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16. 묵상글 들 ( 연중 15주 목요일-휴식이 아니라 안식을. 등 )
----------------------------------------------------
20071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5주 목요일-휴식이 아니라 안식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께서는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신다는 안식은 어떤 안식입니까?
그리고 고생하고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지게질하는 사람의 물리적으로 무거운 짐입니까?
일이나 책임을 많이 맡은 사람의 심리적으로 무거운 집입니까?
그런데 안식과 관련하여 무거운 짐이 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주님께서는 짐에 대해 구분하여 말씀하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짐이건 짐을 내려놓게 해주시겠다고,
다시는 무거운 짐을 지지 않게 해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무거운 짐진 이들을 당신께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뜻은
우리에게 짐을 벗겨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짐을 지되 가볍게 지는 법을 가르쳐주고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주시겠다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안식입니다.
휴식과 안식은 일을 쉰다는 면에서는 같은 뜻이지만
휴식이 그저 일의 중지에 방점이 있다면
안식은 마음의 편안함에 방점이 있는 것이 다른 점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을 쉬고 있는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불편하거나
더 나아가서 불안하기까지 하다면 그것은 일을 쉬어도 안식은 없는 거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우리가 스스로 얻지 못하기에 당신이 주시겠다는 뜻이고,
우리가 안식을 얻지 못함은 짐 지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기에
짐 지는 법을 당신에게서 배워 편하게 짐을 지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의 짐 지는 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멍에를 매고 짐을 지는 것이고,
주님의 멍에란 온유한 마음과 겸손이기에
온유한 마음과 겸손이라는 주님의 멍에를 가지고 짐을 지면
짐도 가볍고 마음의 안식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사실 '내가 왜 이 짐을 져야 돼?'라는 마음이 마음의 안식을 빼앗고,
그런 마음으로 짐을 질 때 짐은 더 무겁기 마련이지요.
반대로 자기는 마땅히 짐을 져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 짐도 남이 아니라 내가 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고,
짐도 가볍거나 적어도 덜 무거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셨지만
우리는 종종 내 십자가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니라고 하거나
남이 져야 할 십자가로 생각하기에 너무 무겁게 내 십자가를 지곤 하는데
우리 십자가까지 당신 십자가로 생각하고 지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내 십자가만이라도 내가 지겠다는 마음을 먹는 오늘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
Comment '1'
김레오나르도. 4 시간 전 (2020. 7. 15. 07:50 .현재)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포르치운쿨라 행진이 공식적으로는 없겠습니다. 다만 저와 저희 수도회 청원자들이 함께 걷겠습니다. 그리고 일부 구간을 같이 걸을 분들이 있다면 아주 제한적으로 허용을 하겠습니다. 다만 포르치운쿨라 축일(8월 1-2일)을 같이 지낼만한 곳이 있다면 그때 축일은 같이 지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로는 그럴 만한 곳이 없기에 하느님의 안배를 기다려야겠습니다. 비록 같이 하는 행진을 올해는 할 수 없지만 마음과 기도로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혹 참고하시라고 저의 행진 일정은 저희 관구 홈페이지 <자유 게시판>에 올려놓겠습니다.
----------------------------------------------------
200716. 이영근 신부님. “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의 짐과 율법의 짐을 지고 잠자리에 누워서까지도 신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안식”에로의 초대는 이러한 인간의 비참을 보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다함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에게로 왔는데도 아직 우리에게 “안식”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안식”으로 초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자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이는 당신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제자가 된 우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진정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멍에’란 ‘또바리’나 ‘바지게’처럼, 머리에 얹어 짐을 받쳐주거나, 등에 메어 짐을 질 수 있게 하여 짐을 편하고 가볍게 해 주는 것을 말하며, 또한 소나 말 등의 동물에게 쟁기를 채우거나, 써레나 수레를 끌게 하려고 목과 등에 감아 거는 기구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위에 걸쳐지지만, 짐을 편하게 지거나 끌게 합니다. 그것은 짐 아래에 눌리지만 짐을 가볍게 합니다. 이토록, ‘멍에’는 짐을 함께 지거나 함께 끌며 동행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위에 놓이지만 온유하고, 짐 아래에 놓여 겸손합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가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일입니다.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서 배워라”는 말씀은 단지 ‘당신을 모방하라’ 혹은 ‘당신의 경험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진리를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바로 “길”이십니다.
