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직후 우익단체의 뿌리를 찾아서
시절이 너무 엄혹하다. 마치 박정희 시대나 이승만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실제 현 정권은 이승만을 다시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그의 분단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칭하며 반대세력을 싹쓸이하고픈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승만의 친위조직이었던 국민회와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땃벌떼와 백골단, 민중자결단과 같은 반공우익집단들이 '뉴라이트'로 이름만 바꿔 다시 발호하고 있는 것도 그 때를 연상케 한다.
이럴 때일수록 현대사를 되돌아보면서 역사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한국 우익집단과 토호세력의 뿌리'를 약 50회에 걸쳐 추적해보려 한다. 이 글은 그 첫번째로 해방직후 마산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어떤 세력들로 결성되었는지를 알아본다.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1)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라디오를 통해 일본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포츠담 선언의 조건을 수락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을 들은 경남도민들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최후의 1인까지 싸우자고 외치던 일본이 아니었던가?
얼마 후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입과 입을 통해 마침내 해방이 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다. 마산 민의소가 있던 창동거리도 금세 인파로 가득 찼다. 만세소리는 밤늦게까지 계속 이어졌다.
허당 명도석
바로 그 시각. 어시장 근처의 집에서 창문 너머 들려오는 만세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앉아 앞일을 구상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이미 수개월 전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된 새 나라 건설을 은밀히 준비해온 허당 명도석(당시 64세)이었다. 서울의 몽양 여운형과 함께 해방을 준비하는 비밀결사조직 '조선건국동맹'을 만들어 경남조직책을 맡아온 그였다. 마침내 때가 온 것이다.
친일파-무정부주의자-사회주의자의 행보
"일본이 전쟁에서 질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조선민중이 아무런 준비 없이 해방을 맞았다간 다시 열강의 식민지가 되고 말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의 주체적인 힘으로 진정한 독립국가 건설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그가 건국동맹에 합류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1907년부터 노동야학의 교사였고, 1919년 마산의 3·1운동을 주도했으며, 1927년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해 독립자금을 조달하다 평양에서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마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그는 마산의 민족운동가들 가운데서도 끝까지 기개를 꺾지 않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인물이었으며, 부산의 백산 안희제를 통해 독립자금을 제공해온 마산의 민족자본가였다.
허당이 해방이후의 구상에 빠져있던 그 비슷한 시간. 마산 중성동 김창갑의 집에는 목발 김형윤(金亨潤)을 비롯한 손문기, 조병기, 이일래, 김주홍, 이원세, 정홍열, 류석형, 정명북 등 무정부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오동동에 살던 사회주의 운동가 김형윤(金炯潤·목발 김형윤과는 다른 인물로 역시 유명한 사회주의 민족운동가인 김형선, 김형진과 형제)의 집에는 김명규, 김용찬, 김종열, 김종신, 박삼조 등이 모였다.
이와 달리 일제 때 부회의원을 지냈거나 친일파로 분류되던 손형업, 서기홍, 이유만, 안장수 등 세도가들도 동성동의 민영학의 집에 집결했다.
이들은 3파는 제각각 해방에 따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하루바삐 시민자치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모았다.
중도파 여운형계 위원장 명도석
그러나 과연 누구를 지도자로 내세울 것인가. 자칫하면 그토록 고대하던 해방을 맞이하고도 3파가 분열됨으로써 더 큰 혼란과 시민의 비난을 부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우파성향의 강태호와 좌파성향의 김형진이 나서 70여명의 지도자들을 마산식당(현재 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 2층으로 불러 모았다. 그때가 8월 16일 밤이었다. 이들은 곧 '해방 축하 마산시민대회'를 열기로 하는 한편 이를 위한 준비위원을 선임하는데 합의했다.
전날 밤의 결의에 따라 17일 공락관(이후 시민극장)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극장 안을 빽빽이 채운 가운데 해방된 마산의 실질적인 지방자치권력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마산부위원회' 결성대회가 개최됐다. 경술국치 직전까지 시민자치기관이었던 민의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지 36년만의 일이었다.
이날 위원장으로 추대된 지도자가 바로 허당 명도석이었다. 그는 이미 건국동맹 활동을 통해 '준비된 위원장'이었던 것이다. 또한 서울의 여운형처럼 중도 좌파였던 그의 성향도 마산의 3파 세력 모두에게 거부감 없이 수용된 요인으로 보인다.
부위원장 겸 구호부장에는 속칭 '손 감찰집' 부호의 아들로 마산청년구락부와 신인회, 노농동우회, 신간회 등 활동을 벌여온 무정부주의 성향의 손문기가 선임됐다.
역시 무정부주의자로 조선·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던 조병기가 총무부장으로 선임됐고, 어시장 점원에서 출발해 신간회 및 적색노조 활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사회주의자 최명출은 조직부장을 맡았다.
이와 함께 선전부장에는 기독교인으로 이후 한민회 간부와 미국 CIC 통역관을 지내기도 한 이일래가 선임됐고, 친일파로 부회의원을 지낸 손형업도 재무부장이 됐다.
전날 모임을 주선한 강태호는 산업부장, 유도에 능한 스포츠맨 박삼조는 치안대장, 최명출의 계매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한 사회주의 운동가 김종열은 서기를 맡았다.
3파가 뭉친 마산 건준
이처럼 마산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일제시대 친일파와 무정부주의자, 중도 좌파 민족운동가, 사회주의자 등 각기 다른 성향의 인사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서울의 경우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친일파들은 배제된 조직이었고, 부산에서 결성된 '건준 경남도지부'도 참가자격을 항일투쟁 경력이 있는 자에 한정했으며, 일제 때 공리 또는 일제에 협력한 사람은 철저히 배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산 건준도 조직의 핵심적인 부분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장악하고 있다. 조직과 서기,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대 격인 치안대장을 모두 진보인사들이 맡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3파가 연합한 마산 건준의 지도자가 된 허당은 이후 건준의 진보적인 색채에 불만을 품은 손문기, 조병기, 이일래, 강태호, 손형업 등이 한민회를 만들어 딴살림을 차리고, 그후 건준마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는 등 좌우 분열조짐을 보이자 아예 어느 쪽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그후 '조선독립촉진 마산협의회'결성을 계기로 3파가 다시 연합하게 되자 여기에 인사부장으로 참여한다. 이후 그는 미군정이 시작되자 고문으로 추대됐다가 46년 좌우합작을 지지하던 민족혁명당 마산 조직책을 맡아 다시 한번 양측의 연합을 시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끝내 좌우 대립이 심화되자 일체 공직에 나서지 않고 은거하다가 6·25전쟁을 겪으면서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당한 후 그 후유증으로 54년 6월 4일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출처 : 김주완, 김훤주 기자 블로그
1945년 해방의 기쁨은 2개월뿐이었다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2)해방 직후 불안해진 친일파
1945년 8월 17일 공락관(시민극장)에서 결성식을 가진 마산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명도석)는 사무실을 당시 마산백화점 2층(산업부장 강태호가 운영하던 것으로 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 지금은 마산특별시라는 술집으로 쓰이고 있다)에 두고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경호대장으로 명도석 위원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모셨던 정수영씨(99년 증언 당시 76세)의 증언에 따르면 건준의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는 해방공간의 치안유지였다. 특히 해방으로 인해 일본인과 친일관료들의 행정력이 일시에 무력화된 상황에서 건준은 마산의 정치와 행정을 모두 장악한 시민자치권력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안해진 사람들은 해방직전까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해온 친일파들이었다.
"일제말기 경방단이라는게 있었지. 말하자면 요즘의 민방위대 같은 조직인데 왜놈들의 유화정책을 한답시고 조선 사람한테 경방단장을 맡겼어. 세도가 대단했지. 경찰서장도 쩔쩔 매던 정도니까. 위안부도 이 경방단에서 모집해 보냈어."
