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안과 밖 에세이 시리즈] 오래된 미래, 소통하는 리더십: 작금의 전치 파국에 대한 반사(反思) ☞ 이승환 고려대 철학과 교수
(장면1) 아내를 소 닭 보듯이 하며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남편이 있었다. 보다 못한 어린 딸이 “제발 엄마와 마주보고 대화 좀 나누시면 안 되나요?”라고 애원하자, 남편은 아내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대화,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당신은? 으허허허···” 대답의 앞부분은 아내와의 대화 같은 것은 필요도 없다는 평소의 마초(macho)적 소신을 드러낸 말이겠지만, 뒷부분의 웃음소리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무심코 내뱉은 몰상식한 발언으로 인한 멋쩍음을 너털웃음으로 얼버무린 것인지, 아니면 아내가 감히 대화라도 요구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경고성 신호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장면2) “대면 보고,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오호호호···” 2015년 1월 12일 신년 기자 회견장에서 장관들의 대면 보고를 늘릴 의향은 없는지 기자가 질문을 하자, 배석한 국무위원들을 돌아보며 대통령이 던진 말이다. 대답의 앞부분은 장관들의 대면 보고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여기는 평소의 소신을 밝힌 것이겠지만, 뒷부분의 웃음소리는 아리송한 여운을 남긴다. 무심코 내뱉은 상식 밖의 발언으로 인한 계면쩍음을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기 답변이 훌륭했다고 여기는 뿌듯함의 표현이었는지 선뜻 가늠이 서지 않는다.
소통 부재, 관계 파국의 궁극적 원인 위의 두 장면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면대면(face-to-face)의 소통 방식은 정치/비정치의 구분을 떠나서, 인간 사회에서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본자세라는 점이다. 하물며 가족과 같은 소규모의 친족 집단 안에서도 면대면의 의사소통이 사라지면 오해와 갈등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국가 권력의 최고 중추에 해당하는 공조직 내에서 소통이 단절된다면 국정 전반에 심각한 동맥경화가 초래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소통 부재로 인한 국정 운영의 난맥상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던 첫해부터 이미 전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2013년 10월, 진영 복지부 장관은 노령 연금 관련 현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면담 요청은 묵살당했고, 이에 그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장관직에서 물러나버렸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와 이처럼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도저히 장관직을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부 출범 이듬해인 2014년 6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약 1년 동안 정무수석을 지낸 조윤선 씨는 재직기간 중 단 한 차례도 대통령을 독대한 적이 없다고 청문회에서 밝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정무수석은 대통령과 집권 여당 그리고 야당을 연계하는 연락자로서, 대통령이 추진하는 주요 정책을 여·야에 설명하고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소통자이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에서는 정무수석실을 “congressional liaison office”라 부른다. 대통령과 의회 간의 연계를 책임지는 연락 사무소라는 뜻이다. 연계와 소통의 중책을 맡은 정무수석이 재직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대통령과 독대한 적이 없었다고 하니, 누구보다도 긴밀하게 지내며 의견을 교환해야 할 대통령과 정무수석 사이에 얼마나 소통이 부재했으며, 나아가서 대통령과 집권 여당 사이에도 얼마나 단절이 심각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게 명시적으로 드러난 사례 외에도, 권력의 최고 중추 내에서 소통 부재와 관계의 단절을 시사해주는 수많은 증언들이 있다. 면대면의 의사소통을 거부한 대통령은 참모들의 의견을 경청할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렸고, 장관 및 정부 조직의 전문가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 난제를 풀어나갈 소중한 기회들을 자진해서 차단해버렸으며, 정상적 시스템을 통해 정위(定位)해야 할 국정 운영의 방향타를 40여 년 동안 알고 지내던 한 사인(私人)의 손에 내맡겨버렸다. 공/사의 구분이 붕괴되고, 합법/탈법의 경계가 무너졌으며, 옳고/그름의 구별이 사라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소통 거부’라는 치명적 실책에 있다고 여겨진다.
