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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감정의 시초, 지역감정의 원인
지역주의 논란에 대한 한 가지 참고자료 by socio
최근 "전학생은 홍어녀" 라는 만화에 대한 이글루스의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논쟁에 참여한 유저들의 모든 글들을 세세하게 검토해보지는 못하였지만, 개략적인 인상비평을 하자면 좁은 차원에서는 지역주의 문제에서부터 넓은 차원에서는 소수자-전라도인을 소수자라고 간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개의 논의가 있어야겠지만-에 대한 조롱의 정당성 문제까지 다양한 층위에서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 포스트에서는 시간과 역량의 한계로 인해 넓은 차원의 문제는 다루지 않은 채 좁은 차원에서의 지역주의 문제에 대해서만 논하도록 할 것이며, 이 역시 현 사태 자체에 대한 필자의 독자적인 의견보다는(즉, "전학생은 홍어녀" 만화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시시비비는 논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사태의 해석에 도움을 주는 선행연구를 인용하는 것을 통해 대체하도록 할 것이다. 본 포스트에서 인용할 텍스트는 후마니타스 출판사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의『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이다. 이는 한국의 지역주의 문제에 대해 속설이 아닌 엄밀한 학문적 접근을 통해 규명을 시도한 기념비적 문헌인 만큼 논지에 대한 찬반여부를 막론하고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카피레프트에 해당되는 저서인지라 제목의 링크를 클릭하면 전문의 PDF 파일을 다운받아 볼 수 있다. 아래 인용문에 제시된 참고문헌의 출처나 인용부분 후의 전개가 궁금하다면 전문을 다운받아서 보면 될 것이다.
----------------------이하 인용-----------------------------
-일상 속의 질문들
문제를 다르게 접근하게 되니 흥미로운 질문이 많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지역감정이 역사적으로 오래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옛날 문헌들에서 호남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을 인용하곤 한다. 대표적으로는 ‘풍전세류’(風前細柳)니 ‘표리부동’(表裏不同)이니 하면서 ‘간사하고’ ‘뒤끝이 나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록으로 따지면 안 그런 지역이 없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었다. ‘권세 있는 사람에게 아부해 이익을 좇는다’라는 충청도에 대한 평이나 ‘미련하다’는 강원도에 대한 평도 있었다. 함경도를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은 말할 것이 없고 영남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을 담은 역사 기록을 찾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조반정 이후 영남 사대부는 오랫동안 차별받았고, 영조 때는 무신란을 계기로 ‘반역향’으로 낙인찍혔으며, 정조 때는 대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우면서 이 지역 출신의 과거응시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반대로 호남을 좋게 평한 옛 문헌을 찾는 것도 아주 쉬운 일이었다. 윤선도나 정철의 글이 대표적이지만, 그 밖에도 전라도의 ‘전’을 뜻하는 전주는 조선 왕실의 고향이라 해서 어향(御鄕)으로 칭송되었고 무엇보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은 우국과 충절의 지역으로 상찬되었다.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조선이 없다”고 했고, 김정호는 호남을 “전국 팔도에서 가장 축복받은 땅”이라고 했으며, 정조는 “가장 어질고 충성스러운 고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제기해야 할 질문은, 왜 호남에 대한 좋은 평가는 배제되고 오로지 나쁜 것만 선택적으로 부각되었으며, 왜 다른 지역은 그렇지 않았는지, 어떻게 해서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지금의 지역주의적 해석 틀로 변형될 수 있었는지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호남에 대한 나쁜 기록을 있는 대로 모아 반호남 지역주의가 역사적으로 오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역주의적 해석의 틀로 뒤틀린 역사를 우리 앞에 내놓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여러 사람들에게 지역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물어보는 일도 재미있었다. 누구든 처음에는 오래전부터 지역주의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것이 언제의 기억인지를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실제로는 그리 멀리까지 가지 못했다. 일제 때 태어난 노인들의 경우 해방 직후부터 호남에 대한 지역감정이 심각했다고 말했다가도 그게 몇 살 때쯤인지 물어보면 대개 청년 이후가 되고 시기는 금방 1960년대로 올라왔다. 해방 직후엔 오히려 함경도 등 이북 출신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더 심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한참 생각하다가 대부분 그렇다고 인정했다. 서울 토박이들의 인색함에 대해 이주민들이 느끼는 감정도 있지 않았냐고 하면 비서울 출신의 대부분은 이를 긍정했다. 그런데 왜 이주민들끼리 서로 지역감정을 다투게 되었을까를 물으면, 서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존해야할 사람들이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경쟁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월남한 이북 출신들은 남한에 정착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의 반공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체제 차원’에서는 이들을 나쁘게 볼 이유가 없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지역과 관련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지역적 차이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지역적 차이에 동반된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호남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이를 바탕으로 ‘과거의 정치적 이용’(political use of the past), ‘편견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 ‘전통의 발명’(invention of tradition) 등과 같이 역사학이나 정치학 연구에서 자주 쓰는 개념들을 소개해 주면, 한국의 지역주의 역시 보편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문제임을 금방 이해했다. 실제의 역사보다 역사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는 것, 따라서 역사는 과거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특정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현재의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럴 때 특정 방향의 의미 구조를 담고 있는 편향성 내지 편견은 역사 해석을 둘러싼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옛날부터 그랬다는 생각이나 전통이라는 것도 잘 따져 보면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작위적으로 창조되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이론들이지만, 한국 지역주의의 사례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영남이나 호남과 같은 옛날식 지역 개념이 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지, 충청남도 금산이나 논산처럼 그 가운데 일부가 과거에는 전라도였던 곳에서 왜 더 강렬하게 스스로를 충청이라고 호명하고 싶어 하는지와 같은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역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면서 그 망국성을 강변하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힘들었다. 아무리 뭐라 해도 지역성이라는 게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거나, 안 그러면 어떻게 한 지역에서 특정 후보에 90% 이상의 지지율이 나올 수 있냐면서, 어떤 경우든 그런 맹목성은 지역주의 때문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지역주의 때문에 그런 거라고 보면될 이 간단한 문제를 왜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느냐면서 도리어 필자에게 핀잔을 주는 사람도 많았다. “지역주의는 없다는 거냐”라고 되묻거나, “지역주의 극복하지 말자는 거냐”는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경우든 지역주의 때문에 나라 망하게 생겼다고 전제하지 않는 한 이들과 대화는 불가능했다.
여기쯤에서 지역주의 망국론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재생산되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는 게 좋겠다. 망국적 지역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 일반에 워낙 익숙한 주장이다 보니, 필자의 문제 제기로 인해 혼란스러워 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상훈,『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후마니타스, 2009, p.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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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처럼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는, 지역을 둘러싼 갈등의 구조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그때의 지역주의는 대체 어떤 내용을 갖는 것이었나? 옛날부터 있었다는 ‘지역색’ ‘지역 정서’ ‘지역감정’이 계속해서 이어져 온 결과인가, 아니면 근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것인가? 1970년대 중후반에 이루어진 고흥화‧김현섭(1976), 김진국(1977)의 조사 연구는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연구는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자료와 방법에 의존해 출신 지역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갈등의 내용을 조사 분석한 최초의 연구 성과이기 때문이다.
고흥화‧김현섭에 따르면, 이 시기 60%에 가까운 피조사자가 결혼‧친구‧동업 관계에서 호남 출신을 기피 대상으로 꼽았다. 반면 호남 이외의 지역 출신에 대한 기피 의식은 평균 10% 미만에 불과하다. 김진국의 조사 역시 호남 이외 지역 출신 모두가 호남 출신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적어도 1970년대 중후반 시점에 호남 출신에 대한 기피 의식이 다른 지역 출신에 대한 기피 의식과 분명히 구별될 정도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호남 출신은 어떤 근거로 호남 출신을 기피했고, 반대로 호남 출신은 지역 차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다시 이들의 조사를 살펴보자. 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비호남 출신이 호남 출신을 사회적 관계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주관적 편견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비호남 출신이 호남 출신을 기피하는 이유는, 호남 지역이 갖는 정치경제적 특성이나, 호남 출신이 주로 담당하는 사회적 기능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호남 출신은 ‘간사하다’ ‘신뢰성이 없다’ ‘이기적이다’ ‘뒤끝이 나쁘다’와 같이 객관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한 개성적 특질 내지 행동 양식을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라도 사람’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호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옛날부터 늘 있었다는 식으로 그 기피 의식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에 반해 호남 출신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갖는 소외감의 근거를 지역 간 경제적 격차, 특정 지역에 대한 인사상의 차별 등 권위주의 통치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요컨대 지역주의 문제와 관련해, 호남 출신의 경우 ‘사회구조적 차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체제’와 비판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반면, 비호남 출신의 경우 호남 사람의 타고난 부정적 특질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가해자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김진국 1988, 236).
-영호남 갈등이 아니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지역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관점은 지역주의 문제를 영호남 갈등 혹은 이들 간의 지역감정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1977년 자료를 이용, 지역민 상호 간의 호오 정도를 측정한 김진국(1984)의 연구 결과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 준다. 지역주의 문제가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이라면 지역민 상호 간 호오 태도에 있어 영호남 간의 거리가 크게 나타났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우선 호남 출신이 가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지역민은 영남 출신이었다. 역으로 호남 출신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지역민은 서울과 충청 출신이었다. 호남 출신을 가장 덜 기피한 것은 영남 출신이었다. 이는 1970년대 중후반의 시점에서 볼 때 한국의 지역주의는 영호남 간 지역감정의 대립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호남 출신에 대해 비호남 출신 전반의 사회적 거리감은 크게 나타났지만, 그중에서 영호남 출신 간의 거리감은 가장 작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후반까지 영호남 사이의 거리감이 작았고 오히려 호남에 대한 서울과 충청 출신의 편견이 더 크게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문제를 큰 차원에서 제기해 보자. 압축적 근대화의 정점에 달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 1970년대 중후반의 시기에, 어떻게 출신 지역과 같은 귀속주의적인 차이와 주관적 편견에 바탕을 둔 반호남 지역주의가 부각될 수 있었을까? 시기적으로 그 기원을 어느 시점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전통 사회에서부터 있었던 ‘전근대적인 것’ 의 연장인가, 아니면 ‘냉전 반공주의 체제에서의 권위주의 산업화’ 로 요약될 수 있는 한국적 근대화의 특수성 때문에 만들어진 ‘근대적인 것’ 인가?
-전통 사회의 유산인가
반호남 지역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근대 이전에서 찾는 입장은 크게 두 견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지역주의가 1960~70년대의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고 보는 주장이다. 두번째 견해는 고대 국가 시기부터 강한 반호남주의가 존재했고, 바로 이 ‘반호남 지역주의 때문에’ 한국의 근대화가 호남에 대한 경제적 차별, 엘리트 충원에서의 차별을 동반했다는 주장이다.
