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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7:1-5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어느 시대나 가끔씩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타나서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세상이란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말에 전혀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의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언제 끝나느냐 하는 것보다도 더욱 확실하고도 중대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 각자 앞에 놓여 우리 개인의 종말, 즉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자기 종말 곧 개인적인 죽음이 곧 그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야 다함께 당하는 것이겠지만 개인적인 죽음은 누구의 눈앞에나 있는 것이요, 더구나 각자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더 큰 경각심을 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보증을 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환란이 있더라도 실망하여 넘어지지 않고 의인의 길을 갈 때 더욱 힘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욥이 자기 죽음을 직시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는 본문에서 말하는 욥의 말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어떻게 각자의 종말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 1.우리는 기력이 다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극심한 육체의 병고를 겪으면서 자기 죽음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라고 본문에서 말했습니다. 기운이 다 쇠하였다는 것은 이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적신호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자기 몸이 강건하고 젊은 혈기가 충전할 때는 누구도 자기의 기력이 쇠진할 때가 온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그런 일은 자기와은 상관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욥의 말을 경청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젊음과 늙음 사이는 한치도 되지 않습니다. 오늘 젊은 사람이 내일이면 백발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기력이 왕성할 때에 자신의 기력이 쇠약해질 때가 온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 기력을 가지고 값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때를 덫처럼 맞음으로써 허탈함과 후회스러움에 빠져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기력이 남아 있을 때에 그 기력의 소중함을 알고 정신 차려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2.나에게도 끝날이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또 죽음에 직면한 자기의 심경을 < 나의 날이 다하였고...>라고 토로하였습니다. 사실 이때 자기가 죽음의 벼랑에 다달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치고 언젠가는 자기가 죽게 될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는 죽음이 도래할 까닭이 없고, 자기와 죽음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평생은 일식간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때는 단축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더 빠르고, 우리의 생명은 한 호흡 사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 한번 주어진 삶, 그리고 조만간 맞이하지 않으면 안될 제한적인 인생, 이러한 인생의 일회성과 유한성에 대한 진지한 자각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서 매순간을 의미있고 값진 삶으로 장식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토마스 A. 켐피스는 < 저녁에 잠자리에 눕거든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고 아침 시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거든 다시 저녁 때까지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신없는 말 같지만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임을 깊이 알고 우리는 한 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 3.우리에게는 무덤이 예비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또한 자기 죽음을 직감하고서 <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 >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은 이때 자기 죽음을 직면한 정도에만 그치지 않고 벌써 죽음 저편으로 자기 무덤을 몸소 바라보는 심경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적 견지에서 본다면 무덤은 썩음의 자리요 절망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무덤은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과 연결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슬피 울었지만 조금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놀라운 감격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썩을 무덤을 직시함과 아울러 영화로운 부활을 믿으며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을 때 거기에는 세속적인 삶은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사도 바울은 자기는 그리스도만 위해 살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벡하였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짧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 순간 자기의 남은 시간을 점검하면서 주어진 현실 가운데 최선을 다해 신앙적 삶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종말을 예비하는 지혜로운 삶이요 영원히 사는 지혜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절박한 준비의 자세로 하루 하루를 믿음을 지키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 17:6-16
악인과 의인의 삶
본문에 보면 안타까운 욥의 탄식이 계속됩니다. 그의 죽음이 가까왔고 바라는 것도 죽음뿐이라는 고통의 끝에 다다른 욥은 감당하기 힘든 지독한 고통 가운데서 계속 살아가기 보다는 차라리 죽어 구더기에 먹히는 것이 더 낫다고까지 불평하고 있습니다. 비록 친구들이 하나님의 징계가 끝나면 구원해 주실 것이고,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욥의 현실에서는 그들의 말이 본문 12절에 말하는 것처럼 < 밤으로 낮을 삼고 빛이 어두운데 가깝다.>는 조롱으로만 들립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간의 유혹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께 죽음까지도 맡겨버리는 태도로 일관한 욥에게서, 우리는 환란과 핍박 중에서 신앙을 지켜 나가는 성도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며 우리 또한 큰 위로와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한 가지 일을 두고서도 마음이 사곡한 자는 그것을 나쁘게 평가하는 데 비하여 마음이 정직한 자는 좋게 평가합니다. 이는 곧 어떤 색안경을 끼느냐에 따라 사물이 검게 보이기도 하고 푸르게 보이기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생각해 보십시다. 한사람 예수를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예수를 보고서도 조롱하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만약 평소에 경건하고 선량하게 지내던 사람이 내일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된다면 그는 각별히 자기 마음을 더욱 선하게 가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서조차 악에 젖은 사람은 이사야 22장 13절의 말씀처럼 <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상반된 사고 방식과 행동의 차이는 고난에 대한 반응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욥은 본문에서 그 점을 잘 대조시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응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 1.의인은 고난중에 더욱 분발합니다
욥은 애매하게 당하고 있는 자기의 고난을 처절한 심정으로 술회하고 나서 곧이어 본문 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그러니까 욥은 어떤 의인이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보게 되면 그는 더욱 분발하여 의를 행하는 일에 더욱 힘쓸 것이라는 판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평범한 견해로 볼 때에는 어떤 의인이 까닭없는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구나 당장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의인조차 저런 고난을 당한다면 도대체 의를 행하면서 살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는 불평도 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이 그럴만합니다.
