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 멎고 앉아서 석양의 단풍 감상하노니, 단풍 든 잎새가 이월 꽃보다 더 붉구나. 停車坐愛楓林晚
霜葉紅於二月花” 두목(杜牧)의 산행(山行)
시로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마을은 많은 정자군이 형성된
고을이었다. 그만큼 입지조건이 됐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중에 한 곳, 가흥리 풍정마을 은행나무 정자는인 단풍정(丹楓亭)은 일명 풍정(楓亭)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김굉필의 당질(堂姪 5촌 조카)로 왕자사부 예산현감(禮山縣監) 등을 지낸 서흥인 죽오당(竹梧堂) 김건(金鍵 1513
중종 8 ~1584 선조 17))이 1540년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 풍정마을 280번지에 휴식지소로 풍정(楓亭)을 마련해 말년에
유유자적하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정유년 병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1955년 지역 유림들이
죽오당(竹梧堂)을 기념하기 위해 인근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계동소와(溪東小窩) 귀래정(歸來亭)의 주인이었던 일헌(逸軒)이
정심(鄭諶 1520-1602)이 소요지처(小搖之處)로 삼기도 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한말의 유학자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1855~1910)에게 입문으로 학문과 문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진주인 동초(東樵) 정철환(鄭喆煥 1901~1981)이 기리는
시에서
정자 타에 비석이 동천을 눌렀으니/ 흐른 향기 끼친 소리 반천년이 지났다. 붉은 언덕은 역역히 거문고 타고 술 마시던
곳이요/묵은 풀은 아련히 도마 옥기 차렸던 자리다.
비자나무는 춘풍에 송산 아래에 울창하고/단풍 숲은 밝은 달밤 금강 앞에
아름답다. 대나무에 열매 열고 오동은 잎이 피니/상서가 임은 뒷날 봉황이 인연 맺으리라.
그는 용모와 총명한 재주로 촉망받았고
8세에 집을 떠나 공부하던 중 11세에 지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부모님 떠나 몇 해 째인가 허공을 바라보니 흰 구름만 흐르네
불효한 죄 어찌 면하리요 삼년(三年)이나 돌아가지 못했는데 離親問幾歲 空望白雲飛 不孝吾何逃 三年未得歸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에 있는 조선 세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 정서(鄭鋤), 신숙주(申叔舟), 신말주(申末舟), 죽오당(竹梧當) 홍천경(洪千璟) 등과 함께
당시 대표적인 학자들의 학문 연구 장소로도 이용되었고, 규약을 정하여 미풍양속을 지키도록 행하는 계회(契會)와 시회(詩會)의 장소
쌍계정(雙溪亭)에서 주측이 되면서 향리의 많은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정철환은 전라도에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전남 화순군 도곡면
신성리에 1896년 구한말에 은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의병대에 가담한 나은(蘿隱 서상룡(徐相龍)이 춘천에서 활동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정자을 짓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자 그의 아들 서내준(徐內駿)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1946년에 이룬의 정자
삼산정(三山亭)에 들려 읊은 경차삼산정원운(敬次三山亭原韻) 시를 남긴다.
삼산(三山)의 양맥(陽脈)이 군음(群陰)을 눌렀는데/뜻이
어긋나 찾아가지 못함이 아쉬워라 칼집은 가을에 천고(千古)의 기운을 울렸고/문원에 달빛은 백년(百年)의 마음을 비쳤도다 三山陽脈壓群陰
恨未蹉○卽去尋 劒匣秋鳴千古氣 章臺月照百年心
아들은 집을 다스려 유풍이 멀었고/그대같이 뒤를 이으니 효도 이미 깊었어라 동서에
이웃하여 흠송(欽誦)한지 오래인데/시축을 보태려고 巴人 노래를 보내주네 克家有子遺風遠 趾武如君孝己深 隣壤東南欽誦久
續貂聊且寄巴音
그는 낭주(지금의 영암) 영보촌에서 출생하였으며 1544년 벼슬을 등지고 1535년경 가흥리에 입향하고 만년을 처가
초동(草洞)마을에 지냈다. 정지(亭地)에 1947년 유허비가 세웠다.