근대화와 지역 차별의 인과관계를 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두 견해 모두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적 유산에서 지역주의의 기원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전통 사회의 지역주의와, 앞서 살펴본 1970년대 중반의 지역주의는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이었을까? 사실 여부를 따져 보기 위해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설명 요소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호남 지역주의의 최초 기원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대립, 그리고 백제의 멸망과 통일신라의 등장에 있다. 둘째 후백제와의 치열한 군사적 대립을 통해 고려가 건국됨에 따라 후백제 출신은 지배층의 구성 에서 배제되었다. 셋째, 농업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에 호남 지역은 가혹한 수취의 대상이었으므로 민란과 모반이 잦았고, 그 결과 영남 출신이 중심이 된 지배층에게 차별을 받았다. 넷째, 반호남 지역주의는 옛날부터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구조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면면히 이어져 왔다. 맞는 말일까? 하나씩 따져 보자.
-신화로서의 시원주의적 지역주의관
삼국시대와 관련해 ‘백제=호남’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백제를 세운 온조(溫祚)는 부여족의 일파로서 고구려로부터 남하한 이주민 세력이었다. 그리고 백제가 존립했던 678년의 기간 중 493년 동안 정치적 중심지는 오늘날의 서울과 경기 지역이었고, 나머지 185년 동안은 오늘날의 충청도 공주와 부여였으며, 그 아래 호남 지역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서도 호남 출신이 지배층의 구성에서 차별되거나 배제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고려 전기 지배층의 배출 지역을 보면 후백제 지역 출신(31성관)과 신라 지역 출신(27성관)이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왕비의 배출 지역 역시 지역적으로 고르게 편재되었다. 특히 고려 말 몽고 침략에 대항하는 장기간의 항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과거 고대국가를 복원하고자 하는 지역주의적 경향은 사라졌고 그 뒤 지난 1천 년 동안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농업에 기반을 둔 중앙집권적 관료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호남 지역이 특별히 가혹한 수취의 대상이 되거나 이로 인해 민란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경작 가능한 토지의 크기나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기준으로 볼 때, 특별히 호남의 과다 수취를 보여 주는 증거는 없다. 민란의 발생 빈도는 호남이 많은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영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남영신 1991). 조선시대 중앙 관료의 출신지로 볼 때도 특별히 호남이 차별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만약 조선 시대에 특정 지방이나 그 출신에 대한 ‘제도화된 차별’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호남이 아니라 서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서북 출신의 경우를 보면, 당상관이라는 중앙의 고급 관리에는 단 한 사람도 임용되지 않았으며, 후기에 와서도 지방관에 한해서 몇 사람의 예외만 있었을 뿐이었다. 중앙정부의 이런 차별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경기 이남에서는 의병이 많았던 반면 서북 지역에서는 의병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피난 온 왕자나 대신을 붙잡아 왜군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이이화 1983, 121-123).
다른 한편, 절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을 토지에 결속시키는 전통적인 농업 사회는 그 공간적 한계를 넘는 이동의 필요성을 갖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간적 이동을 허용하지도 않는 사회다. 그것은 대다수 생산 집단의 생활 세계에서 여타 지역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치적 필요나 지배층 내 권력투쟁의 계기로 인해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이 부과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식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지배층 내부에 한정되었을 뿐 지역민의 의식구조에 침투해 자연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토대를 갖지 않는다.
-창조된 전통, 발견된 편견
물론 근대 국민국가로의 이행이 서구의 경로처럼, 지역적으로 분리되어 산재해 있던 다수의 독립된 공동체들을 강제로 통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면, 누군가 지역공동체에 대한 정치적인 충성심과 문화적인 정체성을 동원해 중앙 정부에 대항하려고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러한 지역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적 민족’[1] 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으며, 전통적 사회구조의 해체가 외부의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정체성을 민족이 아닌 지역에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날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도 근대로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조선 후기나 일제 강점기 동안 지역이라는 단위와 민족이라는 단위의 갈등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비교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약한 지역성이야말로 한국사의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된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부정적 지역 편견이 호남에 집중되면서 전라도 사람은 ‘잘 속이고’, ‘배신을 잘한다’는 등의 편견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인식처럼 받아들여졌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근대 이후 여러 사회에서 ‘전통’이라고 주장되는 의식과 행태가 대개는 “정치경제적 필요 때문에” 작위적으로 발명,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석하면서 홉스봄‧레인저(Hobsbawm and Ranger 1983, 2)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들 ‘창조된’ 전통의 특이성은 …… 역사적인 과거와의 연속성이 대체로 인위적이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 낸 산물로서, 과거의 맥락과 연관된 형태를 창출하거나 혹은 준강제적 반복을 통해 그 자신의 과거를 새로이 확립한다."
한국의 지역주의와 관련해 이야기되고 있는 전통적 인식 역시 마찬가지의 특징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분명 반호남 지역주의는 그 기원을 근대 이전에서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것이고 새로운 것이다. ‘충의지향’(忠義之鄕) ‘고국의 풍토를 가진 지역’ 등과 같이 호남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나, 호남을 칭송했던 수많은 내용들은 배제되고, 각 지방에 대한 부정적 인식 중에서 오로지 호남에 대해 부정적 편견만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호남에 대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인식이란 것은 새롭게 ‘불러들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석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호남인이 본래 갖고 있는 특질’을 이유로 호남을 인간적 관계에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 지역 편견은 언제, 어떤 사회적 계기에 의해, 누가 불러들였을까?
-지역 편견의 변화 과정
해방 이후 1950년대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지역적 고정관념은 비단 호남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깍쟁이’ ‘영남 문둥이’ ‘호남개땅쇠’ ‘함경도 이전투우(泥田鬪牛)’ ‘강원도 감자 바위’ 등은 이 시기에 나타난 대표적인 고정관념 내지 편견들이다. 당시 이런 고정관념과 편견들은 주로 서울에서 나타난 것이었는데, 이는 절대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평생 출생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지역에서 삶을 마감했던 전통 사회에서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게 됨에 따라 지역성의 차이가 부각되고 여기에서 사투리와 지연 관계가 집단적 정체성의 단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초기 근대사회의 특징을 반영한다. 이 시기 부정적 편견의 집중적인 대상이 된 것은 서울로의 이주가 많았던 지역민들이었다. 북한 지역으로부터 내려온 이주민과, 그중에서도 하층민을 이루고 있던 함경도 출신이 대표적인 예다. 반대로 서울 토박이의 인색함에 대한 이주민들의 부정적 감정도 컸다.
1955년 6월 6일자 『중앙학보』에 실린 글에서는 함경도 출신을 “이전투우”적 특질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고, “그 자식 함경도 자식인데 더 말해서 뭐해!”라는 편견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여 준다. 같은 해 10월 22일자를 보면 “내가 시골에서 듣기엔 서울 사람들은 아주 인정 있고 얌전하고 궁한 사람을 도울 줄 …… (안다)던데, 웬걸 내가 와서 겪어 보니 인정 있고 얌전은 고사하고 궁한 사람의 입속 것을 내어 먹을랴 하니 어찌된 일인지 어리벙벙하다”라며 서울 토박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나타난다(고흥화 1989, 89-92에서 재인용). 1960년 조사된 이진숙(1960)의 연구는 서울 사람에 대해 피응답자의 40% 이상이 ‘인색하다’고 평가했으며, 30% 이상은 ‘간사하다’는 고정관념을 부여했음을 보여 준다. 어떤 자료를 보든 적어도 1960년대 초반까지 호남은 지역과 관련된 부정적 편견이 집약되는 대상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반호남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대표적 정치인으로 알려진 김대중은 1961년 당시 강원도 지역의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에서 61%를 득표했으며, 전남과 전북에서도 각각 62%, 54%를 득표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하나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반호남 지역주의를 보여주는 조사 결과가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화와 대규모 인구 이동 과정에서 이주민들 사이에 지역적 정체성을 둘러싼 편견의 교환이 본격화되었지만, 적어도 1960년대 초까지는 호남 출신을 중심으로 한 배제와 소외의 갈등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의 반호남주의는 1960~70년대의 권위주의 산업화와 그것이 가져온 사회 변화의 맥락에서 부각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잘 알다시피 한국의 근대적 사회 변화가 집중되었던 1960~70년대 경제개발 혜택과 엘리트 충원의 공간적 분배에서 수도권과 영남은 집중적인 혜택을 받았다. 비단 호남만이 아니라 그 밖의 지역 모두가 산업화와 엘리트 충원에서 혜택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첫째는 왜 영남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다. 즉 수도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비해 영남이 경제개발과 엘리트 충원에서 압도적인 수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균열의 분획선은 왜 수혜 지역으로서의 영남과 비수혜 지역으로서의 비영남의 갈등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왜 호남이었는가 하는 문제다. 즉 경제개발과 엘리트 충원에서 호남과 마찬가지로 혜택을 받지 못한 충청권과 강원도 출신 역시 왜 반호남의 편견에 쉽게 반응했는가? 혹은 해방 이후 1950년대를 거치는 동안 경쟁적으로 형성되었던 각 지방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과 편견 가운데 호남에 대한 부정적 편견만 호명되고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라디오‧텔레비전‧신문 등 대중매체가 생활 세계를 지배하기 전인 1970 년대 중반까지 집단 간 상호 의식이 형성되는 소통 구조의 기술적 조건은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 압도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로 삼는 지역 혹은 지역성이라는 차이가 만나는 지점은 각 지역 출신들이 모여 있는 도시에서 이루어졌다. 지역과 관련된 편견은 지방이 아니라 중심과 도시에서 만들어졌고, 이것이 역으로 지방으로 확대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박정희 시기, 지역성의 차이가 교차했던 도시는 급격히 성장하는 산업도시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나타난 지역주의는 산업화, 도시화, 계급 분화라는 시간적 축과 지역성이라는 공간적 축이 교직되는 지점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60~80년 사이, 도시 지역 인구 증가분의 50% 이상은 타 지역으로부터의 이주에 의한 것이었다. 도시로의 이주는 여러 가지 요인에 따른 것이었다. 행정 체계의 정비에 따른 도시의 인구 흡수 능력이 증대된 것이나 더 나은 교육 기회를 얻고자 하는 기대 등은 대부분, 같은 광역 행정 지역 안의 도시로 이주함으로써 실현되었다. 따라서 광역지역 내 도시로의 이주는 지역 갈등의 소재가 되기 어려웠다. 반면 산업 부문의 유인에 의한 이주는 달랐다. 1960년대 산업 생산의 중심지였던 서울과 인천의 인구 증가 요인을 보면 타 지역으로부터의 인구 이동이 기여한 정도가 각각 70%와 114%에 이른다. 1970년대에 새로운 산업도시로 등장한 부천, 안양, 울산, 포항의 경우는 각각 83%, 73%, 69%, 69%에 이른다(전광희 1990, 118-119). 이주민만으로도 거의 두 배 가까이 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산업도시로의 이주는 두 개의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서울-경인 지역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남 지역이었다. 그러나 영남 지역의 경우 산업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주로 영남 지역의 농촌퇴출 인구로 채워짐으로써 지역성의 교차 정도는 경인 지역에 비해 훨씬 덜했다. 따라서 박정희 시대에, 출신 지역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주로 경인지역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서울 외곽의 경인 지역이 개발되기 이전인 1960년대의 경우, 절대적인 수의 농촌 인구가 유입된 지역은 서울이었다.
