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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百濟王 昌 제1편 - 스님의 되려한 王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52 14.04.27 21: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사 傳]


그는 잊혀진 왕이었다. 오랜 침묵의 봉인을 풀어줄 유물이 발굴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흥분과 놀라움 속에 출토된 1400여 년 전 청동사리함. 그 뚜껑을 열자 또 하나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은으로 만든 사리병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황금사리병이 연이어 나왔다.

 

 

잊혀진 왕의 이름은 청동사리함에 새겨진 29자의 명문 속에 들어 있었다. 백제왕 昌. 그것은 기쁨, 슬픔과 고뇌를 간직한 백제왕 昌에 귀환을 알리는 신호였다.


2부작 미스터리 추적!!

百濟王 昌 - 제1편 스님의 되려한 王


■ 들어가는 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백제왕이 1400년 만에 깨어났습니다. 백제왕 창. 왠지 낯설고 생소한 이름이죠. 창왕은 사비시대를 이끌었던 백제 27대 임금이었습니다. 죽어서는 위덕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그 낯선 이름만큼이나 백제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창왕의 미스터리를 풀어줄 귀한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부여 왕흥사 터에서 발굴된 1400년 전 사리함이 그것인데요. 사리함에는 잃어버린 후기백제사의 공백을 채워 줄 명문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창왕의 슬픔과 고뇌를 고스란히 담은 기록이었습니다. 한국사 전에서는 오늘부터 2주간에 걸쳐서 1400년 전 백제 창왕이 남긴 눈물과 고뇌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부소산성 넘어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왕 창에 비밀을 간직해 온 왕흥사 터가 나온다. 지난 2000천년 발굴 조사에 첫 삽을 뜬 이후 올해로 8년째 접어 든 발굴 현장. 사리함이 출토된 곳은 목탑지 한군데다. 특히 하게도 땅 밑에 심초석 끝단에 홈을 파서 사리공(16×12×16㎝)을 만들고 화강암 뚜껑으로 봉인해 놓은 독특한 구조였다.


김용민 소장(부여국립문화재연구소)

“처음에 이 뚜껑을 발견했을 때에는 ‘아 이것은 정말 사리가 남아 있구나’ 저희가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이렇게까지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으리라고는 처음에 정말 생각을 못했다.”

 

 

굳게 닫힌 화강암 뚜껑을 열었을 때 사리공에는 진흙물이 가득했다. 고인 물을 뽑아내는 순간 마침내 원통형 청동 사리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동사리함. 그것은 놀라운 발견의 서막에 불과했다. 청동함의 뚜껑을 열자, 그 속엔 은으로 만든 또 하나의 사리병이 발굴 팀에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나온 세 번째 보물. 작은 황금 사리병이었다. 발굴 당시 황금 사리병과 은제 사리병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수습된 왕흥사 사리 유물은 곧바로 국립부여박물관 문화재 연구실로 이송됐다.


유물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세월에 녹을 벗겨 내고 보존처리를 거친 왕흥사 사리감 유물은 수천 점에 달했다. 백제와 창에 시대를 되살려 줄 이 유물들은 사리함과 함께 심초석 주변에서 출토된 것이다.


김낙중 학예실장

“이것도 아주 단순화됐지만 동물 모양,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와 같은 무덤을 지키는 모양” 

 

 

 


목걸이 형태의 장신구는 무령왕릉 무덤 방을 지키던 진묘수를 단순화 시켜놓은 모습이다. 귀여운 호랑이 모양의 장신구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백제 위덕왕 시대의 초정밀 세공술을 보여주는 연꽃무늬 운모 장식은 어디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희귀 유물이었다. 운모라고 불리는 광물질을 1㎜ 깎아서 투명한 연꽃무늬 모양을 만들었다. 미세 공예품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리함과 함께 수습된 구슬류만 8천여 점. 구슬은 대부분 지름이 1㎜이하에 작은 것으로 그 재료도 다양했다. 호박과 옥 등 각가지 재료에 펼쳐 놓은 사비시대에 눈부신 세공술, 그 화려함의 진수는 황금장식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여기 보면 금 알갱이들이 조금만 것들이 5개 붙어있고 원형의 고리 있잖습니까. 축구공 모양으로 붙여서 만들었습니다.”

