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빈곤
윤희경
“ 요즘 자발적이란 단어가 흔하게 사용 되더라구요. 자발적 금혼. 자발적 가난, 자발적 외톨이. 이런 것들이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힘들어서 그러겠지요?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게 싫어서 만들어낸 핑계 같아서 반감이 들더라구요. 사람들이 그립고 혼자 있는 게 싫은데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고독한 사람에게 사치처럼 들려요. ”
맞는 얘기라 여기는 분들도 있겠다.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고 교류하며 집단 활동을 하면서 혼자보다는 같이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서 사람들의 삶의 패턴은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특히 홀로 지내는 시간을 원하는경향이 두드러진다. 깊은 산골에 뭍혀 자연인으로 살고자 하는 로망을 보여주는 ‘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 제목처럼 사람들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 지친 영혼들을 안고 자연의 품에서 회복하기를 원하나 보다. 이러한 시작은 1845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월든walden>이라는 작품을 통해 인간 삶의 단순함을 써 내려간 글이 한참의 세월이 지나 다시 관심을 받으며 책을 통해 인간의 고요한 삶에 대해 조망 해보게 했다. 산업 혁명 이후 인간의 삶은 자신이 자기다움을 잃어가고 기계화 되어가는 모습에서 인간의 본모습이 상실되어감을 느끼며 다시 인간성 회복 운동처럼 일어난 활동이다. 결국 인간다움을 자연을 통해서 섬세하게 찾아가는 소로우의 필체는 우리나라 법정 스님도 소로우가 호수가에 자급자족하며 지어서 혼자 살던 그의 오두막집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영화 :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외치는 ‘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즉 ‘지금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라틴어. 선배들의 비밀모임에서 읽던 책이 바로 소로우의 월든이였다.
그렇다면 왜 현대화 되어가는 이 시점에 다시 자연으로 귀의하고자 하는 이들은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일까? 어디서 인간다움의 온기를 찾으려고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가까이에서 나를 이해 해주는 사람.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호수, 강물 자연. 월든의 책에는 자발적 빈곤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같은 뜻이다. 꼭 필요한 것 이외에 더함이 없이 사는 것. 그렇다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게 도대체 무엇인가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여러분은 무엇이 필요한가요?
월든에서 소로우는 의식주에 기본을 갖추어야 하고 그의 말처럼 “내가 숲으로 간 이유는 사려 깊은 삶을 살면서 인생의 본질적인 것만 직면하고,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과연 배울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라고 한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 만 이라는 대목은 자발적 가난과도 통한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생각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자발적이라는 말에는 동의하나 빈곤, 가난이라는 말은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선택이라고 바꾸고 싶다. 이유는 자발적인 선택이 가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발적 고독이라는 단어 역시도 자신이 선택 했을 때는 다른 것 보다 충족 될 수 있기에 여기에 가난이나, 고독이나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앞의 자발적이라는 단어와 상충되는 의미임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나 역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서도 아주 잘 지낸다. 하지만 나의 주변은 또한 많은 사람과 교류를 하고 연대하고 살고있다. 이러한 방식의 내면은 많은 이들과 사회적 공동체임으로 얼마든지 오픈하고 친밀하며 자유롭다. 진정한 자발적 고립이란?
사회적으로는 많은 교류를 하면서도 철저한 사람 경계를 가지고 자기 개방이 없는 이들이야 말로 바로 자발적 고립이 아닌가 한다. 반대로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사람에 대한 마음에 온기가 일어난다면 당신은 가난하거나 고립된 외로운 사람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군중 속에 고독이라고 많은 사람숲 속에서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이 진정으로 외롭고 고독한 사람일 것이다. 이는 자발적 외로움이 아니라 타의적 외로움일 것이다. 외로울 때 밤하늘에 멀리서 반짝임을 멈추지 않는 별, 혼자서도 늘 그렇게 떠 있는 달을 보자. 달은 해가 있음을 알기에 자기 몫을 다 했음에 외롭다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