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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전염병》- 신병주
이 책은 서울대를 나온 뒤, 현재는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신병주 교수가 저술한 것이다. 신 선생은 이미 KBS 역사 저널 ‘그날’과 ‘글로벌 한국사, 차이 나는 클래스, 신병주 역사 기행’등 프로그램을 통해 친근하고 재미있게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꾸밈없어 보이는 얼굴에서는 친근감이 뚝뚝 떨어지기도 하며, 많은 저서들을 남기기도 했다. 《왕비로 산다는 것》, 《참모로 산다는 것》, 《왕으로 산다는 것》,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 《책으로 읽는 조선의 역사》, 《조선왕실의 보물, 의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등인데 아직까지 다 읽어보지는 못했다.
《우리 역사 속 전염병》이라는 이 책에는 수많은 통계를 제시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조선왕조실록》등에 있는 자료일 테지만, 책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코로나19가 줄었다고 하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른다. 이미 지난 3년 동안에 전 세계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600만 명 이상 죽었다는 것도 경악스럽다. 이 책은 조선시대 전염병을 중심 소재로 다루는 것 같기는 한데,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전염병은 《삼국사기》백제 온조왕조 기록이다. “온조왕 4년 봄과 여름 가뭄과 기근이 생기고 역병이 유행하였다.”고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천 건 이상 전염병 기사가 등장하는데, 역병을 나타내는 용어는 여역(癘疫), 두역(痘疫), 학질(瘧疾), 홍역(紅疫), 악병(惡病), 시병(時病), 염병(染病), 온역(溫疫), 호열자(虎列刺)등 무려 60종이나 된다. 최초 기록은 1393년 3월 태조 이성계가 심혈을 기울여 창건한 양주 회암사에서 역질이 크게 유행해 수 개월간 계속되어 왕사(王師)이던 무학대사(1327∼1405)가 급히 광명사로 옮겼고, 중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였다. 또 태종 때도, 세종 때도 역질이 끊이지 않았으며 특히, 1673년(현종 12)에는 “경상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5,100여 명이고, 그중 역병으로 죽은 이가 200여 명, 소 역질도 번져 8월까지 779마리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 때인 1733년(영조 9) 전라도에 역질이 유행하여 2,081명이 죽고, 영조 17년(1741년)에는 관서지방의 역질로 3,700명이 죽었다고 했다. 이는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조정에서는 백방으로 처방을 내리고, 구휼정책을 시행했지만 1750년 한 해에도 경기도에서 3,487명, 강화도에서 349명, 영남에서 1,933명, 해서(황해도)에서 464명이 죽는 등 폭풍처럼 전국을 휩쓸었다고 《영조실록》은 상세히도 기록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임진년 병화보다 더하다”라고 기록했을까. ⇒ 임진란이 끝난 73년 후인 1671년(현종 12)의 기록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전쟁의 양상은 물론 세계를 발깍 뒤 짚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때 2년 동안 전세계에서 무려 2,500만∼5,000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1918년 프랑스에 주둔하던 미군 병영에서 시작된 독감은 9월 미군들이 철수하면서 미 본토에까지 확산되어 한 달 만에 2만 4,000명이 죽고, 미국인이 총 50만 명, 영국인이 15만 명이 죽었다. 스페인 독감은 조선에도 들어와 당시 조선인 740만 명이 감염되고 그중에 14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였으나, 2005년 미국의 한 연구팀이 알래스카에 묻혀 있던 한 여성의 폐 조각에서 바이러스를 분리해 재생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이것이 ‘인플렌자 A형’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근년에 샤스, 신종플루, 메르스 등이 유행했는데 이들도 모두 인플렌자 A형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킨 것이었다. 2012년 전 세계에서 유행한 샤스는 2013년 7월까지 774명이 사망하고, 전세계 214개국에서 발병했다. 2015년 유행한 메르스는 우리나라에서만 186명이 감염돼 39명이 죽었다.
