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삼척까지 해안길로 봄을 달리다 / 오태진
통도사 영각(影閣) 앞 홍매(紅梅)는 졌다. 자장율사를 기려 심은 삼백쉰 살 자장매(慈藏梅)다.
이른 삼월 피어 매화 찾는 탐매(探梅)꾼을 부른다. 영각 처마 초록 단청을 뒤로 두면 진홍빛이 더욱 도드라져 사진가도 몰려든다. 이젠 마르고 바랜 꽃만 몇 남았다.
대신 영각 옆 늙은 산수유가 연노랑 꽃가지를 처마에 드리웠다.
초록 단청과 친한 빛깔이어서 화사하면서도 눈이 편하다. 극락보전 뒤 홍매는 아직 붉다.
곳곳에 백매가 순백 꽃을 터뜨렸다.
이 봄 큰 가람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손톱만 한 제비꽃이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 가는 잿빛 섬돌 틈에 딱 한 송이 진보라 꽃이 솟았다.
그 빛이 하도 선연(鮮姸)해 수줍기는커녕 거만하기까지 하다. 나 여기 있다며 바지 자락을 붙든다.
어쩌다 여기까지 와 피었을까. 절하듯 수그려 렌즈를 댔다. 입술처럼 튀어나온 아래 꽃잎 흰 무늬를 들여다
본다. 그래, 봄이구나.
뭍의 봄은 섬진강 하구로 밀려든다. 늦은 삼월 광양 매화, 구례 산수유가 폭죽 터지듯 한다. 올해는 딴 데서 봄을 맞고 싶었다. 지난 주말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바람 드셀 거라고 했다. 남쪽 동해가 생각났다. 양산 통도사 거쳐 울산 주전해변에서부터 동해안 드라이브에 나섰다.
해운대 달맞이고개에서 올라온 해안도로가 울산 공업단지에서 끊겼다 다시 시작하는 곳이 주전이다. 동해 길은 거기서부터 바다에 바짝 붙어 달린다. 바람에 파도가 높다. 한적한 포구 길을 넘쳐 적신다. 갯바위 끝에 비닐 옷 입은 사람이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았다. 갈고리 매단 장대를 바다 겨눠 들었다. 챙 긴 모자 쓰고 흰 고무신을 신었다. 일흔쯤 된 할머니다.
파도가 갯바위를 후려칠 때마다 몇 길 물보라가 솟구친다.
할머니는 찬 바닷물을 번번이 뒤집어쓰면서도 고개만 돌릴 뿐 물러설 생각을 않는다.
바다를 노려보다 이따금 장대 디밀어 뭔가 건져 올린다. 파도에 밀려온 한 줌 미역이다. 갯가 삶이 모질다.
자식이 봤으면 마음이 어땠을까. 길가에 '자연산 미역 판다'는 팻말이 서 있다.
울산 맨 북쪽 정자항엔 대게집들이 요란하게 늘어섰다. 어판장엔 참가자미가 제철이다.
등 전체에 작은 돌 같은 게 점점이 박힌 줄가자미도 구경한다. 눈요기만 하고 항구 안쪽으로 갔다.
어둑해지는데도 난전을 걷지 않은 채 할머니들이 말린 참가자미를 판다.
좌판 곁에 하얗게 배 뒤집은 가자미들이 말라 간다. 사진 몇 장 찍었더니 할머니 입이 나왔다.
"사진 찍으믄 돈이 나오노, 밥이 나오노."
꾸덕꾸덕 실한 가자미 여섯 마리를 1만원에 샀다. 싸다.
밤엔 영덕 강구항 남쪽 바닷가 호텔에 들었다. 오래전 묵었다가 소박한 무궁화 둘 3급 호텔에 반했다.
5층 건물 발치에 바다가 찰랑댔다. 로비에서 몇 발짝만 나서면 너비 50m쯤 되는 전용 백사장이다.
방에서도 바다가 뒷마당처럼 바라보인다.
객실은 나무 창틀이며 집기가 낡았어도 그 고집스러움이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이불 깃에 호텔 이름이 자수 글씨로 박혀 있었다. 가볍게 풀 먹여 다린 새하얀 광목 홑청이 기분 좋게 사그락거렸다. 몇 년 전 주인이 바뀌었는지 뜯어고친 뒤론 밋밋한 모텔방이 돼버렸다.
그래도 워낙 자리가 좋아 가끔 묵어간다.
이튿날 새벽에 눈이 떠졌다. 커튼 젖혔더니 하늘이 벌겋다. 오메가 일출은 아니어도 수평선에서 깨끗하게 해가 떠올랐다. 번번이 구름 끼거나 정면 일출이 아니었다가 처음 제대로 맞는 해오름이다.
봄이 선물 주려고 새벽잠 깨운 모양이다.
강구항에서 축산항까지 강축해안도로는 여전히 으뜸으로 아름다운 바닷가 길이다.
해맞이공원 아래 바다도 변함없이 속 시원하게 푸르다.
북으로 몇 굽이 언덕길 지나 고갯마루 '어촌 체험마을' 표지판에서 바닷가로 내려간다.
가파른 산비탈에 일흔 가구가 사는 석리마을이다. 자그마한 포구 언덕길에서 보는 바다가 한 폭 유화다. 방파제 안 물빛은 남태평양 부럽지 않다.
멀리 흰고래 떼처럼 파도가 밀려드는 갯바위에 원색 옷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간다.
영덕 해안길 '블루로드'를 걷는 행렬이다. 남쪽 가파른 계단을 헐떡이며 올라온 이들이 탁 트인 석리 바다를 보며 일제히 탄성을 지른다. 봄 바다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다.
당장 따라 걷고 싶지만 이럴 땐 몰고 온 차가 족쇄다.
강축도로 지나도 동해는 숨 가쁘게 아름답다. 영덕 고래불해수욕장 못 미쳐 대진해변은 해안 드라이브의 절정이다. 옥빛 코발트빛 에메랄드빛 청록빛 잉크빛….
바다가 갖은 빛깔로 일렁인다. 바람 불어 좋은 동해다. 울진 들어서면 후포항에서 평해읍 직산리까지 가는 '울진대게해안도로'를 빠뜨릴 수 없다.
원남면 덕신삼거리에서 망양정해변까지 '쪽빛바다해안도로'에선 가속 페달 밟는 발이 느슨해진다.
삼척 '새천년해안도로'는 도시 속 기암절벽 위를 구불구불 가며 시퍼런 바다를 본다.
그 길 끝에 작은후진해변이 있다.
두어 가족 놀면 딱 맞게 작은 모래 해변이 전혀 후지지 않다.
묵호·어달·망상·헌화로· 정동진·등명까지 해안길이 이어지지만 이쯤에서 접는다.
동해고속도로 옥계휴게소 남쪽 끝에서 웅장한 망상해변을 내려다본다.
바람이 차도 아리지 않고, 파도가 커도 거칠지 않다. 어느새 봄이 동해에 가득했다.
꽃길만 봄맞이 길이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