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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위에 3
이번 집회에 내가 사과할 일이 있다. 다 잘되었는데 나에게 걸려서 들을 말씀을 못듣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아무도 안 걸려야 하는데 내 부족한 소치로 걸린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복음이 제대로 들렸으면 좋겠다.
이번 주제가 ‘반석 위에’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라.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라는 사람을 시작으로 해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제도 위에 교회를 세웠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닌데 제도라는 것은 굳어지기 쉽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
개신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웠다고 주장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 위에 세운 것이라 해서 교리가 되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분열이 계속되고 있다
교리는 흔들리지 말라고 세운 것인데 사람이 그렇지 않다. 시대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고 사람은 흔들린다. 어제까지는 A라는 교리를 믿다가 오늘은 B라는 교리를 따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현상이 역력하다. 장로교가 한국교회의 장자교회라고 자부하지만 가장 많은 분열이 생겼다.
크게 보수주의 칼빈주의라 해서 알든 모르든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게 1500년대 종교개혁이다. 제도가 굳어져 문제가 생기니 제도를 가지면 안 되고 교리를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분열이 생겨 보수주의라는 교단이 생기고 자유주의 교단이 생겼다.
자유주의는 계시를 따르지 않는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해서 중도파가 생겼다. 계시만 따르지 말고 이성으로 잘 소화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셋으로 갈라져 있다.
이 셋이 서로 도와서 고맙다는 게 아니라 서로 원수처럼 대립하고 있다. 신앙고백 위에 세워도 분열되고 제도에 세우면 굳어지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 될 방법이 없다. 더 분열 안 되면 다행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을 첫날에 드렸다. 그런데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운다 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면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 때문에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주자학에서 중심이 되는 성리학 학문도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하나는 주리론이라 해서 원리론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하는 주기도문처럼 우리가 아버지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스승도 바꿀 수 없고 더더욱 임금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에 어린 왕자라도 아버지가 승하하면 세워야 한다는 것이고 대표적인 것이 단종이다.
단종을 세웠는데 삼촌이 처음에는 섭정을 했는데 옆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고 직접 통치하라고 하니 왕이 되어 세조가 되었다. 그 후 단종을 그대로 두면 후한이 생긴다고 해서 멀리 단양으로 유배시켰데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결국 죽였다.
그러니 문제는 다 있다. 한쪽에서는(주기론) 하늘의 뜻은 같지만 사람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다고 율곡 선생이 말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에서는 율곡학파는 완전히 뒤로 밀렸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임금이라도 잘못되면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니 왕권을 유지하고 싶은 왕조에서는 지지하지 않았다. 퇴계학파를 지지하는 게 당연하다
조선왕조 중기 이후에는 완전히 퇴계학파가 장악하게 되었고 율곡학파는 밀려서 벼슬을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문제점이다. 결국 일본이 먼저 개화되어 한국을 자기 땅으로 만들려고 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앉아서 중국만 믿고 있다가 당하게 되었다.
대책이 없었고 마지막에는 안방까지 다 점령되었다. 나중에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나라를 넘겨주게 되어있었다. 같은 주자학이 두 파로 갈라져서 이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제도나 교리 모두 문제가 있다. 교리를 굳게 세우면 절대 분열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더 분열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도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찌할 방법이 없는데 반석이 또 하나 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따르는 반석‘이라는 말이 나온다.
광야에서 물이 없어 원망하는 백성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했는데 두 번을 쳤다. 물은 나왔지만 모세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 산에서 멀리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혼자 죽었다.
하나님을 대신해야 하는데 잘못 대신했기 때문이다. 참 딱한 일이다. 모세를 신으로 사용하였으니 더더욱 그 책임이 크다. 보통사람이 그랬으면 큰 문제가 아니었을텐데 신으로 대신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컸다. 모세의 시신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따르는 반석‘을 통해서 생수를 마셨는데 이것이 그리스도라 한다. 광야 40년 길을 가면서 반석에서 나오는 물 한번 먹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반석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한다.