우리나라에 근대식 서양 의료기술이 들어오고 병원이 설립된 것은 언제였을까? 서양 세력이 탐탁치 않았던 대원군과 고종 입장에서 보면 외래 병원이 탐탁치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1884년 정부 신문〈한성순보〉에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양성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10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이 병원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우정국 낙성식에 참석한 수구파 중심인물이었던 민영익이 개화파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고 이에 미국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하여 살렸다. 이에 고종이 서양식 병원을 설립하도록 윤허한 것이었다.
국립으로 설립된 제중원은 알렌의 명성이 날로 높아져 하루에 260여 명 환자를 볼 때도 있었다고 한다. 알렌은 선교사 스크렌턴과 헤론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1886년에는 여의사 엘러스가 파견됐다. 엘러스는 성종 때 의녀 장금이를 떠올리기도 한다. 1886년에는 서양의학을 교육하기 위한 국립 제중원 의학당이 개교하고, 알렌에게는 당상관 벼슬을 하사하기도 했다. 엘렌의 뒤를 이은 에비슨이 1899년 제중원학교를 설립해 제중원은 유지했지만, 1904년 병원 이름을 미국 실업가이자 후원자였던 세브란스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이 뿌리박고 있어서 남녀칠세부동석을 외쳤을 만큼 남녀가 하는 일이 구분돼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의녀(醫女)가 생길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406년(태종 6) “재생원에 명하여 여자아이에게 의약을 가르치게 하였다고 지체생원사 허도가 상언하였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서는 이때 부인의 병을 진맥하고 치료하기 위해 의녀를 둘 것을 상소하였고, 태종 때 처음으로 의녀 제도를 설치했지만, 재생원에는 자질을 갖춘 의녀가 5명 정도로 그 수가 매우 부족했다. 하여 의녀를 더 뽑아 줄 것을 요청했는데, 태종 18년 “비자(婢子-별궁과 종친 사이의 문안 편지를 전달하는 여자 종)안에서 나이 13세 이하인 자 10명을 더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다.
체계적으로 의녀를 뽑아 교육함으로써 의녀는 진맥, 침, 뜸, 약의녀로 나누어 양성되었다. 한의학에서는 일구이침삼복약(一灸二針三服藥)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뜸을 으뜸으로 쳤다. 궁궐에서의 출산은 왕실을 안정시키는 행위로 매우 중요했다. 의료수준이 열악했던 만큼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례도 많았다. 세자빈 신분으로 단종을 낳다가 승하한 현덕왕후, 인종을 출산하다가 사망한 장경왕후가 대표적이다. 산모가 출산하다 사망하는 경우 의녀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1544년(중종 39) 2월 19일 효정옹주가 해산 후 병세가 위독하자, 즉시 의관과 의녀를 보내 진료토록 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러나 의관과 의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옹주가 숨을 거두었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있었지만, 중종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대로 출산이 잘 이루어졌을 때는 의관과 의녀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는데, 1626년(인조 4)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 석철이 태어나자, 인조는 산실청 도제조 윤방에게 안구마(鞍具馬-안장 얹은 말) 1필을, 의녀에게는 미포(쌀)를 각각 나누어 주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의 의사나 간호사 시험처럼, 의녀들도 교육시킨 후 일종의 시험을 보았는데, 일정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였을 때는 ‘다모’가 되기도 했다. 다모는 기본적으로 관청에서 식사나 차를 끓이고 대접하는 일을 한 관비였다. 다모는 필요에 따라서는 포도청에 소속되어 범인을 체포하는 일도 했는데, 이런 임무가 의녀에게 배당되기도 하였다. 2004년 방영돼 인기를 끌었던 의녀 〈대장금〉은 궁중 요리사라는 캐릭터까지 결합하여 인기를 끌었고, 수사관으로 사건에 개입하는 의녀의 활동을 그렸던 〈다모〉또한 흥미로운 캐릭터가 아닐 수 없었다.
