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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4월 17일 금요일]
《 『환단고기』 북부여기(北扶餘紀)
3세 단군 고해사와 최씨 낙랑국》 (32)
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
壬申元年正月 樂浪王崔崇 納穀三百石 于海城 先是 崔崇自樂浪山 載積珍寶 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 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
癸丑四十二年 帝躬率步騎一萬 破衛賊於南閭城 置吏
庚申四十九年 一群國遣使 獻方物 是歲九月 帝崩 太子高于婁立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임신년 원년(B.C.169) 정월에 낙랑왕 최숭(崔崇)이 곡식 300섬을 해성(요령성 안산시)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195)년의 겨울이었다.
계축년 42년(B.C.128)에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 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년 49년(B.C.121)에 일군국(一群國)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高于婁)가 즉위했다.
[논주] 북부여의 도읍지 해성(海城)은 요령성 안산시이다. B.C.194년 위만이 찬탈한 번조선의 영역은 요서 상하운장에서 요령성 동쪽까지였다. B.C.195년 낙랑 제후 최숭이 위만을 피하여 보물을 배에 싣고 해로로 이동하여 평양에 낙랑국을 세웠다. 마한은 한반도 전체의 통칭으로 남부에는 마한과 기준 왕이 세운 건마국 등 수많은 소국들이 있었으나 북한은 소국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최숭이 이주하여 낙랑국을 세울 수 있었다. 이후 B.C.169년에 낙랑왕 최숭이 북쪽의 북부여 고해사 단군에게 곡식 300섬을 바쳤다. 요령성 북쪽에 대한 위만의 침략이 맹렬했는데, 고해사 단군이 위만군을 무찌른 남려성은 고구려 때 남소성으로 요령성 무순 지역이다. 그러므로 위만조선은 요령성 서쪽이었고, 중북부 지역은 북부여-고구려 관할이었다. 그러므로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영역은 요서에서 요령성까지 발해만 연안 지역이다.
<壬申元年正月 樂浪王崔崇 納穀三百石 于海城>를 보면, 한반도 서북부 평양에는 최씨 낙랑국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 당할 때까지 존재했다. 낙랑국의 역사적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에는 32년, 37년, 313년 등 세 번에 걸친 낙랑국 멸망 기사가 있다.
고려의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에 실수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정사에 세 번에 걸친 낙랑국 멸망 기사라 있는 이유는 32년과 37년 5년의 시차, 그리고 이후 276년의 시차를 갖는 ’낙랑(樂浪)‘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제시된 사료를 통해 몇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첫째로 [북부여기] 3세 고해사 단군 시대의 기사를 살펴보자.
’낙랑’이란 말이 갖는 의미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먼저 <先是 崔崇自樂浪山 載積珍寶 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 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를 주목해야 한다.
해모수 때 기사는 “병오년 45년(B.C.195)에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이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단제께서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博士)로 모시고 상하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이해 겨울 단제께서 붕어하여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니 태자 모수리(慕潄離)가 즉위하였다.”이다.
B.C.195년에 위만이 요서의 상하운장을 차지하고 연, 제, 조나라 유민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운 후에 우선 가까운 발해만 동쪽의 ‘낙랑’을 침략하였다. 이때 최숭은 ‘낙랑’의 제후였는데, 위만이 침략하자 최숭은 B.C.195 가을에 백성들과 함께 배에 보물을 가득 싣고 탈출하여 해로로 한반도 북부에 정착하여 왕검성, 즉 평양 지역에 ‘낙랑국(樂浪國)을 세웠다. 이듬해인 B.C.194년에 위만이 요동의 번조선을 침략하니 기준왕이 패하여 발해에서 황해로 이어진 해로를 타고 한반도 남부로 도주했다. 이로써 위만이 발해만 북쪽과 동쪽의 요서-요동을 모두 지배하였다. 그러나 한나라의 공격으로 B.C.108년에 멸망했다. 한무제는 점령지에 한사군을 설치했는데, 옛 낙랑 지역을 ’낙랑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민들을 규합한 동명국 고두막 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B.C.82년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B.C.75년에 현도군을 무순 지역으로 옮겨가고 낙랑군만 남았다.
