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앞에 고요히 머물며,
그분을 고대하여라" (시편 37, 7)
산 속 깊이 외떨어진 곳. 봉쇄구역인 수도원의 높은 담장 안에서 수녀님들의 자유로운 목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한가한 토요일 오후엔 수도원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물장난을 치시는지 유쾌한 웃음소리가 계곡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다.
이 곳에 머물면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에 산열매들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석양이 지면 깊은 산이 잠자는 소리가 들린다. 멈추어 하늘을 보면 하느님 이야기가 들린다. 세상 한가운데서도 들리지 않던 아픈 사람들의 쓰라린 이야기가 들린다. 성당에 들어서면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수도자들의 찬미 기도가 울려 퍼진다.
(수도원 성당-봉쇄수도원인 관계로 사진은 필터 처리했습니다. )
성무일도와 미사, 묵주기도를 수녀님들과 함께 바친다. 봉쇄구역을 알리는 커튼이 열려지고 서로 마주보며 기도한다.
기도가 끝나면 다시 커튼으로 세속과 구분 짓는다. 수녀님들은 밤 12시에도 공동기도를 바친다.
개인피정 위주라 식당은 작고 간소하다. 침묵은 자유이지만 어차피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시편 65, 5)
고요 속에서 3일이 흐른다. 나의 기도가 많이 단순해졌음을 느낀다. 고마운 일이다. 피정 마지막 날 주일 새벽, 수도원 아침기도 전에 피정집을 나서 배론성지를 산책하였다. 주위는 아직 어둡고 적막하지만 신앙의 기운이 충만히 흐름을 느낀다. 묵주기도의 길을 걸은 후 성지 뒷길 박달재를 오르는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민가 두 채가 보인다. 박해시대엔 이 길을 따라 외부 교우들과 연락했으리라. 끝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피정집으로 돌아오는 오솔길에 하얀 돌들이 눈에 들어온다. 묵시록의 말씀이 생각나 두 개를 집었다. 그냥 돌이지만 나에겐 성경말씀이 담긴 소중한 돌이 되었다. “하느님, 지상에서 내 삶이 끝날 때 새로운 이름이 새겨진 흰돌을 주소서” (묵시 2, 17)
아침기도와 미사를 마치고 수도원 앞집에 머물며 안식년 중이신 신부님과 식사를 했다. 수도원미사를 담당하신다. 미사의 정성과 영성이 듬뿍 담긴 강론이 너무 좋다. 안식년 동안 칩거하시며 홀로 생활하시는 사제답게 영혼이 참 맑으시다. 저녁때에 만났다면 영적상담을 하겠지만 주일 아침이라 적당치 않아 가벼운 대화만 하고 방에 돌아와 노트를 꺼내 일주일 동안의 여러가지 생각들을 정리하며 주님을 향한 신앙의 여정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다. 이제... 하느님의 위대한 침묵 속에서 아름다운 무능력자가 되고 싶은 작은 소망의 씨앗 한톨을 주어 집으로 간다.
배론 대성당
3일동안 날 지켜주었던 창
배론 성지 인근에 있는 탁사정
박달재도 넘고....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