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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윗이 힘을 다해 춤추는 것을 보고 조롱했다
궤를 메고 다윗성으로 들어갈 때 다윗이 힘을 다해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미갈이 마음으로 그를 비아냥거렸다.
어찌나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채신 머리 없이 춤을 추었다고 조롱했다.
물론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었다.
이로인해 비웃었던 미갈은 자식이 없는 저주를 받았다.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춤출 때 비웃는 사람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린 오직 여호와 앞에서 춤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하6:14~23)
2 규례대로 가져오지 않아 웃사가 죽다
다윗이 힘을 다해 춤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윗은 처음에 궤를 가져올때도 여호와 앞에서 춤추며 뛰놀았었다 그러나 웃사가 궤를 붙들면서 그자리에서 즉사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춤추고 뛰놀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다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다윗의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을 경험하며 아프게 배운 다윗은 여호와의 궤는 레위지파만이 메고 옮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규례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다하는 예배는 바로 규례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기본이다. 마음이 있다면 최소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보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리고나서 온몸으로 주님께 올려드릴 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진리위에 있어야 인정받고 무너지지 않는다.(삼하6:6~13)
3 말씀을 어기는 것은 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를 불의하게 취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업신여겼다고 책망했다.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이 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규례대로 구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말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멸시했다고 책망하신다. 하나님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한다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 죄악으로인해 평생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고 다윗이 밧세바를 은밀히 취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내를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어쩌면 우리 죄가 은밀히 행해질 때는 부끄러움을 잘 모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죄악을 보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죄가 만천하에 드러날 때 그때서야 얼마나 부끄럽고 큰 죄악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악에 대한 대가를 물으신다. 또한 이 죄로인해 여호와의 원수들이 크게 비방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였으므로 아이가 죽는 아픔을 다윗을 겪었다.
다윗은 이처럼 불법을 행하고 규례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을 때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야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평생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삼하12:9~14)
4 여호와께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신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시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열방을 기업으로 얻게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장막은 과연 어떤 장막일까? 율법이나 규례에 제한을 받지 않는 내 마음대로 드리는 예배의 모습일까? (암9:11)
이사야 선지자가 다윗의 장막을 잘 표현했다. 다시 오실 예슈아는 충실함으로 판결하고 정의를 구하고 공의를 신속히 행할 것이다. 즉, 진리(충실함)로 판결하고 법도(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와 법도로 세워진 의로운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는 것은 다시 오실 예슈아의 길을 예비하는 것과 같다. (사16:5)
# 그러면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아보자. 다윗의 장막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소망하는 우리는 예배자인 다윗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춤추며 예배하는 예배자로서의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
5 법도를 지킴으로 상이 크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다.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고 우리의 눈을 밝게 해준다. 여호와의 법도는 진실하고 의롭다. 여호와의 법도는 정금보다 귀하고 법도를 지킴으로 큰 상을 받는다. (시19:7~12)
