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진 작가의 ‘Blue Gray’ 전시를 보고,
도자의 완성은 정지지만, 작업은 순간순간 변화의 지속이다. 변화의 원인은 변수들의 등장으로 일어난다. 무의식, 감정, 우연, 그리고 이들을 종합하는 이성에 따라서.
변화는 곡선이다. 그의 작품에서 직선은 없다. 직선이 있다면 곡선의 이어짐일 것이다. 그래서 조형적으로 유연한 곡선은 기물의 전체 형태에서 손의 강약에 따라 물결처럼 일어나지만,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선 전까지도 있는 듯 없는 부드럽고 자유로운 곡선으로 마무리 된 작품들이 눈에 띈다. 그렇게 변화의 과정이 작품에 남겨진다. 그러며 그의 도자는 회화적 유희를 품는다. 우선 도자의 면을 태토로 회화적으로 처리하여 공간의 변화를 주고, 거기에 유연한 곡선으로 구상과 추상의 그림을 그리고, 전체적인 조화를 보며 자연스럽게 생명감을 부여하며 마무리한다. 물레에서 그릇을 올리는 작업부터 그림으로 마무리하고 유약으로 옷을 입히는 전체 과정에서 작가는 손맛을 즐기며 자유롭게 유희한다. 그렇다. 도자로 논다. 도자로 놀고 장난칠 수 있을 만큼 그는 원숙해 있다.
그런 점에서 죽부인처럼 편안하게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매병의 변주는 자연스럽게 확장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준다. 위에서 얘기한 전의 소멸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처리가 우선 눈에 띄고-그 만큼 그는 그릇의 필수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구속이 될 때는 깨버릴 정도로 자유롭다. 숫자와 글자, 추상화하고 있는 화초와 낙서 그림, 그리고 흩뿌려진 점과 너울너울 그려진 곡선들은 매병의 면을 캔버스로 활용한다-그의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화가인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정호진 작가는 기본에 충실하다. 그는 도자를 그릇이라는 한계 안에서 작업하고자 한다. 크기가 작은 청자 화병, 접시, 높은 접시들은 좀 더 부드럽고 편안한 물결의 곡선들로 이뤄져 있고, 그의 페르소나인 학이 한 둘 날고 서고 있다. 예술과 실용의 결합이라는 화두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를 보며 그의 화화적 욕구가 표출되는 것을 확인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더불어 이렇게 다양하게 표출되는 그의 예술적 변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그가 도자의 그릇으로서의 기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있었다-그것은 실용성보다 조형적 감상의 성격이 강한 모난 청자 찻잔 같은 작품에서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생활 주변에서 삶과 가까이 있고 싶어 한다. 그래서일까 작가처럼 작품도 따뜻하다.
나는 잊지 못한다. 그의 칠량 작업실에서 김치전을 먹으며 듣던 청자 소리를. 그 때 막 가마에서 꺼낸 청자 작품들이 식으며 실로폰 같은 소리로 울려댔다. 청자표면의 실금들이 태어나 그물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청자가 태어나고 있었다. 생명의 소리였다.
blue gray! 생명의 길! - 여는 글
심규한
정호진 작가는 스스로 한강 마포에서 바다를 따라 강진만에 왔다고 한다. 청자빛을 찾아! 꿈같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이다. 당신이 그의 청자를 만난다면, 그의 말이 예삿말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것이다.
청자빛은 애증을 쓸어내리는 승화의 빛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회청(blue gray)이듯. 그는 철저히 현실인 gray에 살며 고투하며 이상인 blue를 추구하는 예술가다. 예술가로서 그의 힘은 현실의 gray에 뿌려진 씨앗이 발아해 이상인 blue를 찾아가는 오디세이의 모험 여정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유목민이기도 하다. 그의 말처럼 먼 옛날 아침볕을 찾아 초원을 가로질렀던 조선인의 원형무의식이 그의 핏줄기 안엔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든 그의 빛을 찾는 여정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청자는 그에게 운명이다.
만약 당신이 강진만에 와 바다를 본다면 gray한 강이 blue gray로 빛나는 순간을 만날 것이다. 한바탕 태풍이라도 지난 듯 비가 쏟아진 뒤, 갠 하늘에 새 하얀 구름이 흘러가며 강진만에 얼핏얼핏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순간 나는 강진만의 가장 아름다운 청자빛을 만나곤 한 다. 그때의 한없이 맑고 깊은 투명함 속에, 바로 그 순간 속에 영원이 열리는 것 같다. 깊은 그늘이 빛을 만나는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 나는 그것을 정호진 작가가 담고 싶은 blue gray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강진만은 그의 둥지가 되었다.
그의 작업은 철저히 육체적이다. 그는 강진과 산을 누비며 흙을 찾고 도자의 혼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작업을 한다. 그의 손끝으로 도자혼은 햇살을 찾아 발아해 가지를 뻗고 잎과 꽃을 피우고 급기야 날아오르기도 한다. 손맛으로 살아 꿈틀대는 그의 작품을 보라. 그 손맛은 흡사 뛰어난 요리사를 연상케 한다. 구불구불 뭉치고 확 풀어지고 가볍게 스치고 날아가며 기운생동 하는 흔적들에 매혹되지 않을 사람 있을까? 인위의 작업이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불꽃 가마를 통과하는 순간, 영원의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난다. 그렇게 그는 무수히 많은 생명을 낳았다.
이번 전시회에서 우리는 더욱 다채롭게 번성한 생명들을 만난다. 그 중 개인적으로 눈에 들었던 것은 흡사 문자처럼 추상화하고 있는 모란문이다. 모란이 아니고 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동하는 추상의 생명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무르익은 추사의 획처럼 인상적이다. 그는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다.
한 없이 넓고 높은 blue gray한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학은 그의 페르소나일 것이다.
축사
안녕하세요?
강진문화마당의 심규한입니다.
우선 정호진 작가의 열세 번째 전시회를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더불어 축사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정호진 작가가 왜 말주변 없는 저에게 축사를 부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올해로 육년 째 정호진 작가를 만나고 있는 저로서는, 여기 계신 여러분 중 아마 작가를 가장 짧게 만나 작가의 작품세계와 진화과정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정호진 작가의 작품에 매혹된 사람으로서 간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흙에 생명을 불어넣어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창조하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매혹을, 저는 정호진 작가의 작품이 가진 생명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감을 저는 작가가 가진 모순과 열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블루 그레이’처럼 그는 자본주의 현실에 지독한 불만을 갖고 그것에 연루되어 살면서 동시에 예술의 순수성과 이상을 추구하는 모순의 작가입니다. 그는 예술로 도피하지 않고 현실 속에서 삶으로 예술을 껴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려면 엄청난 열정과 체력이 필요했을 겁니다. 이런 모순과 갈등의식이 지금도 작가의 꺼지지 않는 화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자의 전통과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의 답습과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형상의 파격을 실험하고 무늬의 자유를 구사하며 생명을 불어넣는 작가의 생명 넘치는 살아있는 유희를 사랑합니다. 글쎄요. 거기서 살아 있는 맛을 느낍니다. 작업 자체가 아름다운 생명이며 진화 과정라고 생각합니다.
정호진 작가의 살아있는 도자혼이 오늘 이렇게 꽃피고 또 어떻게 진화해갈지 궁금해집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작가의 노고에 감사하며, 이어질 고투에 대해 진심어린 응원과 축복을 보냅니다.
고맙습니다.
2023.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