둘째로 국사편찬위 고대사 DB의 『삼국사기』의 낙랑 멸망 관련 세 기사를 살펴보자.
(1) 낙랑국을 정벌하다 ( 32년 04월 )
「서기 32년 고구려 대무신왕 15년 서기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물어 말하기를, “그대의 낯빛을 보니 예사 사람이 아니오. 어찌 북국(北國)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최리가〕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이 나라로 돌아와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의 딸에게 알려 말하기를,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어서 만약 적병이 있으면 저절로 소리가 났다. 그런 까닭에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의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 안에 들어가 북의 면(面)과 나팔의 주둥이를 쪼개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비하지 못하였다. 우리 병사가 엄습하여 성 아래에 다다른 연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을 멸망시키고자 마침내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맞이하여 아들의 처로 삼고,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 병장기를 파괴하게 하였다.”라고 한다.」
(2) 낙랑을 멸망시키다 ( 37년 )
「서기 37년 고구려 대무신왕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각주 1)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 본문에서 언급된 낙랑을 낙랑군으로 여겨, 낙랑군의 멸망은 미천왕 14년(313) 10월의 일이므로 해당 기사를 과장이라거나 잘못 전해진 결과로 여기기도 한다(이병도, 1996, 353쪽). 반면 일정한 사실성을 구하기도 하는데, 그때 주목되는 것이 왕조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후한서』 권76 열전66 왕경전(王景傳)에 따르면 경시제가 패배할 무렵(25) 낙랑군에서는 토착 세력가 왕조가 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하니, 건무 6년(30) 광무제가 왕준(王遵)을 태수로 임명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왕조를 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렀을 때 왕굉(王宏)과 양읍(楊邑) 등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6년 6월조에도 비슷한 내용을 전한다[“初樂浪人王調據郡不服,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즉 경시제 집권 말부터 광무제 집권 초기 낙랑에서는 왕조가 위세를 떨치다 곧 제압되었는데, 이 사건을 고구려 측의 시각으로 표현한 것이 해당 기사라는 것이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437쪽). 하지만 이 기사는 왕조의 난이 진압된 시점(30)으로부터 한참 지난 뒤의 일로 나올 뿐 아니라, 실제 왕조의 난에 고구려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기에 한계가 있다.
한편 이때의 낙랑을 최리의 낙랑국으로 보아 대무신왕 15년(서시 32) 호동 전승 때의 상황에 부연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37쪽). 아마도 본 기사를 최종적인 낙랑국의 멸망으로 간주한 것 같다. 다만 본서 기년에 의거할 때 최리 낙랑국은 이미 5년 전 고구려에 투항하였다고 하며 사건이 일단락한 데 비해, 지금 기사에서는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고 하여 낙랑국과는 별개의 세력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14년(37)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해당 기록은 낙랑의 멸망 결과 나라 사람[國人] 5,000명이 투항해 와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고 하는 등 사건의 전말을 보다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신라 측 전거 자료에서 기인한 기사로 여기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임기환, 147쪽). 신라본기 초기 기사 가운데는 주변 세력의 복속이나 포섭을 전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며, 낙랑 유민의 수용 전승 역시 그 하나일 텐데, 후대의 사료 정리 과정에서 유리이사금 14년(37)으로 기년이 설정되었고, 이것이 고구려본기에도 실려 지금처럼 남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3) 낙랑군을 침략하다 ( 313년 10월 )미천왕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 14년 겨울 10월에 낙랑군(樂浪郡)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각주 1) 낙랑군(樂浪郡) : 한무제 때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하여 313년까지 존속한 중국 왕조의 변군(邊郡).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하며, 군치는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에 설치한 조선현(지금의 평양)이다. 고구려본기에는 낙랑 멸망과 관련된 기사가 대무신왕조에 2건이 보이는데, 이 대무신왕조 기사가 고구려가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한 낙랑군을 병합한 기사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들 기사에 대해서는 본서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32) 4월조 및 20년(37)조 참조.