6 율법, 계명, 가르침, 법령들은 여호와의 것이다
율법은 여호와의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가 복이 있고 행위가 완전한 자이다. 다윗은 주의 법도와 율례와 계명을 지켰으며 율례들을 배우기 원했고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기 원했다. 그래서 주의 계명이 자신의 눈에 숨겨지지 않기를 구했다. (시119:1~19)
7 전심으로 법도를 준행하기 원했다
교만한 자는 여호와의 계명을 떠난다. 다윗은 주님으로부터 율례를 배우기 원했다. 법도를 깨닫기 원했고 넓은 마음을 가진 자가 계명들을 지킬 수 있으며 전심으로 법도를 준행하기 원했고 사모했다. 우린 전심으로 율법을 행하고자 하면 율법주의라고 말한다. 만약 이 시대에 다윗을 만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주의라고 다윗과 상종도 안할 것이다. 이 시대에 반율법주의, 반유대주의는 사라져야한다. 율법주의라는 단어도 반 율법주의에서 나왔다.(시119:21~40)
8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인해 맹렬히 분노했다
여호와의 율법을 항상 지키며 영원히 지키고 법도들을 구하고 다른 왕들 앞에서 여호와의 교훈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말하기 원했고 계명들을 즐거워하고 주의 율법을 버린 자들로 인해 심히 분노하였으며 율례들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다윗의 소유는 금도 은도 아닌 여호와의 법도를 지킨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시대에 다윗이 온다면 여호와의 법도와 율례를 버린 대다수의 기독교인들로 인해 맹령한 분노를 느낄 것이다. 다윗은 그런 기독교인들을 악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119:44~61)
9 율례를 배우기 위해 고난은 유익하다
다윗은 법도들을 지키는 사람들의 친구이다. 율례들을 배우기 원했고 계명들을 신뢰했다. 계명을 믿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교만한 자는 다윗을 치려하지만 다윗은 전심으로 법도를 지키고 즐거워했다. 고난이 삶에 유익한 이유는 율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법도는 금은보다 좋으며 계명을 배우기 원했다. 삶에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율례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믿는가? 다윗은 그렇게 고백하고 있다. (시119:63~73)
10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
주의 법도는 다윗의 즐거움이었고 율례들에 대해 완전해 지기 원했다. 또한 법도를 지키지 않는 교만한 자들이 다윗을 죽이려하고 이유없이 핍박했지만 다윗은 결코 법도들을 버리지않았다. 어둠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법도를 대적했다. 어둠이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는 우리가 법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어둠은 선악과라는 다른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법도에 불순종하게 만들며 죄를 짓게 했다. 지금도 아둠은 법도를 거절하게 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게 미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명은 신실하다.(시119:77~87)
11 고난에도 법도가 즐거움이었고 살게했다
많은 고난에도 법도가 즐거움이 되었고 법도가 다윗을 살게했다. 또한 법도들만 찾았으며 너무나 사랑하였다. 계명들은 완전한 것보다 더 완전하여 끝도 없이 심히 넓으며 계명을 준행하므로 원수보다 지혜로워졌고 법도를 지킴으로 노인보다 명철해졌다. 그러므로 모든 거짓 행위들을 미워한다. 원수가 아무리 공격해도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지혜와 명철을 주시므로 그들은 준행자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신다.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모든 스승보다 뛰어나고 노인보다 뛰어난 이유는 하늘의 지혜가 세상 지혜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법도를 지키지 않고 계명을 떠나는 것은 거짓 행위를 따르는 자들이다(시119:92~104)
12 율례를 떠나는 자를 하나님이 멸시하신다
죽을 위기에도 법도를 잊지 않았다. 악인들이 자신을 해하려는 상황에서도 법도를 떠나지 않았다. 악인들은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며 법도를 사랑하지 않는다. 율례를 떠나는 자를 하나님께서 멸시하신다. 악한 자들은 법도를 폐한다. 다윗의 시대에도 대부분의 주의 백성들이 법도를 지키지 않으므로 다윗이 핍박을 당했다. 이건 예슈아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이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였고 지키는 척 하는 가식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예슈아를 죽이려했다. 하지만 지금도 똑같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교만하다고 비웃고 비난한다. 애석하게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예를 되찾을 때이고 다윗들이 일어날 때이다. (시119:109~126)
13 여호와의 율법과 계명은 진리이다
순금보다 계명들을 더 사랑했다. 법도들을 떠한 거짓 행위를 미워했다. 계명들을 숨을 헐떡이기까지 사모했다. 사람들이 법도를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눈물을 시냇물 같이 흘렸다. 멸시를 당하는 중에도 법도를 잊지 않았다. 율법은 진리이다. 계명들은 진리이다. 환난과 우환중에도 계명은 즐거움이다. 악한 자들은 여호와의 법에서 멀다. (시119:127~151) 우리는 정말 율법과 계명을 진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금보다 사랑할 수 있는가?