건준이 업무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해방 때까지 경방단장을 맡고 있던 한모씨가 보따리에 돈을 싸들고 명도석 위원장을 찾아왔다. 당시 명 위원장은 흰색 한복차림으로 총무부장 조병기와 함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한씨는 당시 요리집 등을 운영하던 부호였다. 명 위원장 앞에 넙죽 엎드린 한씨는 대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건준 재정으로 사용해 주십시오"하고 돈 보따리를 내놓았다. 요즘으로 치면 적어도 5000만원~1억원 정도 되는 돈이었다.
당시 건준은 종이 한 장까지 명도석 위원장의 사비로 충당했다. 위원장은 치안대 대원들에게도 절대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엄히 지시해놓은 상태였다. 끝까지 창씨개명도 거부하고 꼿꼿한 삶을 살아온 그는 한씨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더러운 돈을 가져오느냐. 즉각 갖고 가지 못하겠느냐."
혼쭐이 난 한씨는 그길로 쫓겨난 후 건준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산월정이라는 유곽을 경영하던 허 학이라는 사람이 또 돈 보따리를 들고 찾아왔다. 그때도 명 위원장은 "살(人肉)장사 하던 놈이 어디라고 찾아오느냐"며 호통을 쳐서 쫓아 보냈다.
정수영씨는 친일파 부회의원이었던 손형업이 건준 재무부장을 맡았다는 기록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건준 사무실에서 한번도 그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처음 명부에만 그렇게 올려놓고 실질적인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풀이했다. 실제로 손씨는 얼마 안돼 건준을 탈퇴하고 우익단체인 '한민회'에 가담하게 된다.
건국준비위원회 치안 장악에 숨죽인 친일파들
그러나 이들 친일파들이 건준에 의해 어떤 처벌이나 제재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해방 전 일제의 경찰 노릇을 하던 조선인이 의분을 참지 못한 젊은이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전해진다.
김해출신 고정수라는 청년이 허 형사로 불리던 일본 경찰을 부림동 금곡원이라는 요리집에서 단도로 응징한 사건이다. 허 형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고정수는 사건직후 도피했다. 당시 마산시민들은 이 일을 모두 통쾌하게 여겼고 범인 고정수를 마산의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사건시효가 끝난 후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살다 병으로 죽었다.
또 마산의 고성여관집 아들이 일본인 술도가(양조장) 사장을 일본도로 즉사시킨 일이 있었다. 이후 그는 강도살인 혐의로 미 군정법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도 사실은 민족감정이 근본적인 동기였다고 전해진다.
이밖에 10월초 마산에서는 일본인들이 경비하던 창고가 습격당해 군인 1명이 사망했으며, 일본인 중대장이 그의 저택에서 살해당했다는 기록(박철규, 해방직후 마산지역의 사회운동, 역사연구 5호, 1997)도 있다.
그러나 건준은 오히려 일본인과 조선인의 충돌을 막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일본군은 패전으로 인해 독이 올라 있었고, 우린 해방을 맞아 의기양양한 상태였어. 그러나 우린 빈손이었고, 왜놈들은 여전히 무기를 갖고 있었지. 충돌하면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었어."
정수영씨에 따르면 당시 건준 치안대(정씨는 '보안대'로 기억하고 있었다)의 대원들도 일부 간부를 제외하고는 무기를 상시휴대하지는 않았으며, 필요할 경우 몽둥이 등을 이용했다고 한다. 대원들은 샤쓰에 검은 물을 들여 복장을 통일했으며, 팔에 '건준 보안대'라는 완장을 차고 다녔다.
치안대(대장 박삼조)는 건준 사무실 바로 맞은편의 단층건물인 경남자동차주식회사를 본부로 사용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조철(朝鐵)자동차부 자리였으며, 이후 경남은행 본점으로 사용돼오다 지금은 경남은행 창동지점과 증권회사로 쓰이고 있다.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대가 건준 사무실에 몰려와 명도석 위원장을 위협한 사건이 있다. 이들은 건준이 다량의 무기를 확보하고 일본군대를 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 "일본군의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가하고 탈취할 경우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며 건준 사무실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마산시사)
그러나 박계진씨는 <합포의 야화>(마산의정동우회, 1973) 2권에서 "알고 보니 일인들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 준비해 둔 배 기름을 건준 청년들이 압수한 까닭"이라고 적었다.
이와 관련, 정수영씨는 "당시 내가 보안대원들을 데리고 대구에서 철수해 온 일본 보병연대의 군수품을 압수한 적이 있다"면서 "그때 그들이 타고 온 트럭에서 압수한 군수품 중에는 휘발유 10여 통도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말을 미뤄볼 때 어쨌든 일본 군인들은 자신들의 군수품을 압수한 건준에 대해 항의의 뜻으로 건준 사무실을 찾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건준은 부산과 마산에 이어 진주, 창원, 함안 등 도내 전역에서도 속속 결성됐으며, 일부지역에서는 면단위 조직까지 결성됐다. 이들 조직은 함안군 연합자치유지회, 창원군 대산면 인민자치위원회 등으로 명칭도 약간씩 달랐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해방 후 일본 헌병에게 피살당한 창원 상남면 건준위원장
그런데 창원군 상남면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배정세)는 해방후 잔류해 있던 일본 헌병들로부터 끔직한 만행을 겪게 된다.
해방 10일째인 8월 25일 오후 2시 배정세 위원장이 살던 창원군 상남면 토월리에 일본 헌병 30여명이 갑자기 트럭을 타고 들이닥쳤다. 건준이 일본 군용트럭을 압수했으니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배 위원장과 황의근, 문기수, 정용관 등 젊은이들은 육탄으로 이들 헌병과 맞섰으나 역부족, 포박을 당한 채 진해 해군사령부로 끌려갔다. 나머지 청년들은 모진 고문 후 풀려나왔으나 배 위원장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후 미군이 들어온 후 진상을 알고 보니 일본 헌병들이 진해로 끌고 간 당일 손을 묶은 채 배 위원장을 바다에 수장시킨 것이었다. 관련된 헌병들은 무기징역 등을 받고 일본으로 송환됐으나 배 위원장의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한편 건준은 10월 8일 미군이 마산에 도착하면서부터 세력이 급속히 약화된다. 미군이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해방의 기쁨은 2개월도 채 이어지지 못했다.
선견대격인 스미스 대위와 이후 마산군정청장인 데일리 소령이 부임하면서 전진원 초대 마산경찰서장이 취임하자 건준 치안대의 역할도 사실상 소멸된다. 또 이때를 즈음해 일부 우익인사들이 건준을 탈퇴, 한민회를 결성하고,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을 단행하게 된다.
