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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9장
하나님께서 버리라는 것을 버리고 천국에 들어감
(찬송 171장)
2023-12-20, 수
맥락과 의미
마태복음은 5개 설교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성도)의 삶에 대한 산상설교(5-7장), 제자의 사역설교(10장), 천국 비유설교 (13장), 교회생활설교(18장), 종말설교(24,25장)입니다. 오늘 본문은 18장 교회생활에 관해 가르치신 설교에 바로 이어 나오는 내용입니다.
5개의 설교는 그 앞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하심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리고 그 설교에서 말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이어 나옵니다.
1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새롭게 세우실 교회에 대해 가르칩니다.19-23장은 누가 그 교회 안으로,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가를 보여줍니다.
19-20장은 유대 지역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대해 말해 줍니다. 21장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21-23장은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18장의 예수님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던 장소인 성전을 대신하여 성전을 더 완전케 하는 공동체입니다.
1. 이혼 허용법을 새롭게 해석: 하나님의 뜻은 이혼 금지 (1-12절)
2.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 (13-30절)
1. 이혼 허용법을 새롭게 해석하시는 그리스도 (1-12절)
1)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고 장가들면 간음함이다 (1-9절)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이혼법에 대해 물었습니다. 대답하기 아주 까다로운 질문을 해 예수님께서 율법을 잘못 해석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해 목사에게 묻거나 함께 나눌 때, 함정에 빠뜨리려는 악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무슨 이유 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3절). “옳다”는 ‘의롭다”는 뜻이 아니고 ‘성경적으로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일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이혼을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물었습니다.
“읽지 못하였느냐?”(5절).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율법)의 가르침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답을 받아야 합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구약 율법이 계속 유효한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을 교정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따라 새롭게 이뤄지는 해석을 추가해 주십니다(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헌법으로 구약을 더 좋게 개정하여 바르게 해석한다는 의미입니다.
우선 율법의 원래 의도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 교정하십니다. 남자가 아내를 내보낼 때는 반드시 이혼 증서를 주어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이 있습니다(7절, 신명기 24:1-4). 유대인들은 이혼 증서만 써 주면 마음대로 이혼해도 된다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8절, “본래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본래’는 ‘세상의 시작’을 의미하고, 사람을 창조하신 원 뜻을 의미합니다.
구약 율법에서 이혼 증서를 써 주고서 이혼을 허락하신 이유를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하십니다(8절). 남자들이 아내를 싫어하는 것이 심하여, 몰래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자들이 이혼을 할 수도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혼 증서를 써 주는 절차를 두어서, 이혼을 하기가 힘들게 하셨습니다. 한편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은 그 이혼 증서를 가지고 다른 남자와 재혼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이혼할 경우에는 이혼 증서를 반드시 써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지, 이혼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원래 뜻을 따라 가르치십니다. 아내가 음행하지 않았는데도 아내를 내어버리고 장가들면 간음죄를 범한다고 하십니다.
만약 어떤 남자가 재혼하여 40년동안 이 세상을 산다면, 그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원래 아내를 떠나 다른 여자(그가 재혼한 여자)와 40년 동안 간음죄를 범하는 셈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40년 동안 계속 간음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가해자인 남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당하게 이혼당한 여성이 재혼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고린도전서에는 믿는 그리스도인 부부가 별거하거나 이혼을 한 경우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말고 서로 기다렸다가 원래 배우자와 합치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7:11).
그런데 한 쪽 배우자가 음행을 했을 때 깨끗한 편이 “반드시 이혼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치유의 과정을 거쳐서 함께 사는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내가 간음해도 상대방이 용서할 것이다”는 얄팍한 계산으로 음행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입니다.
2) 은사로서의 독신 (10-12절)
예수님께서 이혼을 금지하시는 것을 들은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평생 매여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겠다는 뜻으로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자라야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타고난”은 “주어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신으로 살 수 있는 은사를 주신 사람만 독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독신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a) 타고날 때부터 정서적으로 혼인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
b) 내시처럼 의도적으로 독신으로 만들어진 사람
c)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섬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독신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 바울 같은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독신이 되기를 원한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전 7:7)고 했습니다. 음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고전 7:8).
사도와 성령님은 왜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많이 생겨 나기 원했을까요? 한 가정이 아니라 교회 전체와 교회에 속한 가정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섬길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독신으로 사는 성도는 자기 가정의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도의 가정이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일을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잘 도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은사를 가진 성도를 잘 분별하여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교가 독신이 결혼보다 더 고상하다고 말하고, 목회자는 독신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13-30절)
1)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13-15절)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올 때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13절).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과 같은 자들의 것이다” 고 선언하십니다(14절).
18: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들처럼 자신의 낮음을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만 믿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19:14에서 “천국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다.” 천국 백성은 어린아이처럼 사람이 보기에 별 것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고 오직 하나님을 받드는 자, 세상적으로 가진 것 없는 사람이 교회의 회원으로서 은혜를 누립니다.