-왜 호남에 대한 편견만 호명되었을까
서울로 유입된 지역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호남과 충청이었다. 서울로 이주한 호남권과 충청권의 인구는 주로 저임금의 불안정 취업자나 일용직 혹은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는 산업예비군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 저소득층의 출신 지역별 분포에 대한 서울시의 조사를 보면 호남이 28.3%로 가장 많고 그다음 충청이 17.3%, 서울이 14.2%, 뒤이어 영남은 12.5%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김만흠 1991, 72). 1980년을 기준으로 영남권, 호남권, 충청권의 인구구성 비율이 30.5 : 16.2 : 11.7인 것을 기준으로 보면 충청권과 호남권은 자신들의 인구 비중을 넘는 서울로의 하층 이동이 두드러지는 반면, 영남권의 서울로의 하층 이동은 인구 비중을 훨씬 못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남의 경우 농촌 퇴출 인구의 대부분은 영남 지역의 산업 도시에서 흡수했으며, 서울로 이주한 영남 출신의 상당 부분은 대학 진학, 관료 진출, 사업의 형태를 띤 엘리트나 중산층의 이주였기 때문이다.
당시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빈민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공장에 다니는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전통적 상업과 서비스 부문 종사자, 대다수 실업 상태에 있는 빈민 등 공식 부문과 비공식 부문을 유동하는 인구가 뒤섞여 경쟁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타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로서, 각자의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은 출신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이때 도시의 저소득층 이주자들 사이에 호남 출신이 다수를 점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피고용자나 피수혜자의 위치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효과를 발휘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은, 도시에서의 정착과 고용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해야 하는 이주민들 사이에서 비호남 출신들의 반호남 의식을 자극하는 객관적 기초였기 때문이다. 또한 세입자와 피고용인의 위치에 설 확률이 가장 높은 호남 출신이 집주인이나 고용주와 갈등 관계를 갖게 될 때, 호남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은 쉽게 부과될 수 있었다.
-하층 이주민 사이의 경쟁
산업화의 초기 단계이자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 있었던 당시로서는 사회 하층 내부의 갈등이 좀 더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과잉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정착과 고용을 둘러싼 경쟁은 거의 생존의 문제에 가까울 만큼 강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김진국(1984)의 조사에서 나타나듯이, 호남에 대한 배타적 거리감은 하층계급의 최다수를 차지하는 호남 출신과, 규모면에서 그 뒤를 잇는 충청 출신 이주민, 그리고 서울의 토박이 하층민 사이의 경쟁 관계에서 비롯된 바 컸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성된 반호남주의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는 것이었을까? 객관적인 증거를 들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주민이 집중되었던 서울에서 호남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이 점차적으로 편견과 기피 의식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현실성이 있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이북 출신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거나 점차 약해졌을 것이라는 것도 합리적인 가정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전까지 반호남 편견과 기피 의식이 집단적 갈등이나 정치 경쟁을 자극한 사례를 찾기는 힘들다. 반호남주의가 집단적 갈등과 정치적 경쟁의 소재로 불러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1971년 대선은 이를 살펴볼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이 시기 반호남주의의 정치적 호명과 조직화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그리고 그 효과는 어땠을까?
-박정희 정권, 영호남을 지지 기반으로 출발 지역주의가 위로부터 조직되고 동원되었다는 증거를 확인하기에 가장 용이한 사례는 선거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거는, 제도화된 정치 참여가 제한되어 있던 권위주의 체제에서, 사회적 갈등과 균열이 단기간 내에 가장 폭발적으로 동원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시기 반호남 지역주의가 최초로 동원된 사례는 1971년 대통령 선거였지만, 그 이전 1960년대에도 지역성이 동원된 선거가 있었다. 1960년대 선거에 동원된 지역성은 호남이 아니라 영남이었다. 영남의 지역성이 정치적으로 동원된 이유는 박정희 후보가 영남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영남 인구가 전체 인구의 30%를 상회하는 최대 인구였기 때문이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영남 이외 지역에서는 ‘구악 일소’ 등 개혁주의를 강조한 반면, 영남에서는 연고 의식에 호소하는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다. 이 전략은 효과적이어서 서울과 경기, 충청에서는 40% 초반의 지지율로 고전한 반면 경북 61%, 경남 67%, 전북 54%, 전남 62%의 높은 지지를 집중시킴으로써 당선될 수 있었다.
더 전형적인 사례는 1967년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여당은 전체적으로 경제 발전의 성과를 부각시키면서도 영남 지역의 선거 유세에서는 여전히 지역성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선거에서는 영호남의 개발 격차에 불만을 갖기 시작한 호남을 제외하고 전국 모든 지역에서 지지율의 상승과 함께 경북과 경남에서는 71%와 75%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영남 지역의 유권자가 박정희를 지지한 것은 산업화의 혜택이 이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63년의 시점에서 경남의 일인당 지역 주민 소득(GRP)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경북 역시 전북에 비해 13%가 낮았다. 그러나 1963년 이후 영남의 경제 수준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1970년의 시점에서 영남은 충청과 호남을 크게 앞질렀으며 경기 지역에 버금가는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영남 유권자가 박정희를 지지했던 것은 산업화의 혜택을 대가로 권위주의를 감수하는 일종의 정치적 교환(political exchange)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의 위기와 지역주의
그렇다면 왜 그 이전 선거와는 달리 1971년 선거에서는 반호남주의를 동원하는 것이 필요했을까?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일 것이다. 첫째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1960년대를 거치면서 호남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의 경쟁 후보가 호남 출신의 김대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사실은 1960년대 박정희의 경쟁 후보가 충남 출신의 윤보선이었으며, 충남의 경우 지역 편견의 대상으로 부각되지 않았다는 것과는 대비되는 변화였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박정희 정권이 반호남 지역주의를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있어 일종의 필요조건이었을 뿐, 인과관계를 연결해 주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야당 후보가 충청 출신에서 호남 출신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야당 후보의 도전과 영향력이 매우 강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이 선거 과정을 압도할 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된다. 첫째 1970년을 전후로 해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본격화되었고, 산업화의 비용을 감수했던 사회집단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69년 3선 개헌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재야라고 불리는 사회 세력이 등장한 것도, 학생운동이 반독재의 슬로건을 내걸고 사회의 전면에 나선 것도 이 시기다. 또한 ‘전태일 분신 사건’ ‘광주 대단지 사건’ 등 산업화가 만들어 낸 하층계급의 저항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였다. 둘째 김대중 후보가 권위주의 체제를 뒷받침한 제도와 기구, 불균등한 분배 구조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당시 그는 중앙정보부의 수사 기능을 축소시키고 국회의 심의 대상으로 만들겠다고 공약했으며, 1968년 창설된 향토예비군제를 폐지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또한 적대적 남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4대국 보장안’을 제시했고 ‘대중 경제’라는 새로운 경제 운영 원리를 주창하면서 ‘부유세 도입’을 공약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대중이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근간을 공격하고 나섰을 때 그의 대중적 영향력은 폭발적이었다. 4월 18일 김대중의 장충단공원 유세에 수십만의 군중이 모인 것은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야당 스스로도 놀라게 했다. 이로 인해 권위주의 정권이 갖는 위기감을 보여 주는 증거는 많다. 예컨대 당시 집권당이 사용한 선거 자금이 1971년 국가예산(5천2백억 원)의 10%를 상회하는 6백억 원에 달했다거나,[2] 선거 유세 종반에 박정희 후보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호소는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고위 관리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충식(1992, 315-318)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호소는 김대중 후보의 상승세가 예상외로 강력하고 이에 따라 박정희 후보의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감지한 중앙정보부의 ‘작품’으로 설명한다. 중앙정보부는 이 과정에서 공화당의 지도부를 설득하고, 마지막으로 박정희와 막역한 관계를 갖는 인사를 내세워 박정희를 설득했다고 한다. 선거 이듬해인 1972년 유신체제의 등장은 이런 상황과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지역주의와 반공주의의 접합
그렇다면 이런 위기 상황에 직면해 박정희 정권이 조직한 반호남 지역주의의 의미 구조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선거 국면에서 박정희 정권이 조직한 반호남 지역주의는 당연히 김대중이 호남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접합’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반호남주의와 반공주의의 접합이자, 반호남주의를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영역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반호남주의와 김대중과의 의미 연관을 위해 동원된 언술이 ‘호남 대통령’이었다면, 반공주의와 김대중과의 의미 연관을 위해 동원된 언술은 ‘사상이 의심스런 자’라는 언술이었다. 박정희 후보 측이 제기한 “이런 사람이 호남 대통령은 될 수 있지만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동아일보』1971년 4월 23일)라는 주장과, 예비군제 폐지를 둘러싼 ‘안보 논쟁’에서 그를 ‘이적 행위자’ 로 몰아 부친 것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이례적으로 “예비군 폐지는 김일성의 남침을 촉진 유도하는 이적 행위다”라는 내용의 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러나 김대중을 전라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반호남주의의 정치 동원이 효과를 갖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196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 확산되었던 ‘간사하고 앞뒤가 달라 배신을 잘하는 호남 사람’이라는 지역 편견은 개인들 간의 사적인 관계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이었을 뿐 집단적인 갈등이나 정치 경쟁의 분획선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반공주의를 불러일으키려 했지만 그럴수록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만 커졌다. 이런 이유로 1971년 선거에서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치는 호남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호남 사람들
-지역주의 정치 동원의 제한적 효과
그렇다면 이 시기,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되고 정치적으로 동원된 반호남주의에 당시 사회 구성원들은 어느 정도 반응했을까?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겠지만 아마도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할 것이다. 첫째는 당시 권위주의 지지 세력의 구성원들은 반호남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상층계급이나 급격한 산업화의 수혜 집단 그리고 엘리트 충원 과정에서 특혜를 얻은 이들 지지 세력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권위주의 체제의 위기와 불안은 곧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위기와 불안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반호남주의의 동원에 반응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반호남주의의 자발적인 조직자, 적극적인 동원자 역할을 했다. 둘째, 정권과 그 지지 세력이 동원한 반호남주의에 대해 일반 대중이 보인 반응은 그다지 강렬한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을 호남 대통령으로 상징화하려 했지만 이보다는 권위주의 정권에 투쟁적인 야당 후보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또한 영남과 그 출신이 경제개발과 인사 충원에서 독점적 수혜를 입었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도 강했다. 김대중은 지역개발의 불균형은 박정희 정권의 책임이라고 공격했고, “내가 당선되면 나는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지, 결코 어느 지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호남 사람이라서 못 찍어 주겠다고 생각하면 안 찍어도 좋다”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3]
‘똘똘 뭉친 호남인’이라는 조작된 이미지를 이용해 비호남 유권자의 반호남주의를 자극하고자 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호남의 집단적이고 강렬한 움직임은 없었다. 따라서 김대중을 ‘호남 대통령’으로 호명했던 것이 야당지지 성향을 가진 도시의 유권자들을 김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했고, ‘똘똘 뭉친 호남’에 대한 반사적 반호남주의가 영향력을 갖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1971년 선거가 반호남 지역주의에 의해 압도되었다면 적어도 영남 지역의 경우 그 이전의 대통령 선거보다 박정희 지지가 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상과는 달리 박정희의 득표는 경남에서 오히려 줄었으며 부산에서는 매우 많이 줄어들었다. 영호남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의 득표 결과만 보면 야성이 강한 도시지역, 특히 서울에서의 지지에 힘입어 김대중이 1만7천여 표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 시기에 국한해 본다면 정치적으로 동원된 반호남주의는 대체로 위로부터의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박정희 정권과 그 지지 세력에 의해 조직된 반공주의와 반호남주의의 접합은 여전히 불완전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경성 권위주의의 등장과 지역주의