그 때부터 숨죽이고 있던 친일파들은 한민회라는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다시 기를 펴게 되고, 이들은 미군정에 빌붙어 좌익 척결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출처 : 김주완, 김훤주 기자 블로그
해방이후 친일파 청산의 역사
I. 서론
2007년 5월 2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 63억원에 이르는 땅이 국가 재산으로 환수되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이는 친일파 청산에 한 획을 그을만한 사건이라는 평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친일파라는 것이 더없이 멀게만 느껴지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반민특위가 해체된 이후 처음있는 친일파 청산 작업이라는 의의는 다시 생각해볼만 하다고 생각된다. 반면 이 법이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는 논란의 여지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60여년 전 반민특위가 창설되었을 때도 똑같이 반복되었을 것이라 여겨졌고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핌으로서 앞으로 특별법과 위원회가 나아가야할 길은 무엇인지, 당시의 실패원인을 앎으로서 앞으로의 특별법과 위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우선 친일파가 무엇을 가리키는 지에 대해 정의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친일파의 정의는 친일파의 범위와 성격을 규정하는 데 꼭 필요하고 이러한 범위와 성격은 후일 처벌대상을 지정할 때에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친일파의 성격은 무엇인지를 살피고 해방 직후 우리 민족의 친일파 인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는 친일파 청산하면 반민법과 반민특위만 떠올리게 되는데 대한민국 수립 이후 제헌국회에서 반민법이 발의될 때까지 있었던 다른 종류의 친일파 청산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실제적인 반민특위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구성되었던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지, 어떤 활동 상황을 전개했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반민특위가 해체된 과정을 살펴보겠는데 대부분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라는 외적인 요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국민의 지지를 있었더라면 그러한 위원회를 그렇게 쉽게 없애지는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반민특위가 해체되게 된 내적인 요인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2005년 발의된 특별법이 언제 제정되었으며, 어떤 법안을 포함하고 있는지, 위원회의 목적과 추진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위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이후에 미칠 파장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태까지 친일파 청산에 대한 논문과 책들을 보면 대부분 반민법과 반민특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특별법과 위원회 역시 이러한 친일파 청산 작업과 깊은 연관이 있고 이전의 몇몇 법안들도 친일파 처리문제를 논의했었다. 그러므로 해방 직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온 친일파 처리 문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지나온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II. 친일파란 무엇인가
1. 정의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친일파’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어느 역사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외세와의 친연성을 가진 정치집단’이라는 의미라기보다 민족적 정서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역사적 행위를 한 매국노, 민족반역자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1)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건대 외세와 친연성을 가지는 정치집단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시간적으로 현재는 물론 조선시대, 고려시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식민 지배를 받은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제국주의 국가에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유독 친일파=매국노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그러한 집단이 이러한 외세와 친연성을 가진 집단임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부 사람들은 친일파의 시작을 개화운동을 주도한 개화파에서 찾기도 하지만 보다 정확한 친일파라는 개념은 35년 식민지 지배를 염두에 두고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즉, 친일파라는 것은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자와 일제시기에 반민족행위를 저질렀던 자를 일컫는 개념인 것이다.2)
2. 성격
이러한 친일파들의 성격을 보면 정부관료가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총독부 산하의 식민지 시대를 살펴보면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던 고위관료에서부터 말단관료에 이르기까지 관료가 되는 것은 적극적인 친일은 하지 않더라도 지배구조상 조선인들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관직에 이름이 올랐지만 활동이 없었던 자를 제외한다면 이러한 정부관료들은 자의적이었던 타의적이었던 분명히 친일파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로 인해 35년의 지배가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친일파들이 계몽운동을 전개했거나 민족개량주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민족의 힘이 부족하므로 힘을 기르자는 생각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힘이 부족하므로 일제 지배하에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해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근대 서양문명을 수용한 지식층이 많았다는 것도 특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에서 공부한 지식층은 서구 근대문명을 긍정적으로 여겨 우리가 지향해야할 지점이라 보았고 제국주의와 파시즘과 같은 식민지배논리에도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친일파들은 한말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35년간의 지배에 걸쳐 조선인을 수탈하고 그들의 토지를 빼앗았으며 전쟁터로 내모는 등 수많은 일들을 저지르며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또한 민족정신에 여러 해악을 끼치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도록 앞장섰다. 그들의 존재가 해방 이후 무너진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고 정의를 확립하기 위해, 자주적 통일민족으로 새로이 국가를 정립하는 시점에서 이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III. 해방 후의 친일파 문제
1. 우파, 중도파, 좌파의 인식과 태도
우파들이 친일파를 보는 관점은 친일파도 같은 민족이니 포용하자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일본놈은 우리의 원수이니 설사 우리의 독립을 지원하는 자가 있어도 이를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나, 우리 한인 중에 설사 일본에 협조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이는 같은 민족으로써 포용해야 할 것이다.”
라는 김구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3)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친일파 문제를 바라본다면 악질적인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친일파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아래 용서받게 되고 철저한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이루어지기 어렵게 된다. 이는 우파들의 대부분이 자본주의 경제를 지지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의 권력기반이 지주, 자본가에게 있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이해를 따져볼 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좌파에 대항하기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았다. 이러한 우파의 대표적인 인물에 이승만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실제 친일파를 권력기반으로 삼고 이후 친일파 척결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중도파 역시 우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일파 척결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당위성은 가지고 있었지만 척결해야만 한다는 의지는 미약했다. 이는 중도파가 좌파와 우파를 합쳐 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했기에 확실한 입장을 취하기가 어려웠다는 점과 일제와 타협했던 전력이 있었던 사람이 존재했다는 점, 중도파의 입장이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친일파를 모두 포용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던 것이 그 이유라 생각된다.
좌파는 우파와는 정반대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승만의 “덮어놓고 뭉치라”는 우파의 무원칙한 통일운동을 비판하고 친일파를 민족의 적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친일파는 반드시 척결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민족적 입장에서 바람직하다 생각될 수 있으나 따져보면 그들의 생각은 이데올로기와 연관이 깊다. 좌파는 사회주의자들이 대부분인 노선이라 할 수 있는데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려면 지주와 자본가와 같은 사회지배계급을 척결해야 한다. 해방 직후 사회에서 친일파는 지주와 자본가가 대부분이었고 그런 사회에서 혁명을 이룩하려면 친일파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친일파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친일파와 연합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들의 입장대로라면 친일파들은 청산될 수 있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분단 이후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북한에서 친일파 청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점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살펴보면 우파, 중도파, 좌파 각 세력의 입장은 달랐지만 모두 장기적인 안목에서 민족의 통일을 바라보기 보다는 정치적 이권을 위한 관점에서의 친일파 해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건국준비위원회의 인식과 태도
해방직후 전국적으로 조직된 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는 총독부로부터 치안을 유지 명목으로 권한을 양도받은 단체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고 민족단체로 전국에 걸친 조직력으로 건국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지만 친일파 청산을 위한 문제에서 보면 미흡한 점이 많다.
해방직후 민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거나 관리 등을 폭행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민중의 대다수가 친일파의 청산을 바라고 있었고 그들을 처벌할 것을 원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생각해볼 때 친일파 청산의 문제는 해방 직후 이루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는 이러한 민중의 운동을 치안유지, 질서확립 이라는 명목으로 금지시켰다. 이러한 생각은 여운형의 연설에서 잘 나타난다.
조선 민족은 해방되었다 ······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으니 지난날의 아프고 쓰린 것들을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4)
쓸데없이 거리에 나와 몰려 다니지 말 것입니다. 시위운동을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 그리고 직접행동을 절대로 금지합니다 ······ 연합군이나 외국사람 앞에서 문화민족으로서의 초라한 태도를 보이지 마십시오 ······ 여러분 조용히 질서를 지키면서 우리 앞에 닥쳐 들어오는 새날을 기다려야 합니다.5)
어찌되었든 이와 같은 여운형의 연설은 우리나라의 해방이 자주적 해방이 아니라는 것과 건국준비위원회가 연합군의 진주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생각은 이 집단이 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를 위해 권한을 양도받은 집단이었다는 것과 그렇기에 물리적인 힘이 미약했으나 일제의 물리력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좌파와 우파를 한 곳에 모은 서로 다른 세력의 연합정권이었다는 점, 건국준비위원회 주도세력이 적극적으로 일제에 투쟁해오던 집단이 아니었으므로 근본적으로 친일파에 대한 적개심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로 인해 건국준비위원회는 국가 건설의 선결적 과제라 할 수 있는 친일파 청산의 가장 좋은 시기를 놓쳐버렸고 이후 미군정에게 친일파 청산의 민족적 문제를 양도하게 된다.