그리고 “길”이신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을 제자들 안에 건네주십니다. 이 마음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겪어서 타인의 아픔을 아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안식”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
)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이는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 안에 있었고, 그분이 주리라 약속한 것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쉼”, 이를 두고 성 그레고리오는 관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상하는 일, 주님을 맛 들이며 주님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삶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품으십시오.”(필립 2,5)라고 했던, 바로 그 “마음”을 선물로 건네주십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라고 고백했던 바로 그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 마음”에서 사랑을 퍼 올리는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예수 마음”이 이미 안식입니다. 그 마음의 사랑이 이미 안식입니다. 그 사랑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
200716. 연중 1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멍에는 편하다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옳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셨고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감당하면 멍에와 짐은 편하고 가볍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요한5,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한계, 죄스럽고 못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오너라..정령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나에게 오너라!’하시는 주님께 다가가서 모두를 맡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은 사랑에 목말라 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시면서 우리의 목마름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의미에서 목마름이 아니라 충만한 생명, 악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풀려나는 생명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또한 육화를 통해서 하느님은 한 인간, 나자렛의 예수 안에 당신의 목마름을 태우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을 목말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사랑에 목말라 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목마름은 예수님 안에서 타오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서 인간적 목마름과 신적 목마름이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이 갈망은 이 목마름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수난 전날 성자께서 성부께 드린 기도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모든 이들의 일치를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악마는 분열의 아비이고 항상 갈라놓고 항상 싸움을 일으키며 많은 악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목마름이 또한 우리의 목마름이 되기를 바랍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2015년 1월 25일).
----------------------------------------------------
200716.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키려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악의 세력에 짓눌리며 살고 있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를 못해 절망해 버린 사람들, 또한 자신의 약함과 죄의 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세상을 건설하는 법,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이것은 겸손하게 시작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높이 올라가려 한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높은 건물을 지으려 한다면 터부터 닦아야 한다. 이것이 겸손이다. 건물이 높아지면 높이 질수록 그 기초는 그만큼 깊어야 한다. 기초가 튼튼한 만큼 건물도 튼튼하게 지을 수 있다. 건물은 높이 올라간다. 그러나 그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은 먼저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29절) 주님 안에서만이 이러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면 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이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열성적인 이들에게 주님의 계명은 가볍다. 그 멍에는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파생되는 어려움을 이야기 한다. 이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멍에는 이미 멍에가 아니라,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이 된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불쏘시개인 부정이라는 멍에를 벗어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들게 보이는 것은, 세상의 욕망에 물든 마음은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없다.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이다. 그 무게는 우리가지지 못할 만큼 무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짐은 우리의 힘을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사람들을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그것을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는 힘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즉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천국의 멍에를 지도록 해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그러한 삶을 노력하자.
----------------------------------------------------
200716.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의 묵상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존재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편하고 가볍게 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큼 위안과 위로가 됩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비슷한 내용의 반복입니다. ‘멍에’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유다교와 신약 성경에서 멍에는 율법을 나타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당시 율법을 따르며 살았던, 율법을 힘겹게 지켜나가던 사람들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내 멍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안식을,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율법은 점점 사람들을 힘겹게 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부정한 일을 피하도록,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세세하게 모든 것을 규정하고 그 부정적인 것들에서 멀어지기를 요구합니다. 율법은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것을 더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실천하고 행동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르침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으로, 피하고 멀어지는 것에서 다가서고 실행하는 것으로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기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그 가르침은 우리에게 안식을, 영원한 생명을 선사할 것입니다.
- 허규 베네딕토 신부 -
----------------------------------------------------
200716. 새벽을 열며.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빠다킹신부님.
