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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시지 20051221
다음 주가 꽉 찬 크리스마스 주간입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성경에는 주님의 탄생기사가 기록되어져 있고 또 그 날짜가 언제이냐 하는 것이 다른 날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그분이 탄생하신 날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수전절 이라는 절기가 있는데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에 성전을 재건한 뒤에 기념해서 나중에 만든 절이 수전절인데 지금쯤인 겨울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어떤 계기로 12월 25일로 정해졌느냐 하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서에서 주님의 탄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다음 주까지 누가복음서, 마태복음서를 이 두 복음서를 가지고 사복음서 대조연구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이 두 복음서와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탄생기사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우리가 잘 아는 기본적인 문제이지만 성탄주간에 연구를 해 볼까 합니다.
특히 앞부분에서 탄생기사에 대한 것입니다.
4복음서 중에서 탄생기사가 가장 자세하게 나와 있는 것이 누가 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을 해서 탄생기사로 이어지고 있고 누가복음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해서 탄생기사 그리고 세례요한이 옥에 갇힐 때까지의 기록이 있은 다음에 3장 마지막에 족보가 들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세례요한의 사역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주님의 공생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분의 탄생기사가 아닌 원 존재에 대한 기사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 복음서는 땅에서의 그분의 사역을 요한복음은 하늘에 계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기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때문에 그분의 원 존재에 대한 기록을 알 수 있고 세 복음서를 통해서 그분의 땅에서의 사역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서들은 이렇게 그분의 탄생에 대하여 족보에 대하여 집착을 하고 있는가?
일관되게 복음서들은 그분의 탄생에 대하여 그냥 넘기지 않고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은 첫 장 첫 절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면서 선언적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누구에게 편지형식으로 그동안에 일어났던 사실들을 알리는 설명적인 서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의 복음이고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의 복음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시작을 해서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요셉계통의 족보를 말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아담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류적 족보를 말하고 있는데 비록 누가복음에서도 요셉족보를 말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 마리아의 족보입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는 이 족보들이 같은 계통으로 내려오고 있지만 다윗다음에 열왕 시대로 들어가면서 족보가 갈립니다.
한 족보는 솔로몬 계통으로 한 족보는 나단계통으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솔로몬에 대하여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나단 계통은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 낳았던 아들 중 세 번째 아들로 기록된 것 이외에 같은 기록이 없습니다.
같은 이름의 선지자 나단이 주로 등장을 하고 다윗의 아들로서의 나단은 단 한번 이외에는 거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통에서 마리아가 나오고 솔로몬 계통에서 요셉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결국 원 시조로 보면 사촌간의 결혼이 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한 계통에서 짝을 맺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기 때문에 역시 누가복음에서는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레위지파 특히 엘리사벳은 아론 계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것도 같은 지파에서 만나서 결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가랴는 제사장으로서의 구약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내려오는 가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다시 왜 그러면 복음서가 이렇게 족보로 시작을 하고 있고 족보에 대하여 집착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를 예수에서 그리스도로 옮겨주기 위한 것입니다.
신약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약에서 어떻게 신약으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사실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느냐?
구약에서는 사실 모형과 그림자들만 등장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족장들이고 제사장들이고 왕들이고 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성은 가지고 있어도 실체는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려 물려받아서 결국 신약으로 넘겨주는 것이 구약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충분히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대하여 그분의 사역성에 대하여 그분의 위대성에 대하여 잘 보고 알 수는 있지만 그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사람들은 전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다 구약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이라는 것은 히브리서 1장 1절이 정의한 대로 옛적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 조상들에게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셨던 그 시대가 바로 구약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의 형체로 우리들에게 많이 말씀을 하고 계시지만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환희와 감격이라는 것은 바로 그렇게 약속하시고 그렇게 기다리고 그렇게 믿던 그 실체가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신약의 존재 의미가 있고 기록과 보존과 전승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 귀에 들리고 우리 손으로 만지고 우리가 먹는 것을 같이 먹고 우리가 자는 곳에서 같이 자고 우리가 걷던 길을 같이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니고데모도 만나고 사마리아 여자도 만나고 백부장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을 친히 만나고 말씀하시고 우리 길거리에서 친히 가르치시고 어떤 때는 모욕도 당하시고 어떤 때는 죽임의 위협도 당하시고 우리가 당했던 모든 것들을 실제로 이 세상에 오셔서 당하시면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의 감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너무나 그를 몰라주고 외면하고 무시하고 깔보고 그리고 버렸습니다.