3. 미군정의 인식과 태도
이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친일파 청산의 문제는 점점 요원하게 된다. 맥아더 포고 제1호 제2조를 살펴보면 이와 같은 점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정부, 공공단체 및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명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한 기능과 업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하여야 한다.6)
종래의 정상적인 기능과 업무를 실행하라는 이러한 포고 덕분에 민중의 보복을 피해 해방 직후 뿔뿔이 흩어졌던 관료들과 경찰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해방 이후 청산되어야할 자들이 미군정의 보호 아래 다시 민중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민중의 큰 반발을 불러왔으나 미군정의 무력아래 진압되게 된다.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친일파를 민중이 보복하면 그들을 구속하는 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서의 친일파 제정법 제정이 있었다. 1946년 12월 30일 제6차 본회의원법초안 제2회 독회과정에서 정이형의원이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간상배 조사위원회’에 대한 동의를 구함으로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안은 관선의원과 민선의원의 대립적인 성격으로 관선의원에 의해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대립과 분열을 낳았으며 이후 초안과 수정안, 재수정안을 거치며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 재수정안’의 최종안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추상화, 형식화되고 끝내 미군정 장관이 인준보류 통지를 함으로서 끝맺게 된다.
이러한 미군정의 입장은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 일제관료 및 총독기구의 활용하고자 하는 실리적인 관점과 조선을 미국을 지지하는 자본주의 사회로 만들어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와의 대결구도를 위한 최전선으로 여긴 미국의 국익과 연관이 깊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책은 민중의 봉기를 좌절시키고 일제 식민지하의 지배구조를 존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부수립이후 친일파 청산이 난관을 거듭했던 점도 미군정 아래에서 이러한 지배구조가 존속되었기 때문이다.
IV. 반민족행위처벌법
1. 배경
친일파 청산 문제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과정은 국가기구의 성격, 국가 및 정권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표적인 친일파 청산 관련법이라 할 수 있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많은 민족세력이 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하였으나 통일된 정부를 이루지 못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이에 김구와 김규식 같은 많은 민족세력은 단독 정부 수립에 불참하지만 5·10 총선거 결과 구성된 제헌국회의 성격을 보면 당선된 198명의 국회의원들 중 대한독립촉성회가 55명, 한국민주당 29명, 대동청년단이 12명, 민족청년단이 6명, 기타 단체가 11명이고 무소속이 85명이다. 이러한 구성을 보면 우파계열인 한민당이 약화되고 무소속 의원들이 대거 출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무소속 의원들의 성향이 어떤지 밝히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후의 행적을 고려해본다면 진보적이고 민족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정부를 살펴보면 친일경찰·관료·군인 등 미군정 체제에서 존속된 일제시대의 구조를 개혁없이 그대로 유지해나감으로서 친일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정부와 국회의 차이로 인해 이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은 많은 불협화음을 내면서 진행되게 된다.
2. 활동과 성격
헌법 제 100조(10장 부칙)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7)
반민법은 이러한 헌법 조항을 기본으로 발효되었으며 1948년 8월 5일 제 40차 국회본회의에서 김웅진 의원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긴급동의를 제안함으로서 시작되게 되었다. 이들은 해방이후 각 단체에서 만든 초안, 선 이북의 인민위원회에서 만든 법안, 일본의 공직자 추방령, 중국 장개석의 전범 처리 등을 참고하고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의 친일파 숙청법안을 기본골격으로 반민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전문 3장 32조로 제1장 죄(1~8조), 제2장 특별조사위원회(9~18조), 제3장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절차(19~28조), 그리고 부칙(29~32조)로 구성되었다. 특히 친일파 조사 및 처벌에 있어 국회가 중심이 되고 정부는 협조만 하도록 되어있는데 이러한 점은 당시의 정부의 구성원의 대부분이 친일관료였다는 점에서 정부가 친일파 척결에 반대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었으나 이후 삼권분립과 헌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비판받을 소지가 있었다. 정부뿐만 아니라 경찰집단도 이 법안을 반대했는데 이는 경찰들의 대부분이 일제시대 경찰직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어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반민법이 9월 22일 이승만에 의해 법률 제3호로 공포되자 곧 중앙청에 임시사무실을 정하고 부속기관과 조직의 완성, 법의 보완 등을 통하여 반민특위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 등의 기본적 구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반민특위의 조직은 특별검사부, 특별재판부 그리고 특경대까지 설치하여 조사권, 검찰권, 사법권을 갖춘 독립적인 기구였으며 특별위원회 위원은 각 도별로 뽑아 국회의 승인을 얻도록 했다. 또 전국 각도에 반민특위 지부를 조직하였고 반민법을 보완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기관 조직법안, 반민족행위 특별재판부 부속기관 조직법안, 반민법중 개정법률안 등 반민특위의 활동을 위한 기본법을 제정했다.
운영과정을 살펴보면 특위위원과 중앙사무국·각도 조사부의 조사관은 신문, 출판물, 구전증언, 일제시기 관보, 직원록, 총력연맹 기관지, [친일파군상]등의 자료를 통해 우선 친일파 ‘일람표’, ‘반민자명부’를 작성하여 이를 기초로 친일파의 조사와 체포가 시작되었다. 또한 전국의 중심지에 ‘투서함’을 설치하여 투서를 받거나 혹은 제보를 통해서, 그리고 반민피의자의 자발적 자수 등을 통해서도 친일파의 조사와 체포가 이루어졌다. 조사와 체포는 특경대의 보호 하에 이루어졌고, 체포된 반민피의자는 각도의 형무소에 일시 수감되었다가, 조사관의 예비조사와 문초를 거쳐, 증거자료·조사관의 [범죄보고서] 등을 특별조사위원회에 넘기면, 특별조사위원회는 [의견서]와 함께 특별검찰부로 송치하였다. 특별검찰부는 송치된 자료 등을 재조사하여 기소여부를 결정하고 공판을 청구하면 특별재판부는 재판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반민특위는 7000여 명의 친일파를 반민피의자로 선정하고 1월 8일 화신재벌 박흥식을 체포함으로서 친일파 검거를 시작했으며 3월 28일부터 고종의 당질 이기용을 시작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8)
이후 8월 31일 공소시효 마감까지 총 8개월간의 업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총 취급건수 682건(남자 676, 여자 6건)
영장발부수 408
당연범수 198 : 중추원 참의 120, 습작 43, 지사 35
체포건수 305 : 미체포건수 73
석방 84, 송치 559
서울 282, 경기 32, 황해 26, 충남 25, 충북 26, 전남 27, 전북 35, 경남 50,
경북 34, 강원 19
영장취소건수 30, 도피자수 51, 주소불명자수 10
* 검찰부의 기소건수 221
* 재판부의 판결건수 40
체형 14건 : 징역 1년 집행유예 3건, 징역 2년 집행유예 1건, 징역 1년 5건,
징역 1년 6개월 1건, 징역 2년 1건, 징역 2년 6개월 1건, 무기징역 1건, 사형 1건
공민권 정지 18건 : 3년 7건, 4년 1건, 5년 6건, 7년 1건, 10년 3건
무죄 6건, 형의 면제 2건9)
이러한 반민특위의 활동을 친일파를 청산한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진행되었으나 판결을 보면 단 1건의 사형집행도 시행되지 않았고 형벌이 전체적으로 가벼운 편이다. 또 반민특위가 해산된 이후 14건 중 12건이 집행유예로 풀려남으로서 실제 처벌의 강도는 매우 약한 편이다. 2차대전후 프랑스는 2천71건에 사형을 선고했으며 3만9천9백명이 징역형의 판결을 받았다. 또한 벨기에는 5만5천건, 네델란드는 5만건 이상의 징역혁이 가해졌고 일본에서조차 21만여명이 공직추방령이 가해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반민특위에 의한 친일파의 처분은 미온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반민특위가 지속된 것이 아니라 와해되어갔고 외부적, 내부적 문제가 작용하여 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해체과정