(각주 2) 낙랑군(樂悢郡)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 이때 낙랑군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에 대하여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상 건흥(建興) 원년(313) 4월조에는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을 점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해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이 장통에게 말하여 그 백성 1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모용외가 그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서진은 274년에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으며, 평주자사가 동이교위(東夷校尉)를 겸임하였다. 285년에 부여가 선비 모용외(慕容廆)에 의해 격파되자 부여의 복국을 추진하는 등 진의 동방정책이 본격화되었지만, 이후 요동지역에서 선비족 모용씨의 득세에 따라 평주자사나 동이교위의 역할이 점차 약화되었다. 특히 291년 8왕의 난으로 시작된 진 중앙의 혼란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권위와 교역체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동방 변군으로서 낙랑군, 대방군의 군현 기능은 급격히 쇠퇴해갔다. 313년 고구려에 복속되기 이전에 낙랑군과 대방군의 통솔자는 요동 출신의 장통(張統)이었는데, 진의 정부에 의해 태수로 임명된 인물이라기보다는 요동지역의 세력가였다.
세 번째로 『삼국사기』의 낙랑 관련 기사를 살펴보자.
「B.C. 28년 낙랑, 신라를 공격 B.C. 15년, 백제, 낙랑과 수교
B.C. 11년 백제, 낙랑과 화친B.C.
B.C. 9년 낙랑, 말갈로 하여금 백제 습격하게 함
B.C. 8년 백제 낙랑로를 막음
B.C. 2년 낙랑, 백제 위례성을 불태움
A.D. 4년 낙랑, 신라를 습격. 14년 낙랑 신라 금성 습격
24년 낙랑인 왕조, 한 낙랑태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 태수를 칭함 28년 한 요동군 태수, 고구려 위나엄성 포위
30년 한나라, 왕준을 보내어 낙랑군 왕조의 난 평정
동부도위 폐지. 이로서 한군현은 서북부만 남음
32년 4월 고구려, 낙랑을 공격하여 항복 받음
36년 낙랑, 신라 북면 공함
37년 고구려, 낙랑을 공멸, 낙랑인 3000명과 대방인 신라에 투항
44년 후한(後漢), 해로로 군을 보내 살수(청천강) 유역의 낙 랑군을 회복
49년 고구려, 후한의 북평, 어양, 상곡, 대원을 공격
69년 낙랑, 신선도 칠기 이룩됨
122년 고구려,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군 공격. 부여는 요 동군을 지원
146년 고구려, 요동군 서안평현 습격, 낙랑군 습격,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함
167년 부여왕 부태, 병 2만으로 현도군 공격
168년 한의 현도군 태수 고구려 습격
고구려와 선비, 후한의 유주와 병주 공격
169년 반독립적인 요동지방의 공손씨를 고구려가 도움
205년 요동의 공손강, 낙랑군과 대방군을 둠
238년 위의 공손씨 토벌에 고구려가 1000명을 보내 도움, 위가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룰 보내 공손씨 지배하애 있던 두 군을 취함
274년 낙랑, 대방, 현도군이 진(晉)의 평주에 속함
286년 고구려, 대방을 공격. 백제가 대방의 요청으로 원병 을 보냄
302년 고구려, 현도군 공격
304년 백제, 낙랑군 서현을 공격. 10월 진의 낙랑군 태수 가 보낸 자객이 백제 분서왕을 살해
313년 고구려, 10월에 낙랑을 공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음. 낙랑군 멸망
314년 고구려, 대방군을 공격
315년 고구려, 현도군을 격파
334년 고구려, 평양성을 중축」
위의 『삼국사기』의 낙랑 멸망 관련 세 기사 중에서 서기 32년의 기사에 대한 각주와 서기 313년 기사에 대한 각주에서 왕준이란 인물이 다음과 같이 겹치고 있다.
