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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기뻐하는 택한 종(마 12:17-21)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두 가지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만 하셨습니다. (요 8:28-29)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목표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도 이 두 가지 목표를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어떤 사업을 하든지 이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땅에 남겨진 예수요, 보이는 예수의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12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병을 다 고쳐 주신 후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첫째로 예수님의 겸손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예수님이 유명해지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명해지면 불순한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므로 사역을 마치기 전까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셨으므로 나타내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7절과 21절을 연결해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를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숨기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여년전에 예언을 통해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이사야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8-21절,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내용은 구약 이사야서 42:1-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예수님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특징은 세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종이어야 합니다(17).
여기서 '종'은 하인이나 노예의 개념처럼 참으로 섬기는 자의 표본입니다. 그분은 본체가 하나님 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셨지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자기 비하입니다. 빌2:6-7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는 창조자이시지만 피조물의 몸을 입고 왔다는 것도 엄청난 사건인데 가장 낮은 곳에 가장 낮은 몸으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왕이시지만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는 진정으로 이 땅을 섬기러 오셨습니다. 세계와 역사를 창조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신 바로 그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셔서 섬김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의 자세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좀 더 이야기 한다면 참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바로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택한 종입니다. 종은 세 가지가 없습니다. 1)소유권이 없습니다. 다 주인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됨을 알았습니다. 뿐 만 아니라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소유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관리자입니다. 따지고 보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하나님앞에 가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결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지만 그 후에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2)선택권이 없습니다. 선택권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내 맘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를 주목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나 어떤 선택권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도 내 뜻대로 마옵 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종으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의 모델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3)영광권이 없습니다. 종은 자기영광을 받으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요즘 우리가 이사야서를 살펴보면 깨달을수 있는 하나의 진리는 교만하면 패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가 주인인양 자기 영광을 드러내면 인간은 타락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심판의 몸둥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내가 택한 종"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바로 택한 하나님의 종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택하여 불렀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살라고 택하셨습니다. 주님이 남겨 놓으신 일을 행하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종으로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이라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종은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인 마음대로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종은 주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행동해야 합니다. 종이 구약시대 때에 좋은 주인을 만나면 평생 헤어지기 싫습니다. 그러면 재판장에게 찾아가서 서약을 하고 그 증표로 기둥에다 귀를 대고 뚫었습니다. 그리고 나면 그는 영원한 종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의 삶은 염려가 필요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주인은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종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택함을 받아야 하고 2)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이 두 가지 관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여자 중에서 한 여자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한 여자를 택하는 것은 모든 여자에 대해서 자유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도 택하고 저 여자도 택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도 택하고 저 하나님도 택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선택이 없는 것은 사랑도 아니며 선택이 없는 것은 축복도 아닙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축복받은 자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1:4-5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해 주셨습니다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 조건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한 종이었습니다.
메시아는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종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3:17에서 이미 증거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에게 임하시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다." 이 말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써야 하는 말입니다. 비록 그 아들이 살인을 하였어도 부모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 아들을 다 저주하고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부모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가장 기뻐하는 자"라고 예수님을 표현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에는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면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소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종입니다. 그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포기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놀라운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줍니다.
2. 메시야는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18).
18절,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이사야 32:15에는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내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메시아는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가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위에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령님과 하나이셨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셨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충만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과 자격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앉은뱅이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자연을 통제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메시아의 직능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막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주로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끊임없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할 때로 자신의 힘만으로 땀을 흘리면 안됩니다.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을 인정하고 성령의 감동하심과 감화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바로 주님의 성령님을 만족케 해드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메시아에게 성령을 무한하게 주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2에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단순히 방언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혜를 얻습니다. 총명을 얻습니다, 능력을 얻게 됩니다. 믿음을 갖게 됩니다. 놀라운 역사를 행하게 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단순히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부어져야만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건물이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움직여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한 것이 그냥 변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변한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귀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들어왔기 때문에 귀가 열린 것입니다. 이성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그 힘이 바로 이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성령 자체이십니다. 그분은 메시아이십니다.
3. 메시아는 하나님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선포하는 자입니다(18-21).
