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무림(武林)의 본산(本山) - 숭산 사오린쓰(嵩山 少林寺)
중국 무림의 총 본산인 소림사는 낙양에서 1시간 30분가량 떨어진 등봉현(登封縣)에 있는 숭산의 소실산(少室山)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숭산(嵩山) 소실산(少室山) 다섯 개의 기묘한 산봉우리를 말하는 오악(五嶽) 중 중악(中嶽)인 숭산은 태실(太室) 36, 소실(小室) 36, 총 72개 봉우리를 가진 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1.500여 년 전 북위(北魏) 때 창건되었다고 하는 소림사는 인도의 승려 달마대사에 의하여 이름을 날리게 되고 또한 달마는 중국 무술의 창시자로도 숭상되고 있다. 등봉현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무술학교들이 도로 옆을 따라 늘어서 있었는데 소림사 주변에만 50여 개의 무술학교가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 구법(求法)을 위하여 중국으로 온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제일 먼저 광저우에 도착하여 혜가(慧可) 스님에게 구법을 하였는데 수백 번의 간청에도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이곳 숭산으로 와서 소실봉 중턱의 바위 동굴에서 9년 동안 면벽정진(面壁精進) 수도하여 크게 깨달음을 얻고 선종(禪宗)의 창시자가 된다. 이야기로는 달마가 9년 동안 마주 보고 앉았던 동굴 벽면에 달마의 그림자가 새겨졌다고 한다. 후일 혜가 스님이 오히려 달마를 찾아와 구법을 하게 되는데 마침 겨울이라 흰 눈이 내리는데 달마가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지 않는 한 안 된다.’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혜가 스님은 칼을 들어 자신의 왼팔을 내리쳐 자르고 그 피를 뿌려 눈을 붉게 물들게 하였다고 한다. 깜짝 놀란 달마가 달려 내려가 옷을 벗어 왼쪽 어깨를 감쌌는데 온통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때부터 소림사 스님들은 붉은 장삼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합장할 때 두 손으로 하지 않고 오른손바닥 하나만 세우는 전통이 생겼다고 한다.
소림무술은 소림사에 있는 승려들의 체력이 너무 약한 것을 보고 달마 선사가 다섯 가지 동물의 움직임에 창안하여 권법을 만들어 훈련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소림사가 크게 일어나기는 당태종의 아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열세 명의 소림사 승려들이 구해내어 당태종으로부터 크게 상급을 받아 번창하였다고 하는데 가장 번창하였을 때는 승려만 3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제일 먼저 실내 공연장에 들어가 소림사 고수들의 무술 시범을 관람하였다.
약 30여 분 계속된 공연에서는 18가지 무기를 이용한 무술(十八班武藝), 격파술, 7~8세가량의 동자공(童子功)이 보여주는 서커스에 가까운 유연한 몸놀림 등이 돋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늘을 던져 유리판을 뚫는 무술이었는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무술 고수인 스님이 바늘을 던져 유리판을 뚫고 나가 반대편의 풍선을 터뜨리는 무술인데 뚫린 유리판 구멍을 들고 관람석을 한 바퀴 돌며 직접 확인시켜 준다. 설마 스님들이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니겠지?
소림무술 시범 / 탑림(塔林)
또 경내에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에는 스님들이 일지(一指), 이지(二指) 관수(貫手/손가락 훈련)를 훈련하여 껍질에 수백 개의 3~4cm 깊이의 지공(指孔/손가락 구멍)이 뚫린 것도 볼 수 있다.
그리고 1.000년 이상 되었다는, 일반 가마솥의 서너 배 크기의 가마솥이 있는데 채(菜/나물)를 볶을 때 썼다고 하며 무술연마를 위하여 공중에 가로지른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볶았다고 한다.
그 옆에는 엄청나게 큰 맷돌이 있었는데 돌리는 손잡이가 없고 세 사람이 손가락 두 개를 넣어 돌리도록 구멍이 6개 나 있었는데 맷돌의 크기로 봐서는 소나 말로 끌어야만 돌릴 수 있을 듯하였다.
5. 후베이성(湖北省)
♣ 우한(武漢)과 악양(岳陽)
보수 중인 악양루 / 악양루(岳陽樓)와 동정호(洞庭湖) / 미인의 고향 항주(杭州)
장가계 관광이 끝나고 나 홀로 여행을 다시 시작했는데 우선 무한(武漢)과 악양(岳陽)을 보기로 했다.