‘대장금(大長今)’은 중종 때 궁중에서 실제로 활약했던 의녀를 그린 드라마로 그녀 이름을 따서 만들고 여러 나라에 수출되어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드라마의 모티브는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의녀 장금이 이름을 그대로 땄다. 《중종실록》에는 장금이라는 이름이 1515년(중종 10)에 처음 등장한다. “의녀인 장금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 대고(大故-왕비의 승하)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하더라도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장형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양단을 참작하여 죄를 정한 것이다.”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다가 승하하자 의녀 장금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중종은 산후조리에 힘쓴 장금의 공을 인정하여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명을 내린 것이다. 대간들이 “장형을 속바치게 하니 매우 미편합니다.”라며 거급 장금이의 처벌을 원했지만, 중종이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장경왕후는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가 결혼 7일 만에 폐위당한 후 후궁으로 있다가 계비가 되었고, 1511년(중종 6) 효혜공주에 이어 1515년 적장자(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출산 1주일 만에 승하했다.
이후 선조가 승하하자 어의였던 허준이 유배를 갔는데 이것이 대표적인 의의 처벌 사례이다. 그러나 선조를 이은 광해군은 허준의 재능을 아껴 서울 주변에 머물게 하고 왕명으로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했다는 것도 역사의 기록이다. 중종은 1544년 승하했는데 유독 《성종실록》에는 장금이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중종은 이해 2월 9일 의원 박세거와 홍침의 품계를 올려주고, 장금에게 쌀과 콩 5석을 주었다고 한다. 봄에는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하다가 10월 25일 “오른손 맥이 가늘고 느렸다. 다시 약제를 의논하여 오령산에 마황, 방기, 원지, 빈랑, 회향을 첨가하여 다섯 차례 약을 드렸다.”고 하였고 다음 날인 10월 26일 장금이 이름이 또 보인다. “내 증세는 대체로 조금 뜸한 듯하나 대변은 아직도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약을 의논하고 있다. 내 병은 장금이가 잘 안다.”고 했다. 중종은 1544년 11월 15일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했는데, 중종이 승하한 후 《중종실록》에 더이상 장금이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왜 장금이 이름 앞에 ‘大’자를 붙였을까 하는 것인데, 의녀로서 그만큼 공이 컸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시대 의녀 기록은 장금이 외에도 성종 대 장덕과 귀금, 선조 대에 선복과 애종, 인조 대 연생과 송월, 심지어 정조대 제주 출신 김만덕에 대한 기록까지 아주 많다.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의녀가 아니지만, ‘醫女班首’라는 직함을 준 것은 그녀가 1793년 제주도에 대가뭄이 들자 전 재산을 풀어 제주 백성을 구제한 선행이 알려지면서 의녀의 모습과도 같았기 때문에 요즘 말로 치면 ‘명의’라는 칭호를 준 것이다. 김만덕의 선행이 알려지자 정조는 직접 궁으로 불러 소원을 묻고, 관의 허락없이 제주도민이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규칙을 깨고, 김만덕이 금강산에 가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백성의 병을 치료하는 데 크게 활용된 허준의 《동의보감》은 이쯤에서 꼭 살펴봐야 할 명저인 것 같다. 《동의보감》의 핵심은 병을 고치기에 앞서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예방을 중시했다는 것,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조선 사람들이 병약의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썼다는 것, 당대의 모든 의학 정보를 체계적으로 찾기 쉽운 방식으로 편집했다는 것과 같은 실질적인데 있다.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에 대한 기록은 《선조실록》에는 1575년(선조 8) “명의 안광익과 허준이 들어가서 상의 맥을 진찰하고는 상이 전에 비해 번열(煩熱-몸에 열이 나고 가슴 속이 답답하여 괴로운 증상)이 많아 찬 음식 드시기를 좋아하고, 문을 열어 놓고 바람을 들어오게 한다고 하였다.”는 기록이다. 허준은 30대에 이미 명의 반열에 들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선조가 허준을 신임한 것은 1591년 1월 4일 기록에서 “지난해 두창이 매우 위험하여 여염에서는 한집안에서 잇달아 죽은 경우도 있다니 놀라고 참담함을 느꼈다. 이번에 아이(광해군)의 누이도 두창으로 잃었다. 불과 열흘 사이에 위급해져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었는데, 다행히도 다시 살아난 것은 허준의 공이니 가자(加資-품계를 올려줌)하지 않으면 그 공을 갚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1593년 의주까지 피난했다가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전쟁 여파로 백성이 질병과 기근에 허덕이는 것을 알고 피해회복은 물론 의서를 편찬하기로 했다. 1596년(선조 29)선조는 수의(首醫-내의원의 우두머리 의원)허준에게 의학서적 편찬을 지시하고, 왕실에 소장한 고금의서 500여 권을 내주었다.
