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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9
도피성에서 바라본 십자가 / 홍문수 목사
여러분, 이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에이~ 차라리 어디 도망가 버리면 좋겠다!” “어디 가서 숨어버리면 좋겠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큰 일이 생기거나 혹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피난처’를 찾으려는 것이죠. 하지만 세상에 어디 그런 데가 있나요? 마땅치 않습니다. 혹시 어디를 찾아 간다 해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애꿎은 술이나 마시고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하다하다 안 되면 심한 경우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진정한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생을 더 꼬이게 만들고, 망치기 십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그 어디에도 진정한 피난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성경을 보니까 구약 시대 이스라엘 땅에 그런 피난처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도피성’(逃避性, City of Refuge)입니다. 인생의 극한 상황에서 사망의 위험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 도피성은 지금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 우리에게 읽혀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피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에 구약의 도피성이 과연 어떤 점에서 십자가와 연관성이 있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그래서 모쪼록 도피성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를 더욱 새롭게 새겨보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도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① 도피성의 설치 목적 :
도피성은 사람들이 고안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본래 모세에게 명령하셨던 건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분배할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상기시킵니다.
3절을 보시죠.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살인 사건이 났을 경우 고의로 죽인 게 아니라 실수로 죽인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 지나가던 사람을 쳤는데,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겁니다. 물론 사람을 죽인 것은 분명히 범죄입니다. 하지만 실수로 죽였는데 그 사람마저 죽이면 고귀한 생명이 연쇄적으로 살인이 이루어지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그러면서도 공평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반영된 제도입니다. 물론 고의로 죽인 경우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살인자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피의 보복자(avenger of blood)라는 말이 바로 그겁니다. 피의 보복자는 피살자의 원수를 갚아주는 사람으로, 피살자에게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이 살인자를 죽여도 아무 말을 못합니다. 그게 구약 이스라엘의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죽인 경우는 예외적으로 도피성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겁니다.
9절 말씀을 또 보시죠. “ ...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도피성으로 도망가서 재판을 받을 기회를 주라는 겁니다. ‘회중 앞에 선다’는 말이 바로 그겁니다. 재판의 결과 정말 실수로 죽인 것이면 도피성에 머무르며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고의로 죽이고 도망친 것으로 판명되면 피의 보복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② 십자가의 예표 ‘도피성’ :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도피성에 도망갔던 사람이 그곳에서 살다가 완전히 자유의 몸으로 풀려날 수 있다는 겁니다. 언제 그렇게 되냐 하면 당시 시무하던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그렇게 됩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도피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6절을 보면, “ ...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 ”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으로 도망간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는 그 성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습니다. 만일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가 피의 보복자에게 잡혀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죽으면 완전 사면이 됩니다. 그래서 본래 살던 고향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대속의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인간이 구원을 받습니다. 도피성 제도와 십자가의 유사성입니다. 이런 걸 가리켜 ‘예표’(豫表, type)라고 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예고편’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도피성은 십자가의 예표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을 연구해 보면 이런 예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 흔히 신학에서 ‘예표론’(豫表論, typology)이라 부릅니다. 구체적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먼저 출12:1~14을 보면, 유월절 어린 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출애굽)할 때 열번째 재앙으로 바로왕의 장자로부터 모든 집의 장자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안전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피가 곧 대속의 피가 된 겁니다. 죽음의 천사가 집집마다 들어가다가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는 집을 보면 그냥 지나칩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란 말이 생긴 겁니다. 유월절은 영어로 'Passover' 즉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함으로 사망이 지나쳐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유월절 어린 양’(고전5:7)라 부르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민21:4~9에 나오는 놋뱀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하면서 힘든 일이 자주 생기니까 불평을 합니다. 그런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불뱀을 보냅니다. 독사인데 한번 물리면 독이 온 몸에 퍼지는데, 고열이 나서 고통스러워하다가 죽게 됩니다. 모세가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비방을 가르쳐줍니다. 놋으로 불뱀과 동일한 형상의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매달라는 겁니다. 백성들이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게 된다고 했는데, 정말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살아났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님(요3:14~15 참조)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놋뱀 역시 십자가의 예표인 셈입니다.
