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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초 청계는 고향, 내앞(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을 떠나 한양 근교의 조그마한 암자에 머물러 있었다.
과거시험 정보는 아무래도 시골에 비하여 한양이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여름날, 청계(김진ㆍ
1500년~1580년)는 소략한 점심상을 물리고 서둘러 공부방에 들어앉았다. 시험일이 임박해오니 한시라도
시간을 아껴 문장을 외우고 모의 문제를 풀어 보는 등 책문에 대비하느라 마음이 바쁘기만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책을 펼치자마자 연신 잠이 쏟아졌다. 눈을 헤집고 귀를 당겨도 보지만 밀려드는 수마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청계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책상에 엎디어 깜박 잠이 들고 만다.
“청계. 이 바쁜 시각에 어찌 그리 한가하게 졸고 있는가”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한 사나이가 흰 도포 자락을 날리며 암자의 계단 밑으로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여보시유, 화상…”하고 다급하게 불렀더니 힐끗 뒤를 돌아보며 그 사내는 “생전에 참판하는 것보다 죽
어서 판서되는 일이 더 쉬울 걸세. 훗날을 도모하게나” 라는 말을 남기며 홀연히 자신의 모양을 감추었다.
꿈인 듯 생시인 듯 아주 모호한 상황이었다. 청계는 문득 포은의 시(몽) 한 구절을 떠올렸다.
‘꿈을 깨고 나면 부질없건만 꿈을 꾸고 또 염려를 하네/
어찌하면 감통이 있을까/
은황제는 꿈을 꾸고 부열을 얻고, 공자는 꿈을 꾸고 주공을 만났네’//
청계는 사나이가 남긴 ‘훗날을 도모하라’는 말을 곱씹으면서 마침내 과거에 대한 집념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부열을 얻은 황제와 주공을 만난 공자를 꿈꾸며.
◆비보의 숲으로 시작한 마을
내앞으로 돌아온 청계는 동구 밖에서 잠시 말을 세우고 솔밭을 걷는다. 영양 일월산(1,219m)에서 발원
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을 만들어내는 반변천의 맑은 물이 예나 다름없이 굽이굽이 돌아내린다.
유속이 빠른 물길은 소리마저 청아하다. 솔가지 가장귀에 걸린 석양이 넓은 강역을 금빛으로 출렁거리게
하니 개울가의 맑은 모래톱이 마치 금싸라기처럼 반짝거린다. 수십 년의 나이테를 자랑하는 송림 사이로
할아버지의 어질고 지혜로운 손길이 포근하게 전해진다.
이곳은 청계의 할아버지, 김만근(1446년~1500년)이 내앞 마을에 삶터를 정하면서 굽이져 흐르는 물길과
어울리는 솔숲, 개호송림을 온 정성을 다해 조성한 곳이다. 내앞이 비록 길지라고 하나 한 가지 흠은 마을
입구가 텅 비고 트인 것이었다. 청룡, 백호가 상서로운 기운을 안고 마을 안으로 들어오기에는 그 입구
(수구)가 너무 넓게 터져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입이 너무 커서 기운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새 나가는 듯했다. 그래서 청계의 조부는 마을 앞 700~800m 거리의 반변천 가장자리에 자갈과 모래를
막아 넓고 푸른 숲을 만들어 수구막이, 즉 비보(裨補)로 삼았던 것이다. 해가 갈수록 그윽하게 어우러진
개호송 숲은 곧 마을의 기운을 적절하게 열었다 닫았다 하는 대문 역할과 함께 아름다운 서정을 안겨주
는 숲이 된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숲은 장마철이면 범람을 이겨내느라 수난을 당하곤 한다. 임란 직후에 발생한 대홍수 때는
버텨내기 어려울 만큼 큰 유실이 있었는데, 1615년경 후손들과 동네 사람들이 다시 심고 손질하여 함부로
벌채하거나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라는 숲을 보호하자는 규정까지
만든다.
그런데 지난 1987년,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의 위기에 몰리자 일천여 평의 개호송림을 5m 이상 수면
위로 들어 올리는 대공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나무는 수종에 따라 수령이 다르다. 천 년을 사는 느티나무가 있는가 하면 소나무도 500년은 족히 간다.
봄날 화사한 꽃을 선사하는 벚나무는 그리 수명이 길지 않다.
내앞 사람들은 미리 수령을 고려하여 다양한 나무들로 개호송림을 만들었는지 솔밭에는 몸때 붉은
금강송을 비롯하여 느티나무와 참나무 등 갖가지 수종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아름답고 넓은 숲이 되었다.