허준은 《동의보감》에 편찬에 앞서 긴급한 《언해태산집요》,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등을 그해에 편찬해 바쳤으나 《동의보감》은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임금을 살리지 못한 책임을 물어 도성 밖으로 쫓겨났고 사간원에서 허준을 중도부처(中途付處-한 곳에 머물게 하는 형벌)하거나, 위리안치(圍籬安置-울타리 속에 가둠)할 것을 거듭 건의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세자시절 자신의 두창을 치료한 것을 기억하며 허준이 도성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1610년(광해군 2)마침내 《동의보감》을 완성한 허균은 이를 광해군에게 바쳤다. 허준의 나이 72세 때다.
《동의보감》은 목차 2권, 본편 23권으로서 〈서문〉과 〈집례〉를 통해 허준이 책의 편찬한 동기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본문은 〈내경편〉4권, 〈외형편〉4권, 〈잡병편〉11권, 〈탕약편〉3권, 〈침구편〉1권 등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 내용은 생략하지만, 한의사라면 당연히 모두 공부하지 않을까 싶다. 〈잡병편〉에 보면 내과 질환과 외과질환은 물론 부인과·소아과에 관한 질병들도 기록하고 있고 이중에 온열, 괴질 등은 전염병에 관한 것으로 전염병 유행에도 대처하려고 했다.
《동의보감》은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의서로 자리 잡고, 현재도 한의학을 대표하는 저술로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동의보감》은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이미 30여 차례, 일본에서도 번역돼 출간된 바 있다.
그런데 허준에 대해서는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드라마 〈허준〉에서 설정했던 것처럼 스승 유이태의 시신을 해부하지도, 심지어 그가 스승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1990년 출간된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허준이 스승의 시신을 해부한 것으로 설정하여, 의학적 실력을 갖춘 인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고, 유이태가 산청 출신이고 허준의 외가가 산청이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유이태(劉爾泰, 1652∼1715)는 허준(許浚, 1539∼1615)보다 한참 후배였으므로 결코 스승이 될 수 없다. 2007년 개관한 산청 ‘한의학박물관’도 가봐야 할 여행코스다 싶기는 하다.
실학자 정약용은 정조대 인물로 그가 천주교 박해의 희생물로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간 머물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는 것은 다 안다. 하지만 그 많은 저술 중에 의학서적인 《마과회통》을 남겼다는 것은 잘 몰랐다.
《마과회통》은 전염병 치료를 위해 분투했던 정약용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마과회통(麻科會通)’의 마과(痲科)는 痲疹(홍역)계통 병을 말하고, 그 치료법을 모아(會) 잘 통(通)하게 하도록 정리했다는 뜻이다.
정약용이 홍역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데는 개인적 사정도 있었다. 바로 자식의 죽음이었는데,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난 그해(1789년) 태어난 아들 구장이 마과를 앓다가 죽자 몹시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까지 지을 정도였는데, 이 무렵의 《정조실록》에는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가 낳은 아들 문효세자도 홍역으로 죽었다. 이에 정조는 시약청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문효세자는 1786년 창덕궁 별당에서 훙서(薨逝-왕족의 죽음)했는데, 무덤은 용산구 효창동에 생모 무덤과 함께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개발을 이유로 고양시 원당동으로 옮겨 현재에 이른다.
홍역은 전염이 빠르고 고열이 심하여 아주 위험했다.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무엇보다 빠른 대처가 필요하고 가까운 곳에서 처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했다. 1798년 정약용은 《마과회통》을 완성했지만, 전염병과의 악연은 계속됐다. 6남 3녀 중에 4남 2녀를 잃었다. 낳기도 많이 했지만 대부분 죽었다. “삼동이는 병진년 11월 5일 태어나서 무오년 9월 4일 죽었고, 그다음 애는 이름이 없다. 구장이와 효순이를 두척산에 묻었고, 삼동이와 그다음 애도 두척산 기슭에 묻었으니, 농장(농아)이도 역시 두척산 기슭에 묻어야 할 것이다. 죽은 애들이 산 애들의 두 배다. 아아,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잔혹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할 것인가.”탄식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싶다.
