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산상수훈을 시작하는 첫머리 “마태복음 5:3-12”을 팔복이라 부른다. 구약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이라면 산상수훈의 핵심은 팔복이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바람직한 신앙 자세와 그에 따르는 하나님이 주시는 여덟 가지 복이 소개되고 있다.
한편 팔복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다룬 것으로 영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현세적 복, 물리적인 복이기도 하다. 따라서 팔복에 대해서 알아보고 깊이 묵상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팔복은 명백히 한 쌍씩 서로 짝을 이루시에 6월 한 달 동안 한 주에 두 주제씩 팔복에 대해 강해하겠다. 많은 은혜 받기를 바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본문을 여기서 간단히 주해하면 ‘심령’은 영, 영혼, 인간의 감정과 욕망 같은 것을 가져오는 근본, 마음이라는 의미가 있는 말이고 일부에서는 마음이라고 번역하였다. ‘복’은 말 그대로 복이고 공동번역, 현대인 성경 등에서는 행복이라고 한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함을 마음이 가난하다고, 복이 있다는 말은 행복하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또 참으로 기이한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복 있는 자로 여긴 적이 있었던가? 가난을 오히려 복으로 말씀과 축복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중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어떤 사람인가?’이다.
1.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이 아닌 겸손하는 사람이다.
흔히 세상에서는 자기를 내세우며 자만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심령의 가난은 이러한 성품과는 완전히 반대된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만사를 자기 뜻대로 마음먹는 바로처럼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출 5:2)”라고 말하는, 불신적이고 교만한 태도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겸손함이다.
겸손이란 교만, 오만, 자고(自高)의 반대개념으로서 성도가 가질 가장 기본적인 주요 덕목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각하여 낮은 자세를 처하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2.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가치도 없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령의 가난, 즉 자신이 비어있고 결핍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은 인간의 마음 속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 즉 자신의 무기력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3. 영적 결핍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채우시도록 자신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성령의 역사이다. 거듭난 모든 영혼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성이다.
4.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령의 가난을 소유한 아는 복되다고 선포되어 있다. 그것은 천국이다. 천국은 모든 문제와 모든 부족을 채워주는 하나님의 최고의 복이다. 본문에서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구원만을 의미하는 복이 아닌 현세에서 천국과 같은 삶을 보장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천국이란 복이라는 말과 연관지어야 한다. 이 복을 행복이라할 수도 있는데, 천국은 바로 행복을 누리는 편안한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예로 화장실, 에어콘, 방귀 등의 해결의 편안함.....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과 같은 최고의 복을 주심은 철저히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애통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슬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위로란 단순히 슬퍼하지 말라는 위로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서 나오는 위로 그리고 그 위로부터 생성되는 마음의 진정과 평화이다.
애통한다는 것이 인간 본성으로는 거부하고 싶은 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며 본성적으로 유쾌하고 즐거운 일에 동참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본문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세상의 논리와는 완전히 모순된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부유하고 쾌활한 자를 행복한 자로 여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행복하다고 선포하신다.
복을 받았다면 왜 애통하는가? 애통하고 있다면 어떻게 복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만이 이 역설을 풀 열쇠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모든 종류의 슬픔을 다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슬픔의 원인이 되는 것들은 많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위로를 약속하신 애통은 영적인 것에 제한되는데, 앞에서 살펴본 첫째 복인 그리스도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선포하신 축복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은 연약한 존재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죄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각성된 사람들을 묘사한 것이다. 이제 그러한 가난에서 애통에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사실 가난의 뒤를 따르는 애통은 서로 단짝을 이룬다. 이사야 66:2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되는 애통은 앞선 가난이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것으로 깨달아야 한다.
우선적으로 복된 애통은 우리의 본성의 부패성과 우리의 행위가 야기한 죄를 깨닫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선함을 깨달은 결과이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위로를 약속하신 애통은 경건한 슬픔으로 죄에 대해 자각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축복을 선포하셨던 애통하는 심령에 대한 훌륭한 예증이 눅 18:9-14에 나온다. 여기서는 두 부류의 사람들의 생생한 대조가 눈에 뜨인다.
먼저, 첫째 부류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이다. 그는 하나님을 쳐다보며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칠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말한 그대로 모두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죄의 문제를 전혀 해결치 못한 채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 자기는 몰랐을지라도 그의 훌륭한 옷은 누더기이며 그의 횐 옷은 더러운 채로였다.
그 다음 부류는 세리이다. 그는 멀리 서서 자기의 죄악이 자기에게 미쳐 감히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칠 뿐이었다. 자기 속의 부패함을 의식하고서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울부짖는다. 이 사람은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 왜냐하면 그는 심령이 가난했고 죄로 인해 애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 된 첫 표시가 있다. 심령이 가난해져 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죄 때문에 애통해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어느 한 교회에 속해 있거나 직분을 맡았다 하더라도, 천국을 본 적도 그 곳에 들어간 적도 없고 참 위로는 받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또한 애통은 단지 죄에 대한 가책과 깨달음에 국한되지 않는다. 심령이 가난함으로 자신의 무기력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울어나오는 애통함이 있는데, 자신의 연약함에 애통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에 마음을 쏟는 애통함이다. 또한 신앙적인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부족한 심령의 상태, 바로서지 못하는 믿음의 부실, 그리스도의 덕목을 올바로 행하지 못하는 믿음의 행위의 부족함에 애통하며 주님께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연약한 믿음의 행동의 슬픔이다. 이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애통함이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선적으로 교훈하시는 것은 양심을 짓누르는 죄를 제거해 주신다는 것이다. 비록 핑계 할 수 없는 잘못에 대해 애통해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자기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요일 1:7) 확신에 의해 위로를 받는다. 비록 도처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괴로워 하지만 앞서 말한 하나님의 위로를 통한 진정과 평화와 마음의 안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