우리가 대속을 받았든지 구속을 받았든지 천하에 없는 교회를 다니든지 간에 계속 목마르지 않을 수 없으니 ’따르는 반석‘이 필요하다. 항상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필요하다. 한번 되었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항상 생수를 공급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분은 영원히 십자가에 계시는 분이 되었다. 나도 궁지에 몰려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사라져버렸다면 십자가의 효능을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따르던 예수에 대해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고 소화될 수 있는 예수만 여러분에게 공급했다. 내가 먼저 먹어보고 배탈 안 나고 소화 잘되고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만 교회에 공급했다. 여러분들은 내가 공급하는 예수를 먹고 배탈 난 분은 거의 없고 다 좋았다.
그런데 이 예수가 신화에 쌓여 있다고 해서 나는 심각해졌다. 나도 생각해보니 그렇게 된다면 나는 실체를 모른다는 말이었다. 나는 모르는 것은 그냥 두었는데 이제 이런 지경에 이르니 실체를 모르면 안 되겠고 떡만 얻어먹고 포도주만 얻어먹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화적 예수라는 말은 개인이 한 말이 아니라 유명한 신약성서 학자 볼트만이다. 가장 유명한 말이 비신화화라고 신화를 벗기고 예수의 실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상은 볼트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볼트만이 신화를 다 벗기고 예수를 찾아놓은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기를 예수의 다른 것은 다 신화일 수 있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신화가 아니라고 했다. 왜냐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지금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안되는 게 신화다. 홍해 바다가 갈라진 것도 창세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지금은 일어나지 않으니 신화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면 죽는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러니 신화가 아니라 역사다. 나도 예수를 찾아보기 위해 성경을 보았지만 나가 딱히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사도들이 말한 예수를 보고 여기 실체가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 자기들은 경험이 있어서 한 말이지만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부활한 예수와 40일간 같이 있었어도 몰랐는데 오순절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이것이 다시 살아난 예수라고 목숨을 걸고 전했고 기독교가 생겼다.
그것이 또 온전하지 못하니 바울이 나와서 바통을 잇게 되었다. 바울은 현장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고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가다가 중도에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예수를 만났다.
여러분 중 이렇게 예수를 만난적 있는가? 나는 이렇게 예수를 만나지 않아서 모른다.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도 우레가 우는 것으로 들었고 사울만 그 음성을 들었다. 그러니 나도 참여가 안된다. 나도 그런 음성 한번 들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안되고 방언이라도 한번 해보려 애썼지만 안 되었다.
요즘도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나는 이해가 안된다. 나도 방언이라도 한번 했으면 내 속에 증거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몇 년간 추구를 했고 서울 삼각산으로 기도원으로 부흥회로 찾아다녔다.
어찌하든 방언이 나오면 그리스도의 흔적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안되었다. 나는 이것을 반대하지 않았고 늘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늘 열심이 있으니 교회가 잘된다. 많은 목회자들이 방언을 해서 부흥사 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나는 불합격이었다
그런데 워치만 니를 만나고 나니 은사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선물은 있다가 없어질 수 있고, 그 선물은 처음에는 감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감사를 잊을 수 있는데, 워치만 니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성경을 볼 수 있는지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두 번째 그 책을 읽고 발견하였다. 이 책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책이었다. 연구나 기도로 보이는 책이 아니었다.
보통 책은 지식으로 누구나 다 보고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안 된다. 예수는 중요한 질문을 하면 이러저러하다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 내가 곧 그것이라고 한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물으니 대답이 내가 곧 그 길이라고 한다. 이상한 대답이다.
이 사람을 모르고는 이 사람의 말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생각하면 곤란한 분이다. 그냥 가르쳐주면 되는데 그냥 가르쳐줄 수 없다. 안되니까 못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되어야 알 수 있다. 그 사람 되는 만큼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로 은사나 증거를 구하는 것이 사라져버렸다. 사람 자신이 증거였다.
그 후 한 번도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분이 신화 속에 묻혀있다고 하니 큰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찾아 나섰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사람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죽으심을 보며 내가 여기밖에 만날 자리가 없었다. 그 자리가 내게 딱 맞으니 너무 좋아서 다음 일을 생각하지 않고 발표를 했다. 왜냐면 나를 따라오던 모든 형제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했지만 너무 다르게 여러 반응이 나왔다.
좋다고 날뛰는 사람들이 나왔는데 그 사람들은 급한 사람들이었고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금방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분이 볼 때도 그 사람은 시시하게 보인다. 만일 내가 말하지 않고 신학자가 말했다면 다 인정했을 것이다. 나는 정말 기독교라는 종교안에서 믿음도 없는 자랑할 게 하나도 없는 낙제생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예수가 필요했다.