면대면의 소통: 인간관계 유지의 기본 방식 사람의 입은 먹기 위해서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얼굴은 곱게 단장하기 위해서만 몸통 위에 얹혀 있는 것이 아니다. 지렁이나 해삼과 같은 하등동물의 입은 단지 먹이를 섭취하기 위해 달려 있지만, 원숭이나 오랑우탄과 같은 고등동물로 올라갈수록 입은 먹이를 섭취하기 위한 기관이면서 동시에 의사소통의 기관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하물며 언어를 사용하며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입은 먹이 섭취라는 하등동물의 수준을 넘어서서 의사소통을 위한 매개체로서 기능을 수행한다. 얼굴 또한 마찬가지이다. 입으로 행하는 구어(口語)에 못지않게, 눈짓과 낯빛 그리고 표정과 몸짓을 통한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화자의 내면 상태를 상대방에게 진솔하게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한다. 인간은 사적인 관계에서도 말을 사용하여 의미를 주고받지만, 공적인 세계 특히 정치 세계에서 말이 차지하는 역할은 소중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만약 정치의 세계에서 말을 통한 의사소통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주먹과 폭력이 난무하는 동물의 왕국으로 전락해버리거나, 음습한 침묵 속에서 서로 간에 눈치 보기와 주관적 억측이 난무하는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른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가능케 해주는 기본 수단은 말이며, 만약 말을 통해 대화를 주고받는 일이 불가능해진다면 ‘정치적인 것’ 또한 실종의 위기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소통을 위한 다섯 가지 기본자세 동양의 정치 전통에서는 군주가 의사소통의 대가가 되기를 기대해 왔다. 『상서(尙書)』 「홍범(洪範)」 편에서는 군주가 의사소통의 장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지 않으면 안 될 다섯 가지 기본자세를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다섯 가지 기본자세란 첫째는 용모(貌)요, 둘째는 말(言)이며, 셋째는 보는 일(視)이고, 넷째는 듣는 일(聽)이며, 다섯째는 생각하는 일(思)입니다. 용모 즉 표정과 몸가짐은 공손해야 하고, 말은 이치에 따라야(從) 하며, 바라봄에 명석해야 하고(明), 들음에 총명해야(聰) 하며, 생각함에 미세한 곳까지 사려가 통해야(睿) 합니다. 표정과 몸가짐이 공경스러우면 엄정해지고, 말이 도리에 맞으면 조리가 있게 되며, 보는 것이 밝으면 사물을 명석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듣는 것이 총명하면 일을 잘 도모할 수 있으며, 생각이 미세한 곳까지 통하면 성인처럼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습니다. 『상서』에서는 군주가 의사소통의 장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다섯 가지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용모(貌)이다. 낯빛과 몸가짐이 바르고 단정할 때 그가 하는 생각도 바르게 되며, 표정과 몸짓이 언어 공동체의 ‘몸 문법’에 들어맞을 때 그의 말을 듣는 사람도 신뢰감을 가지고 경청하기 마련이다. 만약 군주가 백성들 위에 군림하면서 공동체의 ‘몸 문법’에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제스처를 쓰거나 표독한 표정을 짓는다면 그를 보는 백성들은 마음속에서 아무런 복종심도 일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군주가 의사소통의 장에서 지녀야 할 첫 번째 자세는 무엇보다도 단정한 용모와 바른 몸가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장에서 필요한 두 번째 요건은 말(言)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조리에 맞고 타당해야 듣는 사람도 승복하게 된다. 만약 하는 말에 두서가 없거나, 입만 열면 유체이탈식 거짓말로 일관한다면 그의 말을 듣는 백성들은 아무런 신뢰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셋째는 바라봄(視)이다. 군주가 의사소통의 장에서 단정한 눈빛으로 상대방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경청해줄 때 상대방도 성실하고 진솔한 자세로 대화에 임하게 된다. 