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설교가 성도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커요. 그래서 제가 주로 선택하는 설교 방식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3대지 설교 그래서 주제가 같은 주제로 설교를 하되 소항목이 3개로 나눠져서 하는 3대지 설교가 있고 두 번째는 원포인트 설교가 있습니다. 그냥 주제가 하나인 거죠. 요즘 제가 주로 원포인트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주제 설교 제가 오후 예배 때 주제 설교를 좀 많이 했죠. 그래서 주제 설교가 있고요. 그다음에 강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냥 말씀을 말씀으로 이렇게 풀어가는 강의 설교가 있고 주로 수요 예배가 강의 설교가 될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 설교가 있습니다. 이야기하듯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성경 자체가 이야기로 되었으니까 그것을 이야기로 다시 제가 구성해서 하는 방식을 이야기 설교라고 합니다.
제가 다양한 설교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어떻든 이게 여러분에게 잘 전달이 되고 여러분에게 잘 소화가 되고 그리고 잘 기억해서 여러분의 삶에 영향력을 끼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다양한 설교 방식을 택합니다.
오늘은 제가 조금 설교 방식을 바꿨어요.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이런 설교 방식이 아닌 다른 설교 방식인데 옴니버스식 설교라고 합니다. 이거는 설교 방식에 나와 있는 건 아닌데 일반적으로 세상에서는 많이 쓰는 이렇게 방법이에요.
대표적으로 뭘 생각하시면 되냐 하면 개그 콘서트가 그런 방식이에요. 개그 콘서트라는 큰 타이틀 아래 그 안에 보면 각자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지죠. 같은 주제나 내용이 없고 각자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이렇게 풀어가는 것을 옴니버스의 구성이라고 이렇게 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 안에 좀 넣으려고 하냐 하면 원포인트 설교를 하다 보니까 이게 제가 정말 전달하고 싶은 내용들이 너무 오래 이렇게 기다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종종 가끔씩은 이렇게 옴니버시식 설교로 준비해서 설교 안에 다양한 주제가 들어가고 그리고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시도를 몇 번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아래하고 열심히 이렇게 준비했어요. 금요일날은 장례가 나서 갔다 오고 그때부터 이렇게 설교를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분명히 옴니버스식으로 준비한다고 했는데 끝날 쯤 되니까 이거 원포인트 설교가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렇지만 준비한 대로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시고 중간에 약간 주제와 다른 내용이 나와도 그렇구나라고 이해하시고 말씀을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 당시는 교회가 완전히 지금처럼 이렇게 세팅된 시대가 아니잖아요. 교회가 출발할 때의 이야기니까 교회의 원형에 가까운 이야기인 거죠. 그래서 우리가 교회의 원래 모습이 어땠을까라고 생각할 때 그러니까 신약의 이 서신서들을 보면 돼요.
그중에 에베소서가 이 교회론에 대해서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서신입니다. 22절에 보면 또 만물을 그의 발랄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거예요. 교회라는 공동체가 있고 이 공동체에 따지고 보면 우두머리 아니면 머리 역할을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예수님이 교회를 주관하시도록 해야 된다는 의미인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의 주관자가 예수 그리스도일 때 교회가 교회에 다울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위해서는 성도와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를 받아야 돼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는 말씀 앞에 말씀 안에 잔뜩 있어요. 그래서 말씀으로 교회가 이끌려간다는 의미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그분의 뜻 안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그래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신 방향을 따라서 그분의 인도하심의 내용에 충실하게 일하는 것이 교회의 본래의 모습이고 또 그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교회는 교회로 전주할 수 없어요.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말씀에 순종해야 돼요.
여러분이 기대하는 교회에 우리가 우리는 교회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마치 이렇게 교회를 다니면서도 우리가 교회에 대한 갈망이 있잖아요. 우리 교회가 좀 더 좋아졌으면 목회자에 대한 갈망도 있죠. 우리 목사님이 좀 더 좋아졌으면 이런 갈망이 있어요. 이 교회에 대한 갈망이 채워지려면 교회가 말씀에 순종함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교회는 교회에 다 올 수 없다는 거예요. 교회가 교회로 기능하려면 교회는 반드시 말씀에 대한 따름과 순종함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의 메시지가 주관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런 의미로 본다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주관하기보다는 사람의 메시지가 교회를 주관하는 경우가 더 많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메시지가 많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과 거리가 먼 말씀들이 선포된다는 의미인 거예요. 기록된 원형의 말씀과는 다른 그래서 목회자가 나름 잘 해석은 했는데 달콤한데 우리의 기는 이렇게 만족하게 하는데 정작 말씀의 원형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져 있어요.