나는 그 다음 문제를 몰랐다. 그분의 죽음의 독특함을 몰랐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 그런데 예수가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파된다고 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받을 이유가 있다. 예수를 따라온 사람들중 변변한 사람이 없다.
니고데모 같이 훌륭한 분이 왔지만 안되었다. 그러니 아쉬운 사람만 따라다녔다.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못 잡은 베드로 같은 사람만 따라왔다. 그러나 자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왔다고 한다. 갈릴리 바다의 작은 배와 그물밖에 없지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왔다는 가난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다. 베세다 광야의 오천 명도 유명한 사람들은 없다. 그러니 기독교가 더 자랑스러워지려면 아직도 멀었다. 가난하지 않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 따르는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조금 좋아지고 조금 넉넉해지면 그리스도를 놓칠 가능성이 많다.
따르는 반석이 없으면 물이 없어 못산다. 우리 뒤에는 항상 따르는 반석이 있어야 한다. 언제든지 찾아가고 볼 수 있는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혹시 내가 빗나가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이것이 없으면 돌아올 수 없다.
역사는 한번 왜곡되면 그다음 세대에 가면 왜곡된 역사로 논하게 된다. 100년 후에 우리나라가 사실과 다른 역사를 가지고 진짜 역사인 줄 알게 된다. 그런데 항상 원본이 있으며 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조선왕조 때 왕조실록을 적었다. 임금의 말 한마디를 그대로 적어서 그 책을 임금이 보지 못하게 하고 우리나라의 네 장소에 보관하였다. 임금은 보면 안 되는 책이다. 그러니 역사적 사실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도 어쩌면 왕조실록과 같은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다 개인적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사학자마다 사관이 다를 수 있지만 왕조실록은 상관없이 보관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의 분열 가운데 생긴 모든 일에대해 사람들이 그것이 전부인 줄 착각하더라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만 있으면 언제나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내가 문제가 생기면 항상 근본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나는 언제든지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만일 내가 발견한 이 복음보다 더 좋은 복음이 있다면 나는 가차 없이 버리고 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다. 전에 아무리 좋은 복음이 있더라도 새 것이 오면 바로 바꾸었다. 나는 교리나 제도에 매일 필요 없이 더 좋은 게 있으면 바꾼다
이런저런 것으로 걸려서 이 복음을 안 듣더라도 때가 되면 들을 것이다. 나는 이 복음이 인류에게 불가피한 복음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더 좋고 더 쉬운 복음이 있다면 미련 없이 버리고 그 복음을 택하겠다. 그러니 내 걱정하지 말기 바란다. 더 쉬운 게 있는데 왜 다른 것을 하겠는가. 내가 전한 복음이 얼른 쉽게 안 되니 그런 말을 한다.
오늘도 마지막 하나님 대책에 대해 말씀하겠다. 이 대책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우리가 대책을 알자면 원인을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한다. 균등한 재물이 없어서 문제인가? 권력이 없어서 문제인가? 학식이 없어서 문제인가? 몸이 약해서 문제인가? 문제는 항상 많고 끝이 없다.
이것을 낱낱이 해결하려면 죽을 때까지 해도 남아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할 말 없는 무덤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근본을 모르고는 치료할 수 없다. 그 원인을 알아야 대책을 알 수 있다.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병의 진단이다. 병이 진단 안 되면 약이 없다.
옛날에 문둥병을 정확히 진단 못 하니 아무리 약을 구해도 안 되었다. 세균학이 생긴지 100여 년 밖에 안된다. 그전까지는 문둥병이 하늘이 준 병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균학이 발전한 이후 이 병이 균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지금은 어떤 다른 병보다 쉽다.
결핵은 최소한 약을 1년 먹어야 한다. 한 번에 죽는 균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매일 주사를 맞다가 그게 효과가 없으니 일주일에 두 번 주사를 주었다. 최소한 1년 이상 약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문둥병은 한 가지 약이 나와서 간단하게 해결되어 결핵보다 쉬운 병이 되었다
대책만 나오면 한 방에 해결된다. 원인을 모르니 해결이 안 된다. 원인을 모르니 아무리 고치고 고쳐도 안 된다. 이것을 사람의 원죄 때문이라고 한다. 불순종, 교만, 욕정 이 세가지가 원죄라고 어거스틴이 말했다. 그 사람은 이런 죄에 빠져있다가 나오니 이렇게 정의했다.