어떤 학생이 수능이 끝난 후에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자신의 자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상담사가 왜 자살을 시도했느냐 물으니,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인생을 살아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서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이 수능 잘 보는 것으로 단정을 짓는 것이었지요. 수능을 망쳤으니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고 그래서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괴로운 상태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수능을 잘 보지 못했어도 우리 각자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역할은 단지 수능을 잘 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수능이라는 것은 소중한 ‘나’를 만들기 위한 수많은 과정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얼마 전에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문구류가 있었습니다. 좋은 문구류인데 서랍을 열어서 사용하지 않다 보니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서랍 구석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도 이렇게 서랍 속에 갇혀 있던 문구류와 마찬가지는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믿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도 잘 알고 계십니다.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쉽게 포기하고 좌절한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금 힘이 될 수 있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정말로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향해서 내게 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개선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향해 내가 도와주겠다고 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초대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충분히 배울 수 있으며, 충분히 고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충분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랍 속에 두고서 사용하지 않은 좋은 문구류처럼, 단지 아직 그 힘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게 아니다. 보다 자기다워지는 것이다(린 홀).
--------------
자존감 높은 사람의 특징
1)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2)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미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원치 않는다면 고쳐 나간다.
3)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어도 여유가 있다. 불안한 사람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큰 분노를 느낀다.
4)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는다. 관계를 맺고 싶다면 맺고, 맺기 싫다면 맺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바라볼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행동한다.
어떻습니까? 나는 과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특징들입니다.
자존감이 밥 먹여주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존감이 나를 살게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해보면 밥 먹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
200716. 연중 제15주간 목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차장 마당에 풀이 많이 자랐습니다. 풀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서 전지가위를 들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무릎이 아팠습니다. 모기는 기세 좋게 날아왔습니다.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겨서 인가 봅니다. 2달 전에 청소를 해 주시는 형제님이 마당의 풀을 뽑았습니다. 형제님은 커피를 마시면서 쉽게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꽃의 이름을 몰라도 향기는 있습니다. 새의 이름을 몰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듣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름에 집착하여 꽃의 향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새의 노래를 제대도 듣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산보를 하면서 이름을 모르지만 열심히 일하는 분들을 봅니다. 도시가스를 교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가정에서 편하게 요리할 수 있습니다. 잔디를 깎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마당을 볼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깨끗한 마을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직업이나 직책이라는 옷을 벗으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피부색이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직업이라는 편견도 버려야 합니다. 종교라는 ‘틀’에 갇혀서도 안 됩니다. 꽃밭의 꽃은 저마다 향기를 내듯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향기를 내는 겁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눈, 귀, 코는 정보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눈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고, 귀로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코로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입, 손, 발입니다. 우리가 입, 손, 발을 잘 다스리면 권력을 가지지 못했어도, 큰 재물이 없어도, 명예를 지니지 못했어도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고, 존경을 받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의 곁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셨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진 많은 사람들은 그릇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길, 재물의 길, 명예의 길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사랑의 길, 희생의 길, 나눔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안내 해 줄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군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고 싶다는 뜻으로 ‘사명’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가톨릭 신앙인이다.’ 이 말에는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200716.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삶은 짐이 아닌 선물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
요즘 수도원 배밭 곳곳에서 끊임없이 하늘 향해 타고 오르며 폈다 지는 야생화 메꽃들입니다. 그대로 수도자들의 하느님 찾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상징합니다. 아주 예전에 애송했던 자작시 메꽃이 생각납니다.
-“이가지 저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 피어내며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들!”-1997.8.21
삶은 짐인가 선물인가?
