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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6-24
하나님의 눈은 / 김봉수 목사
젊은 시절에 좋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삼일 예배까지 살펴보았던 다니엘이라는 사람은 아직 젊은 시절에 너무나 귀한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시작했는데, 마지막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에는 아주 성숙한 성도로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상급만을 기다리는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추한 모습이 아니라 더 거룩한 모습으로 모두가 존경할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뀐 다니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젊은 시절에 그래도 한 때는 신앙이 괜찮은 것 같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영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 볼 아사 왕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 본 것처럼 젊은 시절에 아사 왕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을 척결하는 것으로 개혁을 시작하여 열왕기 기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왕입니다.
아사 왕을 통해서 개혁자의 삶의 원리를 찾아 낼 정도로 그는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하를 통해 아사 왕의 젊은 시절에 행한 다른 일들을 볼 때에도 그는 처음에 아주 좋은 평가를 받는 신앙의 왕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아사가 왕이 된지 36년이 지났을 때, 이제 아사 왕이 나이가 어느 정도 많아졌을 때에, 그에게서 신앙의 사람답지 못한 일들이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아무리 노련한 왕이라고 할지라도 전쟁이 일어날 때 마음이 그리 평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아사 왕이 취한 태도는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머리가 잘 돌아간 행동이었는지 모릅니다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아주 어리석은 모습이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에게 은과 금을 예물로 보내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달라고 원병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사 왕은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아주 전략을 잘 세운 것입니다.
유다와 싸우고 있는 북 이스라엘을 뒤쪽에서 아람 군대가 공격을 하도록 하는 것은 멋진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전략대로 아사는 북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사람으로서는 전혀 맞지 않는 전략이었습니다.
역대하 14장에 보면 과거에 아사 왕이 아직 젊은 왕이었던 시절에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내용이 나타납니다.
세라의 군대는 엄청난 군대였습니다.
병거가 삼백승이나 되는 강한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에 아사가 취한 행동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대하14:11은 아사 왕의 기도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도와 줄이는 주 밖에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결국 아사 왕은 구스 사람 세라의 백만 대군을 가볍게 이긴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었을 때, 이제 왕이 된 지 36년이 되었을 때, 그를 쳐들어 온 군대는 그렇게 큰 대군이 아닙니다.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가 공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다.
구스 사람 세라가 쳐들어 왔을 때에는 <도와 줄 이는 주밖에 없다고>했는데, 이제 그에게 수단과 방법이 있습니다.
은금이 있습니다.
아람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금을 사용하여 벤하닷의 군대를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사 왕이 왜 그랬을까요?
왜 과거에는 그렇게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하나님만 의존하던 왕이 이렇게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어쩌면 오늘 우리들에게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왕이 된지 36년이 되니까 이제 수단과 방법에 능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도 전쟁이 일어나면 돈을 주고 원병을 사는 것을 왕으로의 36년 동안 배운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 전쟁판에 기다리는 것은 미련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아사 왕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은금을 주더라도 벤하닷이 와서 도와주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이렇게 아사 왕이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 북 이스라엘과의 싸움을 승리로 끝내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위로했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은과 금을 보냈을 때 하나님이 벤하닷의 마음을 움직여서 나를 돕도록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대하16장에 보면 북 이스라엘 왕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아사 왕이 안심하고 있을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옵니다.
그리고 아사 왕을 책망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까닭에 아람 왕이 왕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내용은 바로 하나니의 다음 말입니다.
같이 대하16:9을 찾아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선견자 하나니를 통해서 아주 귀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가랴서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두루 감찰하시는 모습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감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를 위해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과거에 아사 왕이 우상들을 척결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은 아사 왕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왔을 때에 아사 왕이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를 하니까 그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을 했으면서도 아사 왕은 이제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자기의 은금을 동원해서 아람 왕을 산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귀신 드린 아들의 아비가 주님께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우리가 잘 아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기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믿는 자에게 능력이 풍성해진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자꾸 어떤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는가 하면 믿음이 풍성해지면서 내가 굉장한 능력을 갖추어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말은 맡긴다는 뜻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나는 도무지 할 수가 없어서 주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견자 하나니를 통해 주시는 말씀처럼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람 왕이 아무리 실력이 있고 대단해도 그에게 전쟁의 문제를 돈을 주고 맡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나라의 군대가 아무리 대단해도 군대 장관을 믿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기다리는 자,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찾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믿는 그 사람 자체가 못할 일이 없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맡기는 그에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차이를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자꾸 능력의 사람을 찾습니다.
슈퍼 맨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하지만 능력자는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온 땅을 두루 두루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주실 사람을 찾습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닥쳐 온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주님께 전심으로 맡기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배워온 수단 방법을 통해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금을 가지고 아람 왕을 부르는 행동을 취하지 않고 말입니다.
저는 다윗의 예를 들고 싶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갑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 앞서서 다윗이 사울을 찾아가서 미리 대책을 세운 적이 있습니까?
<만일 내가 골리앗과 맞서 싸우다가 잘 안되거든 빨리 발 빠른 사람들을 시켜서 그 무서운 골리앗의 손에서 저를 좀 구출해 주십시오.>라든가,
아니면 <내가 만일 골리앗의 손에 죽을 것 같거든 활을 잘 쏘는 병사들을 동원해서 제가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대비해 주십시오.> 이런 대책 말입니다.
사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을 하러 나가는 것은 완전히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왜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을 맛보지 못할까 하는 것에 대해 오늘 본문을 통해 믿음이 없는 탓이라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는 탓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사 왕은 젊은 시절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그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아직 젊었을 때는 믿음으로 행동하다가도 나이가 들면서 온갖 경험을 다하고, 이곳 저곳에서 듣고 배운 것들이 있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데 실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에 실패하고 나면 계속 판단력이 흐려져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법입니다.
아사 왕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그 아사 왕은 왕이 된지 39년째 되었을 때 발에 병이 듭니다.
그런데 그 초창기 괜찮았던 선왕 아사가 아주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대하16:12을 봅니다.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 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이 역대기 기자는 이 아사 왕의 발병 문제가 하나님과 관계된 문제라는 것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발에 병이 든 것은 의사들을 찾아 갈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발에 병이 들어 아주 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사 왕이 다른 곳을 찾아다니지 말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여전히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의사들을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병이 들었을 때 병원을 찾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아사 왕의 경우에 이 발에 병이 든 것은 의사에게 갈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야 할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사 왕은 죽는 날까지 발에 병이 있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저는 오늘 이 아사왕의 관한 말씀을 살피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 하나님 앞에 잘 한 것으로 결코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앙의 삶은 천국에 입성하는 순간까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신앙 생활을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시간까지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 뛰어야 합니다.
처음에 아무리 1등으로 달렸어도 마지막에 가서 주저앉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과 같은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잘 달린 사람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고, 아사 왕과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잘 달렸지만 마지막에 가서 완전히 주저앉은 사람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믿음으로 달려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사 왕의 말년의 취한 모습처럼 여러분의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며 살아왔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마지막까지 여러분의 수단과 방법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다 내려놓는 작업이요, 하나님께 맡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견자 하나니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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