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경가회 월모임에서는 가톨릭대 신학과 교수겸 학교법인 사무국 부국장이신 이경상 바오로 신부님의 미사와 강의가 있었읍니다. 다음은 미사강론과 본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미사강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매일미사“ 책은 3년주기로 같은내용의 성경을 읽고 묵상하도록 편집되어 있습니다.
“가”해에서는 “하느님이 어떤분이신지”에 대하여
“나” 해에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다”해에는 내주변 모든 것 삼라만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각각 대주제를 가지고 묵상하도록 되어있으며 주일전례의 내용에 그 주간의 평일 전례의 내용이 종속되어 다시 새기며 묵상하도록 흐름이 되어있습니다. 최근의 전례독서에는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힌 율법학자와 종교지도자들이 나름대로 자기들 사상의 구축된 원리를 고수하며, 사상체계를 바꾸라는 예언자와 예수님의 말씀에 거부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논어의 위령공편에 “사람이 먼것을 염려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에 시달리게 되어있다” 고 합니다. 일상과 무관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꿈보다 현실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꿈은 내가 만드는것이지만, 현실에서는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배우자가 미울때가 많고 , 결혼안하는 사제들도 동료사제가 미울때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제생활을 성공적으로 지속하는 이유는 가톨릭 의 교리가 좋아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복잡한 마음보다 단순한 생각으로 사는것이 좋으며 내가 망하더라도 노심초사 하지말고, 하느님 안에서 배짱부리면서 살며, 착하고 생복하게사는것을 실천의방향으로 삼는것입니다. “what for? so what? and then?" 이라는 질문들에 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1초이내에 답할수 있어야 합니다. 사소한 개인과 하느님과의 교감, 즉 나자신의 하느님과의 관계의 이야기가 최대의 중요 관심사입니다.
<본 강의> 하느님과 나와 세상.
천주교 교리가 너무 마음에 드신 강사 신부님은 일찍부터 신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중동중, 성신고교를 거쳐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대신학교에 진학하셨습니다. 그런데 행복한 사제생활을 하는 이유는 가톨릭 교리의 탄탄함에 있다고 하십니다. 즉 타종교처럼, 어느 위인이 깨달아서 교리를 정리한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오면서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의 이야기 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 전하도록 선발된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이 선택되어,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있는 고향땅을 떠나 하느님이 가라고 하시는 길로 떠나서,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는 그분의 백성이 되도록 준비시키시고, 그의 아들인 이사악과 야곱의 시대인 족장시대에 이르러, 기근을 피하여 에집트로 가서, 엄청난 수의 민족으로 만드신후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시는 과정에서 당신의 크신 사랑을 모두에게 체험하게 하십니다. 출애급 이후에도 그들자신의 잘못과 역경을 견디면서 왕국으로 성장하였으나, 바빌론의 유배를 겪고 다시 귀향하게 됩니다. 그들은 살아오면서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신앙의 공감대 (consensus fidei) 로서 구성된 이야기들이 message를 전달하면서 신앙체계로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계시입니다. 바빌론의 유배를 겪고난후 성서가 기록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은 유다교의 얌니아 종교회의에서, 신약은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목록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교리중에서 성모승천은 1951년에 믿을교리로 선포되었는데, 물리적 대기권 일탈이 아님이 확실하지만, 2000년동안 신앙의 공감대 안에 간직되었던 믿음이며 그 의미를 이해하는것이 필요합니다. 창조는 하느님이 당신을 내어놓으심을 의미합니다. 피조물을 사랑스러워 하시고 보시니 좋다고 하십니다.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 고백할수밖에 없어집니다. 삼위일체와 부활의 교리도 그렇습니다. 바티칸은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개발하느곳이 아니라, 믿어온 진리를 공인하고 선포하는곳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계시진리중에 쓰여진것 만을 지칭하는것입니다. 쓰여지지 않은 계시진리는 거룩한 전통안에서 전해지며, 선포됩니다.
우리는 존재의 소명을 다 한후,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다시 하나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 매일 새로워지면서, 하느님스러워 져야 하며, 우리가 원래대로 회복해야할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는것이 천국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에서 ,큰아들은 아버지와 마음이 달라서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아버지가 아들형제에게 포도원에 일하러 가라고하는 이야기에서 큰아들은 예하고서 안갔고, 작은아들은 싫다고 하면서도 일하러 갔습니다 . 포도원은 세상이며, 하느님이 포도가꾸는 동업자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와 같은일을 하자고... 숨막히는 예의스러움을 버리고 하느님께 매달리며 배짱을 부리며, 흩으러진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반항하는 큰 아들은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의 증거입니다.
역사는 자연의 지배를 당하던 고대(ancient time), 종교적권위의 지배하에 있던 중세(medieval time), 인간이지배하는 근대(modern time)로 흘러왔는데, 근대에서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편견으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붕괴되는 우려가 있습니다. 즉 근대는 1) 수학과 숫자로 이해하려는 경향 때문에 더 큰영역을 잃을수 있습니다. 2) 실체론의 왜곡 으로 들어난 모습밑에있는 실체를 물질로만 풀려고 하므로서 영적인것을 노칩니다. 과도한 인간중심으로, 인간만 존엄한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집단이기주의로 발전하여 베푸는 마음이 없어지며 이것은 하느님을 잃고 사는것 입니다. 꿈 보다 현실이 아름다운것은 살아계신 하느님이 이 현실을 깔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최대한 무조건 긍정적으로 포용해야 하며, 사람을 사랑함은 그의 착한점을 믿어주는것입니다. 서로 깎아내리는 minus 공동체에서 하느님 사랑에 내 사랑을 보태는 plus 공동체로 가야합니다.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며, 고대, 중세, 근대의 사고방식들이 쇠퇴하면서 하느님을 잘 만나는 탈 근대적 영성의 시대가 올가능성도 있습니다. 최초의 어떤 행동과 체험이 축적되면서 신앙은 공유되어 받아들여집니다. 매 순간의 현실속에서 내가 착하고 행복한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서는 하느님과 일치하게 됩니다. 신학공부의 결론은 매순간 사랑을 품고 따뜻하게 사는것 입니다.
첫댓글 꿈은 내가 꾸는것 이지만 현실은 하느님이 마련하시고 함께 해주시기 에 더 아름답다...너무나 감동적 말씀입니다. 열강해주신 이경상 바오로 신부님께 큰 감사를 드리며 영육간에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1.10.29 08:31
강론을 들을 때에는 신부님의 진솔함에 더 쏠리다가 유 선배님의 정리를 글자로 읽고 나서야 제대로 메시지를 새긴답니다. 제 부족함을 채워주심에 감사,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