화두같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소재로 하여 참 많이 강론을 했습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그러나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선물같은데 잘 들여다 보면 짐인게 또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부분 많은 이들이 삶의 짐으로 힘겨워합니다. 하여 인생고해人生苦海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론하여 믿는 이들에게 삶은 짐이 아닌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단 주님의 초대에, 환대에 응답하여 주님과 함께 살 때입니다. 바로 이때 삶의 짐은 선물로 변합니다. 바로 이에 앞서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초대에 응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신앙고백의 시가 참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찾는 갈망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절실하여 많은 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글이든 말이든 삶이든 기도든 참으로 절실하면 진실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여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참 아름답고 깊은 신앙고백의 시이자 기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들 누구나가 공감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영혼의 갈망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야 살아나는 영혼입니다. 영혼의 무한한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영혼의 한없는 갈망은, 허기虛氣는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 영혼은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런 갈망의 목마른 사람들을 당신의 배움터에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할 때 무거운 고해인생苦海人生은 축제인생祝祭人生으로 바뀌며 안식의 선물입니다. 짐은 변하여 선물이 됩니다. 그러나 저절로의 안식이 아니라 주님의 배움터에서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이래서 하느님께 대한 갈망에 이어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글입니다. 주님의 배움터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평생 예수 성심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웁니다. 순리에 따를 때 경지에 도달합니다. 바로 평생 온유와 겸손의 순리에 따라 살 때 경지에 이릅니다.
점차 우리의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바뀌고,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바뀝니다. 온유와 겸손의 수행으로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 때의 은총입니다. 하여 우리의 짐은 점차 주님의 선물로 변합니다. 아,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두입니다.
말 그대로 예닮여정의 축복 은총입니다. 그러니 예언자 이사야처럼, 시편의 사람들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배움터에서 온유와 겸손을 배울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평생 주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이 이래야 합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삶의 영적 전쟁터에서 평생 싸워야 하는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의 배움터에서 평생 온유와 겸손을,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배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죽어야 제대이고 죽어야 졸업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새롭게 배움의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멀리 밖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가 삶의 영적 전쟁터이자 주님께 배우는 삶의 배움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온유와 겸손을 닮게 하시고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시며 당신 찾는 배움의 여정에 항구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
200716.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안식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예수님은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스럽게 이 지상의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걸 아십니다. 당신 친히 세상에 오셔서 몸소 보고 겪으신 까닭에 그야말로 생생하게 아시는 겁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예수님께서 그 해결책으로, 세상 짐을 내려놓고 당신 멍에를 메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렇다고 먹고 사는 일, 개인 차원에서 관계적 의무를 다하는 일, 사회적 차원에서 세상에 기여하는 일을 다 내팽개치고 나몰라라 하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인간으로서 기본 도리와 권리는 챙기되, 영혼을 좀먹고 마음마저 끌어내리는 세상 짐에 매몰되어 허덕이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세상의 짐보다 주님의 짐이 더 가볍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믿어야지요. 하지만 과연 진짜 그런지 헷갈리는 이도 있을 겁니다. 말씀하시는 분만 보고 그저 철썩같이 믿거나, 용기를 내어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수긍할 수 있는 진리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신앙 고백의 시가 흐릅니다. 예언서의 추상같은 심판에 익숙했던 우리의 귀와 마음을 부드럽고 평화롭게 어루만져 주는 듯하지요.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이사 26,9).
한 영혼의 감미로운 사랑 고백입니다. 이 속삭임은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뿐 아니라 주님의 마음도 부드럽게 어루만져드릴 것 같지요. 당신 피조물에게 모든 걸 다 쏟으시고도 번번이 외면받고 배신 당하는 주님께서 당신 신부인 인간들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명을 부여받아 이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바람과 소원이 이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 가지려, 이기려, 딛고 올라서려, 무너뜨리고 차별하고 내치려 온갖 근심 걱정 불안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가 주님의 평화를 얻고 안식을 누리는 길이란 실상 이것밖에 없습니다.
