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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개지벽(天開地闢) 원문보기 글쓴이: 九宮
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剖卵降世生而有聖德* * * * * 命駕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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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나왔다. 추모왕은 천제(하느님)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화백(물의 신)의 딸인데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성덕이 있었다. ---- 수레를 메울 것을 명하여 돌아다니면서 남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2.광개토대왕릉비문 제1면 2행-제1면 3행
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爲我連?浮龜應聲卽爲連?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 |
왕이 나룻가에 임해 말하기를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화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자라들을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라."고 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곧 자라들이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추모왕은 물을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세웠다.
3.광개토대왕릉비문 제1면 3행-제1면 4행
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岡黃龍負昇天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그러나 추모왕은 인간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므로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 하였다. 그래서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에 업혀 하늘로 올라갔다. 세자 유류왕에게 유언으로 명하여 나라를 도리로써 잘 다스리도록 하였다. 대주류왕은 나라의 기초를 이어 받았고 17세손인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미치게 되었다.
4.광개토대왕릉비문 제1면 5행-제1면 6행
二九登祚號爲永樂太王恩澤洽于皇天威武振被四海掃除不 * 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弔삼有九宴駕棄國以甲寅年九月甘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 |
왕은 18세에 왕위에 올라 영락태왕이라 일렀는데, 그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그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에 떨쳤다. 또 생업을 편안케 하였으므로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5곡이 풍요하게 무르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돌보지 않아 39세에 돌아가면서 나라를 버리었다. 갑인년 9월 29일 을유일에 산릉에 옮겨 모시고 이에 비석을 세워 훈공과 업적을 새겨 놓음으로써 후세에 보이는 바이다.
5.광개토대왕릉비문 제1면 6행-제1면 8행
焉其辭曰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歸 * 人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牛馬群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 * 城力城北豊王備獵遊觀土境田獵而還 |
그 글에 이르기를 영락 5년 을미가 되는 해에, 왕은 비려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을 지나 산을 등지고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의 부락과 육칠백영을 격파하고 수없이 많은 소와 말 그리고 양떼를 노획하였다. 이에 수레를 돌려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 성, 역성, 북풍에 이르렀다. 왕은 사냥 준비를 시키고, 국토를 즐기며 구경도 하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왔다.
6.광개토대왕릉비문 제1면 8행-제1면 9행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東 * 新羅以爲臣民 |
백잔(백제를 낮춰 부른 말)과 신라는 옛날에는 우리의 속민이었고 그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던 것이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백잔의 꾀임으로 도래하자 백잔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던 것이다.
7.광개토대왕릉비문 제1면 9행-제1면 9행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至 * 南攻取壹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 * * 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古舍蔦城阿旦城古利城 * 利城雜珍城奧利城句牟城古須耶羅城莫 * * 城 * * 城 * 而耶羅城瑑城於利城農賣城豆奴城沸城 |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남으로 공격하여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수야라성 * *성 * *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농매성 두노성 비성
8.광개토대왕릉비문 제1면 11행-제2면 3행
比利城彌鄒城也利城大山韓城掃加城敦拔城 * * * 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 * 城林城 * * * * * * * 利城就鄒城 * 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城曾拔城宗古盧城仇天城 * * * 城逼其國城 |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 *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종성 임성 * * * * * * *리성 취수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 * *성들을 취하였으며 어느덧 백잔의 국성(수도성)에 근접하였다.
9.광개토대왕릉비문 제2면 3행-제2면 4행
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遺刺迫城殘兵歸宂 * 便圍城而殘主因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千匹 |
그러나 백잔은 의리를 따르지 않고 감히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봉군을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군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그들의 성을 표위하였다. 그렇게 되니 백잔 임금이 궁박하게 되어 남녀 노비 1천명과 가는베 1천필을 바쳤다.
10.광개토대왕릉비문 제2면 4행-제2면 5행
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
그리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제부터는 영원토록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여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58성과 7백촌을 얻었고 백잔 임금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돌리어 국도로 돌아왔다.
11.광개토대왕릉비문 제2면 5행-제2면 6행
八年戊戌敎遣偏師觀帛愼土谷因便抄得莫斯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 |
영락 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토곡에 보내 관찰 순시토록 하였다. 그 기회에 막사라성과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명을 습격하여 잡아 왔으며, 이때부터 식신은 조공하고 정사를 보고하게 되었다.