만약 군주 된 자가 상대방과 눈길 마주치는 일을 회피하거나 상대방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신감이 없거나 속으로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주게 된다. 정정당당하고 공명정대한 군주라면 의사소통의 장에서도 항상 맑고 단정한 눈빛으로 상대방과 시선을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는 귀밝음(聰)이다. 군주는 의사소통의 장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란 군주가 주관적으로 가진 독단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말을 가려 듣거나 배척하지 말고, 귀에 들어오는 모든 소리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반대하는 목소리 또는 듣기 싫은 쓴소리까지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어야 사태의 진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생각함(思)이다. ‘생각함’은 위에서 언급한 의사소통의 네 가지 자세를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성찰의 능력이다. 상대방에 집중하는 몸가짐, 잘 보기, 잘 듣기, 잘 말하기와 더불어 상대방의 말을 공정하게 수용하고 객관적으로 해석하며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사고(思)의 능력이 없다면 군주는 의사소통의 장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상서』에 제시된 다섯 가지 자세는 정치의 장에서 군주가 가지도록 요구되었던 ‘소통의 자세’이다. 이러한 자세는 전통 사회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날 민주 사회의 공공 영역에서 모든 대화 참여자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소통을 망치는 아홉 가지 폐단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나라의 병 치유하기(醫國)」이라는 글에서 국정을 망치는 의사소통과 관련된 폐단 아홉 가지를 들고 있다. 구폐(九弊)는 원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오는 내용으로, 군주와 신하가 의사소통의 장에서 범하기 쉬운 폐단 아홉 가지를 열거하여 경계로 삼은 것이다. 이 중 여섯은 군주의 자세에 관한 내용이고 나머지 셋은 신하에 관한 것이다. 이른바 아홉 가지 폐단은 군상(君上)에게 여섯 가지가 있고 신하에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남 이기기를 좋아하는 일(好勝人), 허물 듣기를 수치스러워 하는 일(恥聞過), 변명하여 핑계 대는 일(騁辯給), 자기의 총명함을 자랑하는 일(眩聰明), 위엄 부리며 겁주는 일(厲威嚴), 강퍅하게 멋대로 구는 일(恣彊愎), 이 여섯 가지는 군상께서 가지고 계신 병폐입니다. 아첨 떠는 일(諂諛), 눈치 보며 관망하는 일(顧望),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일(畏愞), 이 세 가지는 신하들이 가지고 있는 병폐입니다. 군주-신하의 권력 관계에서 흔히 발견되는 의사소통 상의 아홉 가지 폐단은 원래 당나라 때 덕종(德宗)의 재상인 육지(陸贄)가 황제의 하문에 임하여 솔직 담백하게 그의 허물에 대해 진언한 것이다. 육지는 당시 국정 운영의 난맥상이 “군주와 신하 사이에 정(情)이 제대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上下之情不通)이라고 보고, 군주가 신하를 자주 접견하여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진언의 과정에서 그는 황제의 의사소통 관련 허물을 ‘군상의 여섯 가지 폐단’(君上六弊)으로 열거한 것이다. 장관들과의 소통을 거부한 채 홀로 관저에서 칩거했던 우리의 대통령에게 육지(陸贄)와 같은 현상(賢相)은 없었다.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지조 있는 참모 대신에, 세상의 모든 싫은 소리를 차단하고 탄압하려는 공작 정치의 달인들만이 최고 권력자의 발 밑에 부복하고 있었다. 진영 장관처럼 사직서를 내지 않고 정부에 남은 관료들은 그저 “아첨 떠는 일(諂諛), 눈치 보며 관망하는 일(顧望),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일(畏愞)” 이 세 가지에 능한 이들뿐이었다.