정약용은 《마과회통》에서 당·청대 학자들의 저서를 여러 차례 인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했다. 옛날의 명의일지라도 시대가 지나면 적절히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 허준에 대해서는 16세기 당시 독창적 의견으로 중독성 질병이 급박하여 사사로이 억척하고 처방을 베푼 것이라고 하면서도 이론은 학문에 깊어 귀중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허준을 명의의 반열에 넣은 근거를 밝히고는 있다.
《마과회통》에는 홍역이 발병하는 주기까지 상세히 관찰해 기록했지만, 당시 의술로는 이것을 퇴치할 수는 없었고, 운기론과 풍속상 오류를 비판했던 정약용이었으나, 몸속에서 독이 발현한다고 본 것은 - 독이 피부를 뚫고 나와 고름이 생기고 딱지가 된다 - 주목되기는 해도 전염병을 정확히 진단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 정약용은 《종두요지》를 써서 새로운 두진(痘疹-천연두)치료법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몸속 태독을 피부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거꾸로 독을 인체 내에 투입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영국에서 개발된 우두법(牛痘法)을 종두법(種痘法)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를 시행한 이는 지석영(池錫永-1855∼1935)이다. 그는 서울 관훈동에서 중인 가문 자제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중인은 양반과 상민 사이에 위치한 신분으로 기술직인 의관, 역관, 율관이나 관청의 서리, 양반 첩의 자손인 서얼 등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 의학책들을 탐독하다가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개발한 우두법에 관한 책도 읽었다. 제너는 21세 때 런던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개원하였는데, 당시 천연두가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소젖을 짜는 부인이 “나는 우두를 앓았으므로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 종두법을 연구했다. 우두 바이러스는 소의 유도나 유방에 생기는 것으로 소젖 짜는 사람은 이를 통해 면역력을 갖게 된 것이었다.
우두를 라틴어로 ‘바리올라에 바키나에’라고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예방 접종을 의미하는 ‘백신’이란 말의 어원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파스퇴르는 백신의 의미를 전염병 예방을 위한 물질 접종으로 확장시켜, 탄저병 백신을 개발하고, 1885년에는 광견병 백신도 개발했다. 장티푸스, 콜레라, 페스트 백신까지 잇따라 개발되고, 1902년에는 결핵 예방 백신인 BCG까지 개발되게 되었다.
이 무렵인 19세기 말은 조선의 역사는 파란만장 그 자체다. 178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고, 1882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 차별대우로 밀린 봉급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켜 결국 타깃은 일본으로 향해 일본 공사관을 방화해 이것이 일본의 반감을 불렀고, 이듬해 1883년 최초로 발간된 근대식 신문 《한성순보》에서 종두법에 관한 외국 기사를 크게 실으면서 위험성을 알리기도 했다. 지석영은 종두법 시행과 보급에 힘쓰면서도 문과시험에 합격했는데, 이후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지평 등을 거치면서 중앙관리가 되었다.
1887년 중앙정부 조세 및 국정의 난맥상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고는 5년간 강진의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한 지석영은 유배 중 농서 《중맥설》과 위생서 《신학신설》을 저술하기도 했는데, 두창이 자주 유행하자 의료사업에만 관여한다는 조건으로 유배가 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식 속에서 당시 사회폐단을 적극 피력하는 개혁 성향을 드러냈는데, “청나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일본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수구파인 민영준과 진령군*에 대한 처벌과 인재육성을 통한 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진령군 : 여성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출생 연도나 출생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군(君)으로 봉해지는게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데다가 조선 초기도 아닌 말기를 살았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를 추적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야사에는 본명이 이성녀 또는 박창렬이라 하고 이씨 성을 가졌지만, 이름을 버린 무당이라 하기도 하는 등 이름에 대하여 몇 가지 추측이 있지만 어느 것도 분명한 근거는 없다.