반민특위는 활동 초기 단계에서 친일파 처리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높은 상황에서 정치적인 압력을 비롯한 각종 외압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활동 목적을 고수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정치적인 압력뿐 아니라 활동을 방해하는 여러 요인들이 나타나고 세 기관의 불협화음과 갈등 등으로 활동이 약화되어 갔으며, 궁극적으로 친일파 처리라는 민족적 과제를 수행하기보다는 정치적 타협으로 활동이 마무리되게 된다.10)
이러한 해체의 가장 큰 원인은 당시 가장 큰 협조자가 되어야할 정부의 중심에 친일파가 존재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수립될 당시의 관료들을 살펴보면 대외적인 장관과 같은 고위 관료는 대외적인 명분으로 인해 친일파가 적지만 말단으로 갈수록, 특히 경찰과 군인들의 대부분이 일제시기의 직위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파를 권력기반으로 하는 이승만이 반민법에 대해 반대하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이자 경찰과 군을 중심으로 보다 조직적으로 반민법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계속되는 담화를 통해 친일파의 처리 문제는 동의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시기상조론을 고수했고 경찰은 퇴진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반공구국총궐기 및 정권이양 축하국민대회’를 통해 절정에 이르렀다. 이 대회는 많은 국민들을 강제로 모은 반공궐기대회였지만 실제로는 반민법을 규탄하는 구호들이 나붙고 홍보물이 뿌려지는 반민법과 국회를 규탄하는 집회였다. 이처럼 담화와 대회를 통해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지만 1948년 10월 하순 수도청 수사과정 최란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전 수사과장 노덕술이 수도청 수사과장실에 모여 암살하기로 한 후 백민태에게 암살을 지시한 것과 같이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비록 백민태가 검찰에 자수함으로서 이들이 구소·기소됨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이는 당시 경찰과 군의 방해 움직임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많은 방해공작을 겪으면서도 반민특위는 그럭저럭 유지되었으나 국회프락치사건과 6.6경찰특위습격사건을 겪으면서 와해되기 시작한다. 국회프락치사건은 반민법을 지지했던 국회의원들을 위축되게 만들었으며 6.6경찰특위사건은 반민특위의 집행력을 파괴한 것이다.
국회프락치사건의 전모는 지금도 정치적 조작사건이다 사실이다 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이 사건은 소장파 의원들이 1949년 3월 19일 김약수를 대표로 유엔한국위원회에 외군철퇴요구진언서를 제출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문제로 삼아 수사를 진행시키는 도중 남로당을 수색하면서 [주주총회보고서]를 찾아냄으로서 국회의원들이 좌익계열과 접촉하는 사실을 탐지했음을 이유로 5월 18일 이문원, 최태규, 이구수 의원을 구속하게 된다. 이후 소장파 의원들이 이와 같은 명목으로 총 15명의 의원이 구속됨으로서 소장파 의원들이 이끌어나가던 반민특위는 그 추진력을 상실하게 되고 국회에서의 입지도 약해지게 된다.
이 사건이후 반민특위는 공산당이 움직인다는 식의 소문이 퍼져나갔고 반민특위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반공과 연관되게 되었다. 이러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민특위는 이러한 시위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를 구속하고 이는 경찰과 정면대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되자 경찰은 전원 사직하겠다는 결의문을 대통령에게 보내게 되고 이후 특위를 습격, 특경대를 해체하기 위해 6월 6일 출근하던 특위요원을 연행하여 불법감금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사실상 실효적인 집행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한민당 및 친정부 세력에 의해 국회가 주도됨으로서 반민법은 무조건 빨리 종결시키는 방향으로 개정되게 된다.
4. 해체원인과 한계
반민법의 해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미 권력화된 친일파에 의한 방해공작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반민특위의 구성원과 활동, 즉 내부적인 문제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첫 번째로 반민법에 규정된 반민족행위자의 범주와 처벌 규정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즉 처벌이 무거운 법에 적용되는 사람은 이미 사망했거나 극소수만이 처벌을 받았으며 대부분이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최저형이 규정되지 않았으며 재판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형을 면제하거나 경감할 수 있는 가감례 조항이 규정이 적용되었다. 이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친일파를 구제하기 위한 제도였지만 당시 친일파가 모든 부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본다면 일부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줄 수도 있었다. 즉, 당시 위원회와 재판관, 검찰관에 따라 형벌이 무거울 수도 가벼울 수도 있었지만 당시 시대상황으로서는 최대한 가벼운 쪽으로 몰려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민특위의 구성원에 친일파 처리의 주체로서 적합하지 않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시대에 관료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 처리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체포에 반대하거나 체포된 친일파의 석방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또 체포가 결정된 피의자를 미리 알려줌으로서 체포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끊임없이 적용대상 축소와 공소시효 단축, 해체를 내용으로 하는 반민법 개정을 주장해 친일파 청산을 어렵게 해나갔다. 특별위원의 협의에 따라 처벌할 친일파를 결정하는 반민특위의 제도내에서 이들의 존재는 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친일 행적을 알림으로서 반민특위의 도덕성과 권위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특별위원들뿐 아니라 조사관 역시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 반민법에 참가한 이들이 많았고 이로서 정치적인 입지에 따라 조사관들의 활동역시 많은 부분이 흔들렸다. 이러한 사항은 특별위원뿐 아니라 조사관, 재판관들 모두에게 나타났으며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반민법을 이용하다보니 특위,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 사이에 대립과 갈등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즉, 반민법의 실패는 권력의 중심에 선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의 방해가 주요원인이었지만 반민특위의 자격문제, 세 기관의 갈등을 통해 권위와 도덕성이 훼손되어 외부의 방해요인을 쉽게 이기지 못한 점도 있다고 여겨진다.
V.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1. 배경
앞서 살펴본 반민법은 여러 활동을 하면서 민족정기를 세우는 데 이바지하였으나 결국 1951년 2월 14일 반민법 등 폐지에 관한 법률이 공포, 시행되면서 폐지되었다. 그 후 군사정권 등을 거치며 친일파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990년대 초부터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의 ‘조상땅 찾기 소송’과 ‘조상땅 찾아주기 운동’을 통한 재산찾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련 국가소송은 법무부가 2006년 1월 파악한 바에 따르면 모두 24건이며 이는 친일파 송병준(4건) 이완용(3건) 이재극(5건) 민영휘(4건) 윤덕영(1건) 이근호(7건)의 후손들이 제기했다. 이중 국가승소한 사건은 5건, 소 취하된 사건은 4건, 국가패소 또는 국가 일부패소한 사건은 8건이며 7건의 사건이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수원지법 및 수원지법 여주지원 등에 계류 중이라고 한다.11) 이러한 사건들은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게 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정논의의 기폭제가 되었고, 사회 각 영역에서의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입법노력이 계속되어 오던 중 최용규 의원과 노회찬 의원이 공동발의 2005년 2월 24일 발의되어 결국 2005년 12월 29일 특별법을 공포, 시행하게 되었으며 2006년 6월 29일에는 특별법시행령을 공포·시행하였으며 2006년 9월 22일에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을 공포, 시행하게 되었다.
이 법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우리 미족을 탄압한 반민족행위자가 그 당시 친일반민족행위로 축재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여 거래의 안전을 도모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12) 이처럼 특별법은 반민법과 같이 징역, 집행유예와 같은 형사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 부당하게 취득한 재산을 국가로 환수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제정되었다.