2)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16-26절)
어린아이들과 전혀 반대인 한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청년입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모든 계명을 다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자기가 그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 사람은 재물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재산을 다 버리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의 경우 재물이 우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인생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욕심이 인생을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서 그 사람의 탐욕을 드러내셨습니다.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이러한 시험을 통하여 바른 믿음으로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성도는 재산을 우상처럼 섬기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생업을 위해 일하는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따라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은 자기 직업을 가지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집니다.
목사와 모든 성도에게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버리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어떤 것 중에 하나님보다 높이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버립시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에 재물을 쌓아야 합니다. 땀 흘려 일해 많이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구제하고 선교 헌금해야 합니다. 생산은 많이 하되 스스로를 위한 소비는 적게 하며 서로 많이 나누어 천국에 재물을 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23-24절). 재산이 많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보다 재물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명예, 지식 어떤 것으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26절). 사람의 공로, 조건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선행도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 됨을 알고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해야 합니다.
3)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을 상급(27-30절)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른 제자들에게 내세의 영광을 약속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제자들은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은 더 넓은 의미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는 내세에 새 땅을 다스리는 일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영생(기업)을 상속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좋은 땅에 뿌린 씨와 같습니다. 이 땅에서도 열매를 맺고, 천국에서도 기업을 얻게 됩니다. 마가복음 10:30은 버린 자들은 이 땅에서 집과 가족을 100배나 받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성도들이 가족과 재산을 버린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가족들과의 혈연적 관계, 재산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정인 교회를 새로운 가정으로 얻습니다. 성도들은 서로에게 가족이 됩니다. 성도는 재산을 사유하지만, 그 재산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물질이라는 은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헌금을 통해 물질을 서로 도우며 풍요롭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의 어려움을 당할 때 다른 성도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 성도를 세워줍니다. 자신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모든 성도는 교회의 모든 성도를 가족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다른 성도도 물질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 책임을 지고, 나 자신이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과 내세를 위해 최고로 좋은 보험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습니다. 이 땅에서 많이 성취해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께 충성하지 않은 사람은 내세에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따른 성도는 내세에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 중 특별히 독신의 은사가 없는 성도는 혼인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를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서로를 섬기는 사랑으로 부부가 하나됨에서 계속 성장하기 바랍니다. 둘을 하나로 만드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사랑합시다.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힘을 얻으면서 서로 사랑합시다.
천국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애서 어린 아이를 소중히 여깁시다. 어린아이와 같이 천국을 받들면서 교회생활을 합시다.
이 땅의 어떤 것을 우상처럼 섬기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동료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섬깁시다. 천국에서 상을 받을 것을 소망하면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바리새인의 질문과 제자들의 질문의 대조
바리새인은 묻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으면(아이티아, 3절) 이혼하는 것이 옳습니까?” 제자들은 말합니다. “이같이 할진대’(아이티아, 10절) 장가들이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같은 단어가 쓰입니다.
<참고> 남자들이 이혼하는 절차가 쉬웠던 유대사회
그 때 유대인 남자들은 이혼하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는 이혼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아내가 이혼 소송을 내어 법원이 이혼을 결정해도, 실제 이혼은 남편이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참고> 3절, 옳으니이까?
“옳으니이까”(3절)은 “의롭습니까(디카이스)”가 아닙니다. “허용됩니까?(엑- 세스티)”입니다. 12:2에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 잘라먹는 것에 대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허용되지 않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또 안식일에 한쪽 손이 마비된 사람 앞에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안식이에 병고치는 것이 옳습니까(허용됩니까)?”(12:9). 그때도 예수님께서는 “읽지 못하였느냐”(12:3)하시며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잘 알아서 구체적 상황에 잘 적용합시다.
<참고> 10절, 성도가 독신이 되는 것은 성도의 유익을 위한 것 (고전 9:35)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조로 말했습니다.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숨페로, 19:10)는 고린도 성도들이 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전 7:1, 칼론)고 바울에게 물어 왔습니다. 바울은 가능하다면 독신으로 살 것을 권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유익(숨페로, 7:35)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고> 기타 독신: 기도하기 위한 일시적 독신, 배우자를 먼저 잃은 경우, 미혼
독신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결혼생활을 하지 않는 독신도 있고, 결혼 생활을 하지만 침실생활을 하지 않는 그런 독신도 있습니다.
1) 독신의 여러 종류
a) 하나님 나라 위한 독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독신이 된 사람으로 사도 바울과 같은 분입니다. 고대의 목사들은 독신이 많았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독신으로 사셨습니다.
b) 신체적 독신: ‘내시’ 나 사고로 신체적으로 장애가 된 독신이 있습니다.
c) 결혼한 사람의 일시적 독신(경건생활을 위해): 결혼생활을 하지만, 특별히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얼마 동안 침실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긴 기간을 절제하기 말고 가능한 빨리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라고 성령님이 권하십니다. 마귀의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7:5)
d) 결혼한 사람이 특별한 상황에서의 독신: 아내가 임신한 경우, 부부 중 한 명이 사업 등으로 여행하는 경우, 감사함으로 절제해야 합니다. 부부 중 한 명이 사고로 침실생활을 하지 못하는 장애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 몸으로 서로 사랑합니다.
e) 배우자를 먼저 천국에 보낸 경우의 독신: 배우자를 먼저 천국에 보내면 독신상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독신으로 살며 하나님 나라를 섬기기 원하시는 지, 아니면 다시 혼인해야 하는 지 기도하며 결정해야 합니다.