12.광개토대왕릉비문 제2면 6행-제2면 8행
九年己亥百殘爲誓與倭和通王巡下平壤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特遣使還告以密計 |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순시하면서 평양으로 내려오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그 나라 국경지역에 가득 차서 성들을 파괴하고 있는데, 노객(신라왕)은 신민으로서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13.광개토대왕릉비문 제2면 8행-제2면 10행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鹽城倭寇大潰城內十九盡拒隨倭 |
영락 10년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귀순 항복하였다. 순라병과 수비병을 두었다. 신라성 염성 등을 함락시키니 왜구가 크게 궤멸되고 성안사람 열에 아홉은 왜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14. 광개토대왕릉비문 제2면 10행-제3면 3행
安羅人戍兵新羅城 * *其* * * * * * 言** * * * * * * * * * * * * * * * * * * * * * * * * 辭* * * * * * * * * * * 殘倭潰* 以隨 * 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至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 *寐錦*家僕句請* * * 朝貢 |
순라병과 수비병을 두었다. 신라성 ----(안타깝게도 비문이 지워져 내용을 알 수 없음)---- 남은 왜적들이 궤멸되어 달아났다. 그 성을 함락시키고 순라병과 수비병을 두었다. 옛날에는 신라 매금(왕)이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국강상 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와서 매금(신라왕)이 가복이라고 자칭하면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15. 광개토대왕릉비문 제3면 3행-제3면 4행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和通殘兵 *石城 * 連船* * * 王窮率往討從平穰* * *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殺無數 |
영락 14년 갑진년에 왜가 분수없이 대방지역을 침입하였다. 그들은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략하였다. 연이언 배----.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평양을 출발하였다. ---선봉이 서로 조우하자 왕당이 막아내며 무찔렀다. 왜구가 패전하여 무너지니 참살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6. 광개토대왕릉비문 제3면 4행-제3면 6행
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 * * * * * * *王師四方合戰斬殺蕩盡所穫鎧鉀一萬餘領軍資 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年? 城 * 城 ** * * 城那 * 城 |
영락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문이 지워져 보이지 않음)---- 왕은 사방 포위작전을 지시했다. 적은 대부분 궤멸되었으며, 토획한 갑옷이 1만 벌이나 되고 군수물자 기계류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루성 우주성 *성 * * * *성 나 *성을 격파했다.
17. 광개토대왕릉비문 제3면 6행-제3면 7행
廾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城國駭服獻出* * * * * *王恩普覆 |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해 오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 군사들이 부여성에 이르자 부여는 온 나라가 두려워하여 굴복했다. -----왕의 은혜가 널리 퍼지었다.
18. 광개토대왕릉비문 제3면 7행-제3면 8행
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偳社婁鴨盧肅斯舍鴨盧* * *鴨盧凡所 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 |
이에 개선하여 귀환하였다. 또 그 나라에서 왕의 은덕을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들은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단사루압로 숙사사압로 * * *압로이었다. 무릇 이때 공파한 성이 64개요, 촌이 1천4백개였다.
19. 광대토대왕릉비문 제3면 8행-제3면 11행
守墓人煙戶賣句余民國煙二看煙三東海賈國煙三看煙五敦城民四家盡爲看煙干城一家爲看煙碑利城二家爲國煙平穰城民國煙一看煙十此連二家爲看煙俳婁人國煙一看煙卌三梁谷二家爲看煙梁城二家爲看煙安夫連甘二家爲看煙改谷三家爲看煙新城三家爲看煙南蘇城一家爲國煙 |
수묘인연호(묘지기가구)로서 매구여민은 국연 둘 간연 셋, 동해고는 국연 셋 간연 다섯, 돈성민은 네집 모두 간연, 오성은 한집이 간연, 비리성은 두집이 국연, 평양성민은 국연 하나 간연 열, 자련은 두집이 간연, 배루인은 국연이 하나 간연이 마흔셋, 양곡은 두집이 간연, 양성은 두집이 간연, 안부련은 스물두집이 간연, 개곡은 세집이 간연, 신성은 세집이 간연, 남소성은 한집이 국연이다.
