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의 서울 조계사 대웅전이...
과거 전라도 정읍의 보천교 십일전(十一殿)이였음은... 불자님들도 알 만 한 사실입니다.
보천교(普天敎=普化敎)...
그 유명한 강증산 도인의 제자 차경석씨가 창건한 종교로
당시,국채보상운동과 함께...독립운동단체들과 사회단체들에 엄청난 규모의 앞,뒷 자금을 대던 단체로서...
차경석씨가... 후기,조선의 제 2건국을 주창하며 천자로 등극하려 시도할 당시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 주장과 비슷한 슬로건등을 거는등으로 인해...여타 증산계열들에게 친일적 행각이라 비판을 받았던 점...
보천교 탄압에 의해 3000명의 신도들이 연행되고...수 십명이 고문으로 옥사하고...3만명이 망명을 했을 정도였는데도...
막상,그 교주 자신은...일제 총독부에 사절단을 파견하는등...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점조직이던 교단을...정식 보천교로 선포한 점 등을 보면...
그의 이종사촌 누님인...강증산 도인의 3째부인 고수부 부인등의 각계 증산 제자들과
적통 쟁탈이 치열했을 당시...차경석씨는...일제의 대동아 공영 입장을 살짝 두둔하면서 안전도모와
조선 천자지위 획들을 추구했던 면이 있어 보입니다.
그가 사망한 시점과 동시에...일제의 보천교 해산작전이 벌어졌음도...
그와 독립운동 성향의 일반 교도들간에는 모르는...일제와 그만의 어떤 거래가 있었음도 짐작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어쨋든 그는...독립운동단체에 가장 독보적이며 엄청난 액수의 자금을 지원했던 것은 사실로 알려져 있고...
그 규모를 증명할 대목은...
당시,천문학적인 공사비인 경부선 철도의 자금이 20만원였는데...
보천교의 발각된 독립자금 1건 액수가 10만원이였다니...
실로 차천자를 꿈 꿀 만 했던...조선 최고의 유력자였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아마도...
총독부에 사절까지 보낼 정도의 형식까지 취함을 보건데...일제가 무시 못 할 조선 최고의 유력인으로서...
그 교리와 조직구성도가 거의 같은...
태평도의 태평천국 천자 홍수전을 이으려 했던건 아닐까도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주목할 점은 이겁니다.
당시 일제와 일반 대중들이 인식한 보천교도들의 숫자가...650만명 이란 겁니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조선의 총 인구가 대개 2000만입니다.
그럼,보천교 외 엄청난 독립운동 혐의 검거자수를 기록한 훔치교등등의...증산계 동학교도들까지 포함하면...
조선인 거의 전부가 증산교도들이였단 말이 되는 겁니다...???
그건 아니겠져...?
경복궁 근정전보다 훨씬 큰...
그 보천교 십일전의 재료를 걷어다 현 조계사 대웅전으로 건립할 때의 그 전라도 정읍 태인등은 한반도 전라도가 아닌
중원의 호남성 일대로 봐야 그런 엄청난 독립자금과 신도수가 나올수 있을 겁니다.
더 재미있는 건...
보천교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싯점이 3.1운동 후 부터며...
차경석씨 사망후...십일전등의 보천교 본부가 일제에 의해 급 경매되어...60배나 싼 가격으로...불교계에 특혜낙찰...
현 서울로 옮겨진단 겁니다.
그 싯점도...미리 알기라도 했다는 듯...
일제의 본격적인 중원 대륙조선인들 학살 싯점인...난징 등의 중원 남부 학살 광란극 발발하기 바로 전이란 겁니다.
보천교의 차경석씨가...
교단의 종주권을 유지하기 위하여...일제의 비유를 맞췄던 면은 있어 보이나...
뒤론... 어쨋든지 가장 엄청난 독립자금을 후원했음을 보건데...
반면...
당시,보천교 탄압과 동일 싯점에...조선의 유일한 정식 종교로 일제에게 승인 받을 수 있었던 기독교와 불교계의 수장들은
얼마나 일제의 비위를 잘 맞추었을 진...눈에 훤 하다 하겠습니다.
