족할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것 같아 무척 아쉽습니다.”
연구소 운영 및 활동과 관련한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 무엇입니까?
“연구소의 본연의 임무는 연구활동입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그리고 동북아의 번영을 위한 질 높은 연구를 위해 재정지원을 강화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정부 차원의 아낌없는 지원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수한 북한전문가를 육성하고 필요한 분야에 대한 연구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국내외 유수 연구소들과의 교류·협력을 통해 북한정보를 공유하고 생산적인 자료수집에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남북관계가 잘 풀려서 평양에 우리 연구소의 분소를 내는 것도 사실은 저의 오랜 꿈입니다.
독일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극동문제연구소는 지금까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최고의 연구기관으로서 소임을 다해왔고 앞으로도 그 목표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경남대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1970년 당시 마산대학(현 경남대학교)이 재정위기로 폐교상태에 이르자 친인척들의 권유로 대학을 회생시키기 위해 경영에 참여한 것이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총장님께서는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남북관계 전문가, 학교 경영자, 그리고 행정가로써 통일부 장관으로도 활동하셨습니다.
“대학 CEO로써 경남대학교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구와 교육 특성화로 설립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와 북한대학원대학교가 최고 연구·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는 점은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통일부 장관으로 남북냉전관계를 화해·협력관계로 전환함에 앞장섰던 것이 맘속에 깊이 남습니다.”
“오고 가고, 주고 받고, 돕고 나누는 ‘사실상’의 통일로”
총장님께서는 DJ정부시절에 통일부 장관을 하셨습니다. DJ정부의 대북정책의 가장 큰 성과나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제1차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이 가장 큰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최고당국자가 만났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만남은 ‘적대와 대결’의 남북관계가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로 변화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였습니다. 대한민국의 군통수권자인 김대중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주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 최고사령관 김정일 위원장이 인민군 육해공군 의장대의 공동사열을 받는 장면만으로도 한반도 평화의 진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한의 화해와 교류협력을 제도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서로 오고 가고, 주고 받고, 돕고 나누는 ‘사실상’(de facto)의 통일로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를 시작하고,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킬 수 있는 역사적 분수령이었습니다.
다만, 경제협력과 사회문화 분야 등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진전이 가시화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정치적 화해와 군사적 신뢰구축이 미흡했던 것은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또한, 남북관계 개선과 민족화해의 진전에 따라 우리 사회 내부의 남남갈등이 나타난 점 또한 아쉬움 중에 하나입니다.”
2000년에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셨는데, 중요한 시기인 만큼 역할이 막중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당시,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으로 큰 실수 없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것과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하여 경의선 철도를 연결하고 개성공단 개발을 위해 ‘남북국방장관회담’을 제주도에서 열게 한 일이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로 기억됩니다.”
“국민적 공감대를 토대로 한 대북정책이 마련되어야”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난 10년의 대북정책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정권의 변화에 관계없이 평화와 통일을 위해 지속적인 대북정책이 추진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통독 전, 양독이 20년 동안 ‘불신의 벽’을 허물면서 ‘신뢰의 성’을 쌓은 결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도 인내와 설득을 통해 남북간에 쌓인 불신을 제거하고 ‘신뢰의 성’을 쌓아야 화해ㆍ협력이 지속되고 평화통일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북정책은 무엇보다도 일관성을 갖고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대북정책도 그때그때 수시로 바뀐다면 대북정책의 지속성이 떨어지고 정책의 효과 또한 가시화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와 야, 보수와 진보가 공유할 수 있는 대북정책의 컨센서스를 도출하고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지속할 수 있는 대북정책의 방향과 기조를 국민적 공감대를 통해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독일의 경우 사민당에서 기민당으로 바뀌어도 동방정책의 기조는 지속되었고, 결국 사민당에서 출발한 동방정책이 기민당에서 통일 달성으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남북이 합의한 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계승성을 갖고 이행하는 모습을 정착시켜야 합니다. 전임 정부가 합의한 것을 후임 정부가 부인하고 휴지조각으로 만든다면 남북의 합의는 더 이상 효용성이 없고 상호 신뢰는 증진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김정은 체제, 당분간 김정일 유훈에 따른 정책노선 유지할 것”
김정은 승계 이후, 북한은 권력구조 안착을 위해 주력하고 있는데요, 김정은 체제의 북한을 어떻게 보십니까?