「그때 주목되는 것이 왕조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후한서』 권76 열전66 왕경전(王景傳)에 따르면 경시제가 패배할 무렵(25) 낙랑군에서는 토착 세력가 왕조가 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하니, 건무 6년(30) 광무제가 왕준(王遵)을 태수로 임명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왕조를 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렀을 때 왕굉(王宏)과 양읍(楊邑) 등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6년 6월조에도 비슷한 내용을 전한다[“初樂浪人王調據郡不服,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즉 경시제 집권 말부터 광무제 집권 초기 낙랑에서는 왕조가 위세를 떨치다 곧 제압되었는데, 이 사건을 고구려 측의 시각으로 표현한 것이 해당 기사라는 것이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437쪽). 하지만 이 기사는 왕조의 난이 진압된 시점(30)으로부터 한참 지난 뒤의 일로 나올 뿐 아니라, 실제 왕조의 난에 고구려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기에 한계가 있다.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상 건흥(建興) 원년(313) 4월조에는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을 점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해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이 장통에게 말하여 그 백성 1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모용외가 그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후한서』 권76 열전66 왕경전(王景傳) 광무제 건무 6년 서기30년과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상 건흥(建興) 원년 서기 313년 4월조에 태수 왕준(王遵)이 겹친다. 283년의 시차다. 『후한서』가 오류인가 『자치통감』이 오류인가. 오류보다는, 『후한서』가 조작인가 『자치통감』이 조작인가.
『삼국사기』의 낙랑 관련 24년 기사와 30년 기사를 보면 『후한서』가 맞고, 『자치통감』이 오류 또는 조작이다. 이런 식의 오류와 조작이 고사서 곳곳에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 쪽 고사서에도 오류 또는 조작이 있을 수 있지만, 아니 있지만, 한국 쪽 고사서에도 오류 또는 조작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조작을 각주를 단 학자들이 파악했는지 모르겠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후한서』 서기 30년 건무 6년 광무제가 임명한 낙랑태수 왕준(王遵)과 『자치통감』 313년 4월 조의 “낙랑 사람 왕준”이 다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서기 246년 고이왕(古爾王) 13년 기사에 다음과 같이 삭방태수로 등장한다.
「고이왕(古爾王) 13년(서기 246년) 가을 8월에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왕이 침범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秋八月魏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伐高句麗王乘虛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茂聞之怒王恐見侵討還其民口)」
김부식은 ‘낙랑(樂浪)’이란 이름이 든 국(國)또는 군(郡)이 세 번 멸망하는 기사를 썼다. 이 세 번의 ‘낙랑’ 기사에 관련되는 인물로 ‘왕준(王遵)’이 시차를 두고 『후한서』, 『자치통감』,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왕준이 ‘철수’와 ‘영수’, ‘영자’와 ‘순자’처럼 흔한 이름인가? 동명이인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불가하다. 『후한서』와 『후한서』는 둘 중에서 하나는 분명한 오류 또는 조작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 기사는 연대가 246년으로 『자치통감』과 67년 시차가 난다. 20세 왕준이 87세 왕준일 수 있다. 그러나 『후한서』의 서기 30년 기사가 사실이기 때문에 『자치통감』과 『삼국사기』는 오류 또는 조작이다. 중국인이 『자치통감』을 쓰면서 서기 313년 기사에 왕준을 넣어 내용을 조작한 것을 김부식이 서기 246년 기사에 인용하면서 낙랑군이 백제에 인접했다는 것을 조작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든지 한사군설과 낙랑군 평양 도읍지를 강조해야만 위로 위만조선과 기자조선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곳곳에 한사군 낙랑군 근거를 치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세 번‘ 낙랑’ 멸망과 세 번 ‘왕준’의 배치로 하여 근거의 기둥이 무너지고 말았다.