........................................................................................................................................................................
http://cafe.daum.net/dojeon1691/2iPV/754 .bbs_content p{margin:0px;}
증산도 제1부흥시대의 보천교건물을 해체하여 서울 태고사(조계사)를 건축하던 당시 사진, 불교최고 건물의 전신은 증산도건물임은 역사적 사실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증산도(보천교)는 해산시키고 일제에 순종했던 조계종은 일제의 허락하에 해산된 건물을 옮겨 건축하는 현장이다. 민족종교였던 증산도(보천교)는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말살되고 해체되었으며 투옥되고 살해되었다. 일제의 독립운동가처럼, 해방후 친일파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우리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금도 왜곡하고 그당시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했던 후손들은 지금도 어렵게 살고 있다. 친일파의 자손들은 지금도 땅땅거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받드시 밝혀진다. 그것은 개벽이 있기때문이다.-편집자주-
(서울=연합뉴스) 신지홍 기자 = 최대 규모의 단층 목조건물로 불교조계종 본산 역할을 해온 서울 견지동 조계사 대웅전이 8월부터 전면 해체.보수된다.
경복궁 근정전과 더불어 당대 조선전통 목조건물의 최고로 평가받는 조계사 대웅전의 해체.보수는 대웅전의 천장과 기둥 등이 낡아 안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1928년 준공된 전북 정읍 보천교(普天敎) 십일전(十一展)을 1937년 11월 26일 현재의 위치로 이축한 것이다. 이듬해 단청을 한데 이어 전남 영암 도갑사에서 본존불상을 옮겨와 10월25일 낙성 봉불식을 거행했다.
고산 스님이 주지로 있던 70년대 썩은 서까래를 갈았고 1999년 현 주지인 지홍 스님이 부임하면서 기와를 전면 교체했다. 기와 교체 과정에서 도리가 틀어져 있고 보머리가 빠져있는 등의 안전문제가 확인됐다.
조계사의 해체.보수는 다음달 시작된다. 국비와 시비 등에서 총 8억원이 지원되 며 이미 시공업체가 선정됐다. 내년 초파일 전에 보수를 끝내 초파일 법요식을 치러낸다는 계획이다.
조계사측은 '대웅전을 완전히 해체해 일부 지주와 썩은 목재 등을 갈고 기와도 20% 가량 교체할 계획'이라며 '공사 기간 신도들의 신행활동을 위해 대웅전 앞마당에 임시법당을 만들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웅전이 원래 증산교 계통의 건물이었던 탓에 불교 전통양식과는 동떨어진 법당내부 바닥이나 불단 등도 정비될 전망이다. 불화와 단청, 벽화도 원형이 복원되거나 전통식으로 고쳐진다.
대웅전 보수불사는 총 30억원 안팎이 소요될 전망. 조계사는 국비 등 지원외의 소요경비를 자체경비와 신도들의 불사금으로 충당할 계획이다.
3Dshin@yna.co.kr">shin@yna.co.kr (끝)
보천교의 교세를 말해주는 사진, 증산도 제1부흥시대의 보천교건물을 옮겨진 조계사 대웅전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 웅장하긴 웅장하다. 조선의 독립과 국운상승과 한민족의 세계통치를 주장했던 증산도 교리를 미워했던 일제에 의하여 말살되었지만 지금 3번째 부흥기를 받이하여 증산도는 개벽을 준비하고 있다.
조선에서 제일 큰 한옥건물을 원 소유주는 증산도 제1부흥시대의 보천교였다. 위 사진은 당시 보천교의 건물을 뜯어다가 서울 태고사(조계사)에 건축했던 모습이다. 불교양식의 건물은 아니다. 어찌 보면 궁궐같은 모습이다. 경복궁보다 더 높았던 건물양식이다. 불교의 교세보다 커던 증산도의 제1부흥시대의 교세를 보면 역사의 진실은 밝혀질것이다.
단층 목조건축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한옥이 서울 시내 빌딩 숲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조계종 본부가 있는 서울 조계사의 대웅전 얘기다.
종로 우정국로변 상가를 살짝 비켜들면 갑자기 나타나는 대웅전은 그 자체로 장엄하다. 1.6m 높이의 돌 기단도 묵직하지만, 그 위에 34개의 아름드리 나무 기둥을 세워 정면 일곱간(약 30m), 측면 네간(약 17m)으로 만든 전통 한옥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크다.
기와지붕 아래로 쭉쭉 뻗어나와 건물의 화려함을 좌우하는 기둥머리의 공포(拱包) 역시 궁중건물 양식이면서 더 화려하다.