14 계명과 율법을 행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다
악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율례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윗은 구원을 바라며 계명들을 행했다. 구원을 사모하며 율법을 즐거워했다. 다윗은 구원을 계명과 율법과 연결했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지는 것이다. 법을 어기는 것이 죄라면 율법을 사랑하고 계명을 추구하는 것이 죄로부터 건져지는 구원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여호와의 법도과 계명으로 다스려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율법과 계명에 순종한다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과 삶에 이루어진 것이다. 다윗은 법도들을 사랑하고 율법을 사랑했다. 법도를 사랑하는 자에게 장애물이 없다. 계명들은 의롭다 (시119:153~176)
# 다윗의 고백을 통해 여호와의 율례와 계명과 법도는 진리이고 공의이며 정금보다 귀하고 생명보다 낫다. 모든 고난과 환란에도 율법과 계명들로 즐거워하며 살 수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구원을 바라며 율법과 계명을 지켰다. 이곳 어디에도 지킬 수 없으며 어렵고 힘든 멍에와 같은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지키지 않는 자들은 악인이며 두마음을 가진 자이며 거짓 행위를 하는 자들이고 이런 자들을 여호와께서 멸시하신다는 증언한다.
15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에서 부터 와서 가르치기를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으로 인해 큰 말다툼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사도들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로 인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파송되었다.
과연 모세의 법에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가? 다시 말해, 할례를 받으면 구원받는가? 구원의 문제는 할례의 여부로 결정되지 않는다.(행15:1~3) 더욱이 그당시 할례파는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할례받은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분명 다윗은 구원을 바라며 계명을 지키는 자였기 때문에 할례파의 교리는 잘못되었다. 이런 계명을 버린 할례 교리 때문에 큰 문제였고 바로 잡아야 했다. (갈6:13)
16 모세의 율법이 조상과 우리도 매지 못하던 멍에인가?
어떤 믿는 바리새인들이 이방인은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서로 많은 토론을 거친후 베드로가 일어나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니 차별이 없는데 우리도 능히 감당하지 못하던 모세의 율법을 왜 지키라고 하느냐고 책망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율법이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멍에같은 것인가?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인가?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 은혜에 반대되는 것인가? 율법을 준행하지 않고 구원받는 게 은혜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의 율법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이라고 가르쳐지는 추가된 전통과 관습이라는 것이다. 전통은 너무 지나치게 많아서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게 만든 것이 그당시 종교인들이 한 일이었다. 그러니 할례파라고 하는 사람이 지킨 것도 사실은 여호와의 율법이 아니라 이들이 말하는 전통이었던 것이다. 기독교도 전통이 많다. 그러나 전통을 지킨다고 말하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거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그당시 율법이라고 지킨 것이 사실은 전통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매지못하는 멍에라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을 수 있다.(행15:4~11)
17 여호와의 율법은 쉽고 매우 가까워 행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모세를 통해 주신 모든 명령은 어려운 것도 먼것도 아니고 매우 가까워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 능히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상도 능히 맬수 없는 멍에는 여호와의 율법이 아니라 그들이 추가한 규례 즉, 전통을 말한 것이다. (신30:11~14)
18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켜 믿는 이방인이 주를 찾게 하신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모든 이방인이 주를 찾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 이방인에게 4가지만 멀리하면 된다고 한다.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하는 것만 주의하면 된다. 정말 이 4가지만 피하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는 것일까? 할례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고 4가지만 지키면 될까? 그렇다면 이방인과 다른 것이 무엇이며 샤밧에 회당에 갈 필요가 있는가 말이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고(할례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모세의 율법은 추가된 인간의 규례 즉, 전통이다) 우선 4가지를 피하라고 하는게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샤밧때마다 모세의 글을 읽어 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즉, 율법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전통을 반대한 것이고 강요하기 보다 믿음으로 점차적으로 순종하기 원해서이다. 그당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율법을 폐하고 전통을 지키는 것이 문화였는데 다시 진리와 정의와 공의의 다윗의 장막을 세우는 것은 이방인들을 진리의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이다(행15:15~21)
19 진리와 정의와 공의의 다윗의 장막이 다시 설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실 것이다. 즉, 진리와 정의와 공의로 예슈아께서 다스리실 것이고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진리와 정의와 공의를 세워갈 때 진정한 예배자의 삶을 살 수 있다. 진리는 여호와의 율법이고 계명이고 법도이다. 이제는 율법주의라는 반율법주의에서 벗어나서 전심으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다윗의 심령을 갖을 때 다시 오실 예슈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고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세우는 것이다. (사16:5, 암9:11,12)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레올람토라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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