그것도 또한 구약의 말씀대로 약속대로 이루어진 사실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지내고 나서 보니까 과연 그분이구나!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흥황하게된 것입니다.
그 감격과 그 놀라움 때문입니다.
말로서만 끝나지 않고 그것이 허풍이 아니고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고 그것이 과장이 아니고 그것이 속임수가 아니고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감격이고 흥분이고 놀람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은 마태복음답게 동방박사 왕으로 묘사를 했고 누가복음은 누가복음 적 서민적답게 묘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장소는 같았고 확인된 그분은 같았고 상황은 같았습니다.
누가 먼저냐 나중이냐 하는 그것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동시적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누가복음은 누가 복음적 관점에서 그분의 탄생을 말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마태복음적 관점에서 그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이 만약에 그분을 구약에서 우리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는 허풍쟁이 하나님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신약이 그 사실을 확인해주지 않고 입증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말씀이 사실화 된 것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열광하는 것은 사실화 되었다는 것이고 현실화 되었고 말씀이 실제화 되었고 그 존재가 허무맹랑한 뜬 구름 같은 것이 아닌 우리 눈에 보이고 역사가 증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 속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낳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자라고 배우셨습니다.
그분도 우리처럼 비천한 가운데서 상황 속에서 어떤 때는 도망 다니고 어떤 때는 배척을 받고 어떤 때는 시험에 당하고 어떤 때는 죽임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한 모든 것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상황과 우리 처지 속에서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그분을 만났고 그분을 통해서 병 고침을 받았고 그분을 통해서 새 삶을 살았고 그분을 통해서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게 되는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습니다.
그분이 만약에 우리 눈으로 보이는 그 분으로 이 세상에 살지 아니하셨다면 지금 보이지 않는 분으로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을 우리는 믿을 수가 없고 인정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그분인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그분을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실체에 대한 하나의 증거. 입증. 내세움 그리고 보여줌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시는 이유입니다.
십자가의 대속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사명을 하기위해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그분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믿음 없는 자들인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구약의 말씀으로는 약속의 말씀으로는 도저히 그분을 믿을 수 없고 영접할 수 없는 우리임을 그분은 잘 아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렇게 나타내주고 보여줌을 통해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분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외적 표징이나 증거나 내세움이나 보여줌이 없이도 우리는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도 말씀이 실재하시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임재 한다는 사실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당해서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셨어야 하는 것에 대하여 기쁜 날이고 절기이지만 우리는 마음속에 회개와 회한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그래야 하고 언제까지 우리는 믿음 없음을 그분께 우리들 사이에서 우리를 괴롭혀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사랑할 수도 없고 말 할 수도 없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첫 머리나 누가복음 첫 머리에서 탄생기사를 보면서 왜 성경은 이렇게 시작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꼭 실행에 옮기지 않아도 그 말씀 자체를 믿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꼭 사흘 길을 모리아 산에 가서 그 포퍼먼스를 시켜야 되는가?
그러지 않고 이삭을 하나님 앞에 그냥 드리는 그 마음의 자세와 상태를 보고 그대로 받으시면 되지 않은가?
꼭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꼭 이삭을 그대로 바치려고 하는 그 현장을 목격하시고서야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제는 네가 나를 믿는 줄 아노라 하셨어야 하느냐 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열심히 하는 것도 많은 재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우리사이에 믿음의 관계성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고 했을 때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믿게 해주는 그 믿음의 내용이 과연 건설적이고 참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이 그 항목들이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니냐 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실체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우리들이 믿던 그 믿음의 항목이나 조항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분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에서 배운 그 조항들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구약에도 그 조항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빼버렸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고 자기들이 그리고 소망하고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조항에 맞추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분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비극인 줄 모릅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항목에 내가 적합할 것 같으니까 나를 믿느냐 입니다.
요사이 세태도 아버지가 아버지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아버지이고 남편이지만 은퇴하고 집에 들어앉으면 집에서 잔소리나 많은 할아버지 귀찮은 남편 나가지도 않고 꼼지락 거리면서 심부름이나 시키는 골칫덩어리 늙은이
많은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이 되지 않습니까?
동방박사들은 찾아오고 목자들은 수태고지를 받고 찾아오는데 정작 그 많은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그들이 어디에 모였습니까?
헤롯 궁에 모여 있습니다.