“짧은 후계준비과정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사후 안정적이고 신속하게 권력승계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는 바, 김정은 체제는 나름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 중앙위 정치국회의의 추대로 군 최고사령관에 오르고, 4월 11일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전당ㆍ전인민적 추대형식으로 노동당의 제1비서가 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 제1위원장으로 추대되어 김정은 체제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습니다.
김정은 체제는 당분간 김정일 위원장의 유훈에 따른 정책노선을 유지해 갈 것이며, 이러한 바탕에서 핵심 엘리트 개편 및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특히, 각 부문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최고실세로 부상한 최룡해(62)가 세대교체의 상징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는 경제강국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당면과제로 강조하고 있어, 향후 먹고사는 문제와 경제부문에서의 정책적 성과(performance)여부가 장기적 체제안정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심각한 경제난 해결 등 무엇보다도 경제문제 성과를 보여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권력이동 과정에서 엘리트들의 균열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차단하는 일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2010년 당대표자회에서 이영호의 급부상,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최룡해의 급상승 등 권력 엘리트들의 부침과정에서 물밑의 갈등과 경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바, 잠재적 갈등이 가시적인 엘리트 균열로 심화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안정성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최근 북한이 미국과의 2·29합의에도 불구하고 ‘광명성 3호’발사를 강행했습니다. 앞으로 북미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북한은 김정은 체제 출범과 함께 강성대국 진입을 위한 전환적 계기 마련과 함께 김일성 탄생 100주년에 즈음, 체제결속 차원에서 ‘광명성 3호’ 로켓을 발사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이번의 장거리 로켓 발사는 미국을 겨냥한 대미 위기조성 전술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수령, 김정은 체제의 등장을 축하하고 김일성 탄생 100년을 맞는 강성대국 진입을 과시하기 위한 ‘대내용’ 정치적 필요성에 따른 것입니다. 때문에 북한은 로켓 발사를 강행하면서도 일관되게 미국과의 2·29 합의 위반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미국과의 협상이 지속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측의 식량지원중단과 유엔 안보리가 기존 1874호 결의안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의장 성명을 발표하자, 북한은 17일 즉각 성명을 내고 미국과 맺은 2·29 합의를 파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로켓 발사 3일 만에 안보리 의장 성명이 나오는 등 국제사회가 강경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으로서는 체제 유지를 위해 굽힐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앞으로 북미관계와 한반도의 정세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추가 경제 제재 조치의 내용이나 6자 회담의 시기, 미국과 한국의 대선 전, 후를 보고 전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림의 대북정책 대신, 북한 변화를 유도하는 관여정책 추진해야”
남북관계의 경색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남북관계 발전과 안정화를 위해 남은 임기동안 현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남북 간 불신의 폭이 너무 깊어 대화와 교류ㆍ협력이 재개되는 등 남북경색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은 체제 등장과 함께 북한은 이명박 정부와는 ‘상종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이명박 정부 역시 대선을 앞둔 정치적 시점에서 획기적인 대북정책 전환을 결심하기 어렵습니다. ‘광명성 3호’ 로켓 발사로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이 강화되어 한반도 정세는 당분간 긴장국면이 지속될 것으로 보여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대외적 환경도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입니다.
우선,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긴장고조 국면을 긴장완화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나서서 대북 제재의 수위를 높이고 국제적 압박을 요구할 게 아니라, 북미 협상의 동력을 유지하고 2·29 합의가 이행될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남은 임기 동안 남북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상황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한반도 긴장고조를 방지하기 위해 북미협상과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북한 붕괴를 기대하는 기다림의 대북정책 대신, 장기적 관점에서 북한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대북 관여정책을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현재처럼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는 남북관계 전문가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북한의 대남, 대미, 대중정책 등을 잘 분석하여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일과 더불어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상생의 길을 북한 측에 잘 알리는 역할이 전문가로써 해야 하는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