◆차라리 부서진 옥 조각이 되어라
마을을 개척해 나간 청계는 개호송림으로 마을의 기운을 확대시킨 뒤 마을 안쪽에 서당을 세워
어리디 어린 8남매를 남겨두고 일찍 사망한 아내를 대신해 양육에 열과 성을 다한다. 그 결과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등과한 까닭에 오자등과댁이라 칭송될 뿐만 아니라 하나같이
학문이 뛰어나고 강직한 선비로 성장한다. 그 넷째가 바로 임란 때 경상도초유사로 활동하다가
진주성대첩에서 장렬하게 순직한 학봉 김성일이다.
청계의 자식훈육과 교육철학은 특별했다. ‘차라리 부서진 옥 조각이 될지언정 하나의 기와가 되
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즉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히지 말고 살라는 뜻이
다. 직도(直道)를 위해서 과감하게 목숨을 버리라는 명령이고 명예와 의로움을 삶의 제일의로
삼으라는 지침이다. 물질적 풍요와 자기영달만을 쫓는 소아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소인됨을 경계
하면서 대인의 길을 가르친 것이다. 언젠가 내앞을 탐방하던 조용헌 교수는 이를 두고 조선조
선비정신의 정수라고 단언한다. 자기 보존의 남루한 처세요령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요즘 세태와 비교해보면 더욱 눈부신 가정교육이 아닐 수 없다.
청계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자기 학문을 익히는 것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반변천 건너 연화봉 자락의 사의리에 있는 부암서당의 손바닥만한 서당마당에서 바라보면
부모가 살고 있는 강 건너 내앞마을이 맑은 물빛에 잔잔한 물꽃 무늬를 띄우고 흐르는 같았다.
가학을 시작한 청계의 마음은 위로는 부모를 섬기듯 하고 아래로는 한없이 자애를 베풀었다.
교과 과정과 서당 규칙을 만들어 내실을 다지고 자식들과 마을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어루만
진다. 달이 가고 해가 거듭될수록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부암을 넘어 마을을 뒤덮고 뛰어
난 학생들이 속속 배출되어 나왔다.
‘대장부의 살림살이가 이만하면 족하지 않는가’. 스스로 만족하고 독락을 즐기면서 살던 청계
가 자신의 숨 때 묻은 부암서당을 뒤로 하고 여든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부암서당은 그
제자들이 청계의 영정을 모시고 추모하는 영당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훗날 그 둘째 아들이
부친을 추모하는 백운정을 짓고 그 130여년이 지날 무렵이던 1710년(숙종 36년)에 문중인사
와 향림들은 부암과 멀지 않은 안동시 임하면 사빈에 사빈서원(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9호)
을 마련하고 청계를 비롯한 그 아들 오형제를 제향한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6부자가 한
서원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린다. 그러나 그 후 서원은 존폐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현재의
위치에 남아있다. 먼저 고종 때(1868) 철훼된 것을 그 20여년 후에 향림들이 뜻을 모아 주사
를 복건하였으나 원래의 위용은 잃어버렸다. 그 후 사빈서원은 임하댐이 건설되던 1987년에
다시 수몰의 위기에 몰리자 임하리로 옮겨지고, 지난 2011년 다시 현위치(임하면 임하리)로
이건, 143여 년 만에 비로소 옛 모습을 그런대로 드러내게 된 것이다.
청계 이후 긴 세월 동안 내앞의 학풍을 이어온 사학의 공간이야 여러 곳 있었지만 그 뿌리는
자그마하게 시작한 부암서당이나 영당에서 찾아야 할 것이고 나아가 그 중심은 사빈서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너희가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오히려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줄 것이
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은 사람과 같이 볼 것이다’라고 이르던 꼿꼿한 청계의
정신을 지켜온 내앞 마을의 후손들은 일제가 들어서자 속속 동네를 비우고 만주로 떠난다.
양반의 신분을 버리고 의병을 자청한 것이다. 임금이 왜놈에게 욕을 당했으니 죽어서 조상을
만날 면목도, 이 땅에 묻힐 수도 없다는 생각으로 고향을 떠나 항일에 앞장 선 절절한 나라사랑
의 선택이었다. 사재를 털어 협동학교를 세우고 독립투사를 양성하던 백하 김대락 선생을 비롯
하여 김동삼과 김형식 등 수많은 선각자들이 목숨을 바쳤다.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온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마을과 개호송림 사이에 자리한 경북독립기념관에 들어서노라면 그 옛날 나라사랑에 몸바친 의인들의 얼굴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청계와 그 다섯 아들이 탯줄을 끊고 자란 의성김씨종택(보물 제 450호)을 시작으로 마을 길을 한 바퀴
걷고 나니 서쪽 개호송림 속에는 설화처럼 하얀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숲을 만들고 마을을 일구고, 자식교육에 온
정성을 다한 500년 전 어른들의 올곧은 지혜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