 

 

0.3 ~ 1㎜크기의 금 알갱이를 이어 붙여 축구공 모양으로 만든 황금 장식은 초정밀 세공술을 보여주는 최고의 명품이었다. 기법과 디자인 면에서 유례가 드문 후기 백제의 독창적인 유물이었다. 140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이 유물들은 백제 문화에 대한 인식을 단번에 바꿔 놓았다.


이한상 교수(대전대)

“왕흥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양상이 무령왕릉보다 조금 더 발전된 면모 또 그대로 연결되어지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사비 백제의 금속공예는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 이상으로 굉장히 진전되고 발전된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특히 금?은?동 삼중구조로 된 사리함 세트의 발견은 사비시대 연구에 엄청난 행운이었다. 은제사리외병은 1400년 동안 청동함에 들어 있던 탓인지 세월에 청동 녹이 켜켜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X선 형광분석기로 은제사리외병의 성분을 측정한 결과 은의 순도가 99.08%로 확인됐다. 황금 사리병의 순도 역시 97.67%. 은제사리병 속에서 보호받은 덕분에 원형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발굴현장을 숨 막히게 했던 1400년 전 백제 창왕 시대에 사라함 세트. 금은동 삼중구조의 사리함 세트가 이처럼 완벽한 형태로 발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발굴 팀을 흥분으로 몰아넣은 것은 또 있었다. 청동사리함에 새겨진 이 예사롭지 않은 명문 그것은 지금까지 어떤 문헌에도 나와 있지 않은 1400년 전의 기록으로 사리함을 봉안한 주인과 그 비밀스런 내력을 밝혀줄 역사의 블랙박스였다. 세로로 한자 한자 새긴 다음 여섯 행으로 구성해 놓은 명문은 모두 29자. 그중 몇 글자는 훼손이 심해 육안으로는 판독이 불가능했다. 금속제품은 적외선 판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연속촬영방식을 선택했다. 부여문화재 연구소에 명문복원 팀은 연속 촬영한 29자의 명문을 먼저 3차원 디지털 복원 프로그램에 입력했다. 그런 다음 입력한 폭과 깊이까지 고려해 한글자 한글자 복원해 나갔다. 판독이 불가능했던 글자가 모두 되살아났다. 그렇게 1400년 만에 빛을 본 29자의 명문.


557년 2월 25일 백제왕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 두 알을 묻었는데 신의 조화로 세알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노중국 교수 계명대학교

“죽은 왕자를 위해서 왕이 중심이 되가지고 만든다. 이런 내용들은 사실 우리 기록상으로는  전혀 없다.”


이도학교수 전통문화학교

“百濟史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관건이 될 수 있다는 것. 특히 사비성이 도읍하던 시기, 그러니까 성왕과 위덕왕 시대 그 무렵에 백제의 정치사 나아가서 불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어떤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청동사리함에 새겨진 29자의 명문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겼던 1400년 전 백제 위덕왕의 애틋한 부정이 담겨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앞세운 아비의 마음, 아마 자식을 둔 부모라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제 창 왕은 그 애끓는 심정을 삭히며 이곳에 사리탑을 세우고 아들을 추모한 것으로 보입니다. 청동 사리함에 새겨진 29자의 명문은 이처럼 문헌 자료상으로는 접할 수 없었던 백제 창 왕의 면모를 되살려 줄 역사의 블랙박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그렇습니다. 창 왕의 재위 기간은 무려 45년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전하는 기록이 극히 일부 밖에 없는 탓에 백제 창 왕은 주목받지 못한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三國史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성왕의 맏아들이었고 죽어서는 위덕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威德王 …… 聖王之元子)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헌데 놀랍게도 일본의 역사서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창 왕의 충격적인 행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국립도서관에 고대문헌 보관실. 창 왕에 기록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日本書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8C에 제작된 일본서기에는 우리 고대사 문헌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한반도의 고대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편찬과정에서 일본인의 시각으로 왜곡시킨 문제점도 발견됐지만 구체적인 사실을 그대로 인용한 내용도 많다. 김현구 교수(고려대 역사학과)는 日本書紀에서 우리 고대사 기록에서 누락된 수많은 삼국시대 기사를 찾아냈다.


