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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30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성경본문 : 다니엘 3: 1-30 출 처| 마경훈 목사
기적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말합니다. 성경은 수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상식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책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신앙의 안경을 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에 대한 본문의 내용을 상식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눈으로 보면 신자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믿음 지키기...
신앙생활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우상에 금을 입히고 두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높이가 60규빗이니 약30m가 되는 엄청난 우상입니다. 이 우상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는 신앙의 도전이었습니다. 왕은 그 우상을 만들어 놓고 국가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을 집성예식에 참석하게 했습니다.
집성예식에서는 음악 소리와 함께 우상에게 절을 해야 하는데 믿음의 사람들인 세 친구는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일로 그들은 결국 풀무불 속에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세 친구의 신앙을 방해하는 적은 사단이었습니다. 사단은 느브갓네살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우상을 만들게 하고 다시 그의 마음을 격동시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에게 절을 하도록 명령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을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또 조상을 섬기는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무서운 죄로 생각지 않는 것은 그 배후에 역사하는 귀신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을 한다거나 아니면 조상을 섬기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 배후에서 일하는 귀신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귀신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이 영적인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상을 가까이 하면 그만큼 귀신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귀신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다른 이유는 사람들의 방해 때문입니다. 사단은 가능하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이용하여 신자의 신앙을 방해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어려운 결단을 하고 왕이 세운 우상 앞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믿음으로 신앙을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세 친구를 향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세 친구의 정적들이 이 사실을 왕 앞에 고자질합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세 친구는 왕 앞에 서게 되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신자가 신앙을 지키려고 힘을 쓰면 주변 사람들이 협력하고 힘이 돼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도전합니다. 여러분이 세상 친구들 틈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고 해보십시오. 반드시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다른 이유는 세상의 유혹입니다. 금신상에 금을 입혀 보기에 좋게 만들었습니다. 거대한 금신상 앞에서면 그 웅장함에 감탄하고 머리를 숙이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화려하고 아름다움으로 지혜롭고 탐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 유혹을 이기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다른 이유는 우리의 육신의 체질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보다 세상의 것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신령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도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더 쉬운 것이 육체의 체질입니다. 본문의 세 친구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풀부불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주어진 고위관직자의 자리를 지키며 편하게 사는 것이 쉬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사회적인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믿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은 믿음을 지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이 충만해서 왕에게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대로 역사하셨습니다.
화가 난 왕이 신하들에게 명령해서 풀무불을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했습니다. 그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세 친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풀무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왕이 세 친구를 불 속에 던져 넣고 보니 불 속에 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아들 같은 이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불 속에서 나타나시고 그들을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얼마나 철저했던지 왕 앞에 선 그들을 보니 불이 그 몸을 해하지 못했고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고 입고 있던 옷의 빛깔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이런 예가 종종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들의 친구인 다니엘 같은 경우는 신에게 기도를 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믿음과 양심을 따라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했습니다. 그도 결국 사람들의 고발로 사자굴에 들어가는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시고 다니엘을 지켜주셨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사울 왕의 공격을 계속해서 받았습니다. 사울 왕은 왕권을 이용해서 다윗 공격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외에도 수 많은 적들을 상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그 때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은 그에게 큰 믿음을 만들어 줬고 큰 믿음을 가진 다윗은 확신에 찬 고백을 합니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시3:6).
다윗의 확신은 우리의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호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나의 영혼의 친아버지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을 보호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는 좋으신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이 사건 속에서 세 친구가 가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은 정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의 고백입니다. 왕 앞에 자신들이 가진 확신을 말한 후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절).
사실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면 고난 당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보호하심만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꼭 보호만을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데 너무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알을 깨줬습니다. 그랬더니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보다 생존율이 훨씬 낫다고 하더군요.
다윗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버려 두시는 것과 같은 경험도 많이 했습니다. 아마 다윗도 고난 중에는 그 고난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섭섭한 마음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과정을 거치고 나니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 유익된 사건들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좋은 일을 허락하시면 "할렐루야"를 외치며 좋아하지만 작은 고난만 허락하셔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 중에 고난이 오니 교회를 떠나고 주님을 버립니다.
지금 이 시대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의 신앙이 필요한 때입니다.
성경 시대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격었던 고난을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으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평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점검해야 합니다. 작은 고난에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우리 앞에 다가오는 고난 앞에서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감사하고 찬양하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시대나 교회사를 더듬어보면 지금처럼 신앙생활하기 편한 때가 없습니다. 요즘도 고난받는 분들이 있기는 한데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고난은 그리 큰 고난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핑계삼아 신앙생활을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믿음으로 살면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과정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결론입니다. 요즘 아시안게임이 한참 진행중입니다. 레스링 결승전을 보니 외국 선수가 우리 나라 선수에게 앞서다가 후반에 가서 점수가 같아지고 연장전에서 점수를 내줘서 결국은 지고 말았습니다. 전체적인 게임에서 그가 앞섰다 하더라도 뒤에 가서 점수를 내주고 말았기 때문에 결국 진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전체적인 상황으로 봐서 적들의 고발에 의해서 풀무불에 들어가는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 풀무불에서 구원을 받고 왕이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주게 됩니다(30절).
다니엘도 그의 세 친구처럼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정적들에 의해서 참으로 곤란한 상황에 들어가게 되고 그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봉하시고 다니엘을 구원하시고 그 광경을 목격한 왕은 다니엘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을 사자 굴에 넣어버립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는 입을 열지 못하던 사자들이 다니엘의 적들이 들어오자 입을 버리고 달려들어 뼈 소리가 나도록 그들을 씹어 먹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다니엘을 더욱 높여 주셨습니다.
막10장에 보면 주님께서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배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대화를 살펴보면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이 땅에서 백 배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세에서는 영생의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다윗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피난을 다닐 때, 때로는 비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가고 결국 길보아산 전투에서 죽음을 당하고 패가망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점점 왕성하여 결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자자손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다윗이 당한 고난과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비유이며 또한 믿음으로 사는 신자의 승리를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시고 하늘에 앉히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위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셨습니다.
신자의 승리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의 과정동안 신앙을 지켜 믿음으로 살게 되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높여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에게 누리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