어느 경우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결정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 기간에는 시간이 자유로우므로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f) 미혼이라는 독신: 혼인하기 원하지만 아직 혼인하지 않는 상태는 “독신”기간입니다.
2) 독신 성도의 삶의 자세: 자연스럽게 만나고 섬김의 기회를 제공
독신 상태의 성도는 여러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은 금물입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독신상황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독신 상태의 성도를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로마서 8:28). 다만 어떻게 사랑하시고 있는지 아직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독신상태가 “비정상” 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스타일의 하나입니다. 우선 자신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합니다.
감정이 아니라 순종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기쁘게 일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시지 않은 것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독신의 상태도 은사의 하나입니다. 그 은사, 그 상황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와 형제 자매를 섬기며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혼인하기 원하지만 배우자를 찾지 못한 것인 인생의 패배자가 아닙니다. 그것을 슬퍼하며 우울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많으므로, 성도와 교회를 위해 섬기는 일을 열심히 합시다.
독신상태의 성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함: 우리가 독신 상태의 성도의 어려움을 공감하는 것은 당연하나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은 금물입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그 성도에게 독신상황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독신 상태의 성도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저 분은 이런 이유로 독신 상태인데 어떻게 대하지?” 그런 부담감을 가지면 형제 자매 사랑에 방해가 됩니다. 독신 상태에 지나치게 생각하고 만나면, 상대방에게 거리감을 줍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다른 성도들 만나듯 만나면 됩니다.
<참고> 동성애
동성애 경향을 가진 사람은 몸은 여성(남성)인데 정서적으로는 남성(여성)으로 느낍니다.
1) 교회는 그런 분들을 싫어 해서는 안 되고 그 고통을 공감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를 자연스럽게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2)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은 특별대우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의 사회에서는 동성애자들은 일반적 도덕적 기준을 지키지 않아도 될 것으로 말합니다.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은 도덕적으로 특별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에게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기준으로 평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성적인 상상을 하거나, 행동한다면 음행입니다. 음행이란 결혼한 배우자 아닌 사람과 침실을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결혼할 수도 없고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남자끼리, 여자가 여자끼리 침실을 함께 하는 것은 음행입니다. 상대방이 동성이든, 이성이든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침실을 같이하면 음행죄입니다.
누구든지 부부 아닌 사람과 침실을 계속 상상하는 것도 음행입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혹은 남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28)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도 죄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동성애 경향을 가진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동성인 사람에게 대해서나, 이성에게 대해서나 성적인 상상을 계속하는 것은 음행입니다.
3) 성도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은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처럼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동성애자들의 생각과 행동에서만 음행죄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동성애 성향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마음의 음욕에 대해 슬픈 마음을 가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그런 유혹과 죄의 도전이 있음을 알고 교회와 성도를 지켜야 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이혼을 금하신 주님의 명령을 가볍게 어깁니다. 그러고도 동성애를 금하신 그 명령만 중하게 생각합니다. 옳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티만 보고 우리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4) 성도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을 특별히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특별히 연약한 지체를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통하는 성도의 슬픔에 참여하라고 하십니다.
“몸(교회)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사람)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 주며…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으며”(고린도전서 12:23,26). 믿는 분 아니라 믿지 않는 분 중 동성애 성향 가진 분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복음으로 교회로 초대해야 하지만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더 환영해야 합니다.
4) “동성애 반대운동”은 옳지 않습니다. 그 분들만 콕 꼬집어서 교인들이 거리에 나가서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5) 동성애를 “성적 정체성”이며 동성애 행위는 죄가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기 때문에 우리도 공개적으로 적극적으로 반대 주장을 합니다.
동성애를 성적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장애가 있는 분을 “장애의 정체성”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그분들의 존엄성을 낮게 만듭니다.
동성애자가 성적 상상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동성애 행위는 개인의 자유이고 죄는 아니라고 소리치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성애는 죄다”고 공적으로 적극적으로 주장합니다.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 한 명 한 명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도덕적 원칙을 타협하지 않고 정당하게 주장합니다.
불신 세상은 자기들이 믿는 잘못된 도덕관념을 주장하는 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가 옳은 윤리적 선언을 하는 것은 “차별, 혐오”라 비난합니다. 우리의 사상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사상의 독재가 우리 사회에 번져 가고 있습니다.
6)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을 상담 등을 통해 정상적인 성향으로 치료하기 위해 교회는 도와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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