“예를 들어 김춘추가 일본에 건너간 기록은 우리나라에는 없어요. 근데 일본서기엔 김춘추가 일본에 건너갔던 얘기들도 자세하게 나와 있죠.”


특히 백제 인이 쓴 백제 신찬을 인용한 기사에는 창왕에 관한 놀라운 내용이 실려 있었다.


“백제왕자 여창이, 국중의 병을 전부 징발해서 고구려를 향했다. 백합들에서 보루를 쌓고 (병사들과) 침식을 같이 했다.”


태자시절 창이 고구려 군과 맞서 싸운 553년에 백합야 전투 기록1)은 아주 구체적으로 이어졌다. 창이 전투에 최선봉에 서서 고구려 군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과정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런데 창의 왕의 계승과 관련된 기사에 실로 충격적인 내용이 실려 있었다. 창이 신하들에게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554년 8월. 백제 왕궁은 스님이 되겠다고 하는 창과 만류하는 대신들에 팽팽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나는 부왕을 위하여 출가하여 수도하려고 합니다.” 

“어찌 출가를 한다 하시옵니까? 전에도 생각을 잘못하여 큰 화를 불렀는데 누구의 잘못이옵니까?”

“이 나라 백제를 어느 나라에 넘기시려 하시옵니까? 만일 원로들의 말을 잘 들었다면 오늘과 같은 처지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청컨대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시고 출가할 것을 그만 두시옵소서.”  傳 : 백제 위덕왕과 신하가 주고받은 말.

 

 

어찌된 영문인지 창왕을 만류하는 원로대신들의 목소리가 죽음과 질책에 가깝다. 대체 창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충북 옥천군의 한적한 농촌 마을(군서면 월전리). 이곳에 그 실마리를 풀어줄 유적이 있다. 창왕의 아버지2)가 전사한 것으로 전해오는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창왕의 아버지 성왕은 구천이라는 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마을 사람들은 구진벼루라고 부르는 이 낭떠러지가 구천이라고 믿어왔다.


조일권 사무국장 향토사 연구회

“구진벼루의 구진이 (구천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곳이 아닌가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성왕은 무슨 까닭으로 사비성이 아닌 이 외진 곳에서 숨을 거둔 것일까? 그 결정적인 단서는 구진벼루 너머에 관산성이 있었다. 당시 관산성에는 태자 창이 머물고 있었다. 해발 330m의 높이에 가파른 경사를 따라 오르자 관산성의 흔적이 나왔다. 성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지만 성벽을 지탱하던 바닥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다. 확인된 관산성의 둘레는 9백미터 정도, 성안에는 우물도 남아 있었다. 병사들이 식수로 사용한 우물이다. 창은 태자 신분으로 무슨 까닭에 이 험준한 곳에 머문 것일까?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지금도 이곳이 교통의 요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도와 철도 고속도로까지 모두 모여 있다. 삼국시대에도 관산성은 백제와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요충지였다. 백제의 입장에서 신라의 수도로 진출하는 관문이자 충북 보은은 지나 한강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반대로 (신라의) 상주에서 (백제의) 부여를 가려면 상주에서 보은을 거쳐 옥천, 이곳을 거쳐야만 부여나 공주로 갈 수 있는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백제와 신라 양국의 국경이 만나는 관산성 일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그야말로 최전방 군사지역이었다. 관산성 주변에는 산봉우리마다 수많은 요새가 있었을 정도다. 태자가 머물기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최전방. 그러나 그것은 창이 선택한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551년 백제는 신라와 연합에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탈환했다. 그런데 불과 2년 뒤 신라 진흥왕이 120년간의 동맹을 깨고 한강 하류까지 독식에 버렸다. 백제 조정은 배신한 신라에 대한 응징 문제로 치열한 논란이 벌어졌다. 원로대신들은 때가 아니라며 전쟁에 반대했다. 하지만 분노한 창은 공격을 주장하며 원로대신들을 질타했다.


“그대들은 신라가 그렇게 겁이 난단 말이요.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이요.”


원로대신들의 반대에도 창은 물러서지 않았다. 백제의 첫 수도였던 한강 유역 탈환은 아버지 성왕의 오랜 꿈이었다. 태자 창으로선 76년 만에 되찾은 영토를 훔쳐간 신라를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554년 7월, 마침내 창에 뜻대로 신라와의 전쟁이 결정됐다. 성왕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정이었다.