늘 주님을 기억하고 사랑으로 그분 이름을 부르는 것, 밤낮없이 주님을 열망하는 것, 존재 안팎으로 주님을 간절히 바라는 것, 그분을 목말라하는 것, 그분 음성과 어루만짐을 그리워하는 것, 그분 향한 사랑으로 사위어 가는 것, 주님 향한 사랑 때문에 고독도 위안도 가림 없이 받는 것,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메워주시는 멍에요 주님의 짐입니다. 이 멍에와 짐은 세상 짐과는 달리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을 소유한 이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라 하지요... 주님만 바라면 나머지는 그분이 해 주신다고 하지요... 편하고 가벼운 주님의 짐을 짊어지면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 모든 축복은 오직 그렇게 믿는 이의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몸을 던진 이들이 누리는 행복이지요.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이사 26,12).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이 실상 우리를 위해 하신 주님의 업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 혼자 힘인 줄 알고, 무겁고 고생스런 세상 짐을 거머쥐고 죽을 힘 다해 주위를 다 밀쳐내면서 도끼눈에 싸움닭처럼 살아왔다면 참 허무한 노릇이지요. 가볍고 편한 주님 멍에와 짐을 지고 왔어도 여기였을 것을 말입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제 예언자의 겸허한 기도에 우리의 마음도 함께 얹어 주님께 올려드립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이니 우리는 그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따르면 그만입니다. 세상 근심에 주님께 향해야 할 영혼을 빼앗기지 않기를, 세상 욕망에 주님만 바라봐야 할 시선을 빼앗기지 않기를, 세상 평가에 주님께 내맡겨야 할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
20071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 곧 유다교의 율법 규정에 얽매여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들이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자유롭게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만약 지금 나에게 큰 고통과 시련이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곧장 하느님께로 달려갈까?
그렇게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게 해야 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 이 고통 앞에서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멀리하거나 거부하면서 하느님이 아닌 또 다른 것으로부터 답을 찾으려고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렇게 하면 할수록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럼 그때서야 비로소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달리신 십자가 앞에 와 무릎꿇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무릎을 칩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구나!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체험을 통해 비로소 고통의 늪으로부터 벗어나 부활하게 됩니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쉼의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입니다.
곧 구원입니다.
오늘도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지쳐있는 나, 고통 속에 있는 나를 우선적으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감사드리며, 주님께로 나아가 부활하도록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200716.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이사야 26,7-9.12.16-19
마태오 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분과 나 둘만이 남아있는 감미로운 순간
안식(安息)이란 무엇입니까?
말마디 그대로 ‘편히 쉼’을 의미합니다.
편안한 안락의자에 거의 몸을 파묻다시피 깊숙이 앉아 좋아하는 비디오 한편 보는 것도
좋은 안식이 될 것입니다.
시원한 계곡 흐르는 물 위에 차양을 친 다음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어도 엄청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쉬는 것도 한 두 시간이지 계속 그러고 있다 보면 슬슬 무료해집니다.
지루하고 심심해집니다.
더 의미 있는 휴식이 되려면 그 ‘누군가’ 필요합니다.
결국 가장 좋은 휴식, 그간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안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그 자체가 가장 효과적인 휴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경치나, 분위기, 주변 상황은 더 이상 그리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요,
다른 것 안 해도 괜찮습니다.
그의 옆에 있는 그 자체로, 그의 존재 자체로 가장 감미로운 휴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안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 결코 변치 않는 영원한 연인,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변하고, 다 떠나가는 반면 우리가 백발이 되더라도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시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사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 앉아있는 순간,
미사에 몰입하는 순간,
하느님을 찬미하는 순간,
영적독서에 깊이 심취하는 순간,
깊은 묵상에 잠기는 순간,
이 세상 모든 대상이 내 앞에서 사라지고 그분과 나 둘만이 남아있는 감미로운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참된 안식의 순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0716.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이사야 26,7-9.12.16-19
마태오 11,28-30
‘나’라는 멍청한 자기운영 체계에서 벗어나는 법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운영체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기러기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먼 곳을 여행하고 꿀벌은 꿀을 찾으며 개미는 여왕을 위해 일합니다.
각자의 운영체계에서 벗어나면 모든 생물은 생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도 처음에는 이 생존체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생존체계가 강하게 나를 지배할수록 인간관계가 힘들어집니다.
인간관계가 힘들어지면 행복이 깨집니다.
모든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우선은 인간의 이전 자기운영 체계를 벗어던져야 함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식 폴더폰만을 고집한다면 스마트폰의 체계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유식만 먹으려 한다면 맛있는 음식은 맛볼 수 없습니다.