이런 것들처럼 도피성도 십자가의 예표입니다. 도피성으로 인해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2] 도피성 구원과 십자가 구원
본문 4절~5절을 봅니다. “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5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실수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도망가면 죽지 않습니다. 살 수 있습니다.
또 6절을 봅니다.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도피성에 안전하게 피신해서 살다가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도피성 구원은 곧 십자가 구원과 동일합니다.
오늘날은 도피성은 없습니다.
마치 영화에서 예고편을 보여주다가 본편이 상영되면 사라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등장함으로 도피성도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도피성을 통해 보여주신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도피성을 통해 바라본 십자가 구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입니까?
① 죄에서 구원 :
인간은 죄로 인해 정죄와 속박을 받습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으로 영혼이 괴로워합니다. 한번은 영화를 보았는데, 이런 장면이 나왔습니다. 살인범을 추격하던 형사가 피의자를 붙잡습니다. 그러자 그 피의자는 형사에게 대듭니다. “당신 증거 있어? 그러면 나를 체포해! 증거가 없잖아!” 형사는 약이 올랐습니다. 분명한 살인범인데 물증이 없습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사는 분해하면서 이렇게 쏘아붙입니다. “그래. 나는 너를 체포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평생 양심의 가책으로 죄값을 받으며 살 것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을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지만 자신의 죄로 인해 영혼의 고통을 당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온간 부귀영화를 다 누려도 영혼에 참 평안과 만족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대속의 십자가 앞에 나오면 모든 죄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롬8:1 보면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죄값을 치러주심으로 십자가를 믿는 자는 정죄받지 않습니다. 심판받지 않습니다.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됩니다.
롬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속량이란 속죄를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는 십자가 속죄로 죄에서 구원받고 이제 의인의 신분을 취득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뭐라고 하죠?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인생 살다가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으로 시달릴 때가 있습니까?
물론 죄를 범한 것은 잘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날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셨으므로 또다시 십자가 앞에 나가면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습니다.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사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람에게 용서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그것으로 불충분합니다. 죄의식으로 인해 계속 괴롭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참 자유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능력입니다.
여러분, KAL기 폭파범 김현희 씨 아시죠? 사형은 면했지만, 그리고 유가족들과 국민들 앞에 눈물로 용서를 빌었지만 그 양심이 어찌 자유로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무수한 생명을 죽였는데 .... 그녀는 계속 죄의식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여간수로부터 십자가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한시도 편하게 살기 어려웠을 것이고, 어쩌면 자살해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한 통계를 보니까 45세 이상 한국인 중 무려 22% 정도가 우울증으로 시달린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영적으로 보면 결국 죄 문제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거운 죄 짐을 내려놓을 때 참 자유를 얻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사순절에 저와 여러분도 십자가 앞에 나아가 영혼의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② 사망에서 구원 :
모든 인간은 다 죽게 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히9:27 말씀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는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인생에서 가장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죽음이 닥쳐오기 전에도 항상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인생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나오면 사망을 이기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요11:25~26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믿는 자는 육신적으로 죽어도 그 영혼은 천국에 갑니다. 육신도 일단 흙으로 돌아가지만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화의 새 몸을 입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빛나는 모습으로 천국에서 영생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면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는 겁니다.
인도의 캘커타에 가면 마더 테레사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죽음의 집’이 있습니다. 올 데 갈 데 없는 천한 인생들, 노숙자들, 빈사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 그곳에 옵니다. 도피성과 같은 곳이죠. 거기서 치료도 받고 나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거기서 임종을 합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의 표정이 밝습니다. 그저 손으로 만져만 줘도 기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십자가 안에 있는 천국의 소망,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있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너머에 있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담대한 마음과 영생의 기쁨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고통에서 구원 :
세상은 아무리 좋은 데라도 고통이 있습니다. 가난과 궁핍, 슬픔과 눈물, 질병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으로 도망간 사람이 자기를 추격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안전하게 살았던 것처럼, 십자가 앞에 나오면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시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62: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러므로 막막할 때 십자가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괴로울 때 예수님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안전지대’입니다.