지석영은 형조참의와 승지를 거쳐서 동래부사를 지냈는데, 동래에서도 우두 보급과 시행에 진력하였다. 기장군에는(읍성 비석군) 〈지석영 선정열세불망비〉가 있어서 동래 지역과의 인연을 읽을 수 있으며,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제로 병합되자 지석영은 모든 공직을 버렸다. 하지만 의학적 능력만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고, 1913년 의생(醫生)으로, 1915년 전선의회 회장으로, 1917년에는 동서의학을 절충한 조선병원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35년 81세 일기로 타개했다. 묘는 구리시 망우공원에 있다.
조선시대 두진(痘疹)이라고도 부른 천연두와 악연이 맺힌 임금은 숙종이다. 본인은 물론 자식인 경종과 영조까지 두진에 걸렸고, 본부인이었던 인현왕후는 20세에 이 병으로 사망했다. 이무렵 두진을 극복하는데 가장 기여한 의원은 유상(柳尙)이란 인물이다다. 그는 숙종의 두진을 잘 치료한 공으로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했는데, 1683년(숙종 9) “의관 유상을 특별히 동중추의 초자(특별히 직급을 올림)하고 금권자(金圈子)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동중추부사 직책을 내리자 사헌부에서 “유상을 치우치게 특이한 은사를 주는 것은 혹 용납해도 좋겠지만 나머지 의관들을 수령에 제수하라는 명은 결코 주요한 관직을 아끼는 도리가 아닙니다.”하고 의관에 대한 지나친 대우를 경계하고도 있다. 그러나 숙종의 신임이 워낙 커서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콜레라는 감당이 안 된 무서운 전염병으로 마을 노인들이 장례식에 갔다가 한 마을 노인 9명이 모두 죽어 나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콜레라균에 감염되면 급성 설사가 나고 빠르게 탈수가 일어나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수인성 감염질환인데, 근년까지도 콜레라가 유형하기는 해도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고, 미리 대비도 하는 것 같다. 원래 콜레라는 2500년 전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서 나타난 것으로, 이후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전세계로 퍼져 1820년부터 대유행이 6년간 지속되었고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콜레라는 《숙종실록》에 처음으로 공식 기록이 나타나는데, 당시에는 병명을 몰라 ‘괴질’이라고 했다가 중국을 본따서 ‘호열자(虎列刺)’로 불렀다. 호랑이가 몸을 찢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중국에서는 ‘호열랍(虎列拉)’이라고 했다. 이것도 호랑이가 몸을 늘려서 꺾는다는 뜻이다. 콜레라는 쥐가 발생시키는 질병이라는 인식이 강해 ‘쥐통, 쥐병’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1821년(순조 4) 4월 콜레라가 발생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이후 거의 매년 확산되자, 1786년에 개항했던 부산, 원산, 인천에 검역소를 설치하고 입국자를 봉쇄하고 검역을 강화한 것은 코로나19 때와 같았다.
정조의 아들로 아버지에 이어서 임금이 된 순조는 아버지가 하던 화성 거동도 중단하며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였지만, 1821년 한 해 동안에 전국에서 콜레라가 창궐해 8월부터 9월 10일 사이 주로 평안도와 서울 등 북쪽지방에 유행했고, 9월 중순부터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도 창궐했다.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에서 콜레라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고 있기도 한데, “신사(1821년) 가을에 이 병이 유행했는데, 열흘 동안에 평양에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요, 도성 5부에서 죽은 자가 13만 명이다. 상강(霜降) 이후부터 점점 수그러졌다.”고 하면서 “전근곽란 같기는 하나 치료법은 알 수 없었다”고 하여 속수무책이었음을 말했다.
겨울에 잠잠하던 콜레라는 이듬해 1822년 4월 말부터 한양과 강원도, 평양에서 다시 시작되어 7월에는 조선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에 왕명으로 사망자 숫자를 보고하고 별여제(別厲鬼-여귀를 위로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지낼 것을 재촉했으며, 이때까지 황해도에서 사망자가 만여 명을 넘어섰는데, 개성에서만 991명이 죽고, 수원부에서도 473명이, 광주(廣州)에서는 885명 이상이라고 장계가 올라왔다. 8월까지 함경도에 1만 500명, 평양에서는 6,113명이 죽었다고 보고를 해왔다. 또 그동안 잠잠하던 제주도에서도 콜레라가 확산되어 1,917명 죽었다 한다.