1971년 선거에서 가까스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정치 경쟁을 극도로 제한시켰다. 그러나 잠재적 경쟁자이자 반독재 투쟁을 자극하는 김대중의 존재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1971년 선거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과 권위주의 체제의 수혜자들이 반김대중과 반호남의 이미지와 편견을 지속적으로 확대시키고자 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정권은 김대중에 대해 좌경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사적인 생활 세계에서 반호남, 반김대중의 이미지와 편견의 조직자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권위주의 체제의 수혜자들이었다. 1971년 선거를 전후해 이들이 경험한 반독재 투쟁과 하층계급의 저항에 대한 불안감은 반김대중 혹은 반호남과 직접적인 의미 연관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신체제하에서 반호남주의가 ‘지배’와 ‘통치’를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조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1980년 광주항쟁 시기에 나타났다. 비슷한 시기(1979년)에 일어났고 반독재 민주화의 열망이 표출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한 사례였던 부마항쟁과는 달리, 유독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호남의 지역 정서를 불러들여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외부 세력’과 ‘과격 세력’, ‘폭도’가 주도했고 소외 의식과 ‘한’을 가진 지역민이 이에 동조했다고 설명했으며, 주류 언론은 이에 맞춰 기사를 작성했다.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의 접합은 하나의 공식처럼 이루어졌다.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한데 기인한 것”이라는 정부의 발표[4] 나 4백 대 가까이 파손된 차량 가운데 유독 경상도 번호판을 단 두 대만을 부각시키는 등 이미지 조작을 통해 지역감정을 동원하려 했던 관제 언론의 보도 태도는 대표적이다(이남재 1993, 47). 이런 해석이 작위적으로 동원되었을 때 권위주의 체제의 수혜자들이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역주의 때문으로 치환하려는 이들의 해석이 큰 효과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광주에서의 비극을 통해 집권했던 5공화국 정부는 반호남 지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추구했지만 반권위주의 저항 연합의 전국적 확대를 막지는 못했다. 지역주의가 사회적 갈등의 분획선이나, 정치 갈등의 분획선으로 표출된 사례도 없었다. 반호남주의가 권위주의 정권이나 그 지지 세력에 의해 광범하게 조직화되고 동원되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와의 접합이 계속 시도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배의 욕구를 공유하는 집단 사이의 문제였을 뿐, 사회 대다수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정도의 효과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1980년대 이후,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행기에서는 어떠했을까? 이 문제는 3부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박정희 정권 시기 권위주의 산업화를 거치면서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 형성에서 인격적 특질 운운하는 편견에 기초해 호남 출신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둘째, 이런 반호남 지역주의는 급격한 ‘근대화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잔존한 전근대적인 유산이 아니라, 지역적 정체성의 차이가 중첩되었던 급격한 도시화와 계급 분화, 그리고 영남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재생산하고자 했던 권위주의 정권과 그 지지자들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셋째, 이 과정에서 근대 이전의 중앙과 지방의 균열을 반영하는 호남에 대한 편견은 ‘발견’되었고, ‘동원’되었으며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창조’되었다.
반호남 지역주의는 호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2차적 균열’혹은 냉전 반공주의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권위주의 산업화가 만들어 낸 ‘파생적 균열’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언어‧종교‧인종‧문화‧전통‧역사적 차이를 가진 다수의 지역공동체가 존재하는 나라들에서 발견되는 지역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지역주의이다. 이들 나라의 경우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에 역사적 기원을 갖는 원형적 지역성(proto-regionalities)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다른 지역 집단과 객관적으로 구분되는 문화적 특성을 갖는다. 그 표출 형태는 정치적 충성심을 지역공동체로 회귀시키고자 하는 지방적(local) 현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지역주의의 정치적 동원 역시 분리나 자치를 지향하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우 동질적인 언어‧인종‧혈연적 기초 위에서 일찍이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가 확립된 한국의 경우 원형적 지역성은 매우 미약했다. 적어도 고려 시대 이후에는 분권화된 통치 공간을 갖춘 어떤 지역공동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지역 갈등이 불거졌다 해도 그것이 원형적 지역성이나 지역공동체의 존재 때문에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러한 분획선이 호남과 비호남 사이에 그어질 객관적‧논리적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호남 출신을 기피하고 차별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호남민의 타고난 인격적 특질’이란 편견이자 허위의식이며,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역성이 아니라 권위주의가 기원
또한 호남의 지역성이 반호남 지역주의의 형성에 있어 전제적 조건이거나 필수적 조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소외 의식에 기반을 둔 호남의 지역주의 역시 호남이 갖는 지역성의 문제가 아님을 의미한다. 오히려 호남의 소외 의식에 앞서 반호남 의식이 먼저 형성되었고, 이런 반호남 의식이 지배와 통치의 계기와 결합된 편견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라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된 호남의 지역주의가 비호남의 반호남주의와 같은 차원으로 대비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를 비지역적 차원에서 파생된 균열로 보는 것은 지역주의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도 의미를 갖는다. 3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지역주의 이슈의 초점은 계속해서 변해 왔다. 예컨대 영남 지역의 투표 행태는 끊임없이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으로 분할과 통합을 반복해 왔을 뿐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 한 정당의 득표 독점성도 끊임없이 유동해 왔다. 지난 2000년 선거 이후 충청권은 대체로 3당 체제에 가까운 결과를 보였다. 호남권 역시 2004년 총선 이후, 특히 2006년 지방선거에서 양당 체제적 경향을 발전시켰다. 아마도 가장 극적인 변화는 2004년 총선에서 호남 지역의 선거 시장을 독점했던 열린우리당이 그 이후 지배력을 상실한 사례일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가 갖는 2차적인 균열의 성격을 이해하지 않는 한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앞으로도 지역주의의 정치적 표현은 권력관계적 계기가 변화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운 내용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주석
[1] ‘역사적 민족’(historical nation)의 개념에 대해서는 E. J. Hobsbawm(1990) 참조.
박상훈,『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후마니타스, 2009, p. 34-59
죽어서도 못 뗀 빨갱이 딱지
12대 총선은 1개 선거구당 2명을 뽑는 체제로 민정당에서도 의석이 나올 수밖에 없었으며, 일부 민정당 1위 선거구는 야당표 분산의 결과이지 민정당에 대한 지지가 높았던건 아닙니다.
전남 출신의 김대중 후보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면서부터 박정희 군사정부는 정권 안보를 위해 지역 패권을 추구한다. 영남 출신을 중용하고 경제적인 특혜를 베풀면서 영남인들의 단결을 도모했던 것이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골적으로 경상도인의 지역 감정을 부추겼다. ‘후백제 후보 김대중’이라는 명의의 흑색선전물이 난무하고 ‘경상도인이 전라도인을 찍으려면 이사를 가라’는 등의 노골적인 지역 감정의 메시지를 시시각각 내보낸 것이다. 1972년 유신으로 정권의 정통성이 땅에 떨어진 다음부터 박정희 정권은 전적으로 경상도의 지역 패권주의와 호남 고립의 전략, ‘김대중 빨갱이론’에 의존하여 유신체제를 지탱해 나간다.
한국에서 정치.사회적인 문제로서 영호남 지역갈등이 등장한 것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였다. 그것은 1980년 광주학살을 거치면서 호남인들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으며, 전두환 정권 하에서 그 상처는 더욱 곪아갔다. 20세기초부터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의도치 않게 생겨났던 지역간의 경제력 격차가 박정희 정권 하에서부터 영호남간의 문제로 좁혀져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당시 집권세력이 엘리트 충원과 지역개발 면에서 의도적 차별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계,재계,금융,언론,군장성 출신들은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80%까지 영남출신들로 채워졌다. (5공정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모든 주요기관들 역시 반이상이 영남출신들로 채워졌으며, 영남정권 40여년동안의 기록을 보면 영남출신 재벌들이 그 당시 전체 기업 금융대출의 58%를 독식하였던 것을 알수 있다. 이는 이북출신이 받던 대출을 제외하면 서울,경기,충청,전라,강원,제주 출신 기업인들은 고작 20~25%의 기업대출을 서로 나눠먹는 정도로 영남정권 당시 영남을 제외한 전지역 출신들이 얼마나 많은 차별을 격어왔는지 알 수 있다. (참고: http://blog.naver.com/rozet77/80018110103)
그러한 영남 몰표는 부정선거와 더불어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적극적으로 부추긴 결과였다. 1971년 대선에선 특히 국회의장 이효상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는 1963년 대선에서도 9월 10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공화당 유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는 지역 분열주의자였다. "이 고장은 신라 천 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이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을 천 년만의 임금으로 모시자."33) 이효상은 1963년 대선에서 재미를 본 수법을 또 써먹은 것이다. 그는 선거 유세 때마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라고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숱한 망언을 양산해냈다.34) 그 밖에도 공화당 정치인들은 영남 지역 유세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들은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경상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거라는 인간의 원초적 공포심을 자극하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아울러 '우리가 똘똘 뭉쳐 몰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망한다. 서울이고 경기도고 전라도고 우리 표를 빼낼 곳이 없다. 우리가 몰표를 던짐으로써 우리의 지도자, 조국 근대화의 기수를 건져내야 한다'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경상도 지역의 공무원들에겐 '김대중이가 만약 정권을 잡으면 모조리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아울러 공화당원과 경찰,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서울에서 영남 지역으로 내려온 참관인들에게 '이 전라도놈(김대중 후보를 지칭) 앞잡이들아, 모두 꺼져버려라!'라고 스피커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협박하고는 공명선거 감시단 참관인들을 모조리 쫓아버리곤 했다. 이 때문에 영남 지역에는 참관인들이 아예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또한 영남 지역 야당 인사들에게는 '이 선거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싸움인데 당신은 왜 전라도놈 앞잡이 노릇을 하고 다니느냐?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 마을에서 없어져라!' 하면서 여럿이 떼로 몰려와 구타 · 협박하였다. 혹은 술과 밥과 돈으로 매수하여, 투표 당일 야당 참관인으로 참석 못하게끔 했다. 설령 참석한다 해도 그들이 어떠한 선거부정을 저질러도 찍소리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36)
권위주의 세력이 지역주의를 창조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005019 여러분 자신은 정말 선거 때마다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따져볼 것도 없이 무조건 ‘우리 지역’ 출신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묻지마 투표’를 하는가? 충남 청양에서 떡방앗집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박상훈(45) 대표는 1987년 서울대(경영학과)에 들어간 뒤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6월항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었다. 학과공부는 하지 않고 친구들과 사회과학 공부 하면서 시위에 열심히 참가했는데, 너무 무서웠다. 그땐 주로 노동문제를 고민했는데 과감하게 뛰어들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에 더 과격하지 않았나 싶다. 그게 진짜 내 모습일까 하는 반성을 했다.”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 들어가 박사과정 때 지역주의 문제를 화두로 붙잡았다. “처음 지역주의 문제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호남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편견에 항의하려는 마음이 컸다.”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훈요십조(訓要十條) 제8항의 차현이남 (車峴以南) 공주강외(公州江外) 위치 http://blog.chosun.com/casy/3220308
훈요십조 8항 원문을 보면:
원문 :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 生亂, 且其僧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奸巧言語, 弄權亂政, 以致 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여기서 문제가 되는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지역은 어디인가?.