근데 요즘에 성도들은 또 목회자들도 그렇죠. 말씀이 원형대로 전하기보다는 말씀을 자기의 가치관과 생각으로 경험으로 잘 풀어내서 전하는 걸 되게 좋아해요. 그러다 보니까 성도들은 잘 이해는 할 수 있어지는데 말씀의 원형과는 좀 거리가 먼 교회들이 종종 우리 가운데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좋은 말인데 말씀과는 다른 경우가 너무 가는 거죠. 사람들을 자극하는 말이긴 한데 말씀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끄심에 순종해야 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방식의 가장 첫 번째가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거예요.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말씀이 있어야 되는데 원형의 말씀 다시 재해석되거나 사상으로 제 포장된 말씀이 아니라 원형 말씀 그대로 전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순종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고 분노합니다.
교회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 말을 안 들어준다고 이렇게 화를 내는 분들이 있어요. 이거는 정말 잘못된 태도예요.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관하는 공간이잖아요.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것이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것이지, 사람의 메시지가 교회를 주관하면 안 돼요.
근데 교회가 전통이 쌓이고 오래되다 보면 안타깝게도 그런 교회는 사람의 메시지가 교회를 이끌어가요. 목회자들의 생각이나 아니면 장로님들의 경험이나 그래서 그분들의 메시지가 교회를 이끌어갈 때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끌어가도록 순전하게 예수님께 의탁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뜻대로 교회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 안 돼요. 목사도 목사의 뜻대로 교회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서도 안 되고, 성도들도 성도의 뜻대로 교회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서는 안 돼요.
그런데 뭐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고 우리나라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교회들 안에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주관하도록 내어드리지 못했기 때문인 거예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지 않기 때문인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머리로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어쩌면 여러분 생각대로 되지 않는 교회가 더 좋은 교회일 수도 있어요.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교회가 훨씬 더 좋은 교회일 수도 있어요.
우리는 자기 메시지가 용납되지 않는다고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요. 이것은 철저하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예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겁니다.
또한 반대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하심 아래에 있는지도 잘 살펴야 됩니다. 교회의 주관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세. 여러분의 인생의 주관자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여야 됩니다.
그러니까 내 삶이 내 뜻대로 안 움직여 간다고 화를 내거나 분노하면 안 돼요. 어쩌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방향과 방법일 수 있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내 자녀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내 남편과 아내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우리 화를 내고 막 분노를 해요. 어쩌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진짜 답일 수도 있습니다.
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머리로 교회의 머리로 인정할 때입니다. 23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일에 충만함이니라.
23절에서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언제 교회다워질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교회가 하는 거예요. 그럴 때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저는 뭐 눈물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슬프다고 해서 많이 우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드라마 볼 때는 좀 울어도 그냥 일상의 삶에서 저는 눈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조금씩 성도들이 가끔 너무 안타깝게 이렇게 돌아가실 때 조금 눈물이 많고 그 외에는 저도 그냥 조금 눈물이 흐르는 정도지 눈물이 많이 흘러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근데 제가 진짜 눈물을 많이 흘릴 때가 있어요. 언제냐 하면 정말 오늘 예배는 하나님 보시기에 좀 기쁠 것 같다는 마음이 들면 눈물이 흘러내려 그러니까 제 안에 교회에 대한 바램이 있는 거죠.
성도들이 어떤 일을 했어요? 근데 이게 말씀에 기록된 내용과 너무 비슷한 거예요. 그럼 제 아내는 진짜 감동이 있어요. 그래서 눈물이 나요. 이 말은 저도 목사인 저도 정말 교회다운 교회를 경험하고 싶어한다는 의미인 거예요.
여러분 교회다운 교회는 어떤 의미냐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교회가 할 때 교회다워지는 거예요. 정말 여러분이 평생을 살아가시면서 정말 교회다운 교회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면 내가 우리 교회가 우리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교회의 몸이라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23절 말씀은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계획을 완성시킨다는 의미예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 이에 충만함이라 이게 해석이 좀 어려워요. 어떻게 보면 되게 쉬운데 어떻게 보면 되게 어려워서 제가 말씀을 준비하다가 이 신학자들에게 전화를 했어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느냐 물론 저는 제가 경험한 것이 있고 공부한 것이 있어서 제 나름대로의 해석은 있지만 근데 이렇게 큰 틀에서 어떻게 보는 게 맞냐고 해서 토요일 아침 일찍 전화를 해서 한번 물어봤어요.