사람이 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는가? 하나님이 정령 죽으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이다. 동산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담은 생각지도 않고 선악과를 먹어버렸다. 하와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먹었지만 아담은 아무 생각 없이 바로 먹었다. 내가 죽었다 살았다 해보니 안 죽는 길만 있다면 하나님을 붙잡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거짓말로 나 하나님 안 믿는다, 예수 모른다 하고 살아나서 다시 회개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아담은 한번 선악과를 먹은 후 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동산 밖에 나오니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난 것처럼 오만가지 문제가 다 발생하였다. 못살 곳에서 살기 때문이다.
멀쩡한 물개인데 수족관을 청소하느라 물을 모두 빼버리니 뒹굴뒹굴 구르는 모습이 불쌍하였다. 물을 채워놓으면 물개는 너무 유연하다. 자기 살 곳이 아닌 곳에 가면 고생을 한다. 남쪽 더운 지방에 살던 나무나 꽃은 한국 땅에서 적응하기 힘들어서 죽는다.
우리도 원래 이렇게 복잡한 사람이 아니고 동산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 명령을 따르니 너무 쉬웠던 인생이다. 씨를 흙에 뿌리면 열매가 나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아기 낳는 일이 너무 당연하다. 공부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안 이뻐도 되고 여자면 된다.
씨는 흙에 떨어지면 생명이 된다. 예수의 비유가 있는데, 씨 뿌리는 자가 길바닥에 뿌린 씨는 새들이 먹어버리고 돌짝밭에 뿌린 씨는 말라 죽고 가시밭에 뿌린 씨는 숨이 막혀 죽는데 옥토에 뿌린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이 비유는 예수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다.
옥토가 굉장히 좋은 줄로 알면 안 된다. 옥토는 썩고 썩은 땅이다. 생생한 산속의 땅에 무엇을 심으면 농사가 안된다. 효령에 언덕이 있어서 2미터 정도 절개해서 깍으니 속이 노란 황토이다. 거기에 개나리를 심었는데 몇 년이 되어도 자라지 않는다. 지금도 안 자랐을 것이다.
흙으로서는 좋은 흙이고 깨끗한 흙인데 씨에게는 필요 없는 흙이다. 썩어서 쓸 수 없는 흙 같은데 씨에게는 좋은 흙이다. 우리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 재배되는가? 이유가 다 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재주가 있어서 깨닫는다면 재주 없는 사람은 안되고 공부를 많이 해서 깨닫는다면 공부 안 하면 안 된다. 말씀을 잘 알아듣는 할머니도 있고 말씀 잘 알아들을 것 같은 똑똑한 젊은이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일본에는 기독교가 상류층에 들어가서 대중에게 전파가 잘 안된다. 인텔리들만 모이니 기독교인을 존경하지만 사람이 불어나지 않는다. 무교회주의로 다 고상하고 지식 있는 사람들만 모여서 사람이 많지 않다
우리나라 순복음교회가 저렇게 커진 이유가 병들고 가난한 때라서 많이 퍼졌다. 지금처럼 잘사는 시대가 아니었다. 인도에서 조 목사가 집회하는데 힌두교인들이 수만 명 모였다. 병 고치니 종교가 다 필요 없다. 인도는 가난해서 병원이 없고 돈도 없는 곳이다
우리도 의료보험이 있기 전에는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갔다. 맹장염에 걸려도 병원에 못 갔다. 병원에 가려면 논밭을 팔아야 하는데 그때는 한번 빚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고 조금만 부자인 사람은 계속 불어난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돈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가난하다. 알고 보면 인간 자체가 가난하다. 하나님이 없으면 형상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그릇에 담을 것이 있어야 한다. 그릇이 영국제 고급이라도 담을게 김치뿐이라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 그릇에 어울리는 음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릇에 담긴 보배고 밭이 묻힌 보화다.
대책이 중요하다. 이 대책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가지고 있었지만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냈다.