하물며 왕조 시대에도 이처럼 직언(直言)이 가능했는데 1733년 12월 11일, 영조는 신하들과 소대(召對)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물었다. “이른바 군상육폐(君上六弊) 가운데서 내가 면치 못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신료들은 각기 소견을 말씀해보시오.” 민주주의 시대도 아니고 전제 왕정 시대의 절대 지존인 국왕의 하문이다. 그것도 국왕 자신의 허물에 대해 신료들의 솔직한 생각을 말해보라는 거다. “아첨 떨며(諂諛), 눈치보고 관망하며(顧望), 겁먹고 두려워하며(畏愞)” 빙빙 에둘러서 말하는 것이 자고로 신하 된 자들의 타성 아니었던가? 그러나 신하들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먼저 참찬관(參贊官) 홍경보가 답했다. “총명함을 자랑하고, 남 이기기를 좋아하며, 허물 듣기를 수치스러워하고, 변명하여 핑계 대는 일, 이 네 가지는 전하께서 면치 못하시는 일들입니다.” 군주가 의사소통의 장에서 흔히 범하는 허물 여섯 가지 중 무려 네 가지를 영조가 가지고 있다고 직언한 것이다. 시독관(侍讀官) 오원은 한 술 더 떠서 말했다. “신이 그윽이 생각건대 ‘강퍅하게 제멋대로 구는 일’ 말고 모든 폐단을 다 갖고 계신 듯합니다.” 앞서 홍경보가 네 가지 허물을 지적한 데 비해, 오원은 무려 다섯 가지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뒤질세라 검토관(檢討官) 윤득화가 거들었다. “신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하들의 까칠하고 신랄한 지적에 영조는 변명조의 말을 길게 늘어놓다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구차한 말로 결말을 짓는다. “짐에게 다섯 가지 폐단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강퍅하게 제멋대로 구는 일’만은 결코 없소.”(『영조실록』 제36권, 영조9년 12월 11일 무오 기사). 자신의 소통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신료들에게 하문하는 군주, 그러한 질문에 꾸밈없이 직설적으로 대답하는 신하, 비록 민망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허물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군주···. 『실록』에 나오는 이러한 대화의 장면은 과거에 있었던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이상처럼 들린다. “오래된 미래”란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오래된 미래, 소통 정치의 이상 정치 세계의 기본 단위는 ‘말’이다. 만약 정치 세계에서 ‘말’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온통 주먹과 폭력이 난무하는 야만의 세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한 사회의 정치 문화가 성숙했는지의 여부는 ‘말’이 얼마나 자유롭게 흐르고, 오가는 ‘말’이 얼마나 상식과 조리에 맞으며, 통용되는 ‘말’들이 얼마나 신뢰감과 설득력을 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말’을 하지 못하게 막는 세상, 오가는 ‘말’이 믿고 싶지 않을 만큼 거짓투성이인 세상, ‘말’에 아무런 신뢰감과 설득력도 담겨 있지 않은 세상이라면, 별로 살고 싶지 않은 세상, 탈퇴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몸담고 사는 연옥 같은 세상일 따름이다. 의사소통의 토대 없이 정치 문화의 성숙은 없으며, 성숙한 정치 문화는 성숙한 의사소통의 기반 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소통의 단절은 야만적인 정치 문화로 이어지고, 야만적 정치 문화는 정치체의 구성원에게 상처와 고통만 안겨줄 뿐이다. 한 사회 안에서도 특히 지도자급 위치에 있는 사람의 말에는 신실함과 돈후함 그리고 미더움과 성실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지도자, 자기가 했던 말을 바로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는 지도자, 거짓 약속과 헛된 망발을 늘어놓는 지도자, 자기 입으로 뱉은 말이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 지도자···. 이런 사람들이 국가의 지도자급 위치에 앉아 있을 때, 그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허탈감과 상실감에 빠져 열심히 일할 의욕을 잃게 된다. 하물며 이를 지켜보며 자라나는 아이들은 과연 누구를 모범으로 삼고 말을 배울 것이며, 누구를 귀감으로 삼고 삶의 목표를 세워나갈 것인가? 심지어 전제 왕정의 시대에도 이상으로 삼아온 ‘소통하는 리더십’의 이상은 아직 우리가 이루지 못한 미래의 꿈으로 남아 있다. 필자 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