 

 

“관산성의 군사들은 최정예 군사들이다. 준비는 단단히 하였느냐?”


아버지 성왕의 입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공격지역은 관산성 일대. 창은 3만 명의 대군을 편성한 뒤 아버지 성왕께 마지막 출정을 고했다. 이것이 창이 마주한 아버지 성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총사령관 창의 기습공격(554년 7월 관산성 전투)은 성공적이었다. 신라군은 백제에 공격을 당해내지 못했고 창은 순식간에 관산성 일대를 장악했다. 하지만 신라의 지원군이 몰려오면서 전투는 밀고 밀리는 교착상태로 빠져 들었다. 바로 그 즘 아버지 성왕은 창을 격려하기 위해 50명의 기동대를 이끌고 관산성3)으로 향한다.


그런데 첩보를 입수한 신라군이 관산성으로 통하는 길목에 매복해 있었다. 얘기치 못한 기습에 성왕은 생포되고 말았다. 日本書紀엔 성왕이 신라의 노비 출신 장수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이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왕의 머리를 베개 하여 주소서”  고도(苦都)

“왕인 내 목숨을 노비 출신 장수인 사람에게는 맡길 수 없다.”  聖王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국왕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습니다.”

“내 지금껏 부끄럽지 않게 살아 왔거늘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어서 베어라.”


신라의 노비가 휘두른 칼에 성왕은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日本書紀4)엔 신라군이 성왕의 머리를 경주의 북청 계단아래 묻고 밝고 다녔다고 적고 있어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성왕의 참혹한 죽음은 백제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백제군은 3만 대군을 잃고 창이 일으킨 보복 전쟁은 참패로 끝났다. 창은 살아 돌아온 것 자체로 죄인이었다. 아버지를 사지로 내몰고 그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한 아들의 죄책감.


일본서기는 창이 왕위를 비워둔 체, 3년간이나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아버지 성왕의 참담한 죽음, 그리고 관산성 전투의 참패가 불러온 충격과 후유증이 그만큼 컸고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창은 그 참담함을 견디다 못해 급기야 원로대신들에게 스님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백제의 국운은 건 관산성 전투의 참패와 아버지 성왕의 죽음. 이것은 창 왕의 일생에서 낙인이요 멍에가 됐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는 왜 하필 스님이 되겠다고 했던 것일까요. 한 나라의 왕이 불효를 씻고 불충을 씻기 위해 스님이 되겠다고 한 것으로 보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왕흥사 사리함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립니다. 창 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사리를 봉안하고 세운 왕흥사 사리탑은 보시는 것처럼 5층 규모에 거대한 목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리는 원래 석가모니가 죽고 난 뒤 그 몸에서 나온 구슬입니다. 그러니까 사리는 부처의 몸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모시기 위해 세운 탑은 부처의 무덤에 해당합니다.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스님이 되겠다고 한 창 왕이 이번에는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사리탑을 세웠습니다. 스님과 사리탑 뭔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지난 1월에 개막된 왕흥사 특별전은 1400년 만에 침묵에서 깨어난 백제왕 창을 만나는 자리였다. 외국인들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풀어야할 수수께끼가 많은 만큼 개막식 첫날부터 전시장은 기대로 술렁였다. 1400년을 견뎌내고도 온전한 상태로 보전된 사리함 세트가 공개되자 관람객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류희열 시민

“신기합니다. 이것을 한쌍으로 해서 넣었다는 것이 지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선미 시민

“사리함을 보면 굉장히 세련미도 있고 안정감도 있고 아기자기한 백제인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그러한 유물인 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


청동사리함의 정교함에도 감탄했다.

 

 