홍역, 두진, 콜레라보다 더 악랄했던 전염병이 학질이었는데, 오죽하면 괴롭거나 힘든 일에서 벗어나느라 진땀을 뺄 때 ‘학을 떼다’는 말까지 생겼을까. 학질(瘧疾)은 모기가 옮기는 ‘말라리아’로 《동의보감》에는 “처음 발작할 때에는 먼저 솜털이 일어나고 하품이 나고 춥고 떨리면서 턱이 부딪치고 허리와 등이 다 아프다. 춥던 것이 멎으면 겉과 속이 다 열이 나면서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이 아프고 갈증이 나서 찬물만 마시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병원균이 몸 안에 잠복해 있다가 수시로 재발하여 치료하기도 매우 어려웠다.
《난중일기》, 《징비록》과 더불어 임진왜란 시기 3대 사서로 꼽히는 《쇄미록》은 9년 3개월간의 매일 일을 기록한 오희문이라는 선비의 개인 일기인데, 여기에 보면 “아들의 처도 학질에 걸려 지금까지 10여 직을 앓았다”고 했다. 오희문 본인을 비롯해 가족들이 학질로 고생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막내딸 단아가 학질로 사망했다고 하면서 딸을 잃은 아픔을 “ … 약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고 가래가 끓어서 소리가 나더니 끝내 내려가지 않아 콧구멍으로 도로 나온다. 결국 말한마디 못하고 훌쩍 떠나버렸다.”라고 했다.
올해(2024년)로 꼭 500년 전인 조선 중중 19년에도 온역이라는 역병이 유행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3월 이후에 의주에서 687명, 철산에서 169명, 용천에서 39명, 곽산에서 정월 이후에 죽은 자가 4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관리에 대한 처벌도 이어졌다. 7월 27일 “평안도 의주·용천·철산 등의 고을에 여역이 크게 일어 죽은 군민이 1,600여 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런 근심거리를 두고 영사 남곤이 지적했듯이 백성과 조정은 무지 자체였다. “이 병을 얻은 사람은 며칠 만에 죽는데, 무릇 백성은 어리석어 의약을 모르고 귀신만 섬기므로 구완할 방도를 몰라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여 의약보다 미신에 의존하는 당시의 세태를 지적했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살피는 것은 전염병은 아니지만,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기(腫氣)다. 조선의 27명의 왕 가운데 종기가 원인이 되어 사망한 임금은 적어도 5명에 이른다. 문종, 성종, 효종, 현종 그리고 정조다. 이외에 태종, 세종, 세조, 중종, 숙종도 종기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흔한 질병 중의 하나였다. 세균 감염으로 피부에 생기는 종기는 지금은 외과 수술이나 항생제로 쉽게 치료되지만, 이것들이 없었을 때는 정복하기가 어려운 병인 것이었다.
효종은 1659년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이때 효종이 의관들에게 자신에게 생긴 종기가 계속 커지는데, 침을 맞아야 할지 묻는다. 의관 신기귀는 침을 맞아야 한다고 하고,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에 효종이 침을 맞기로 하면서 침을 놓자 침구멍에서 피가 나왔다. 침이 혈락을 건드려 계속 그치지 않아 청심원과 독삼탕을 올렸지만, 효종은 결국 승하했다.
정조는 승하하기 7년 전부터 머리에 난 부스럼 때문에 속이 답답하고 밤잠을 설치고 두통을 앓는 등 고생했다. 부스럼에 약을 붙이거나 침을 놓아 병종을 다스렸는데 이것이 만년에도 그를 위협했다. “나는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상승하여 등이 뜸을 뜨는 듯 뜨겁고 눈은 횃불같이 시뻘겋고, 숨은 가쁘게 쉴 뿐이다. 현기증이 심하여 책상에서 힘을 쏟을 수가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참지 못하게 한다”는 기록으로 봐 여러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1800년 6월초 정조는 등창이 나고 20여 일만인 6월 28일 삼복더위 속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정조의 나이 4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