대웅전은 일제 식민정책이 한창 가혹하던 1938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통치의 편의를 위해 난립해 있던 조선불교를 하나의 기구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조선불교총본산'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총본산의 심장인 대웅전은 당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종교인 보천교(普天敎)의 성전(聖殿)을 옮겨와 만들었다.. 보천교는 갑오농민전쟁의 패배로 실의에 빠진 농민들을 흡수해 한때 수백만의 교세를 자랑했던 증산교의 일파.
28년 보천교는 일제가 남산에 만든 신궁(神宮)에 대항하는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을 삼아 대규모 성전을 만들었다.
전북 정읍에 조성된 성전의 중심이 바로 조계사 대웅전으로 뒤바뀐 십일전(十一殿)이다. 십일(十一)이란 증산교리상 후천개벽(後天開闢) 이후 세계의 흙(土)을 상징한다.
역학(易學)으로 보자면 1은 양(陽)의 상징이자 시작이며, 10은 음(陰)의 상징이자 완성을 뜻한다. 십일전은 곧 우주의 중심이기에 보천교도들은 치성을 모아 조선반도 최고의 건축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민족종교의 명운은 길지 못했다.일제 경찰은 36년 교주가 숨지자마자 성전으로 쳐들어가 각종 제구(祭具)를 압수하고 간부들을 연행했다.
그리고 '보천교측 재산처리위원회'를 만들고는 건물을 내팔았다. 십일전은 조선불교총본산에 팔려 서울로 옮겨졌고, 정문은 가까운 내장사 대웅전으로 바뀌었다.
이후 64년간 조계사 대웅전은 불교계의 오랜 내분과 폭력사태를 지켜보면서도 묵묵히 버텨왔다. 그 사이 서까래에 금이 가고 보머리가 빠지는 중병에 걸렸다고 한다. 조계사가 30억원을 들여 다음달부터 해체 보수에 들어간다고 한다. 묵은 먼지와 중병을 툴툴 털어낸 장엄미가 기다려진다.
오병상 문화부 차장 |
일제하 최대의 독입운동자금원이었고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주체였던
보천교를 들어보셨나요? |
우리는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 우리가 배운것중 진실은 얼마나 되고 무엇이 거짓인가? 가까운 근현대사의 은폐왜곡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는 보천교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하였다 물론 보천교가 일제하 독립운동자금원이었고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주체세력이었다는것도 어느 역사교과서에서 배워본 바 없다 .이제 이 지면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그 진실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일제하 최대의 독립운동자금원겸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주체 보천교
<보천교 십일전건물의 정문인 삼광문>
일제하 한국의 종교 중에서 가장 혹독하게 탄압을 받은 것이 바로 민족종교 보천교였다는 사실과 친일지로서 일제의 문화식민지 정책에 동조한 조선, 동아 등 당시 언론의 유사 종교 내지 사이비 종교로의 일방적 매도는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이 큰 상처로 남아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종교단체로써 독립운동 자금원으로 의혹 받은 보천교의 막후 영향력이 그만큼 컸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관한 자료는 비교적 정리가 잘 된 안 후상의 논문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을 보기 바람)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한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1920∼1940->에 나타난 항일기사 건수의 통계를 통해 당시 일간지와 월간지에 나타난 보천교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면, 적어도 1925년 이전의 보천교의 활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천교의 항일운동과 기타 종교와의 비교 |
기독교의 항일기사 건수 총계가 23 건, 천주교 2 건, 불교 18 건, 유교 15 건, 천도교 32 건 인데 반해 증산 계열 보천교 83 건, 태을교 9건, 훔치교 55 건으로 총 147 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보천교 하나만 해도 불교나 기독교 항일운동의 4배에 맞먹으며 훔치교만 해도 불교의 3배, 기독교의 2배가 넘고 있는 항일운동 사건을 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
조계종의 초대 종정인 방 한암 스님이 산천중원(山川重遠)으로, 송광사 주지 임 석진이 임원길(林原吉)로 각기 창씨개명하고 , 월정사 주지 이 종욱이 광전종욱(廣田鍾郁)으로, 용주사 주지 강 대련이 위원형(謂原馨)으로 창씨 개명한 것에서 보다시피 불교는 종단전체 차원에서 친일하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이자 분위기였고,
가톨릭과 기독교 역시 경성기독교 연합회와 교계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와 친일로 돌아선 것이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임원길은 조선총독 미나미의 향응을 받고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엄숙하게 의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신불교」라는 친일지를 발행해 총후보국의 논조를 유지했으며, 강 대련은 「불교총보」에 '불교옹호회와 법려(法侶)의 각오'란 친일성향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일본승을 왕실 및 양반집 여인과의 결혼을 주장하는 '조선불교기관 확장의견서'를 1919년 11월 사이토(齊藤實) 총독에게 제출하기도 한 친일 분자였다.