2.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특별법은 대통령 소속하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를 두고 재산환수를 추진해나가는데 위원회의 업무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조사 및 선정,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조사 및 친일재산 여부의 결정, 일본인 명의로 남아있는 토지에 대한 조사 및 정리, 이의 신청 처리, 조사 자료 보존, 그 밖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사항이다. 위원회는 위원장 1인과 상임위원 2인을 포함한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위원장은 위원 중 대통령이 임명하며 임기는 4년이고 위원회도 4년까지이나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1회에 한하여 2년 연장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하게 된다. 위원의 자격요건은
판사·검사·군법무관 또는 변호사의 직에 10년 이상 재직한 자
공인된 대학에서 역사 관련학과의 전임교수 이상의 직에 10년 이상 재직한 자
역사고증·사료편찬 등의 연구활동에 10년 이상 종사한 자
3급 이상 공무원으로서 공무원의 직에 10년 이상 있거나 있었던 자로서 10년 이상의 경험과 연륜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 위원회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김창국 위원장, 장완익 상임위원 겸 사무처장, 이준식 상임의원, 박영립 위원, 양태원 위원, 이윤갑 위원, 이지원 위원, 조세열 위원, 하원호 의원 등 총 9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3. 위원회의 활동과 성격
위원회에서 대상으로 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범위는 특별법 제2조에 규정되어 있는데
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제6호 내지 제9호의 행위를 한 자로,
6호 :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를 한 자
7호 :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
8호 :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의원 또는 중의원으로 활동한 자
9호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찬의, 부찬의 포함)로 활동한 자
다만 이에 해당하는 자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결정한 자는 예외로 한다
나.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자 등 친일의 정도가 지극히 중대하다고 위원회가 결정한 자
라고 정의하고 있어 논란의 소지가 적도록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누가봐도 명백한 민족반역행위자들이 그 대상이다. 그리하여 환수한 재산은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의 예유, 생활안정 지원금이나 독립운동 기념사업에 쓰인다.
친일재산국가귀속절차를 살펴보면 우선 <조사개시 결정>을 하게 된다. 이같은 결정은 위원회에 의해서나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등 다양한 방면의 요청에 의해서도 조사개시가 있을 수 있는데 의결과 동시에 해당재산은 보전처분신청을 하게 된다. 이때 선정사실을 조사대상자에게 통지하게 되는데 통지를 받은 자는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사활동>을 통해 친일재산에 대한 실지조사 및 친일재산을 관리, 소유하고 있는 자에 대하여 관련자료 제출요구 및 진술청취, 감정 의뢰 등 조사활동을 하고 <국가귀속 결정>으로 재적위원 과반수의 찬성이 있다면 친일재산의 국가귀속 여부를 결정하고 그 대상재산을 관리·소유하고 있는 자에게 결과를 통지하고 <국가귀속조치>를 하게 된다. 또한 각 과정마다 조사대상자가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위원회는 2007년 5월 2일 위원 9인 전원의 찬성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고희경, 이재극, 송종헌, 조중용, 권태환, 이완용, 송병준, 이병길, 권중현 등 9명의 토지 총 154필지(25만4906㎡), 공시지가 총액 36억원(추정시가 약 63억원) 상당의 친일재산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의결했다. 위원장은 “2006년 7월 13일 친일재산조사위가 발족한 이래 약 9개월 동안 특별법에 따라 1차로 친일반민족행위자 452명의 명단과 가계도를 작성했고, 그 중 93명이 소유한 시가 1185억원 상당의 토지도 법원에 보전처분을 신청해 친일재산 여부를 조사중”이라고 말했다. 또한 특별법 발효이후 제3자에게 거래된 토지도 환수할 것임을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이처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반민법과 반민특위처럼 과거에 실패로 끝났던 법과 위원회가 아니라 지금 현존하고 있고 앞으로 더 많은 활동을 할 것이라 여겨진다.
4. 특별법과 위원회의 과제
특별법은 반민법과 반민특위가 해체된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한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해방 직후 이루어졌어야 할 친일파 청산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당사자 대부분이 사망한 이 시점에서 제대로 된 친일파 청산은 어찌보면 불가능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법안을 통해 재산을 환수하는 일부 조치만이라도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특별법과 위원회가 헤쳐 나가야할 문제들은 매우 많다.
첫 번째로 특별법의 위헌문제를 들 수 있다. 위헌문제는 반민법이 제정되었을 당시에도 있었던 논란이지만 헌법 13조 2항에는 ‘소급입법에 의해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어 특별법은 제정당시부터 위헌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헌법은 모든 법 위에 존재하는 가장 큰 법률로서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릴 경우 특별법은 그 자체가 와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이라 들 수 있다. 이 점을 들어 환수 대상자가 된 친일파의 자손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두 번째로는 재산환수를 위한 근거가 될 자료의 부족이다. 일제식민지 당시의 자료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양이 소실되었고 개개인이 일부러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민특위 당시의 조사결과도 인위적인 훼손에 의해 지금은 그 자료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형편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재산환수를 근거할만한 자료가 부족하고 있는 자료들도 흩어져버려 조사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세 번째로는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원래 친일파 청산문제는 해방 후 곧바로 이루어졌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해방 후 6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친일파 당사자 대부분은 사망했고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들이다. 후손들이 직접 친일 행위에 가담했던 것이 아니라 조상이 가담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조상들의 과오로 인해 현재를 살고 있는 후손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철저한 자료조사와 근거자료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로는 대통령 소속이라는 점이다. 대통령 직속으로 운영되는 위원회들의 경우 정권이 교체되면 여러 정치적인 문제로 활동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친일파 청산이라는 큰 목적으로 가지고 이루어지는 만큼 이번만큼은 흐지부지되지 않기를 바란다.
특별법과 위원회는 지금 현재진행형인 친일파 청산작업이다. 해방 당시와는 다른 많은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 남은 3여년간의 활동을 기대해본다.