한자를 보면 車峴의 峴은 볼見에 뫼山이 옆에 붙어있는 고개/재 峴자로 산이 눈높이에 보이는 높지않은 지역를 뜻하는 글자다. 嶺이란 거느릴領에 뫼山을 머리에 이고있는 글자로 산들을 거느리고 있는 높은 지역을 뜻하는 글자다. 낄夾에 뫼山이 옆에 붙어있는 峽[협]은 높은 산과 산사이에 있는 낮은 지역을 뜻한다. 구릉지와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고개나 재가 많으며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종적개념으로 지역의 높낮이에 따라서 峴,嶺,峽를 선택하여 사용했다.
峴을 사용한 예를 보면, 서울 강북에 있는 大峴/阿峴/車峴/梨峴/紅峴/雲峴/藥峴/葛峴/餠市峴/瓦署峴/西學峴/綠礬峴, 서울 강남의 論峴/上峴/南峴/栗峴, 개성의 泥峴/銅峴/不朝峴/朱雀峴, 성남의 葛峴/金峴/走川峴/陽峴/書峴, 용인의 上峴/葛峴, 인천의 葛峴/橘峴/三呼峴, 다산 정약용의 고향 남양주 馬峴처럼 지역내에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구릉지같이 높이가 낮은 고개에서 사용되었다. 嶺을 사용한 예를 보면 鐵嶺,寒溪嶺,陳富嶺,彌矢嶺,大關嶺,花折嶺,鳥嶺,秋風嶺,車嶺,六十嶺처럼 높이 솟은 산봉우리와 그에 연결된 험준한 산마루가 있는 高峯峻嶺[고봉준령]지역에 사용되었으며 높고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지역에 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까지 사용예가 남아있는 서울의 갈현동,송현동,대현동,아현동,논현동,남현동,율현동,녹번동의 녹번현,상도동의 상현처럼 야트막한 산이나 구릉지가 있는 지역에 峴을 써서 표기했다. 높은 산과 험준산 산마루가 있는 조령[鳥嶺]은 충북과 경북을 가르는 백두대간에 있지만 전국 여러 곳에 있는 조현[鳥峴]이란 지명은 높이가 낮은 고개들이다. 峴은 마을이 형성될수 있는 구릉지대지만 嶺은 높고 험준한 지역에 쓰였다. 峴는 전국 방방곳곳에 매우 많이 있지만 嶺은 제한적이어서 손에 꼽을 정도이다.
훈요십조를 원문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원문의 峴이란 글자를 嶺으로 바꿔치기하여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峴자를 嶺자로 바꿔치기하는 것도 모자랐는지 한술 더떠서 종적개념인 峴자를 산맥처럼 길다란 횡적개념인 산맥으로 왜곡하여 원문의 車峴以南을 車嶺山脈以南으로 조작 왜곡함으로써 원문의 뜻이 완전히 달라지도록 만드는 사람이 있다.
車嶺山脈 명칭은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처음 만들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일제시대 이전의 산경도나 지리서에는 없는 명칭이다.
고토분지로가 명명한 車嶺山脈은 백두대간이 강원도 중남부 오대산 부근에서 분기하여 남서로 뻗어 충청북도와 경기도의 도계를 이루고 충북과 충남 경계지역에서 끊겼다가 다시 충남 북부지역에 나타나 서해까지 뻗은 산맥이다. 따라서 훈요십조의 차현이남을 차령산맥이남으로 왜곡하여 해석하면 차령산맥이 지나는 지역 아래지방인 강원도 남부이남과 충청도이남 전체가 된다. 훈요십조의 峴을 嶺으로 왜곡 변형하여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고문서/기록들을 보면 車峴 지명이 있는 곳은 평북 정주시,평양시 순안구역,황해도 은율군, 漢城府 車峴大路,충북 음성군,충남 연기군,경남 산청군 등이고 車嶺 지명이 있는 곳은 충남 천안시,강원도 정선군,평북 초산군이다.
그중 충북 음성군의 차현고개, 수레티 고개(한자로 표기하면 車峴고개)는 지금도 사용하는 지명으로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사이에 있다. 강원도 중부 오대산에서 뻗어나온 차령산맥의 중간지점인 충북 음성군 삼성면과 생극면 지역에는 차현고개, 차곡리,차평리, 車의 순 우리말인 수레의산, 수레티고개, 수레울등 車에 관련된 지명이 유달리 많다. 수레티의 티나 수레울의 울은 모두 지역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강원도 중남부부터 충남북부 서해안까지 이어지는 차령산맥의 충남 천안 차령지역은 실제로 산이 높고 험준한 高峯峻嶺지역이고 충북 음성의 車峴지역은 산이 낮은 지역으로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이며 두 지역은 지리적,역사적으로 다른 지역이다. 훈요십조 8항의 차현은 충북 음성의 차현과 지리적,역사적으로 일치한다.
음성군 북쪽의 중부고속도로가 지나는 차현고개주변 차령산맥지역은 삼국시대에 매우 중요한 지리적, 군사적 요충지로, 특히 동남쪽에 치우친 신라가 경상도와 충북의 경계인 이화령을 지나 한강 및 경기도로 진출하여 당나라와 교역하고 한강 경기지역의 풍부한 물자를 수도인 서라벌로 가져오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통일신라는 차현고개 이남인 청주지역에 5소경의 하나인 서원경을 두었고 차현고개 북동지역에 중원경을 두었다. 5소경은 작은 서울이란 뜻으로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통치하고 지방세력을 감시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차현고개 주변 차령산맥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에 전체 5소경중 두개의 소경을 둔 것은 그만큼 이지역이 정치적,군사적,지리적으로 중요하였다는 뜻이다.
당나라와의 교역물품들과 경기,한강지역에서 생산된 생산물품들을 실은 수많은 마차와 인력들이 차현고개, 이화령을 거쳐 경상도 서라벌로 가고 다시 경상도 서라벌에서 출발하여 이화령 차현고개를 거쳐 경기, 한강지역으로 갔으며 수레(車)와 관련된 지명이 자연스레 생겨났을 것이다. 고지도, 고문서 및 금석문에 차현고개 및 차에 관련된 표기가 많이 남아있고 현재도 차/수레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충남 천안은 차령말고는 차에 관련된 지명이 안보인다. (그림1,그림2,그림3) 다음으로 훈요십조 8항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公州江外는 어디이고 公州江內는 어디인가. 錦江과 公州江은 같은 개념인가.
고지도와 조선시대 山經表등을 보면 白頭大幹의 淸北正脈과 淸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淸川江이라 하고, 漢北正脈과 漢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漢江이라 하고, 錦北正脈과 錦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錦江이라 하며, 洛東正脈에 있는 강을 洛東江이라 했다.
동국여지승람 등에 보면 금강은 지나가는 지역에 따라 옥천지역은 赤登津江, 청주지역은 淸州江, 연기지역은 芙江, 웅진지역은 熊津江, 부여지역은 白馬江, 하류지역은 古城津江으로 불렀으며 강 전체를 뜻하는 금강과는 다른 개념이다. 웅진이란 지명이 통일신라 경덕왕때 웅주로 바뀌었고 태조 왕건이 웅주를 公州로 개칭하였으며 공주현지역을 흐르는 강 이름도 지명에 따라 공주강으로 개칭되었다.(그림4)
한강이 지역에 따라 홍천강,평창강,주천강,동강,소양강,북한강,섬강,남한강,임진강으로 불리지만 강 전체를 뜻하는 한강과 개념이 다르고, 낙동강이 지나가는 지역에 따라 안동강,밀양강,영강,금호강,남강이라 불리지만 강 전체를 뜻하는 낙동강과 다른 개념이며, 영산강이 지역에 따라 남포강,목포강,사호강,곡강,오례강,황룡강이라 불리지만 강 전체를 뜻하는 영산강과 다른 개념이고, 만경강이 고산천,소양천,탑천,삼천과 전주시를 지나는 전주천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錦北正脈과 錦南正脈사이에 퍼져있는 강 전체를 뜻하는 錦江과 公州고을을 흐르는 公州江은 다른 개념이다. 公州江外의 外자가 사용햇던 예를 보자. 왕이 있는 도성안[都城內] 도성밖[都城外], 왕이 있는 본주내[本州內] 본주외[本州外], 서울市內/市外 부산市內/市外, 공주市內/市外처럼 행정구역이나 성벽, 강과 같은 인공물이나 자연물이 경계를 이루는 안쪽과 바깥을 구분하기 위해 內/外를 사용한다. 왕이 있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가리킬때는 內/外를 쓸수 없으므로 왕이 있는 지역에서의 방위를 따져 東西南北을 붙여서 사용하였다.
고려초 수도 개경이 있었던 관내도(關內道), 평안도 지역인 패서도, 충청도 지역인 중원도,하남도 전라도 지역인 강남도, 해양도, 경상도 지역인 영남도, 영동도, 산남도 모두 이런 방식으로 지어진 명칭이다. 따라서 왕이 있는 도성이나 왕이 있는 본주와 멀리 떨어진 지역은 왕이 있는 곳에서 봤을때의 동서남북 방위개념을 사용하여 표기한다. 이러한 표기법은 중국과 한국등 한자문화권에서 수천년간 표기해온 표기법이고 지금도 널리 사용하는 방식이다. 왕성이나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동서남북 방위 대신에 外를 써서 표기한 예는 없다. 外를 以南으로 조작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은 근거를 찾아볼수 없는 잘못된 해석이다.