박은정 시민

“당시 이런 기술이 있었구나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청동사리함의 명문은 우리나라 사리봉함 역사를 한 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창 왕이 봉안한 이 사리함(577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최초의 사리봉함 시기보다 무려 백년이나 앞섰다. 그렇다면 창 왕에게 사리봉안은 무엇이었을까? 그 배경에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창이 태어난 곳은 웅진의 공산성이다. 이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창은 아버지 성왕에게서 보고 배우며 키워온 오랜 꿈이 있었다. 그 꿈은 526년 백제 왕성에서 열린 이례적인 환영행사에서 출발했다.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유학을 떠났던 겸익이 5년 만에 돌아오던 날 성왕은 직접 어전 밖으로 나와 겸익을 맞이했을 정도로 그의 귀국을 기뻐했다. 겸익5)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교 경전은 성왕이 鶴首苦待하며 기다리던 것이었다. 이후 성왕은 겸익을 흥륜사에 머물게 하고 불경 번역을 국가 프로젝트로 지원한다. 흥륜사는 이름 그대로 불법을 흥하게 해서 세계를 다스린다는 성왕의 공이 담긴 절이었다. 성왕은 轉輪聖王의 약칭인데 불법의 바퀴로 온 세계를 교화시키고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를 뜻한다.


양기석 교수 충북대

“수미산에 33천을 지배했다는 그 존재가 전륜성왕 아닙니까? 삼국시대 왕들이 제일 닮고 싶었던 왕이 전륜성왕입니다. 백제 무왕이 전륜성왕이 되고 싶어서 익산에다가 미륵사탑을 세웠고 진흥왕이 황룡사탑을 지어가지고 자신이 전륜성왕이 돼서 무소불위의 큰 힘을 발휘하는 존재로 비견되고 싶어 했던 거거든요. 마찬가지로 성왕이라는 이름 자체가 죽은 다음에 시호를 내린 것이 아니라 살아생전에 당대인들이 성왕을 전륜성왕 이름을 따서 성왕이다, 부를 정도로…….”


살아생전 전륜성왕이라 불렸을 정도로 성왕은 백제 중흥에 구심점으로 삼았다. 어린시절부터 창은 그렇게 아버지 성왕의 꿈을 지켜보며 전륜성왕의 후계자로 교육 받았다. 아버지의 길은 곧 어린 창의 길이었고 철이 들면서부터 아버지 성왕의 꿈은 함께 이루어야 할 부자의 꿈이 되었다. 그러나 부자가 함께 백제를 불국토의 중심으로 이루고자 했던 그 간절한 꿈은 관산성 전투의 참패로 무너져 버렸다.


창왕에게 불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그 신앙 이상의 것이었다. 창 왕이 봉안한 왕흥사 사리함은 국제학술 대회가 열릴 만큼 동북아시아 불교 전문가들의 관심대상이었다. 학술대회에 참석한 마사토시 사가와 교수, 그는 일본의 사리 신앙이 백제 창왕 시대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했다.


마사토시 사가와 교수 동북학원대학교

“현재까지 중국에서 심초석에 사리를 넣는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심초석 내 사리안치 방식은 위덕왕대에 독자적으로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의 양홍 교수는 사리 신앙의 정치적 성격에 주목했다. 부처의 권위를 얻으려는 왕들에 의해 사리가 전파됐다는 것이다.


양홍교수 중국 사회과학원

“불교의 경전 속에 석가모니 열반 후에 주변의 많은 왕들이 그의 사리를 가지려 다투었고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리의 신앙이 중국에 전해진 뒤 불교 신앙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중국 협서성에서 출토된 이 사리 석함에는 분열되어 있던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 문제의 사리봉안 행렬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사리 봉안도에서 특이한 장면하나가 발견 됐다. 다른 사리 공양 그림과 달리 사리가 있어야 할 높은 전각 위에 황제가 앉아 있다. 황제를 부처의 사리보다 우월적인 존재로 묘사한 정치적 상징이었다.


주경미 박사 부경대학교

“민심을 얻으면서 통합을 시키고자 하는 그런 어떻게 보면 제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정치적 목적을 가지면서 민심수습 목적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수 문제는 대표적으로 알고 한 것 같이 그런 민심 수습의 목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사리 공양회를 열었던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 창 왕의 사리봉함 목적은 단지 순수한 종교적 신앙심뿐이었을까? 사리를 봉안하고 거대한 목탑을 세우는 일은 대역사였을 것이다. 창 왕이 이런 대역사를 버린 배경에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곳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사리함은 창 왕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관산성 전투 참패 이후 창 왕은 대신들의 기세에 눌려서 숨죽이고 지낸 무능한 왕이자 스님이 되려한 비운의 왕쯤으로 여겼던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창 왕이 스님이 되겠다고 한 폭탄적인 선언 역시 사리 봉안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행보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관산성 전투 이후 창 왕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 놀라운 내용이 확인 되었다. 양기석 교수는 삼국유사의 한 전투 기록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삼국유사 진흥왕조에 실려 있는 뜻밖의 전투 기록6)이었다.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지 불과 2개월 후인 554년 9월에 백제가 신라의 진성을 공격해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는 것이다.