사람들이 바벨로 가버렸다. 그리고 바벨의 결과는 혼잡과 분열이었다. 하나님은 그 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고친 게 아니라 그곳에서 불러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불러내심의 조상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심을 받았는데 사실은 아버지 때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갈대아 우르는 이라크 수도 근처의 마을이다. 이라크 수도가 옛날 바벨론이라는 말도 있다. 인간문화가 가장 찬란한 바벨론에서 불러냄을 받았다. 왜 불러내셨을까? 거기서는 안되니 불러내셨다.
거기서는 안되니 불러내지 잘살면 왜 불러내겠는가? 초기 개화기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가난한 천민이었다. 선교사들이 아무리 사람들을 불러내도 아무도 안 오니 쌀도 주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모은 것이 배재학당이고 이화학당이다.
초창기에 가난한 사람들이 신학문을 배워서 초기 우리나라의 선구자가 되었다. 자기 고향에 살아서는 아무 소용없으니 나왔다. 나도 내가 살던 고향에서 잘 살았으면 친구가 불러내도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어떤 사람이 미국에 가면서 나에게 미국으로 오라면 오겠냐고 하는데 속으로 어머니를 두고 어찌 가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도 다 걸리게 된다. 사람에게 옷이 여러 벌이라도 버릴 옷은 없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었다. 이 사람은 무엇인지 몰라도 가난한 사람이었다. 베드로도 고기를 못 잡으니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가 고기 못 잡는 베드로를 보고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이 축복이 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정기를 받아 아기를 낳게 되어있다. 몸속에 비어있는 자리가 있으니 남자를 그리워하게 되어있다. 우리도 우리 자리를 알면 하나님 없이 안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가 빈궁이고 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흙은 씨가 없으면 아주 쓸모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다. 시끄럽고 싸움이나 하는 존재로 동산을 떠나니 세상이 시끄럽다. 세상이 시끄러운 게 너무 당연하다. 그러니 우리는 원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했다. 옛날에는 후사가 없으면 땅이 있어도 소용없다. 후사가 있어야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지금은 아들딸 구별을 안 하지만 옛날에는 아들 낳으려고 별짓을 다 했다. 아들 낳기 위해서 첩을 얻기도 했다.
지금은 딸이 더 좋다고 한다. 노후에 딸들이 부모를 잘 모신다고 한다. 아들은 마누라에게 쥐어 살고 마누라 이기는 남편이 없으니 부모를 모시고 싶어도 안 된다. 결국 딸이 모신다. 사위는 마누라가 좋으니 친정 부모를 모셔도 큰 불평이 없는데 아들과 살려면 며느리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했다. 불러낸 사람에게는 후사를 약속한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고 야곱은 아들들을 축복하고 바로를 축복했다. 이 축복은 후사에게 주는 것이다. 야곱이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가 에서를 축복하려는 것을 알고 어머니와 짜고 어찌하든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변장을 하고 이삭에게 축복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뜻에 맞는 축복이었다. 에서가 나중에 와서 남은 축복이라도 달라고 하니 다 줘버리고 좋은 것은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이 입으로 하는 축복이 아니라 실제로 재산과 모든 것을 넘겨주는 것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아들이 여럿이라도 그 축복을 받은 자가 후사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이렇게 되어있다. 아들이 아무리 많아도 한 사람만 아들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족보를 보면 그런 방식으로 되어있다.
꼭 큰아들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넘어온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실제적인 유산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후사를 약속한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애급에 억류된 백성을 이끌어 내어 홍해를 건너간 사건도 믿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이 크다. 홍해를 건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건널 수 없는 큰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다시는 애급 사람을 보지 않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그것이 필요하다.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니 불기둥, 구름 기둥, 만나, 메추라기, 따르는 반석이 필요하다. 애급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물도 길도 없는 곳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쩌면 전혀 다른 길로 전혀 다른 양식을 먹고 가는 길이다. 세상과 비슷한 양식을 먹고 세상이 다 아는 길로 가는 게 아니다. 완전히 다른 길이다. 세상과 같은 길로 가고 같은 음식을 먹으면 혼란이 생긴다. 그 속에 살다 보면 하나님이 이끄는 길인지 내가 가는 길인지 모르게 된다
나는 어쩔 수 없을 때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셨다. 지금도 하나님을 잘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나를 인도하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있냐 없냐가 문제가 아니라 나를 인도하신 분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모를지라도 나는 하나님이 나를 이끄신 것이 너무 역력해서 그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광야를 통과하는데 먹을 것도 길도 아무것도 없는 곳을 가는 것이다. 내가 생각지 않은 길로 가는 것이다. 다윗을 낳는 방법도 아주 특별한 방법이었다. 그 족보가 다말과 라합과 룻을 통해서 왔다. 그 세 여자로 족보가 바뀌어서 다윗이 나왔다.