그러나 욥은 어쨌습니까? 욥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그가 참으로 의인이라면 욥의 고난을 보고 더욱 경성하여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이었고, 이 시간에도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중에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살아가기시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 평안하고 풍족한 생활이 곧 인간의 행복 >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속에서의 행복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가 토인비가 즐겨 말하던 내용입니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 어떻게 하면 북해로부터의 먼 거리에서 런던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가느냐? >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어부들은 아무리 잘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서 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 있는 것인데, 꼭 한어부만은 청어들을 산채로 런던에 가져와서 큰 재미를 보곤 했습니다. 동료 어부들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 어부는 고민 끝에 이렇게 대답을 해줍니다.
< 나는 청어를 넣는 통에다 메기를 한마리씩 집어 넣습니다. >
그러자 모든 어부들의 눈이 둥그래지면서 < 아니!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 않소. >라고 묻자....
<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 먹지만 두 세마리밖에 못잡아 먹지요. 그러나 그 통에 있는 많은 청어들은 잡혀 먹히지 않으려 계속해서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 청어들은 열심히 도망다니며 살려고 애를 쓰지요. 덕분에 청어는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 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많은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향은 엄청나게 달라질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은 우리들의 삶에 더욱 큰 의미를 더하고, 활력과 용기를 더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으로 인해 더욱 생명력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인생의 참 진주를 형성하는 계기가 될수 있는 주어진 기회임을 자각하시고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 2.악인은 고난을 당하면 더욱 어두워집니다
욥은 자기 고난을 바라보는 의인의 태도를 미루어 말하고 나서 이번에는 대조적으로 악인의 소행을 들어 이야기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이 어두운 가운데 가깝다 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욥이 여기서 그들이라고 지칭한 것은 매정한 세 친구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해석상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만은 그중에 하나가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어둠이 지나면 빛이 오듯이 욥의 고난은 곧 끝나게 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기술을 크게 바꿀 것이 없이 '악인은 밤을 낮삼아 살고 빛과 어두움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는구나'라고 문자 그대로 이해해도 무난하리라 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영적 의미에서 볼 때 악인은 낮과 밤을 구별하지 못하고 빛과 어둠도 구별하지 못합니다. 사도 요한도 악인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을 미워하고 도리어 어둠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이 욥의 고난을 보았을 경우 더욱 암담한 상태로 추락할 것은 확연한 것입니다. 즉 악인은 경건한 자들의 고난을 보고서 < 의로운 체해도 별 수 없구먼, 그러니 실컷 먹고 마시며 쾌락을 즐기는 것이 최고다.>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곧은 것도 굽게 보고 옳은 것도 그르게 보며, 좋은 것도 나쁘게 보고 아름다운 것도 추하게 보기 마련입니다. 모든 일을 <뒤틀린 마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감히 하나님의 이런 일에 대해서도 서슴지 않고 악담을 퍼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가 조심하여 이런 악의 시각을 벗겨 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악이 자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선한 사람은 악에서 선을 배우지만 악한 사람은 선에서도 악을 배웁니다. 이는 마음의 태도가 상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난이 의인에게는 분별력을 끼쳐 주지만 악인에게는 도리어 깊은 어둠만 만들어 준다는 것도 바로 이점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세상이 신앙으로 살기에 알맞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이 세상이 자기들 멋대로 살기에 알맞습니다. 이런 일을 경계삼아 우리는 아무쪼록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이 선을 좆아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