충북대학교 양기석 교수

“그 위덕왕의 입장에서는 다시 전투를 벌인다는 현실적인 부담이 있었지만 우선은 아버지 성왕의 유해를 송환하는 이런 목적이 또 강했기 때문에 또 보복전과 병행해서 이 진성 전투를 바로 벌인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관산성 전투 이후 창 왕의 최우선 과제는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오는 것이었다. 진성 전투는 아버지 성왕의 시신을 송환하기 위해 결행한 보복전으로 추정된다. 부여 시가지를 벗어나면 그 외곽에 일곱 기의 무덤이 누워있는 능산리 고분이 나온다. 사비시대에 조성된 백제 왕실의 무덤이다. 학계에서는 2호분을 성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창왕은 아버지의 주검을 모신다음 무엇을 했을까? 성왕의 무덤에서 불과 6백미터 지점, 이곳에서 그 실마리가 발견됐다. 지금은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지만 한때는 농경지였던 곳이다.

 

 

지난 93년 허허벌판이던 농경지에 능산리 고분 주차장을 조성할 예정이었다. 주차장 공사를 앞두고 시작된 현장 조사는 세기의 발굴로 이어졌다. 현장 조사단은 백제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되자 주차장 공사가 임박했지만 발굴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치 오랜 세월을 기다려 온 듯 건물의 아궁이로 추정되는 구덩이 속에서 발견된 진귀한 향화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향로는 온전한 상태였다. 64㎝ 높이에 정교하면서도 독특한 향로 백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금동대향로였다. 향로 몸체엔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수십 가지의 문양이 빼곡히 조각되어 있었다.

 

 

이처럼 화려한 향로는 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 그리고 성왕의 무덤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금동대향로가 묻혀 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발굴이 계속 되면서 예사롭지 않은 건물터가 속속 들어났다. 능산리 사찰 터였다. 본격적인 발굴로 사찰의 규모도 밝혀졌다.

 

 

사찰 앞마당 목탑이 세워져 있었다. 그 뒤로 금당과 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회랑으로 그 전체를 에워싸는 전통적인 양식의 대규모 백제 사찰이었다. 금동 대향로는 능산리 사찰에서 사용한 향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능산리 사찰은 또 누가 세운 것일까?


 

그 결정적인 단서는 금동대향로 발견된 곳에서 불과 30미터 지점, 사찰 마당의 목탑 자리에서 발굴됐다. 우체통 모양으로 생긴 사리감이 그것이다. 사리감 중앙엔 사리함을 봉안했던 것으로 보이는 아치형 구멍이 뚫려 있던 것이다. 사리 공양을 한 것은 妹兄公主, 그러나 능산리 사찰이 세워진 해는 창왕 13년이라고 뚜렷이 나와 있다. 이런 대규모 사찰의 조성7)은 당시 왕인 창에 의해 주도되었을 것이다. 관산성 전투 13년이 흐른 뒤 창왕이 이 시기에 아버지의 무덤가에 능산리 사찰을 세우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양기석 충북대 교수

“관산성 전투 패전으로 심히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것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좋은 방법 중에 하나로 택한 것이 아버지 성왕의 위업을 계승하는 이런 방향에서 집권 초기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해 나가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그체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기 위한 상징물을 세우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능산리에 있는 능사건립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창 왕의 일생에서 아버지 성왕을 기리는 능산리 사찰을 세운 567년은 중요한 분깃 점이었다. 창 왕의 45년 재위 기간 중 극히 일부분 밖에 없는 문헌 기록도 비로소 이 시기에 창 왕이 관산성 전투의 충격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대외활동에 나선 것을 보여준다.


“그대는 진나라로 가서 이것을 전하라.”