제가 그런 물음과 이렇게 내려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어떤 거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신다는 의미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곳은 교회라는 의미인 거죠. 우리가 세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지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잖아요. 이 시각적으로 만난 적이 없어요. 예수님을 만나려면 교회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는 거죠. 교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 왜냐하면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은 교회를 충만하게 아시는 분도 예수님이라는 의미인 거예요. 교회의 공간들이 풍성하게 채우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죠. 그러니까 머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이 없으면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할 수는 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교회 안에 있어야 되고 그럴 때 예수님은 자기를 교회 안에 드러내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드러나는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교회가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를 경험하지 못하는 거죠.
우리가 교회를 경험하고 싶어해요. 이런 멋진 교회를 내가 경험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어요. 그냥 아직 믿음이 연약하면 잘 모르지만 그래도 교회를 오래 다니고 그래도 신앙에 대한 고민을 했던 분들은 좀 좋은 교회에 대한 이렇게 희망이 있어요.
좋은 교회는 어떻게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그 교회가 할 때 우리는 그 교회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기뻐하신 일을 하면 예배 가운데 예수님은 자기를 드러내주셔요.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누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하면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를 드러내주셔요. 소그룹 모임에서 섬성교 같은 사역 가운데서 자기를 이렇게 드러내 보여주셔요.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교회를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인 거죠.
여러분 교회는 곧 누구예요? 여러분과 저예요. 우리가 교회예요. 이 건물은 예배당이고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 말은 여러분과 제가 교회 안에서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인 거죠.
교회를 경험하길 원하는 마음이 점점 더 강렬해집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상황이 교회에 대한 간절함을 좀 더 크게 만드는 것 같아요.
요즘 여러분 젊은 친구들이 교회를 얼마나 열망하는지 아세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그렇게 가서 교회를 경험할 교회가 없는 거예요.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 말씀드렸던 것처럼 내가 정말 교회를 경험하려면 교회인 내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내가 교회가 경험되어지는 거죠.
근데 그냥 갈망이 이렇게 많다는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즘 청년들도 어른들도 교회를 경험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교회가 경험이 안 돼요. 이사를 가서 교회를 옮겼지만 또 교회의 경험이 안 돼요. 그 주된 이유가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인 거죠.
여러분 우리의 지금 예배가 부족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를 경험하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 않아서 우리가 교회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정확하게 말하면 성도들이 교회를 욕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욕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교회를 욕해요. 성도들이 목회자를 욕하고 교회에 복음이 없다 십자가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근데 막상 진짜 복음을 선포하고 진짜 십자가를 말하면 부담스러워해요. 그리고 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경험하고 싶긴 한데 십자가를 말하면 회피를 해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교회가 경험되어지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서 못 박혀 죽을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잖아요. 그처럼 우리가 교회가 십자가를 선포하면 십자가를 지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는 거예요. 예배 가운데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고 예배 통해서 그분을 충분히 드러내셔서 우리가 교회다운 교회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말하고 복음을 전해야 그리스도로 충만해집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지만 복음은 전하지 않고 복음은 살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교회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십자가를 말하면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방향을 잃었어요. 여러분 요즘 목회자들이 방향을 잃었어요.
왜 방향을 잃었냐 보니까 성도들이 그런 거예요. 우리 교회는 교회답지 않습니다고 말을 해요. 그래서 교회다운 교회를 말하면 그때는 또 부담스러워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 방향을 많은 목회자들이 잃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방향을 잃고 헤맸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방황하지 않아야 세상에서 우리가 방황하지 않고 정신 차리고 살 수 있어요.
여러분 교회의 든든한 삶은 곧 세상의 든든한 삶이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견고한 삶은 세상에서 견고한 나의 삶이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방황하는데 내가 세상에서 경고하고 든든하게 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목회자들도 방황을 하고 성도들도 방황을 해요.
이 방황의 끝은 어디일까요? 말씀 들은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고 몸인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들을 교회 안에서 행하는 거죠. 그럴 때 우리가 교회다운 교회를 경험하게 되고 그때부터 방향이 생겨나기 시작해요.