37년 7월 26일 YMCA에서는 종교단체 연합 친일 시국강연회가 열렸는데, 불교의 권 상로, 유교의 안 인식, 천도교의 이 돈화, 이 종린, 감리교의 양 주삼, 장로교의 전 필순 등이 친일을 위한 사자후를 토했으며, 38년 5월 18일 서울 부민관에서는 <경성기독교 연합회>가 창립되어 "40만 십자군병들아, 다같이 일어나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보조를 맞추자"는 슬로건 아래 내선일체, 신앙보국을 맹서한 바 있다.
1938년 7월 29일, 구세군 최고사령관 윌슨도 전선각처의 소대장에게 국민의례, 황거요배, 국경일 경축행사 실행을 지시하는 통첩을 내렸으며 이에 의해 황 종률 구세군 전장 서기관은 구세군 1만 8천 신도가 앞으로는 단체적으로 신사참배를 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10-15일의 평양 서문 밖 예배당에서 열린 제 27회 총회에서 첫날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다음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우리들은 신사가 기독교시에 위반되지 않는 본지(本旨)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대국적으로 보아 국가의 의식인 것을 자각하고, 이에 신사참배를 선서함.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이행하며, 더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에 참가하여, 시국하의 총후 황국신민으로서의 적성(赤誠)을 다하기를 기함'
이 결의에 의해 동년 12월 12일 감리교의 양 주삼, 김 종우, 성결교의 이 명식, 장로교의 홍 택기, 김 길창 등 조선을 대표한 기독교계 지도급 교역자 5명의 신궁참배단이 결성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伊勢)신궁, 가시와라(檀原) 신궁, 메이지(明治) 신궁, 야스쿠니(靖國) 신궁 및 모모야마 황릉(桃山宗陵) 등을 참배했다.
.일제시대에는 특히 '공인종교(公認宗敎)'라 하여 일본의 전통적 신교(神道), 교단적인 차원에서 창씨개명과 친일노선을 공식화 한 불교, 기독교만을 공식적 종교라고 인정했었다.
그러므로 이외의 새로운 종교들은 비슷한 종교 즉 유사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고 당시 가장 막강한 반일 민족종교 보천교는 유례없는 "보천교 신법"까지 만들어 탄압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앞에서 본 통계와 같이 보천교의 가장 활발한 147 건 항일기사는(기독교 23 건, 불교 18 건, 천주교 2건, 유교 15건) 친일로 돌아선 여늬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보천교가 그만큼 가장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은 유일하게 친일적이지 않은 민족 자생종교 보천교를 조선의 종교단체를 마음대로 억압하고 요리하는 하나의 샘플로 삼았는데, 이러한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특히 통감부령 제 45호 '종교의 포교에 관한 부칙'은 일본 내지(內地) 신도(神道)와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 민족종교는 근본 속성을 정치적 결사체로 보아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당시 650만 신도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교단체가 공개단체도 아닌 비밀단체인데다 여타의 종교처럼 친일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가장 큰 독립운동 자금원인 것을 알고 있는 일제로서는 이 비밀 단체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내심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제는 종교단체와 사상단체 관리를 위한 방편 상,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의해 비밀교단의 모습을 공개하도록 유도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간부 이 상호에 의해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계기로 민족종교 탄압책의 일환으로 당시 친일 언론이었던 조선, 동아를 무기 삼아 보천교의 어두운 면 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유사종교화 내지 사이비 종교화 했다.
물산장려운동(신문 포스터와 계몽 행렬) |
1936년 3월 주인장(교주 호칭) 차 경석의 사망과 함께 해체되기 전, 당시의 『보천교』는 이미 공개적인 차원에서 친일로 돌아선 국내 여타 종교와는 다르게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이는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 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 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 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여운형,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안재홍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이후 생략)
자료편집정리:개벽대예언
| |
댓글 4 인쇄 | 스크랩(+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