좋은 술은 상에 두는 것이 가장 좋은데/어찌하여 작은 시냇가에 옮겨놓았는가
꽃 사이의 한 낮에 능히 비를 날리니/병 속에 별천지가 있음을 비로소 알겠구나 最合牀頭盛美酒 何如移置小溪邊 花間白日能飛雨
始信壺中別有天
►사진=화순군 이양면 강성리에 자리하고 있는 송석정(松石亭)
이 풍정마을은 병조.예조좌랑, 진원현감을
지낸 최희열(1536~1607), 장사랑, 창의사 김천일 장군의 의병으로 백의종군, 진주성에서 순절한 최희급(崔希伋 1542~1593),
임진왜란때 흥양현감으로 이순신을 도와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1등에 오른 최희량(崔希亮 1560 ~1651), 영찬대군 폐모사건으로
연루되었다가 인조반정 후 풀러나 직장을 지낸 최찬(崔纘 1544~1593), 한성판윤 등을 지낸 최희량의 아들 최결 (崔結 1603~?)등이 이
마을의 출향인물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3.1운동 당시 최기정(崔基正)이라는 훈장은 65세의 나이에 가흥리 서창에 거주한
문근집이 '대한민국만세'라는 글씨 수십장을 써서 학도들로 하여금 다시 시장에에 나가 배포케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광주형무소에 옥고를 치뤘다. 이때 옥중에서 읊은 시에는
나라를 근심하고 인금(고종)을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愛君愛國義當然 나를 무엇때문에 2년이나 옥에 가두어 두는고 我有何非滯二年 방당이 약하고 재주는 둔해서 독립운동을 이루지
못하니 質徵材純難成立 다못 충신 노중련을 따르지 못함이 한이로세 但恨未追魯仲連
조선 시대 전기 한시 작품을 남긴 왕실
여성으로는 종실(宗室) 숙천령(肅川令)의 부인인 빙호당(氷壺堂)이 영빙호(詠氷壺)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빙호(氷壺)는 얼음을 담은 옥병을
말하는데, 청명한 심지(心地)를 비유할 때 빙호에 가을 달이 비치는 것 같다는 뜻의 빙호추월(氷壺秋月)이라는 표현을 흔히 쓴다.
정자에서의 시는 묵은 김치를 볶아 두부를 먹는 음식과 같은 것이다. 또다른 정자의 흔적이라도 찾고자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유허비를 세우며 읊은 하동인 송산(松山) 정기봉(鄭淇琫)이 시에서 선인들의 흔적을 잊는 것을 걱정하며 읊은 시가 애절하다.
물을
따라 동으로 오니 따라 천지가 있어/높은 소문 진즉 듣고 흠양하였다네 후학으로 하여금 근원을 찾게 하는 곳/선생이 도를 강론하던 자리를
사모한다.
평야의 긴 둑은 호해(湖海)의 위에 있고/늙은 회화 다긴 대나무는 보산(寶山)앞에 푸르다. 유허(遺墟)에는 아직도
황혼의 달빛이 있건만/ 그 누가 가인(佳人)을 시켜 옛 인연을 이으리요
요즘 세태는 물질의 소유 정도를 보고 그 인물을 평가하는
경향이 너무 심하다. 그런 연유로 물질을 많이 소유하기 위한 투쟁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다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들의 겉다르고 속다른 복마전 같은 속임수의 행태는 차마 눈과 귀를 막고 싶어진다.
'까마귀가 빛깔이 검다고 백로야 비웃지 말아라.
겉이 검다고 한들 속까지 검겠느냐 ? 아마도 겉이 희면서 속 검은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 ... 겉과 속이 같지 않는 表裏不同(표리부동)과 같은
이들이 너무도 많다. 박세당(朴世堂)은 이를 이렇게 재해석하고 있다.
까마귀 검고 백로가 희다고 / 백로가 날아와 까마귀
비웃네 백로야 웃지 마라 / 나는 부럽지 않다 烏黑鷺羽白 烏謝謂鷺言 汝白吾不伏 吾雖毛羽黑
내 깃털 검다지만 / 속은 본디
하얗고 네 깃털 희다지만 / 속은 외려 검어라 다르고 속 다를 바에야 / 속이 흰 것만 하겠느냐 肉膚本潔白 汝縱毛羽白
肉膚反陋黑 表裏各不同
가마 밑도 검고 솥 밑도 검어 / 솥 밑이 검다지만 가마도 희진 않으니 가마 밑아 솥 밑 검다 웃지
마라 / 시꺼먼 검댕을 본디 누가 취했나 寧如內潔白 釜底黑鼎底黑 鼎底雖黑釜未白 鼎底雖黑釜未白 釜底莫笑鼎底黑
정자에서 우리네
검은 속을 정화했으면 하련마는.....
비 지난 가을 산엔 떨어진 잎새도 많은데 / 비단 위에 또 꽃을 더한 게 가장 예쁘구나
雨過秋山葉落多 最憐錦上更添華....돈 안되는 짓거리는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김은희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