公州江內/外식으로 표기해보면 한강을 경계로 한성쪽은 한강내라 하고 강건너편은 한강외라 하고 공주강을 경계로 공주성쪽은 공주강내라 하고 강건너편은 공주강외라 하고 전주천을 경계로 전주성쪽은 전주천내라 하고 건너편을 전주천외라 하며 달구벌강을 경계로 대구성쪽을 달구벌강내라 하고 대구성 강건너편을 달구벌강외라 한다. 아직도 그런 표기 흔적이 남아있는데 신라말에 서원경성이 있었던 지역인 청주시 쪽을 강내[江內]라 하고 강건너 지역을 강외[江外]라 하였는데 지금도 금강을 경계로 청주시 쪽이 청원군 강내면[江內面], 강 건너편이 청원군 강외면[江外面]이다. 따라서 훈요십조 公州江外는 公州城에서 봤을때 공주강을 경계로 안쪽은 公州江內이고 강건너편이 公州江外이다. 위와같은 내용들을 가지고 훈요십조 8항의 車峴以南 公州江外을 해석하면 車峴은 충북 북쪽에 있고 公州城은 공주강 아래에 있으므로, 차현고개에서부터 남쪽(車峴以南)으로 내려오다 만나는 공주강바깥(公州江外)지역까지이다. 즉 車峴以南지역과 公州江外지역이 서로 겹치는 교집합 지역을 말한다. 이지역은 신라말 西原京지역으로 오늘날의 음성,진천,청주,연기지역이 될것이다 (그림5). - 훈요십조 8항 車峴以南 公州江外 해석의 결론. 만약 훈요십조 8항식으로 개성과 서울 사이의 파주지역을 표현하면 開京以南 漢城府外가 되며 이것은 개성이남과 서울시 바깥 경계 사이에 있는 지역인 파주를 뜻하지 서울시 남쪽인 강남이나 수원을 뜻하지 않고, 漢江以南 水原市外라고 하면 한강이남과 수원시 경계 바깥사이인 과천,성남을 뜻하지 수원시 남쪽인 천안을 뜻하지 않는 것과 같다.
송악산[松岳山]은 개성의 북쪽에 있고 평양강[平壤江]은 평양성[平壤城] 남쪽에 있으므로 松岳以北 平壤江外라하면 개성 북쪽지역으로 올라가서 평양강까지로 양쪽 사이에 있는 황해북도 지역을 뜻하지 평양강[平壤江] 북쪽지역 평안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鳥嶺以南 安東江外라 하면 조령이남과 안동강 사이에 위치한 문경지역을 비정한 것이고, 달구벌(대구의 고지명)강은 오늘날 대구시 금호강으로 공주강이 公州縣을 감싸고 흐르듯 達句伐縣를 감싸고 흐르는데 鳥嶺以南 達句伐江外라 하면 조령이남과 達句伐縣(대구시) 경계 사이에 있는 지역을 뜻하지 達句伐江(금호강) 남쪽인 대구시와 경남을 뜻하지 않는 것과 같다.
훈요십조가 기록된 고려사를 보면 936년 태조 왕건 19년에 후백제를 평정하고 후백제 지역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는데 安은 長安의 뜻으로 왕이 있는 개경을 뜻하며 安南은 개경의 남쪽 지역이란 뜻이다. 또한 경주(慶州)를 개경의 동쪽지역이라 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개경의 서쪽지역 해주(海州)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라 하였다. 또한 거란의 침입으로 훈요십조 원본이 불타기전인 고려 6대왕 성종 995년에 지방 행정구역을 공주,대전지역의 공주강 남쪽지역을 하남도(河南道), 전북지역을 강남도(江南道), 전남지역을 해남도(海南道)라 하였다. 개경에서 봤을 때 공주강 남쪽에 있으면 河南道, 江南道라 하였고 개경에서 봤을 때 백두대간 남쪽에 있으면 嶺南道, 동쪽에 있으면 嶺東道라 하였다. 왕이 있는 개경에서 봤을때 명칭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봤을때 전라도는 금강 남쪽이란 뜻의 湖南, 경상도는 백두대간 남쪽지역이라하여 嶺南, 강릉지역은 嶺東, 원주지역은 嶺西라 하였다. 위의 경우처럼 고려 태조 왕건부터 조선말까지 公州江以南 지역은 개경과 한양에서 봤을때 남쪽이므로 南이란 단어를 넣어서 기록하였다. 태조 왕건이 생전에 公州江以南을 개경에서 봤을 때 남쪽이라 하여 南을 써서 표기했고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등 우리 조상들이 기록한 정사에 公州江以南 지역을 개경이나 한양에서 봤을때 南으로 표기했지 外라는 희한한 표기는 없다.
車峴以南을 빼고 公州江外을 錦江以南으로 왜곡 변형하면 公州江은 크게 전북과 충북에서 발원한 지류(몇몇 고지도는 충북에서 발원한 금강지류를 더 굵고 길게 표시했고 신라말에 청주를 금강 명칭을 따서 청천현이라 했고 고려,조선시대 기록에도 청주강이라 표기된 예가 있음)가 公州縣에서 만나 公州江이 형성되므로 전북에서 발원한 지류로 보면 충청도 중부/남부와 전라도, 충북에서 발원한 지류로 보면 충청도 동부와 경상도로 삼남지방 대부분이 해당된다. 그러나 훈요십조8항에서 차현이남을 빼고 공주강외를 금강이남으로 해석하는 것은 원문을 왜곡 조작하는 해석이며 그리 할 이유가 없다. 만약 태조 왕건이 오늘날의 충청도 중부/남부와 전라도를 지칭하고 싶었다면 복잡하게 車峴以南 公州江外라 하지않고 간단히 公州江以南이나 또는 당시 충남, 전북을 가리키는 河南以南지역 또는 江南以南지역이라고 했을 것이다.
지역주의자들 방식대로 훈요십조의 차현이남이 차령산맥이남이라면 강원도 중남부 오대산에서 내려와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차령산맥이남 지역은 강원도 남부, 충청도이남 전체가 된다. 충북 음성의 차현을 충남 천안의 차령과 혼동하여 차현을 차령으로 변형하고 공주강외를 공주강이남으로 왜곡 변형하여 해석하여도 공주강 남쪽에 있는 공주,부여,대전,청주 등 삼국시대부터 충청도 지역의 정치,경제,문화 및 교통의 중심지역이 모두 들어간다. 그럼에도 직접 해당지역인 충청도는 빼고 멀리 떨어진 전라도설을 주장하는 이유가 뭔가. 지리적,인문적 소양 부족이나 사악한 정치적 목적이 아니면 주장할수 없는 비학문적이고 비양심적인 주장이다.
궁예는 변란을 피해 차현고개 인근의 칠장사에서 유아때부터 10여세까지 보냈다 (http://blog.chosun.com/casy/3585459). 그런 연유로 칠장사에서 가까운 5소경중 하나인 서원경이 있었던 청주지방 일대는 궁예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으며 궁예가 청주출신 사람들을 각별히 신임하여 중용하였고 왕권강화를 위해 청주사람들을 철원으로 이주시켜 왕조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왕건일파의 반란으로 나라를 빼앗긴 궁예의 추종세력들은 크나큰 분노와 반감을 가졌고 궁예의 정치적 고향이자 왕조의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중심으로 임춘길,이흔암,선장형제 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서 왕건이 그지방 호족들에게 동물의 성씨를 내리면서까지 탄압하였고 일부 세력은 후백제에 투항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왕건은 청주인들의 반란이 계속되자 청주인들이 집단이주한 철원지역을 피해 자기의 고향인 송악으로 수도를 옮긴다. 고려중기 청주 남쪽에 있었던 천민주거지역 명학소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차현이남 공주현 외곽지역은 적극 호응하였다.
왕조를 찬탈하면 이전 왕조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은 새왕조에서 경계하게되고 이전 왕조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은 옛 영화를 되찾고자 틈만나면 도발함으로 왕건이 궁예의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경계하라는 유훈을 남긴 것으로 보여진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의 기반인 개성사람들을 많이 살상하고 과거를 못보게 했던 기록이 있는데 같은 맥락이다.
후삼국시대 말에 풍수도참설을 완성시키고 고려,조선의 정책과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던 풍수의 宗師이자 고려초 國師였던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 왕융에게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지시켰고 송악산에 솔나무를 심고 왕성의 기반을 다지도록 하였다. 또한 전라북도 성수산(聖壽山)이 산세가 천자가 조례를 받는 천자봉조지상(天子奉朝之像)으로 왕기가 서린 지역이라 하여 초야에 묻혀있던 왕건을 데려다 성수산에서 107일간 기도하게하고 고려를 건국하도록 훈육하였다.
스승인 도선에게서 풍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왕건은 청주인들의 반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고 쿠데타로 몰아낸 궁예의 정치적 기반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를 건국한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김유신의 출생지역이기도 한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이 풍수적으로 꺼려졌을 것이다.
스승 도선의 고향이자 청년시절 개국의 기반을 닦았던 전라도에 대해 왕건이 다른 지역보다 호감을 가졌다는 증거가 있는데 말년을 함께 보낸 부인들이 전남 승주출신이고,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고 장성한 큰 아들 왕무에게 왕위를 물려준 점이 그렇다. 또한 개국후에 스승 도선의 의견에 따라 여러 곳에 비보 사찰을 세우고 불교 숭양을 훈요로 남기고 국교로 삼았다.
태조 왕건의 권력 핵심중에 핵심이 모두 전라도출신이며 마음과 권력을 모두 전라도에 주었다고 보여진다. 전혀 그렇지 못한 지역이 태조 왕건이 전라도 차별하는 훈요8조를 남겼다고 왜곡하는 것은 빈한한 자가 부귀한 자를 시기하는 꼴인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이방원등도 성수산에 와서 조선 건국을 위한 기도를 올리거나 근처에서 사냥을 한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고 성수산 上耳庵에 친필유적이 남아있다. (http://blog.chosun.com/casy/3623108)
고려초 기록을 보면 풍수적으로 本州인 개성/경기도와 배류하는 강으로 낙동강,섬진강을 지목했는데 그 이유는 본주를 등지고 남쪽으로 흐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청주강은 충북 음성군 부용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충남 연기군에서 전북쪽에서 오는 지류와 합류하여 부강을 이루고 공주지역으로 흘러가서 공주강을 이룬다. 고려초 풍수에 따르면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에 위치한 청주강은 본주와 배류한다. 훈요십조 車峴以南은 車嶺山脈以南이고 公州江은 錦江이라고 왜곡 조작하면서도 차령산맥이남, 금강유역에 직접 속하는 충청도 지역은 훈요십조가 가리키는 지역이 아니고 차령산맥과 공주강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지역이 훈요십조가 가리키는 지역이라며 훈요십조 전라도설을 주장한 사람이 누구인가.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압기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 이마니시(今西龍)에 의해 그 해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기 시작하였다. 이마니시는 구한말까지도 우리의 역사로 가르쳤던 단군조선을 신화로 규정하여 우리 역사의 기원을 일본보다 아래로 만들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입시켰으며 한사군의 위치를 조작하려 점제현비를 조작하고 식민지배에 장애가 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일부 내용을 부정하는 등 일제 식민지배를 위해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 조작했던 핵심인물이다.
차현이남 공주강외 뜻를 왜곡 변형한 이마니시는 그러나 전라도는 차별받지 않았으므로 훈요십조는 조작됐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마니시의 수제자 이병도는 이마니시 해석은 계승하고 조작설은 부인하였다. 해방후 이병도는 국사학계를 장악하고 이마니시의 식민지사관에 입각한 주장들을 그대로 계승하여 우리 역사를 가르쳤으며 훈요십조 8항 해석도 이마니시의 주장 그대로 1948년에 발표된 자신의 논문에 넣으면서 유포됐다. 연세대 설성경 교수는 전라도지역은 전혀 차별받지도 않았고 왕건은 삼한 통합에 매진했으며 公州江外를 公州江以南으로 해석한 것은 잘못(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5/nd98050100.html)이라 하였다.