가장 먼저 와서 경배해야 될 헤롯은 죽이려고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몰라서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치부책에 적어 놓은 메시야에 대한 항목이 이분하고는 틀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언젠가 내가 이 사역을 할 수 없을 때가 오면 지금 이렇게 같이 공부하시던 분들이 몇 분이나 연락이 될까?
물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때 가서는 그때 나름대로 여러분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있고 여러분들의 삶이 있고 바쁠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한 마디로 인사하고 볼일 들을 볼 것입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찾아뵈어야 하는데 바쁘네요.
저는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자식들에 대하여 너희들이 크면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고 그 때 충분히 너희들에 대하여 투자하고 고생한 것에 대하여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저도 마찬 가지입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있어서 같이 말씀 연구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전하면서 그것이 충분히 저에게 보상이 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목사님 절대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됩니다.
끝까지 말씀 전하시고 우리도 곧 뒤따라 갈 텐데 그 때 저 세상에서 영원히 같이 살지요 그러실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적 관계성이지 상황적 관계성이 아닙니다.
존재함으로써 관계성이 성립이 되는 것이지 상황이 우리 치부책에 맞으니까 관계성이 성립이 된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말구유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아기 예수를 뉘어 놓고 그 옆에 소. 말, 돼지를 갔다 놓고 그것을 보면서 아! 크리스마스구나! 이것은 환상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면 이 많은 사람들이 이 열광을 하겠느냐 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잠깐 와서 들여다보고 가고 목자들이 잠깐 와서 들여다보고 가고 그 다음에는 마구간에 누가 어떻게 있었을까?
실제적으로도 지금도 현장에 가면 겨울이고 밤에 춥습니다.
그 나라 마구간이 우리나라처럼 사방에 담이 쳐져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썰렁했겠습니까?
그렇다고 오늘날처럼 출산 준비를 다 하고 그랬겠습니까?
오늘날처럼 출산일 따지고 산후조리원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첫 번 크리스마스를 생각해야 합니다.
2000년 내려온 그래서 만들어지고 꾸며지고 환상 화 된 크리스마스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첫 번 크리스마스의 현장에 있었다면 나는 어떠했을까?
중요한 것은 구약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만 구약의 말씀 속에서 그 많은 말씀 속에서 그렇게 나실 것을 약속하신 그 말씀을 아는 사람들만이 첫 번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맞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황적 관계성이 아니라 존재적 관계성을 맺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났던지 간에 그런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말씀하신 그분이 실체화 되어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누가복음 1장 5절에 보면 유대 왕 헤롯 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사실 마태복음은 처음에 거창하게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태복음에 열광을 합니다. 성경을 좀 아는 사람들은 마태복음에 열광을 합니다.
아브라함 나오고 다윗이 나오고 예수그리스도 나오고 그런데 누가복음은 아주 서민적으로 시작을 합니다.
사실 예수그리스도가 이렇게 뜨니까 오늘날 속된 말로 뜨니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한 사람 그 아내 아론의 자손 한 사람 이것은 뜬 다음의 이야기다 이것입니다.
배용준이 뜨고 나니까 욘사마가 되고 나니까 배용준인 것입니다.
그래야 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라는 그 뜬 분 때문에 덩달아서 흥분하고 덩달아서 묻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첫 번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흥분하느냐 이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구약의 말씀을 믿은 사람이고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가 복음에는 나옵니다.
과부된 지 84년이나 된 그런데 그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들인가 하면 아닙니다.
정말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의 매력이 바로 그런 별 볼일 없는 사람들로부터 시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런 첫 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상황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황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크리스마스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다 띄어놓은 크리스마스를 사람들이 흥분하는 것뿐이다 이것입니다.
결코 첫 크리스마스는 축제가 아니었고 징글벨의 크리스마스가 아니었습니다.
춥고 외롭고 짐승들 분뇨 냄새와 짐승들 소리만 적막을 깨뜨리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뜰대로 떠버린 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를 거슬려서 첫 번 크리스마스로 돌아가서 구약의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져서 하늘에는 영광 이제는 땅에 참된 평화가 오는 그 영광을 찬양하고 그 평화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됐구나! 이제는 이루어지기 시작하는구나!
이분이 나셨으니 이분 같은 많은 분들도 오겠구나!
이제 나도 준비해야지! 이제 나도 털고 일어나야지!
우리는 저 시끌벅적하고 떠들썩한 크리스마스를 우리 의식 속에서 다 몰아내고 누가복음처럼 소박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진지한 첫 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