20. 광개토대왕릉비문 제3면 11행-제3면 13행
新來韓穢沙水城國煙一看煙一牟婁城二家爲看煙豆比鴨岑韓五家爲看煙句牟客頭二家爲看煙求底韓一家爲看煙舍조城韓穢國煙三看煙甘一古須耶羅城一家爲看煙炅古城國煙一看煙三客賢韓一家爲看煙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煙巴奴城韓九家爲看煙 |
신래한예로서 사수성은 국연 하나 간연 하나, 모루성은 두집이 간연, 두비압잠한은 다섯집이 간연, 구모객두는 두집이 간연, 구저한은 한집이 간연, 사조성한예는 국연 셋 간연 스물하나, 고수야라성은 한집이 간연, 경고성은 국연 하나 간연 셋, 객현한은 한집이 간연, 아차성과 잡진성은 합해서 열집이 간연, 파노성한은 아홉집이 간연이다.
21. 광개토대왕릉비문 제3면 13행-제4면 2행
臼模盧城四家爲看煙各模盧城二家爲看煙牟水城三家爲看煙幹弓利城國煙一看煙三彌鄒城國煙一看煙七也利城三家爲看煙豆奴城國煙一看煙二奧利城國煙二看煙八須鄒城國煙二看煙五百殘南居韓國煙一看煙五大山韓城六家爲看煙 |
구모로성은 네집이 간연, 각모로성은 두집이 간연, 모수성은 세집이 간연, 간저리성은 국연 둘 간연 셋, 미추성은 국연 하나 간연 일곱, 야리성은 세집이 간연, 두노성은 국연 하나 간연 둘, 오리성은 국연 둘 간연 여덟, 수추성은 국연 둘 간연 다섯, 백잔남거한은 국연 하나 간연 다섯, 대산한성은 여섯집이 간연이다.
22. 광개토대왕릉비문 제4면 2행-제4면 5행
農賣城國煙一看煙七閏奴城國煙二看煙甘二古牟婁城國煙二看煙八瑑城國煙一看煙八味城 六家爲看煙就咨城五家爲看煙彡穰城甘四家爲看煙散那城一家爲國煙那旦城一家爲看煙句牟 城一家爲看煙於利城八家爲看煙比利城三家爲看煙細城三家爲看煙 |
농매성은 국연 하나 간연 일곱, 윤노성은 국연 둘 간연 스물둘, 고모루성은 국연 둘 간연 여덟, 전성은 국연 하나 간연 여덟, 미성은 여섯집이 간연, 취자성은 다섯집이 간연, 삼양성은 스물네집이 간연, 산나성은 한집이 국연, 나단성은 한집이 간연, 구모성은 한집이 간연, 어리성은 여덟집이 간연, 비리성은 세집이 간연, 세성은 세집이 간연이다.
23. 광개토대왕릉비문 제4면 5행-제4면 6행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朝掃吾慮舊民轉當羸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朝掃 |
국강상 광개토경호태왕이 생전에 명령하여 말하기를 "조상왕들은 다만 멀고 가까운 곳의 구민들을 뽑아 수묘와 청소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구민들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약화될까봐 염려된다. 만약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묘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단지 내가 직접 돌아다니며 붙잡아온 한 예를 뽑아서 수묘와 청소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24. 광개토대왕릉비문 제4면 6행-제4면 7행
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甘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二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煙卅看煙三百都合三百卅家 |
명령을 말하심이 이와 같았으므로 명령과 같이 신래한예 220집을 뽑도록 지시하고 그들이 수묘의 규정을 모를 것을 염려하여 다시 구민 110집을 뽑았다. 그렇게 하니 신구묘지기호수는 합하여 국연이 30집 간연이 300집 도합 330집이 되었다.
25. 광개토대왕릉비문 제4면 7행-제4면 9행
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致使守墓人煙戶差錯唯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其煙戶不令差錯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有達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
선조왕 이래로 묘 위에 비석을 세우지 않아서 묘지기연호에 착오가 생기게 되었는데 오직 국강상 광개토경호태왕이 선조왕 모두를 위하여 묘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를 세김으로써 착오를 없게 하였다. 또 법으로 명하기를 '묘지기는 지금 이후 서로 전매할 수 없으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더라도 함부로 살 수 없다. 법령을 어긴 경우에 판 자는 형벌을 주고 산 자는 묘지기를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