이전 체계의 불편함을 알아야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아니면 동메달을 딴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미국 코넬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은 1992년 하계 올림픽 중계권을 가졌던 NBC의 중계자료를
분석했습니다.
메달리스트들이 게임 종료 직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감정을 분석하는 연구였습니다.
분석이 가능했던 23명의 은메달리스트와 18명의 동메달리스트 표정을 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의 얼굴이 비통에 가까운지, 환희에 가까운지
10점 만점으로 평점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시상식에서 선수들이 겪는 감정을 분석했습니다.
분석결과 동메달리스트의 행복점수는 10점 만점의 7.1로 나타났습니다.
은메달리스트의 행복점수는 4.8이었습니다.
연구팀은 한발 더 나아가 은메달리스트와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 내용도 분석하였습니다.
분석결과를 보면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에서는 만족감이 더 많이 표출되었고, 은메달리스트의 인터뷰에서는 ‘아쉽다’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왜 은메달리스트가 동메달리스트보다 덜 만족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바로 나를 지배하는 시스템 때문입니다.
이 자아라는 시스템은 ‘비교’를 좋아합니다.
남과 비교하게 만들어야 인간을 더 자신의 노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메달리스트는 금메달리스트와 자신을 비교하고, 동메달리스트는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시스템에 지배받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인 것처럼 당연히 지배당하며 살아갑니다.
‘나’ 중심적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온전한 인간관계를 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잘 되려면 상대를 이해해주고 배려해주어야 하는데 ‘나’라는 시스템은 자기 우선으로 생각하게 만들기에 이기적 인간이 되게 합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에서는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대학생 두 명을 한 조로 짝지어서 한 명에게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서 어떤 노래를 연주하게 하고 다른 학생은 그 연주가 끝나면
그 노래 제목을 맞추게 한 것입니다.
노래를 손가락만을 두드려서 연주한 학생에게 연주가 끝난 후 상대가 자신이 연주한 노래의 제목을 알아맞힐 확률을 적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평균 50% 이상은 알아맞힐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들은 사람이 제목을 알아맞힌 결과는 2.5%였습니다.
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조: ‘프레임’, 최인철,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나를 지배하는 자기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생존만을 위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나를 모기로 만듭니다.
나를 살게 하도록 이웃의 피를 빠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스템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선 이전의 시스템이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아를 나로 믿어버렸기 때문에 그 시스템에 지배를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다른 시스템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소가 주인이 없다면 잡아먹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 사시고 곧 나의 나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는 시스템을 장착하게 됩니다.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갖기 위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나 자신이라고 믿었듯이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드립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
어떤 나라들의 장기기증 비율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평균 60%나 높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나라의 시스템은 장기기증을 하는 시스템이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지 않겠다고 신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나라들은 하지 않는 시스템이고 하고 싶다면 신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기기증 신청을 받는 나라들은 20%가 장기기증을 한다면, 하기 싫은 사람이 신청하는 나라는 80%가 되는 것입니다.
각 나라에 사는 사람은 그 나라의 시스템 때문에 특별한 노력도 없이 이웃에게 자신의 장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내가 어느 나라 시민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라고 믿는 사람과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멍에로 메었다고 믿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가 납니다.
그분은 이제부터 뱀인 자아가 나가 아니고 당신이 나임을 믿게 하시기 위해 살과 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나’라는 멍청한 자아의 운영체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나는 나다’라며 오시는 그분이 진정한 나요, 나의 운영체계임을 믿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미 바뀌었습니다.
믿고 사용하기만 하면 안식을 얻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20년 7월 16일 목요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매일미사 - 우창원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https://www.youtube.com/embed/YQsigl-Ix_I
바로가기 주소 입니다...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B%A7%A4%EC%9D%BC%EB%AF%B8%EC%82%AC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게시일 : 2020. 7. 16.
.
2020년 7월 16일 목요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매일미사
Thursday of the Fifteenth Week in Ordinary Time
.
우창원 아우구스티노 신부 ( (재)바보의 나눔 사무국장) 집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