무한(武漢)은 호북성(湖北省)의 성도(省都)인데 장강(陽子江)과 한수(漢水)의 합류 지점으로, 한수(漢水) 북쪽은 한구(漢口), 남쪽은 한양(漢陽), 장강의 동쪽은 무창(武昌)의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뉜다. 주변에 수많은 호수가 널려있고 세 도시가 거의 맞닿아 있어 합치면 어마어마하게 큰 대도시겠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일본이 남경(南京)을 함락하자 국민정부가 한구(漢口)로 철수하였고 1945년 일본군이 철수한 뒤, 한구(漢口)는 국민당(國民黨)이 차지했으나 무한(武漢)은 중국 공산당이 접수하는 등 정치(政治)의 소용돌이가 심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무한(武漢)으로 이동할 때는 2층 침대 버스를 이용했는데, 버스안은 2층 침대를 세 줄로 배치했고 나는 가운데 아래층인데 발을 뻗으니 닿고 옆도 좁아 꼭 관(棺) 속에 누워있는 기분이다.
그래도 몸을 누일 수 있다는 것이 고맙다. 오후 7시 10분에 출발하여 우한에 도착하니 새벽 3시 30분으로 8시간 20분이나 달려온 셈이다. 너무 이른 새벽에 도착하니 갈 곳도 마땅찮아 버스터미널 앞에서 5元짜리 국수로 속을 데우고 벽에 기대앉아 날이 새기만 기다렸다. 다행히 나와 같이 벽에 기대어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명 있다.
아침 7시, 버스터미널 문이 열리자마자 우선 악양(岳陽)을 다녀오기로 하였는데 고등학교 시절 너무나 귀에 익숙한 악양루(岳陽樓)와 동정호(洞庭湖)를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한에서 악양까지 버스로 5시간 걸리고 차비는 80元이다.
오후 1시에 악양(岳陽)에 도착하여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곧바로 악양루(岳陽樓)로 향하였는데 악양루 입장료는 80元이다.
동정호(洞庭湖)를 바라보며 우뚝 자리 잡은 악양루는 고대로부터 수많은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아름다움을 칭송한 곳이다. 악양루는 여러 번 고쳐 지었는데 현재의 악양루는 1880년 청나라 광서제 때 다시 중건한 것으로, 누각의 높이는 20m, 3층 목조건물이고 현재 수리 중이었다.
이 악양루는 동오(東吳)의 명장 노숙(魯肅)이 수군(水軍)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볼 목적으로 세운 열군루(閱軍樓)를 716년 당나라 때 악주(顎州) 태수 장열(張說)이 수리하여 다시 세우면서 악양루(岳陽樓)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악양루는 다섯 번 고쳐 지었다는데 당시의 모습들을 작은 미니어처로 만들어 정원의 작은 연못 둘레에 세워놓았다. 그 중, 송나라 때 있었던 악양루가 가장 멋져 보인다.
천하절색 소교(小喬)의 묘 / 악양루(岳陽樓)의 변천모습 / 당(唐)의 대시인 두보(杜甫) 초상화
악양루 공원의 가장 안쪽에 소교(小喬)의 사당과 묘(墓)가 있다.
중국 삼국시대, 천하절색으로 강남이교(江南二喬)로 불렸던 두 여인은 교국로(喬國老)의 딸들인데, 언니인 대교(大喬)는 오(吳)나라의 장사환왕(長沙桓王) 손책(孫策)의 부인이 되고, 동생 소교(小喬)는 오(吳)의 장수 주유(周瑜)와 결혼을 한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이 발발하기 전, 촉한(蜀漢/유비)의 책사(策士) 제갈량(諸葛亮)은 손권(孫權:손책의 동생)을 찾아가서 참전을 유도하고자 계책(計策)을 쓴다.
당시 이들의 적이었던 조조(曹操)의 아들 조식(曹植)이 지은 동작대부(銅雀臺賦)에 조조가 대교(大喬)와 소교(小喬)를 탐하고 싶다는 내용을 슬쩍 집어넣어서 들려주었다고 한다.
격노한 손권은 전쟁을 결심하여 적벽대전(赤壁大戰)이 일어나고 조조는 촉(蜀)과 오(吳)의 연합군과 맞서다 적벽대전에서 대패한다. 삼국지 적벽대전을 생각하며 잡초만 무성한 소교의 묘를 둘러보니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