예수가 오신 것은 사람들이 생각한 대로 이스라엘과 인류를 구원할 그런 분이 전혀 아니다. 인류를 근원지 에덴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다른 이유로 예수가 왔다고 생각하면 빗나간 것이다.
우리를 원위치로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왜 필요하냐면 우리를 원위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하나님같이 될지라도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아무리 대단한 것이 될지라도 사람의 원래 자리는 여기다 하며 돌아가게 하는 분이다.
이 자리에 와서 우리는 비로소 확고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보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다 가버린다. 그 아무 것도 없는 곳이 내 원래의 자리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언제든지 짝지을 수 있는 자리가 형상이다.
하나님은 자신를 위해 다른 형상을 만들지 말라 했다. 우리가 어떤 모양을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모양이 없는 분이니 형상도 모양도 없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옛사람들이 연단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그것은 자기가 가진 것을 벗겨내는 것이고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 오면 원위치로 돌아간다. 원래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그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이유를 확실히 알기 바란다. 내가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한다.
예수와 연합하는 것만큼 완전하게 원위치로 돌아가는 게 없다. 내가 그분과 길을 함께 간다고 함께 가는 게 아니라 그분과 연합되어야 한다. 헬라인들의 특성은 무엇이든지 객관화해서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면 사용하기 편리하다. 하나님까지도 객관화해서 자기 것이 되게 하려고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려면 하나님을 만들게 된다. 냄새를 맡아서 향기를 대신 만들어내는 게 사람이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무엇을 못 만들겠는가. 그러니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님이다.
그러니 이 사람의 하나님이 다르고 저 사람의 하나님이 다르다. 사람이 만든 것은 다 다르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 수 없다. 사람이 만들면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하나님이 나를 쓰실 때 알뿐이지 안 쓰시면 모른다. 내가 쓰임이 될 때 이렇게 하나님이 쓰시는구나 하고 안다
내가 옛날에 예수를 소유하고 싶어서 발버둥 칠 때가 있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안에 거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지만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이 소중한 기도를 하나님이 왜 안 들어주는가 했다. 예수를 내 안에 모시는 것은 정말 어렵다.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가능하다. 그래서 수녀원 수도원이 필요하다.
보통사람은 이런 생각을 안 하고 특별한 사람만 가능하다. 혹시 예수를 자기 안에 모신다면 종교적인 천재이지 우리 같은 사람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위치가 회복되면 내가 예수 안에 있다. 내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분을 내 안에 모시려고 한다. 내가 그분 안에 있으면 잠을 자도 되고 밥을 먹어도 된다. 어떻게 내가 그 안에 있는가? 그 마지막 자리에 가서 우리와 하나로 연합될 때 알게 된다. 그전까지는 알 수 없다.
혹시 다른 방법으로 된 분이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런데 내 믿음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여러분에게 그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이렇게 애매한 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과 연합이 없으면 모든 것이 모호하게 된다. 내가 다 해보았는데 안되었다. 혹시 되는 분이 있다면 특별한 사람이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은 위치로 있는 것이지 믿음이나 행위로 있는 게 아니다. 한 선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연합을 실제로 느끼게 된다. 내가 그 안에 있다.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꾀부리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야곱의 일생을 워치만 니를 통해 들을 때 내가 하나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주 자유로워졌다. 하나님이 나를 다 알고 계신 것을 나는 모르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내가 믿음으로 신학으로 교리로 다 해보았지만 안 되었다. 여러분도 안되는 사람은 이 말씀을 듣기 바란다. 되는 사람은 되는대로 하시길 바란다.
구속된 인류. 예수와 하나 된 인류. 예수 안에서 아버지께로 간다. 바로 직통으로 하나님께 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알고 있는 사람은 예수 한 사람뿐이다. 완전하게 연합한 사람은 이 사람뿐이다. 우리가 다 그 안에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로 간다.