VI. 참고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란 무엇인가], 아세아문화사, 1997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선인, 2003,
민족문제연구소, [한국 근현대사와 친일파 문제], 아세아문화사, 2000,
김삼웅·이헌종·정운현 공저, [친일파:그 인간과 논리], 학민사, 1990,
역사문제연구소,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비평사, 1993
이송희,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신라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2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http://www.icjcp.go.kr/
VII. 결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친일파라는 것은 단순히 외세와 친연성을 가지는 정치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35년 일제 식민지 시대를 고려해보면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자와 일제시기에 반민족행위를 저질렀던 자를 일컫는 개념이다. 이러한 친일파는 무너진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고 사회 정의를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시점에서 이에 반대하는 대항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청산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해방 전후 우리나라는 우파와 좌파, 중도파로 나뉘어져 각기 다른 생각으로 새로운 국가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파 청산에 관한 문제도 그들의 이념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 우파의 경우 친일파도 같은 민족으로 포용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친일파와 손을 잡기도 했다. 중도파도 우파와 비슷하게 친일파 척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은 가지고 있었지만 척결해야 한다는 의지는 미약했다. 하지만 좌파의 경우 이와는 달리 친일파를 민족의 적이라 생각하고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도 그들의 이념적 노선에서 친일파는 반드시 배제되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며 정치적인 이해에 따라 친일파와 협력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각 세력의 입장은 달랐으나 모두 정치적인 이권의 관점에서 친일파 문제에 접근했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 전국적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의 경우, 이 시기가 가장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졌어야 할 시기지만 여운형 등 건준위의 지도자는 치안유지와 질서확립이라는 명목으로 친일파 청산을 금지시켰고 이는 미군정에게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문제를 양도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미군정은 실리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국익을 고려해 친일파인 관료, 군인, 경찰을 그대로 미군정 관료로 등용하였고 이후 친일파 청산 문제도 어렵게 만들었다. 이때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 제정이 최초로 시도되었으나 관선의원에서만 이루어진 한계가 있었고 수정이 거듭될수록 추상화, 형식화되어 끝내 인준이 보류되게 된다. 만약 인준되었더라면 이 법은 최초의 친일파 청산과 관련된 법으로 실제적인 청산이 이루어지게 될 첫걸음이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헌법이 만들어지고 5·10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무소속 의원들이 대거 당선된 이 선거에서 이들 소장파 의원들은 반민법과 반민특위와 같은 친일파 청산을 시도했으나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일제시대 정부구조를 큰 개혁없이 그대로 유지해나감으로서 친일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반민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구성되고, 특별검사부, 특별재판부, 특경대를 조직해 친일파 청산작업이 계속되었으나 이미 관료화된 친일파는 정부와 경찰, 군을 통해 지속적인 방해작업을 펼쳤으며 국회프락치 사건, 경찰특위사건 등 외부적인 방해와 내부 구성원간의 불협화음, 처벌규정의 문제, 친일파가 포함된 반민특위의 도덕성과 권위 등 내부적인 문제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친일파 재산 찾기 소송이 지속됨에 따라 국민 여론이 악화되면서 친일파의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게 하는 특별법 제정논의가 계속되었고 2005년 2월 24일 발의되어 12월 29일 공포, 시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별법의 활동 결과 지난 2007년 5월 2일 63억원에 이르는 친일파의 토지가 몰수되었고 앞으로도 친일파 재산의 환수 여부를 조사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특별법은 반민법과 반민특위처럼 과거의 법이 아니라 지금 현재 존재하고 시행되고 있는 법령이며 그렇기에 해결해야할 과제도 많다. 아직도 위헌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근거자료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미 실제적 활동을 했던 친일파가 모두 사망한 상태라 그의 자손들에게 피해아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 등 여러 가지가 고려되어야만 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우리 민족의 친일파 청산은 해방 직후 이념 문제로 대립되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지금에서라도 과거의 실패를 교훈삼아 제대로 된 친일파 청산이 재산환수라는 형식으로나마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
1)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란 무엇인가], 아세아문화사, 1997. 24쪽.
2)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선인, 2003, 12쪽.
3) 조규하·이강문·강성배(공저),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13쪽
4) [매일신보] 1945.8.17
5) [매일신보]1945.8.17
6) 1945년 9월 7일 맥아더 포고 제1호
7) 국회입법조사국, [헌법제정회의록(제헌의회)], 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67, 99쪽
8) 민족문제연구소, [한국 근현대사와 친일파 문제], 아세아문화사, 2000, 214쪽
9) 김삼웅·이헌종·정운현 공저, [친일파:그 인간과 논리], 학민사, 1990, 96~97쪽.
10)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선인, 2003, 301쪽.
11) http://www.moneytoday.co.kr, 2006.2.6일자 서동욱 기자
출처 : 한 아고리언의 레포트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중 일부
1945.8.15~46 지방인민위원회 들여다 보기
일제통치가 끝나고 해방을 맞이했을 때 고향을 떠났던 많은 실향민들이 귀향하게 되었다. 그들이 군과 읍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전 지역에 걸쳐서 인구 폭발을 일으켰다. 귀향하여 본 농촌은 농업구조가 그들이 떠났을 때와 다른 바가 없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지주들이 일제통치자와의 결탁으로 인해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1945년의 8월과 9월의 해방 전성기가 지나자 부활된 식민경찰의 요원들에 의하여 보호 받으며 변함없는 일상을 누리게 되었다. 토지에서 쫓겨나 공업부분으로 끌려간 농민들이 보다 오래 떠나 있었다면, 그들의 새로운 일에 알맞는 의식으로 발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진행이 중단되었으므로 대부분은 그렇게 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의 신체는 동원되었으나 정신은 여전히 농민적 의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세상에서 의식을 깨우쳐 돌아왔으며 한국 농업구조의 기본적 질서의 불균형에 대한 보다 확실한 인식을 갖게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노동자적 농민(노동자도 농민도 아닌)이 농민 정치인으로 변한 경우가 흔히 있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13개 도마다 도 단위의 건준의 지부가 불과 수 일 안에 생기게 되었다. 8.15 이후 3개월 사이에 건준의 지방 지부가 가장 작은 마을 단위까지 번창해 갔다. 9월 6일의 인공 성립과 더불어 지방의 건준지부들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아주 적은 경우에만 건준의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한민당 같은 타 정치 단체에 합류하거나, 10월에 가서 신생 인민당에 합류하였다.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위원회들은 각 계층별로 농민동맹,노동조합,치안대,학생,청년,여성들의 단체에 의하여 보조되었다. 이 현상은 흩으진 파벌이나 정당이 아닌 하나의 정치 운동으로 보았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인민위원회와 대중조직이 함께 일하였다. 이 운동은 방방곡곡에 파급되었다.
대부분의 인민위원회들은 조직,선전,치안,식량관리,재정의 부서를 갖추고 있었다. 혹은 필요에 따라서 구호,난민.일용품.노동관계,소작료 등을 다루는 부서를 갖추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지방 인민위원회들은 현지의 일인 혹은 부유한 자들로부터 기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떠나는 일인들로부터 주택 혹은 공장 등 그들의 재산을 맡긴다는 위임장을 받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군 단위의 인민위원회 구조 및 강령을 예를 들어 보면-
# 경상남도 통영군 자치 인민위원회
* 위 원 장 ; ○ 상 훈
* 부 위원장 ; ○ 덕 윤
* 총무 부장 ; ○ 성 관
* 치안 대장 ; ○ 학 수
* 조직 부장 ; ○ 재 수
* 선전 부장 ; ○ 하 수
* 재정 부장 ; ○ 용 식
* 교통 부장 ; ○ 용 건
* 용선 부장 ; ○ 수 만
# 강 령
* 모든 일인의 재산은 한인들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
* 모든 토지와 공장은 노동자들 및 농민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 모든 남녀는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반도 전역에 수백 개의 지방자치 인민위원회를 퍼뜨린 조직의 재능을 누가 발휘했는지를 정확히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학생들과 고향에 돌아온 정치범들이 주된 역할을 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 제대군인,지방의 엘리트,지방의 지주,심지어 일본치하의 전직 관료들까지 참여하였다. 이 모든 것은 8.15 이후 일어난 조직의 팽창의 일부였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그처럼 빠르게 이루어 질 수 있었을까? 일제 패망에 뒤이은 초기 단계의 조직은 에릭 흡스바움이 연구한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농촌에 있어서의 자연 발생적인 동원에 해당할 것이다.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정체 상태의 농민들이 하룻밤 사이에 정치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에릭 흡스바움은 이렇게 표현했다.- '공화국을 선포했다는 소식이 온 마을에 퍼졌다.
환희에 찬 분위기가 이러한 소식의 전파를 크게 촉진시켰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시시때때로 이 즐거운 소식을 퍼뜨렸다. 모든 사람이 선전원이 되었다'- 변화가 일어난 모든 지역에 있어서의 현저하게 공통적인 현상의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외부에서 부과됨이 없는 그 지방 자체의 변화였다.米점령당국이 보다 통찰력이 있었더라면 농민들이 세계 어느 지역의 농민과도 같이 米점령당국 못지 않게 현지인이 아닌 '선동가들'(북에서 온 사람들을 포함하여)을 불신한다는 것을 알아 차렸을 것이다.