18절에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심판'을 알게 하겠다는 말은 성령의 사역과 동일합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이하에 보면 성령의 사역을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6:11절에 보면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임금은 사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 심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사탄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한다는 말은 복음을 이방인에게 알게 한다는 뜻입니다. 구약 이사야 42장에는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고 했습니다. 이 구약의 정의라는 개념은 성경적으로 신약의 복음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온 것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심판, 참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유대인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메시아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1:8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한 말씀과 마태복음 12:18에 "내가 내 영을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 메시아의 직능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방인에게 구원을 베푸는 일입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그의 능력을 표현하는 작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내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은 것이 기적이요. 내 친구가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이 큰 기적입니다. 메시아의 사역은 땅끝까지 하나님의 참된 정의를 실현시키며 심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지않는 이웃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정말 이웃을 우리가 사랑한다면 반드시 저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고 저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메시아의 태도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1절에서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종,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랑하는 종, 성령충만하신 분, 이방인에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시는 메시아의 태도는 다투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아는 절대로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대담하게 투쟁과 폭력과 파괴를 찬양합니다. 그 이론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민족을 살리고 통일을 이루는 이론이라 해도 투쟁의 방법은 잘못된 것입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합니다.
투쟁으로 얻어진 것은 결코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비폭력으로 이룬 것만이 남습니다 투쟁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승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의 직능을 성취함에 있어서 투쟁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2-24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항거하셨거나 데모하셨다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투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3:3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또 53:7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말없이 끌려 갑니까?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핍박도 있습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합니다. 오직 할 말이 있다면 "주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라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들에게 구원도 없습니다. 그러면 악이 무성할 것 아닌가? 방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가는 곳마다 역사는 변하였습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폭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세상은 변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의 비밀인 것입니다.
2)메시아의 태도는 "들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소리지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메시아의 태도는 겸손과 온유와 자기 부정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소리지르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에도, 사형 선고를 받을 때에도 예수님은 조용히 침묵하고 그 불의한 재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선전, 자기 과장, 자기 주장을 외쳐 댑니다.
재판 과정에서 사람들은 소리를 지릅니다. 난동을 부립니다. 법이 잘못되었다고 하며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악을 씁니다. 예수님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조용히 당하고 십자가를 짐으로써 의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19절에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과격한 투쟁의 소리가 많이 들립니다.
예수님의 소리는 듣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메시아는 자기 주장을 하거나 투쟁을 하거나 인기작전을 쓰거나 선전과 과장의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텔레비전을 보십시오. 상품을 팔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선전을 합니까? 메시아의 방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자기를 선전하고 자기 과시의 방법을 쓰고 있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가 메시아적 방법을 쓰지 아니하고 세속적인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 교회의 비극입니다.
3)메시아의 참된 방법은 긍휼 자비입니다.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상한 갈대'란 무엇입니까?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의 본질은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라 상한 갈대입니다. 고대에는 양 떼들을 이끌기 위해서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 불었습니다.
갈대로 만든 피리를 불면 양 테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갈대가 꺾어지면 피리를 못 만듭니다. 상한 갈대란 피리를 만들 수 없는 갈대, 소용이 없는 갈대를 의미합니다. 아무 곳에도 쓸 수 없는 갈대, 마음에 상처를 입고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난 영혼. 그래서 더 이상 꿈과 행복과 이상을 노래할 수 없는 병든 영혼. 시체처럼 죽어 버린 영혼, 이제는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그 인생,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그런 상태를 상한 갈대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는 무엇을 말합니까? 기름이 있을 때는 심지가 활활 탑니다. 그래서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런데 기름이 떨어지면 심지가 불에 타면서 그을음이 납니다. 그래서 심지가 점점 더 꺼져 가고 나중에는 더 이상 탈 것이 없습니다. 심지가 까맣게 다 타 버리게 될 때, 이제는 기름을 부어도 불이 붙지 않게 됩니다. 새 심지로 바꾸어야 불이 붙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재생할 수 없는 심지,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한 때는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불을 비추어 주던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이제는 마지막 심지까지 다 타 버려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는 인간, 이것이 바로 꺼져 가는 심지입니다. 과거에는 화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병 들고 늙어 죽게 되었을 때 내 인생의 새까만 심지 속에서 불길이 깜빡깜빡하는, 그래서 이제는 훅 하고 불면 꺼져 버리는 인생, 이것이 바로 꺼져 버린 심지와 같은 것입니다.
이미 꺼져 버린 인생, 다시 재생할 수 없는 타 버린 심지와 같은 인생을 예수님은 건져 내시고, 씻어서 새롭게 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탄과 세상에 억눌려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의 불쌍한 처지를 아시고 눈물을 흘리시고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이해하셨습니다. 이 메시아는 죄인을 찾아가 구원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창녀나 문둥병자나 귀신 들렸거나 세상에서 손가락질받는 세리이거나 문제삼지 않고 그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능성 없는 우리를 가능성 있게 만드시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20절에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승리할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역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의 모습, 메시아의 방법론을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내가 택한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리리라. 우리 주님은 메시야로서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그 메시야로 인해 구원받고 그 메시야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분처럼 말하고 그 분처럼 행동하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