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위를 몰고 올 겨울비가 진종일 내렸다. 옛날같이 않다는 광복동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세워지고 크고 작은 가게에서는 손님을 기다리는 세밑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세밑에 빠뜨리지 않는 일은 정의평화위원회의 12월 마지막 아세미에 참례하는 일이다. 아세미는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미사’의 준말이다.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는 모든 성당에서 평일미사를 쉬는 매월 두 번째 월요일 저녁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지하철 남포역에서 올라서면 곧장 광복동이다. 옛 미진백화점은 기억 속에 이름만 희미하고 할매회국수와 이승학돈까스, 옛 미화당백화점 뒤 고갈비와 종각국수까지 추억어린 맛집들이 차례로 군침을 삼키게 한다. 한두 곳의 백화점과 리빙 레코드점, 그 많았던 오디오 가게와 클래식 음악실은 커피숖과 패션가게로 변신과 퇴행을 거듭한 지 오래다. 용두산 맨션을 지나 대청동에서 용두산공원 쪽으로 꺾어들면 미문화원과 중앙성당 길이 정겹고 옛길은 침묵으로 맞는다.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보수동 헌책방골목을 지나 산복도로로 이어지는 가톨릭센터 앞 경사길과 계단은 오늘도 숨이 차다.
나는 이 길을 즐겨 걷는다. 가톨릭센터 앞에서 영선고개로 올라가는 대창동 고갯길 길섶에 쌓인 은행나무 잎은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전조등 불빛 따라 노란 은행잎이 황금빛 반란을 일으킨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아세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안식처가 된다. 아세미는 해설자가 “한 해 감사했습니다.”라고 많은 의미를 담은 한 마디를 던지면 참례자들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일제히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응답한다. 정겹다. 아세미는 사제의 강론이 없는 대신 전국에서 초청된 각계의 연사가 한 시간씩 열심히 강의를 담당한다. 특강은 뜨거운 반응 속에 공감의 박수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다.
올해의 마지막 아세미는 11월 한시준 교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강의에 이어 강남좌파로 불리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맡았다. 한 교수의 강의는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담보하는 역사적 문건인 <제헌헌법과 진보적 민주주의>가 강의의 핵심이었다.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 18조에서는 노동3권보다 폭넓은 노동4권을 보장했다. 노동권에 대하여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분배에 규점할 권리”를 보장한 것이다. ‘이익분배균점권’을 신체, 신앙,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으로 본 것이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제헌정신으로 돌아가자.’고 각성을 일깨웠다.
제헌헌법에서 보장한 ‘이익분배균점권’은 기업에 이익이 발생했을 때 노동자들이 그 이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억눌리고 탄압받은 일제강점기 동안 키워온 더불어 살고자 하는 우리의 꿈이 표출된 결과다. 나아가서 제헌헌법 85조는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고 밝히고 86조에서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밝히고 87조에서는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천명해 사회주의적 성격의 진보성을 엿보였다.
우리나라 제헌헌법의 시대정신과 가치는 물, 전력, 가스, 교육, 통신, 금융 등 국가기간산업과 사회서비스를 몇몇 재벌이 장악할 것을 우려하여 평등의 기조 위에 국가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세운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찍이 땅은 밭갈이 하는 농민에게 나눠주려는 일은 오래된 결의로 그 정신이 자본주의를 폐기한 제헌헌법에 구체적으로 담긴 것이다. 대한민국정부의 초대 법제처장이었던 공법학자 유진오 박사는 <헌법해의> 초판에서 “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했다.”고 밝혔듯이 해방정국의 국민적 소망을 반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는 토지혁명이나 토지국유화와 같은 급진적인 토지제도개혁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이유는 농민이 전체 국민의 8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농민을 독립운동에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지금은 국민의 기본권이 억눌리고 갖가지 제도가 역류하며 정치적 자유가 위축되고 꿈을 잃은 청년들이 조국을 ‘헬조선’이라고 절규하는 가운데 분노와 울분이 넘쳐나는 현실에 갈등을 풀어야할 정치권은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바쁘고 무능한 정부는 네 탓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안타깝도다,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았는가! 우리는 정녕 제헌헌법이 담아낸 그 수준 높은 정신마저 깡그리 잊었단 말인가! 아세미는 이 깜깜한 세상에 작은 등불 하나를 비상등으로 밝혀 들며 올해 마지막 아세미에 이어 병신년 새해 1월에는 정현찬 가톨릭 농민회장이 <위협받는 식량주권, 식량안보>를 주제로 만나기로 하고 노래모음집의 32번 <광야에서>를 파견성가로 노래했다.
첫댓글 우리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농민들이 잘사는 나라가 되었으면...하는 바램과,
정의가 살아있는 나라가 언제 오려나... 간절한 바램을 하느님께 올려봅니다~ 감사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제헌헌법보다도 못한 지금의 정치계...누구를 위한 정치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어라 입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요즈음 우리의 현실...
진흙탕 같은 이곳에, 그래도 이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여기에 작은 등불 하나 켜 놓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