내가 예수와 하나라고 한다 해서 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갈 수 없다. 예수 한사람 안에서 우리가 아버지께로 간다. 바울이 말하기를 한사람 안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사람 안에서 의가 세상에 왔나니 하였다. 그러니 죄가 들어올 때도 한사람이고 의인이 되는 것도 한사람이다. 여러 사람이 아니니 간단하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다 그 사람이다. 참 놀라운 복음이다.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 말은 점점 예수가 확실할수록 나도 확실해진다는 말이다. 주 예수가 오시면 오신만큼 나도 된다. 그분이 내게 분명해질수록 나도 가까이 간다.
내가 계속 이야기하는 이유가 이 길로 가다 보니 점점 그분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더 분명해지니 보는 것이 달라진다. 초롱불 아래서 보는 것과 램프 아래서 보는 것과 전등 아래서 보는 것이 다르다. 우리 어릴 때 초롱불 아래서 보다가 도시 가서 전등 아래서 보니 딴 세상이었다. 안 보이던 머리카락까지 다 보인다.
빛 되신 예수라는 말이 그런 말이다. 예수가 훌륭한 분이라는 게 아니라 눈으로 환히 보게 해주시는 분이다. 그러니 신기한 분이다. 그러니 예수가 밝아지기만 하면 나도 밝아진다. 내 눈은 그대로인데 어두우면 안보이고 밝아지면 더 보인다.
내 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빛이 중요하다. 빛이 없으며 눈이 소용없다. 빛이 있을 때 시력을 평가하는 것이지 캄캄한 방에서는 눈이 좋고 나쁘고 구분이 없다. 빛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밝아진다. 빛이 없으면 천지 만물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장님은 빛이 와도 안보인다. 우리도 눈이 안 뜨이면 빛이 와도 안보일 수 있다. 어두울 때 자는 것이 좋다고 한다. 불을 켜놓고는 눈을 감아도 밝다. 내 눈이 밝아도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보인다.
우리 집에 간병하는 분들은 불 조절이 하나의 과업이다. 아주 캄캄하면 안 되고 살짝만 비쳐야 하니 일일이 말해야 한다. 눈만 있는 게 아니라 빛이 있어야 한다. 눈 있는 사람은 많지만 빛없는 사람 많다. 다 같이 보는데 빛을 못 본다. 참 곤란한 일이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들 안에서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나보다 밝은 빛이신 분이 오시면 아들에게 가기 쉽다. 그런데 나보다 밝은 빛이 오더라도 내 눈이 없으면 소용없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내게 빛이 되신 것이 주 예수의 은혜다. 나를 포함해주신 것이 주 예수의 은혜다. 최종적인 이 은혜가 있어야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다 살아난다. 성경 말씀도 다 살아난다. 지금까지 안 보이던 성경책이 빛이 오면 바로 보인다. 전에 모르던 것이 알아진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을지어다. 반석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은 확고하다.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반석이 될 때 내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반석은 그리스도시다.
한번 받고 마는 게 아니라 우리는 평생 이 물을 먹어야 한다. 이 반석이 나를 따라다녀야지 가는데 마다 모세가 바위를 치는 게 아니다. 성경 말씀이 참 신기하다.
인생, 교회, 국가, 사회, 회사, 직장, 가정, 모든 곳에 이 빛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도 알고 우리가 모르던 다른 세계가 보이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게 된다. 내가 모르던 나 자신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주 예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낙오된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앞에 말했던 것처럼 내게 걸림이 되어 이 빛을 못 보면 안 된다. 내게 걸려서 못 본다면 뭐라도 하겠다. 이 귀중한 것을 나 때문에 놓치면 안 된다. 비록 나에게 걸리더라도 이 빛을 볼수만 있다면 좋겠다. 모두가 이 빛 안에서 살게 된다면 그것이 구원이다
교회가 이 빛 가운데 있다면 모두가 다 하나이다. 우리가 모르니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한데 빛이 비친다면 어둠이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운명이 정해졌으니 지금은 모르지만 결국은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있듯 모두에게 정해져 있다.
혼의 죽음도 육체의 죽음으로 알게 된다. 이 죽음 때문에 혼의 죽음도 알고 관계가 끊어진 죽음도 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해서 모두가 한 세계를 보게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