여러분, 다람쥐 아시죠?
작은 체구에 얼마나 위험한 일이 많겠습니까? 그러나 숲 속에서 살아남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다람쥐의 호신술입니다! 자기를 해칠만한 동물이 나타나면 바위틈에 숨어 버립니다. 그러면 아무리 강한 맹수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십자가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요일5:18 “ ...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여러분, ‘노다지’라는 말 아시죠. 옛날 금광에서 서양 사람들이 금을 캐서 상자에 넣고 이렇게 써 붙였다고 합니다. 노우 터치!(No Touch) 그 말을 들은 한국 사람들이 노다지, 노다지 이렇게 부르다가 금 같이 귀한 것을 노다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노다지는 노터치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크리스천은 노다지입니다. 악한 자들과 세상의 위험이 공격할지라도 결코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딴 데 가서 기웃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지어낸 이야기겠죠. 비행기가 이륙해서 상공을 날고 있습니다. 비행시간이 길어지면서 지루하니까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고 떠듭니다. 스튜어디스가 몇 번 타일러도 효과가 없습니다. 주위 승객들이 얼굴을 찌푸립니다. 그러자 스튜어디스가 화를 내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그렇게 떠들려면 나가서 놀래?” 그러자 아이들이 꼼짝 못하고 잘 앉아있더랍니다. 당연하죠. 아무리 답답해도 비행기 안에 있어야지 밖으로 나가면 공중에서 큰일 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아니 답답할수록 더욱 더 그렇습니다. 도피성 밖으로 나가면 피의 보복자에게 죽임을 당해도 아무 말을 못하는 것처럼 주님에게서 멀어지면 결코 안전 보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가지 기억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 동안 주님이 도와주시지만, 세상은 어디까지나 세상입니다. 결국 천국을 소망하는 게 중요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도피성’입니다. 그리고 ‘절대 안전지대’입니다. 계21:4 말씀 보면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러한 천국이 있기에 .... 여러분! 그 나라 가기까지 험한 세상 살 동안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님과 항상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승리하시고, 저 천국에서 영생복락 누리시기 바랍니다.
[3] 도피성으로 달려가는 자와 십자가로 나아가는 자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도피성으로 달려갔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14:6 “내가 곧 길(the way)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부디 주님 앞에 나아가 참 평안과 영생 누리시기 바랍니다.
[4] 도피성의 개방성과 십자가 복음의 전파
그런데 여기서 그치면 곤란합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아주 개방적이었습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당시 도피성은 이스라엘 전국에 6개였습니다. 7절~8절 보면 그 이름들이 나와 있습니다. 요단강 서편에 게데스, 세겜과 헤브론, 요단강 동편에 골란, 라못과 베셀 등입니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골고루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9절 보면,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 ”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뿐만이 아니라 거류민(이방인)에게도 도피성이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병행 구절인 신명기 19장을 보면,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나옵니다. 신19:2~6 “2 ... 땅 가운데에서 ... 3 ...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 6 ...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도피성은 중앙에 위치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속히 접근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하루 길(약 50 km) 안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도로를 잘 닦아 두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고속도로 낸 겁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100?)의 글을 보면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도로표지판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굉장하죠?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무슨 말씀입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크리스천과 교회들에 명령하고 기대하십니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재림할 때까지 완수하라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 세계선교도 하라고 하십니다. 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우리가 이웃과 이 민족, 더 나아가 온 세계 만민에게 십자가로 가는 도로표지판 역할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이번 사순절에 도피성을 통해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 구원의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귀한 십자가 복음, 나만 누리지 말고 가족과 이웃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살 동안 우리 모두 승리하시고, 영원한 도피성 저 천국에 다 들어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