건국대 신복룡 명예 교수는 "일찍이 ‘고려사’ 태조 편이 편찬되어 있었지만 현종 시대(1010-1011)에 거란군 40만 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최제안(崔齊安)이라는 인물이 최항(崔沆)의 집에 있는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다.(‘고려사’ 열전 최승노·제안 조) 최항은 경주 황룡사(黃龍寺)의 중창(重創)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한 인물로서 신라의 후예였다. 최제안은 고려 초기의 중신이었던 최승노(崔承老)의 손자이며, 최승노는 경주 출신으로 신라에서 고위 벼슬을 지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이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 구신(舊臣)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私家)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라며 훈요십조 진위에 의문을 제기했다.
옛 신라지역 출신인 정몽주는 백제지역 왕조출현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고(http://blog.chosun.com/casy/3651498), 영남출신으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과 영남 남인과 같은 남인계열로 당시 전라도 광산김씨가 주도했던 권력싸움에 패해 가문이 큰 고초를 겪었고 자신을 훈육한 부모같은 친형이 장살당한 아픈 기억으로 평생 야인생활을 했던 이익과 이익의 종친, 제자들 중 이중환,안정복 등이 개인 저서에서 훈요십조 전라도설을 주장했으나 고려/조선왕조 인사정책과 관련없는 개인적인 주장일뿐이다. 조선초기 전라도 반남박씨에게 권력싸움에서 패한 경상도 청송심씨는 가훈으로 반남박씨와 통혼을 하지말것을 가훈으로 남겼는데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올수 있는 개인적 주장이나 가문간의 다툼이 반영된 주장을 지역주의로 왜곡 악용해서는 안된다.
현지 실사를 하지않아서 오는 지리적 개념의 무지나 사료들을 충분히 연구하지 않아서 오는 인문적 소양의 부족 또는 잘못된 식민사학자의 주장을 분별없이 인용했던간에 훈요십조 8항의 전라도설 주장은 잘못됐으므로 학설을 올바르게 정립하여야하며 훈요십조 8항을 왜곡 변형하여 호남지역을 음해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1. 고려초기에 백제지역 호족,귀족들이 중앙에 대거 진출하여 권력의 핵심이 되었고, 8대왕 현종은 공주강이남에서 태어난 공주의 김은부 세딸과 전주 박온의 딸을 왕후와 후궁으로 삼아 김은부의 딸이 낳은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고려중기 17대왕 인종의 비 공예왕후 임씨가 전라도 장흥에서 출생하여 왕비가 되면서 이후 고려가 멸망할때까지 공예왕후계열에서 왕들을 배출했다. 또한 고려후기 26대왕 충선왕이 왕실과 통혼이 가능한 '누대의 공신이요 재상의 우두머리'인 당대 1급 가문들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는데:
언양김(彦陽金), 정안임(定安(장흥)任, 시조 임호), 경원이(慶源李), 파평윤(坡平尹), 안산김(安山金), 철원최(鐵原崔), 해주최(海州崔), 공암허(孔岩許), 평강채(平康蔡), 청주이(淸州李), 당성홍(唐城洪), 황려민(黃驪閔 ), 횡천조(橫川趙), 평양조(平壤趙), 전주김(全州金, 시조 完山君 김태서)" 위의 15개 본관들을 보면 경기도 7개, 황해도 2개, 강원도 2개, 전라도 2개(정안임,전주김), 충청도 1개, 경상도 1개이다. 충청/전라/경상의 하삼도중에서 전라도가 충청도/경상도보다 많다. 또한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국사는 왕을 계승할 권한이 있는 태자가 왕위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국사가 될 정도로 고귀한 지위이자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는 자리였으며, 사대부들의 나라인 조선이 세도정치와 서원의 폐단으로 국력이 약화된것 처럼 불교의 나라인 고려는 승려들의 횡포와 사원의 폐단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조선에서 억불숭유정책을 채택하는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최상류층인 승려들을 통솔하는 국사가 사찰이 전라도보다 훨씬 많은 경상도,충청도 지역보다 전라도지역에서 대거 배출된 것은 개성/서경 세력에 이어 전라도지역이 제2의 권세를 누렸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2. 이병도는 조선을 팔아먹은 우봉 이씨 이완용의 종친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조선통치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이론을 만들고 주입시킨 인물이다. 이병도는 종친인 이완용이 팔아먹은 조선에 대해 부정적일수밖에 없었고 구한말 및 일제강압기 광주학생운동같은 전라도지역의 조직적이고 극렬한 반일운동과 서재필,김성수,송진우,김병로등 정계와 재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라도출신들의 항일투쟁으로 신상의 위협과 자신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식민정책 시행에 가장 큰 걸림돌인 전라도지역에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공신이었으나 해방후 역적이 된 친일파 이완용의 종친 이병도는 시대가 바뀌자 종친인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지우려 원광대에 있던 이완용의 자료를 훼손하였으며 친일파들을 배척하지 않은 이승만/박정희정권에서 문교부장관 및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으로 국사학계를 장악한 이병도는 고조선,삼한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와 자신의 이론들을 국사책에 넣었으며 이병도의 제자들 및 일부 사학자들이 이러한 이론들을 인용하고 있다. 3. 조선왕조에서 전라도는 조선왕조 스스로 왕조의 본향이라 하였으며 풍패지향이라 불렸고 전라도 감영이 있던 전주성은 풍패를 따서 남문은 풍남문,서문은 패서문,귀빈들이 머무는 객사인 풍패지관과 조선왕조의 시조묘인 조경단,역대 성군들을 모신 경기전등이 있다. 왕조의 본향이라는 자부심은 왜란/호란같은 국난시에 가장 많은 군사들과 의병들을 배출했고 구한말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궐기한 의병의 40%를 차지했다. 호란때 조선왕조에 반감이 심했던 지역에서 모병활동을 하지 않았던 예만 보아도 왕조의 지역적 기반 및 자부심, 충성심의 지역적 차이를 알수있다. 4. 전라도 지역은 고려초부터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가장 영향력이 큰 왕후장상 및 권력가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배출하였고 훈요십조에 따라 전라도가 차별받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경기도빼고 권세를 가장 많이 누린 지역이 전라도지역이다. 또한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첫장 태조실록에 보면 조선왕조의 朝家가 전주에서 나왔다 하였고 영남유학의 시조 점필제 김종직은 그의 문헌 점필제집에서 조선왕조는 전주에서 나왔다 하였다. 실학의 거두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聖朝가 전주에서 나왔다며 신성시 하였다.
훈요십조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위의 기록들을 해석하면 고려,조선왕조 일천년은 전라도가 여당이었고 가히 전라도 정권이라고 할만하다.
역사를 왜곡 폄훼하여 전라도 차별 운운하는 것은 마치 거지가 부자 걱정하는 것처럼 어이가 없다. 또는 추악한 정치적 의도로 보여진다 (http://blog.chosun.com/casy/5662301).
그림1. 조선중기 전국지도인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에 표시된 차현고개 위치.(음성군 차현고개 주변에는 수레의산(車依山,679m),수레울,車谷,車坪,車坪川 등 車관련 지명이 많다)
그림2. 차현고개 주변 등산로(한남금북 제02구간: 차현 (수레티고개) – 마이산 (△472m) - 8번군도 (윗두리실) - 583지방도 (쌍봉1리) - 583지방도 (내송2리) - 82번지방도 (방아다리) - 21번국도)
그림3. 차현고개 주변에 있는 화봉육교
그림4. 공주강이 감싸고 있는 안쪽의 공주목과 공주강 바깥(公州江外)을 표시한 고지도
그림5. 차현고개와 공주강 사이 지역
이익이 26세때에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친 둘째형 이잠이 역적혐의로 장살되었고 종친인
훈요십조에 왕실은 반역지역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했는데 고려초인 왕건,현종에 이어 고려 중기이후에도 전라도가 권력의 핵심으로 고려왕실과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
역사 | 2008/09/05 18:00 http://gamchoyung.tistory.com/entry/훈요십조
호남을 차별하고 자신들의 호남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 근거로 드는 것이 훈요십조다. 고려 태조 왕건이 유훈으로 전했다는 훈요십조에는 "호남이 배역의 땅이니 이곳의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호남은 고려시대부터 차별받아온 것이므로, 현대사에서 비극적으로 일어난 호남차별 역시 역사적 연장선상에 놓여있을 뿐, 의도적으로 조작되어진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다. 이러한 논리는 호남차별의 원인이 호남차별을 조장해온 가해자에게 있지 않으며 오히려 오래도록 차별을 받아온 호남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것은 결국 차별의 책임마저도 호남에 전가하게 되는 '피해자 탓하기'식의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호남 = 배역의 땅'이라는 기존의 해석은 과연 올바르다고 볼 수 있는가? 만약 이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 해석을 전제로 삼아 파생된 결론 또한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부터 호남차별의 역사적 근거가 되어 왔던 훈요십조에 대해 그 잘못된 점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1.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호남지역을 가리킨다?
아래는 호남차별의 근거가 되고 있는 훈요십조 제8조에 나오는 문제의 구절이다. 訓要十條(훈요십조 제8조)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고려사절요』(1), 민족문화추진회,1968. pp.470-471)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에 있는 주나 군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국척과 혼인하여 권력에 결탁하게 되면 국가에 변란을 초래하거나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이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중략) 비록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권력의 길에 들지 말게 하라』
근대에 들어와 훈요십조를 처음 해석한 사람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 龍)라는 일인사학자였다. 이마니시는 '차현이남과 공주강외'이라는 문구를 호남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이 지금까지 정설처럼 굳어져 호남이 배역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어처구니없게도 명백한 오역이었다.
이마니시 류의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의 오류가 있다.
1) 첫째, '차현(車峴)'을 지금의 '차령산맥(車嶺山脈)'으로 해석한 점이다.
차령산맥은 지금까지 오대산에서 시작하여 전라도의 북방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뻗은 산맥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2005년에 실시한 국토연구원의 조사 결과 차령산맥은 실존하지 않는 산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니, 지금까지 우리가 사회과부도를 보면서 달달 암기해 왔던 그 차령산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 국토연구원의 설명에 의하면, "차령산맥뿐 아니라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노령 등 여러 산맥도 구릉(언덕) 상태인 것으로 드러나 실제 산맥으로 분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차령산맥을 포함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산맥체계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일제시대 '고토분지'라는 일인 지질학자였는데, 1903년에 일꾼 6명과 당나귀 4마리를 끌고 그것도 단 14개월 동안 답사하는 것으로 산맥체계를 완성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주먹구구 방식으로 측정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산맥체계였던 셈이다. 이것이 조선후기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나 산경표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차령산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따라서, 1903년에 실수로 '만들어진' 차령산맥이 900년 무렵을 살던 왕건의 입을 통해 언급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왕건이 말했다는 '차현이남(車峴以南)'의 차현은 차령산맥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니다는 뜻이다.
2) 둘째, '공주강외(公州江外)'를 금강 남쪽으로 해석한 점이다.