 

 

삼국사기에 창 왕의 대외활동이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능산리 사찰을 세운 567년 그해 9월. 창왕은 중국의 남조 국가인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뒤 중국 대륙의 북제국8)에도 외교사절단을 연이어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 줄곧 남조 국가와 교류해 왔는데 창 왕은 무슨 이유로 북제와의 교류를 나선 것일까? 그 배경에는 요동치는 국제정세가 있었다. 신라의 팽창에 밀려 가야의 영토는 축소됐다. 중국의 정세도 시시각각 바뀌었다. 북위와 진나라로 양분되어 있던 중국대륙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양상으로 변화해 갔다.


양기석 교수

“나름대로 위덕왕은 그 중국 정세에 대해서 중국의 동태에 대해서 민감하게 대처를 하고 또 거기에 대해서 또 바로 대처하는 이런 경험이 바로 종전에 볼 수 없었던 백제의 외교력에 큰 발전이라고 이것은 그만큼 백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고 또 대내적으로 보면 그 불안했던 위덕왕 대의 왕권을 보다 강화시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 왕이 능산리 사찰을 세우고 봉안한 금동대향로에도 그런 노력이 깃들어 있다. 금동대향로에 빼곡히 조각해 놓은 문양은 사람과 동물, 산과 계곡 등 현실 세계에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땅에 살지 않았던 코끼리, 악어 등 특이한 동물들까지 조각되어 있다. 그것은 백제를 세상의 중심이자 불국토의 나라로 만들려 했던 성왕의 꿈을 금동대향로에 새겨 넣은 것이다.


이도학 교수

“위덕왕 입장에서 볼 때는 성왕이 꿈꿨던 세상, 세계 이것을 구현하고자 하는 열망 이것이 이제 성왕에게 제사 지내는 그런 도구인 금동대향로에 일정하게 반영되지 않았겠느냐 보여진다.”


능산리 사찰에 피어 오른 금동대향로의 연기.

그것은 관산성 전투의 참패로 무너진 아버지 성왕의 백제중흥에 꿈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창 왕의 다짐이 아니었을까.


■ 1부 방송을 끝마치며

창 왕이 아버지 무덤가에 능산리 사찰을 세우고 금동대향로와 사리함을 봉안한 것은 그가 왕위에 오른 지 13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그때부터 창 왕은 마치 아버지 무덤 앞에 다짐이라도 한 듯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 또 다시 죽은 아들을 추모하며 왕흥사 사리함을 봉안합니다. 그렇다면 서기 557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또 창 왕이 사리함을 봉안하고 애도한 왕자는 누굴까요. 무슨 일로 죽은 걸까요. 어쩌면 창 왕은 그 단서를 왕흥사 명문에 숨겨 뒀을지도 모릅니다.


※ 제작권은 KBS 한국사 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됨을 다시 상기하시기를 바라며…….

 

주)

1) “태자 여창이 고구려 용사를 창으로 넘어뜨리고 목을 베었다. 고구려 군과 장수가 크게 노했다. 이때 백제군이 크게 함성을 지르니 천지가 진동했다. 여창이 나가 싸우니 고구려왕이 동성산으로 퇴각했다.”  傳 : 일본서기 흠명조 553년 10월.

2)  성왕을 말한다.

3)  “성왕은 아들 창이 겪는 고통을 걱정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4)  “신라왕이 성왕의 뼈는 북청의 계하에 두었다(今新羅王埋明王骨於廳階下)”  傳 : 日本書紀 554년 7월조

5)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이다. 526년(성왕 4) 인도로 건너가서 중부의 상가나사(尙伽那寺)에서 율부(律部)를 공부한 뒤, 530년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臧)과 함께 귀국했다. 왕명으로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면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산스크리트로 쓴 율문을 국내의 고승 28명과 함께 율부 72권으로 번역했다. 이때 백제의 고승들이 윤문(潤文)과 증의(證義)를 했으며, 그 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율에 대한 소(疏) 36권을 지었다. 중국에 이미 〈오분율 五分律〉 등 몇 종의 율부가 번역되어 있었는데도, 인도에서 직접 원전을 가져와 번역했던 점이 주목된다. 겸익의 율학으로 백제 불교는 예의와 의식에 치중하는 계율 중심의 불교가 되었으며, 그뒤 일본 율종의 토대가 되었다.

6)  554년 9월 백제의 군사가 신라의 진성을 공격해 3만 9천명의 포로와 말 8천 필을 빼앗다.

7)  567년 재위 13년 능산리 사찰 건립.

8)  567년 10월 遣使朝貢  傳 : 북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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