저는 이제 제 목회의 방향을 좀 잡았어요. 15년 동안 좀 많이 헤맸어요. 그래서 어떤 분 보기에는 제가 일을 하다가 때려치우고 재회를 하다가 나름대로 저의 방황인 거죠. 제가 근무로도 5년을 하고 부목사를 오래 해도 담임은 여기가 처음인 거니까 민간인 담임은 처음인 거니까 당황을 했고 또 우리 교회는 연약함이 있어서 다른 교회보다는 이런저런 방법을 해도 잘 안 되는 측면이 더 많았어요. 그래서 방황을 했어요. 지금은 제가 그런 목회적인 방향은 좀 정리가 됐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일을 전혀 안 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제 잘 세팅된 것을 가지고 제가 여러분과 함께 사역을 하려고 지금 준비를 준비는 거의 다 됐어요. 이제 하려고 합니다.
근데 이런 멋진 교회들이 세워지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교회가 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우리가 집중해야 돼 나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럴 때 교회 다닌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교회가 영광을 얻으려고 영광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려고 영광을 취해요.
근데 교회의 영광은 우리가 영광을 취한다고 해서 영광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영광을 버려야 교회의 영광이 회복되는 거예요. 목회자가 자신의 삶의 영광을 버려야 교회가 회복되는 것이고 성도가 자신의 영광을 버려야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대개 잘못된 방향으로 살아요. 분명히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려고 목회자들이 영광을 쥐예요.
내가 영광을 얻으면 내가 영광스럽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에요. 목회자가 영광을 버려야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는 거예요.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성도가 세상에 출세하고 잘 돼야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자기의 영광을 내려놓을 때 포기할 때 교회가 영광스러워지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영광을 버려야 교회가 영광스럽게 됩니다.
지금 교회에서 영광이 사라집니다. 예배의 영광이 사라지고 사역의 영광이 사라지고 교회의 영광이 사라져요. 그 이유는 교회가 영광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낮은 자리로 더 수치스러운 자리로 더 패배의 자리로 우리가 들어가야 돼요. 그럴 때 교회는 영광스러워지게 되고 여러분은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곳에서 영광스러운 예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있다면 여러분과 저는 인생 대박의 삶을 사는 거예요.
말씀드렸죠. 저는 눈물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눈물 많이 흘리는 사람은 아니에요.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저는 크게 울지는 않았어요. 동생들이 힘들어서 많이 울었지 저는 그냥 덤덤하게 있고 장면 장면에 조금씩 눈물이 나는 정도였어요.
저는 어머니를 너무 좋아해요. 어쩌면 저는 어머님의 분신과 같은 존재예요.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평생을 살았어요. 그러면 저도 그 어머니를 그렇게 생각했겠죠. 근데 저는 슬프지는 않았어요. 일단 뭐 천국 가신 거니까 슬프지 않고 이 땅에 고통 없이 가신 거는 슬프지 않고 인연이 끊어진 건 좀 슬프지만 근데 제가 정말 정말 감격하게 눈물을 흘리고 맞이하고 싶은 순간은 예배예요.
제 목회의 핵심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불을 꺼보기도 하고 앞에 광대상을 바꾸고 이후에도 더 많은 어떤 예배에 대한 변화가 있을지 몰라요. 그 모든 것은 예배를 경험하는 것 그리스도가 인지하는 예배를 경험하는 것이 제 목회의 큰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두 번째 성육신이라 그래요. 첫 번째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몸으로 교회로 오신 걸 말하는 이 땅에 오신 걸 말하고, 두 번째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로 이 땅에 계신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곧 교회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교회 건물은 성전은 아닙니다.
교회 건물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던 성막이나 성전은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합니다. 근데 우리 가운데 어떤 의식이 있냐 하면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교회를 구약의 성막 공동체나 구약의 성전 공동체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해요. 교회를 함부로 해도 되는 곳 성전보다 덜 영광스러운 곳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로 이 잘못된 생각은 다 버리셔야 돼요. 교회는 곧 뭐예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 하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그리스도를 볼 수 없지만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 거예요. 할렐루야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없지만 이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그럼 우리가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그리스도로 살아야 돼요. 그러면 교회의 영광이 회복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로 살면 교회의 영광은 회복이 돼요.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예배에 여러분과 저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축복이 우리 목장 교회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영광이 이곳에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그 회복을 주시려고 여러분과 저를 이곳에 있게 한 거예요. 여러분과 저는 싸울 사람이 아니라 동지예요. 교회를 회복시켜야 할 동지 아셨죠? 저는 저와 여러분은 동지예요.
우리 목장 교회를 영광스럽게 회복시켜야 될 동지 동력자 동력자 의미가 좀 약하니까 동지 그렇게 여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