8.15 해방 직후 여러 주 동안 건준,인공 및 지방자치 인민위원회들이 근 반세기만에 등장한 한국 정부를 대표했다. 특히 농촌에서는 인민위원회들이 아직 제대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우파들의 기선을 제압했다. 인민위원회들과 그 산하 조직이 불과 수 주 사이에 농촌 조직을 지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속하게 내려진 뿌리 때문에 이에 대치되는 조직을 구성하려는 후일의 시도는 지방자치 인민위원회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1945년 가을에는 인민위위회들이 비합법적인 것이고, 다른 집단이 권력을 장악했으며 인민공화국은 실존한 것이 아니라는 등의 소식을 퍼뜨린다는 것마저 어려운 것이었다. 인공과 인민위원회의 소식은 산꼭대기의 봉화,숲속의 북소리,연락원 및 구두 전달을 통하여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인민위원회가 제거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는 데는 여러 달이 걸렸다. 인공의 반대파들이 산에 봉화를 올려서 그들이 기대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서울에 있는 인민위원회 반대파들이 대구에 있는 전화교환원이 믿을만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여 이 지방자치 운동의 전복은 어려운 것이 되었으며, 米점령당국 하지의 말처럼 '화산의 가장자리를 걸어가는 것'같은 형국이었다.
각 도에 있어서의 인민위원회 세력은 1) 경상남도 2) 전남,경북 3) 전북,충남,경기 4) 강원 5) 충북 순이었다. 해방기의 정치에 관한 모든 기존 문헌은 인민위원회의 존재를 언급했으나, 이 지방차치 운동의 범위에 관한 설명은 시도하지 않았다. 한국 문헌에서는 이 인민위원회들에 관한 정보가 극히 드물다.
흔히 '공산주의적'이라고 지목을 받았던 이 운동에서의 공산주의자나 좌파에서도 그처럼 자료가 귀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들 자신이 이 운동의 숨결을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좌파에서는 당시(그리고 뒤이어 이북에서) 인민위원회를 참된 인민의 조직이라고 치켜 세웠으나 그들의 활동 범위와 지역을 규정 지으려고 노력한 경우는 드물다.
서울시인민위원회 제반시책(45.10.14)
서울시인민위원회에서는 금후 시정을 접수하는 대로 곧 시행해 나갈 제반시책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一. 경성부는 서울시로 개칭함
一. 제 중소상공업은 그 자유스러운 발전을 허여하고 國策의 선에서 탈선되지 못하도록 시인민위원회의 감시하에 둠
一. 전차·전기·수도·瓦欺는 市營으로 함
一. 평화산업의 복구와 재건확장에 전력을 다해서 생활필수품의 확보 및 윤택에 노력함
一. 저물가정책을 견지하고 소비조합 공설시장 등을 적당하게 조직하며 폭리 혹은 부정상인을 단호히 일소함
一. 수요공급의 형식에 의해서 특정한 상품에 대해서는 배급제도를 실시함
一. 공장제도에 있어서 근로자의 후생시설을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함
一. 몰수한 모든 가옥은 시에서 직영관리하고 공공시설에 사용하는 이외에 근로자 及 빈민에 대여함
一. 공장사업의 급속한 확장과 토목사업의 실시에 의해서 실업을 방지하고 무위태만의 유민을 일소함
一. 탁아소·대중식당·공중세탁소의 보급에 의해서 부인의 가사로부터의 해방을 원조함
一. 양노원 고아원을 적당히 조직하여 우선은 鰥寡孤獨 老幼를 구제함
一. 소학교의 대량적 확장 及 증설에 의해서 市費에 의한 의무교육제의 급속실시를 촉진함
一. 도서관, 영화관 기타의 시설을 확충하고 과학자, 기술가 기타 문화인의 우매방법을 희구함
一. 기술 정치 등의 민중대학, 공장 기타 직장, 학교를 적당하게 조직하여 과학기술 문화의 인민화에 노력함
一. 청계천 기타의 溝川을 개수하고 하수의 설비를 완성시키며 도로를 청소하고 功勞를 通築하는 사업을 급속히 함
一. 敵日本에서 몰수한 사원 등은 근로시민의 요양소로 개변함
一. 빈민층의 주거를 적당하게 개선하고 가두 及 가옥 주변의 식수를 장려하여 수도의 미관과 위엄을 보전함
一. 식량 及 연료대책의 확립
一. 일본제국주의적 과세를 철폐하고 단일루진세를 실시할 것
(시책은 市政接受하는 대로 즉시 진행함)
출처 : (매일신보 1945.10.14)
인공중앙인민위원회 성명(45.10.14)
朝鮮人民共和國 中央人民委員會에서는 14日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아놀드」장관의 성명이 발표되자 11日 동위원회에서는 그에 대한 담화를 발표함으로서 장관의 성명이 어떠한 오해나 혹은 잘못 전하여진 「데마」에서 출발된 것이라고 하였거니와 여기에 한층 더 조선인민공화국의 성격과 그 사명과 그 태도를 분명히 하고 동시에 군정당국의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새로운 담화를 요망하였다.
聲明
(略) 2) 조선의 완전독립을 위하여서는 조선민족의 통일이 절대로 요청된다. 일본제국주의의 주구가 되어 「황민화」운동으로 조선민족의 착취와 압박으로 강화시키며 일본제국주의 강탈전을 동양민족해방을 위한 「聖戰」이라 하여 조선청년을 전장으로 채찍질하여 몰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죄악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그들은 또 다시 조선민족의 희생에서 저의들의 생명재산을 유지하려고 조선민족진영을 분열시키며 완전독립과 통일정부수립을 조해하고 있다. 그들은 또 다시 外力에 의존하여 민중을 억압하려고 한다. 이 민주반역자들을 배격하고 타도하고 매장함으로서만 우리 민족의 통일은 완성되며 완전독립의 기원은 달성될 것을 조선의 인민은 깨달아야 한다. 민족반역자의 존재와 그 跳梁을 허용하는 것은 조선민족의 치욕이며 우리에게 가하여 오는 민족적 悔蔑은 이 도배의 음모로 생기는 민족통일의 분열에 기인한다는 것을 명기하라.(略)
1945年 10月 14日
조선인민공화국중앙인민위원회
출처 : (매일신보 1945.10.14)
건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 감사결의문(45.11.20)
(略) 우리는 연합군이 조선에 있어서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소탕하고 그 유기적 부분인 친일파를 철저히 숙청함으로써 조선민족에게 완전해방의 문을 열어주고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모든 정치운동에 자유발전의 길을 부여하고 나아가서는 조선민중의 총의로써 수립되는 인민정권에 적극적인 지원을 보낼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천부의 好運을 향유하고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는 일단으로써 전조선 각도 각 군면에 인민총의로써 조직되고 자연적 통일로써 결속된 각지 인민위원회의 대표자 5백여명이 일당에 참집하여 11월 20일부터 3일간 중앙인민위원회 일체가 되어 조선 완전해방을 위한 모든 중요한 당면문제를 토의 결정하는 대회를 열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반드시 조선의 완전독립을 하루라도 빨리 달성하는 최선의 길이오 나아가서는 우리를 위하여 노고하는 연합군으로 하여금 전 조선민족의 뜨거운 환호와 전송에 싸여 하루 속히 그리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유일의 길이며 따라서 우리는 진정으로 연합국에 대하여 감사하는 가장 옳은 방법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略)
1945년 11월 20일
조선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
출처 : (자유신문 1945.11.21)
6. 서울시인민위원회 격문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찾은 것, 그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는 곳으로 링크되어 있음(팝업창 차단 해제되어 있어야 함)
국한문. 1945년 10월 우파세력과 정총대연합회 주최로 개최되었던 미군시민환영대회에 서울시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좌익세력들이 불참했던 이유를 선전하기 위한 격문이다. 이 격문에서 서울시 인민위원회는 일본제국주의의 주구들이 미군정과 민족운동세력들을 이간질시키고 있으며,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주최하는 환영대회는 참가할 수 없다고 적었다.
출처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