공주강은 지금의 금강(錦江)으로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경계로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인데, 대체로 차령산맥(이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곳)과 비슷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마니시는 이 점에 착안하여 공주강 외(外)라는 표현을 금강 남쪽으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이마니시의 해석에 대해 설성경은 "'외(外)'는 『한화사전(漢和辭典)』 등에서 「바깥」이라는 의미와 「위(上)」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공주강 외'는 '공주강 위'라는 뜻이며, 지리적으로 공주강 북쪽을 가리킨다"고 반박했다.
또 'OO以南 OOO外'라는 한문 표현은 '~에서 ~까지'라고 하는 지역적 범위를 설정하는 문구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주장도 있어 공주강 북쪽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공주강외를 단순히 금강 남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냐는 점에서 이마니시의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2. 고려시대 호남사람은 차별 받았나?
1) 호남세력은 배역이 아닌, 왕건의 친위 세력이었다.
왕건은 모두 알다시피 궁예를 왕으로 모신 후고구려의 신하였다. 왕건이 궁예 아래에서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된 계기가 나주정벌이었는데, 이때 왕건은 나주호족의 딸인 장화왕후 오씨를 만나 아내로 맞이하는 등 나주호족들과 굳건한 결속을 맺게 된다. 이후 나주세력은 왕건의 출신지인 개성세력과 함께 왕건을 후원하는 친위세력이 되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2) 오히려 왕건은 호남사람을 중용하였다.
신복룡은 "호남인들 중에는 당시 중앙 정부에 입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예컨대 왕건이 평생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 살아서는 상주국이오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崔知夢)은 영암 출신이었고, 왕건의 비(妃)이자 2대 혜종(惠宗)의 모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吳)씨는 나주인이었다.
또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문성왕후(文成王后)는 승주(昇州) 태생의 순천(順天) 박(朴)씨로 견훤의 외손녀들이었으며, 고려의 창업 과정에 왕건을 대신해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은 곡성(谷城) 사람이었다. 더구나 훈요십조를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唐津) 사람(또한 광주지방에 근거를 둔 호남 호족 세력이기도 했다)이었는데 호남인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 사람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가 없다."
3) 고려 전반에 걸쳐 호남출신이 공직에서 배제된 적이 없다.
설성경은 태조 사후 즉, 훈요십조의 유훈이 전해진 직후였던 4대 광종부터 8대 헌정 때까지 과거시험관인 지공거를 두 번이나 역임했던 전북 전주 출신의 유방헌을 예로 들며 "태조 사후 후대에도 후백제인이 관직임용에 제한받지 않았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4) 왕건은 분열주의자가 아닌 통합주의자였다.
왕건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보더라도, 그는 통합을 강조한 통합주의자였지 분열을 획책하여 왕권을 도모하는 분열주의자가 아니었다. 왕건은 신라의 항복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한때 자신의 라이벌이였던 견훤이 투항해 오자 백관 최상위의 벼슬을 내리며 크게 환대하였다. 그리고 공신과 호족은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들과의 혼약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 왕건은 거란이라는 강력한 외부의 적을 설정하여 호족들의 단결을 이끌어내었다. 굳이 내부의 적을 만들어 분열시키고 차별하는 방법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려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이 시도되는 4대 광종 이전까지 고려 왕권은 매우 미약하고 불안정했는데, 굳이 호남이라는 광범위한 지역을 배역의 땅으로 설정하여 호남 호족들의 반감을 자초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3. 풍수지리적으로 호남은 배역의 땅인가?
조선후기 유학자 성호 이익은 금강을 "반궁수"라 일컬으며 금강 유역 일대를 배역의 형으로 보았고,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지리'에서 훈요십조를 빗대어 전라도를 배역의 땅으로 몰았다.
이익의 주장에 대해 설성경은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와 연루된 성호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었던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금강은 경주를 중심으로 했을 때 배류수가 되고, 개경을 기준으로 하면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이 그것에 해당된다. 만약 개경을 기준으로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을 배류수로 한다면 개경 가까이에 있는 임진강·한강 모두 배류수가 되고 만다. 엄청난 모순이다. 그리고 호남지역에 대해 독설에 가득 찬 이익의 지방 편견을 보아도 그의 풍수관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왜곡되어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이중환의 주장에 대해서 신복룡은 "호남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인물이라면서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있으면서 목호룡(睦虎龍) 사건(1725)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光山·광주) 김씨의 고변(告變)에 의한 것이어서 그(이중환)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며, "그는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20여 년을 유리걸식(遊離乞食)한 다음 "택리지"를 썼으니, 거기에 담긴 그의 호남 인식이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2) 도선의 비보(裨補)사상이 태동한 호남은 배역지가 될 수 없다.
선각국사 도선은 신라말 풍수대가였다. 그는 '비보(裨補)사상'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여기서 비보사상이란 땅이 커 명당이 찾기 쉬운 중국과는 달리 국토가 좁아 명당이 부족한 한반도에서는 승탑과 사찰을 세워 지덕(地德)의 운기를 보강하는 방법으로 인위적으로 명당을 만들 수 있다는 도선의 개성적인 풍수 사상이다.
전남 영암에서 태어난 도선은 옥룡사를 중창하고 35년간 전라도에 머물면서 인근에 미우사, 도선사, 운암사, 삼국사를 창건하고 많은 비를 건립했다. 따라서, 호남지역이 설령 배역지라고 하더라도 도선의 의해 명당지로 탈바꿈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도선은 왕건에게 도선비기를 전해주어 후삼국의 통일비법을 전수해주었다고 알려진 인물이 아닌가? 배역의 땅을 내버려 두어 왕건의 통일을 방해했을 리 없다.
물론, 왕건과 도선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신라말 명망이 높았던 도선의 이름을 왕건 측에서 왕조 개창의 명분으로 이용했을 뿐이라는 유력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의 고승이었던 도선을 왕건과 연결시킨 인물 역시 최지몽이라는 호남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전라도에 불리한 풍수지리사상은 후대에 와서 왜곡되었을 확률이 높다.
개인적으로 풍수지리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귀신 씨나락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맹신하고 호남차별의 근거로 삼는 부류가 꽤 있기에 부분적으로 반박하는 차원에서 논해 보았다.
4. 호남이 아니라면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어디를 가리킬까?
1) 왕건의 아킬레스건은 궁예
왕건은 후백제와 신라에는 관대한 태도를 보인 온후한 왕이었지만 궁예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왕건으로서는 궁예 세력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궁예 세력의 존재는 곧 왕건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건에게 궁예라는 존재는 반드시 지워버려야 할, 그리고 지워져야할 역사의 어두운 과거였던 것이다. 500년 뒤에 고려를 뒤집고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를 모조리 배에 태워 수장시키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만큼 정통성은 왕권의 명분이자 생명이었다.
2)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친궁예 지역를 가리킨다.
설성경은 '차현이남 공주강외'의 유력한 장소로 친궁예 세력이 밀집해 있던 '홍성·공주·청주를 중심으로 한 그 인근 지역'을 꼽으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공주·홍성 지역의 반란 사건은 왕건이 즉위한 지 5일 만에 일어났다. 고려왕조를 창업하고 왕건이 즉위하는 데 공로가 컸던 공주 출신 환선길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 · · · · 이 사건이 일어난 후 9일째, 즉 태조 즉위 14일째 되던 날에는 공주를 장악하고 있던 마군대장군 이흔암이 또 모반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처형되었다. · · · · 2개월 뒤인 같은해 8월에 공주·홍성 등 10여 주·현이 함께 고려에 등을 돌리고 후백제로 투항해버린다.· · · · 청주 지역 출신 호족세력의 반역사건도 들여다보자. · · · · 이 지역 출신 호족세력은 궁예정권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일찍이 궁예는 효공왕 8년(904) 국호를 후고려에서 마진으로 고치고 그해 7월 그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있던 청주의 민호 1천호, 즉 약 4천~5천명을 철원으로 이주시켰다. 다음해인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철원은 청주인을 기반으로 한 궁예의 본거지였다.· · · · 918년 9월에는 왕건의 도읍지인 철원에서 청주인 임춘길이 같은 고향 사람 배총규와 매곡인 경종 등과 모반을 일으켜 임춘길 일당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0월에 임춘길·경종 등의 주살에 대한 여파로 청주의 민심이 더욱 동요되는 상황에서 청주 호족세력인 진선이 그의 동생 선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3) 친궁예세력에 대한 가혹한 응징
설성경은 연이은 반란이 왕건에게 '생애 최대의 시련'을 주었다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고려해볼 때 훈요십조 제8조는 이때 모반사건이 발생한 지역 혹은 반란 주모자의 출신지를 염두에 두고 그곳을 배역의 땅으로 지목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목천현의 경우를 보면 태조가 고려 건국 후 목천 사람이 자주 배반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우(牛)·상(象)·돈(豚)·장(獐)과 같은 짐승의 이름으로 성을 내렸다"며 이 지역에 대한 왕건의 실제적 응징이 뒤따른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4) '차현이남'의 차현은 차현(車峴)고개? 차령 고개?
한편, 차령산맥으로 오역되어 문제가 되었던 차현이남의 '차현'이 실제 어디인가 하는 점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궁예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칠장사(七長寺) 부근의 차현고개(수레티고개)라는 설이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곳에서 금강까지 범위를 표시해 보면 청주를 온전히 포함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차유령 고개라고도 불리는 차령 지역이다. 공주에 가까워서 이곳에서 금강까지 범위를 표시해 보면 공주 근처의 유역이 설정된다.
5)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의 차별은 없었다.
배역의 땅으로 지목된 반란지역 주민들은 항상 불이익과 차별대우를 받았을까? 몇 가지 사례를 보면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차별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태조가 생각한 배역의 땅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성경의 말에 따르면 "태조는 홍성인 홍규의 딸을 12번째 부인, 즉 흥복원부인으로 삼았고 홍규를 삼중대광에 추증하였다. 또 견훤의 부하로 태조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홍성의 성주 긍준은 중용되어 대상이란 관직의 등급에까지 올랐다. 태조의 손자인 현종은 거란 침입 때 공주절도사로 있던 김은부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아 그의 맏딸을 원성왕후로 맞아들였으며, 후에 그녀의 동생 둘도 왕후인 원혜·원평으로 맞아들였다. 태조에 의해 짐승의 성을 부여받았던 목천 사람들은 문종 때 우(牛)는 우(于)로, 상(象)은 상(尙)으로, 돈(豚)은 돈(頓)으로, 장(獐)은 장(張)으로 복귀되었다."
5. 가해자의 알리바이
결과에 맞추어 원인을 찾으려는 결과론적 분석을 하게 보면 치명적인 오류가 생기게 된다. 훈요십조를 근거로 호남차별의 역사성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런 오류다. 역사적으로 호남이 차별받아왔다는 결론부터 짓고, 그에 걸맞는 자료들만 모아서 자신의 결론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현대에 영남 지역이 차별받았다면 영조시절의 영남 차별을 근거로 삼을 건가?
물론 모든 사람들이 미처 이런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경우도 있다. 그들은 호남차별을 오래된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다. 호남차별의 원인을 과거로 떠넘겨야 호남차별의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해자격의 지역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유혹에 더욱 쉽게 빠진다. 훈요십조의 호남차별이 가해자의 역사적 알리바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출처 - http://gamchoyung.tistory.com/entry/훈요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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