또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의 중국정사동이전 [梁書 권54, 열전48 제이(諸夷)]의 “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가 요동을 노략질함 : [서]진에서 영가(307~312)의 난이 일어나자, 선비 모용외(269~333)가 창려[군]의 대극성을 점거하였다. [동진의] 원제(재위: 317~322)가 [모용외에게] 평주자사를 제수하였다.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 재위: 300~331)가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지만, [모용]외는 막을 수 없었다.”라는 기사의 번역주에서 “平州刺史가 다스리는 평주는 조위에서 幽州의 동부를 분할해 처음으로 세운 행정단위이다. 서진이 274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현재 요령성 六股河 以東에서 遼河의 이서와 이동 지역을 관할하였다. 창려·요동·현도·낙랑·대방의 5군을 예하에 두었으며 치소는 襄平이었다.
창려는 서진 시기 평주 관할 아래 있던 5개 군의 하나로 대극성은 현재의 遼寧省 錦州市 북쪽 경계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라고 한다.
창려가 요령성 금주시 북쪽이면 영접한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은 모두 요령성이다. 중간에 고구려가 있어 계속 공격하는데 어찌 평안도에 한사군이 있을 수 있는가.
김부식이 신라사 이전의 고대사를 끊어버린 것도 일종의 조작이다. 그런데 조작은 일연 김견명이 [고조선기]에서 확실하게 저질렀다. 이러한 조작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있을 수 있다.
김부식의 조작 의혹은 낙랑 관련 기사 44년 조 <후한(後漢), 해로로 군을 보내 살수(청천강) 유역의 낙랑군을 회복>에서 느낄 수 있다.
김부식은 이 기사의 한사군이 살수-청천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을 통해 한사군의 서북지역 점령설의 근거를 만들었다. 또한 후한이 해로를 통해 군대를 보냄으로써 서기 37년에 멸망한 낙랑군을 회복했고, 그 낙랑군이 서기 313년까지 존속했음을 확실화하고 있다. 그런데 후한군이 해로를 이용했다. 이유는 북쪽은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로를 타고 얼마나 많은 군사들이 왔는지 모르겠지만 만 명은 넘지 못하고 군수도 곤란했을 것이다. 이니 낙랑군을 멸망시킨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구려군이 쉽게 포기하고 물러날 리가 없다. 그냥 회복했다는 기사만 있지 고구려군과 싸웠다거나 영토를 넓혔다는 기사가 없다. 수만 명의 군대를 투입해서 얻은 소득치고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하면서도 세 번의 낙랑 멸망 기사 쓰기가 난처했을 것이다. 서기 32년에 “낙랑국을 정벌하다‘라고 해놓고 또 서기 37년에 ”낙랑을 멸망시키다“라고 하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멸망한 ’낙랑국‘과 ’낙랑‘이 있는 그 자리에 한사군 낙랑군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유기(留記)』를 옮겨쓰면서 어떻게 하면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까 연구를 많이 했을 것이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한반도에 있도록 해야만 한사군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44년의 기사를 만들어 넣는 것으로 일단은 한사군 낙랑군을 합리화했다. 그래도 ’낙랑‘이란 이름의 나라나 군이 세 번이나 멸망한 기사를 모두 합리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이 44년의 기사가 사실이라면,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6년 6월조 기사의 연장으로, 고구려가 요동의 낙랑군을 공격하여 서기 37년에 멸망시킨 것에 대한 반격에 대한 기사일 것이다. 거기에 ’살수-청천강‘만 집어넣으면 한반도 서북이 된다. 한 자루 붓으로 가필하여 조작한 역사가 됐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개관하면, 김부식과 김견명은 고대사를 없애버리고 기자조선과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온갖 조작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서기 32년의 기사는 고구려가 호동을 이용하여 평양의 낙랑국을 1차 정벌하여 항복을 받은 역사이고, 서기 37년의 기사는 고구려가 요동 동부의 임둔군과 진번군을 축출한 힘으로 왕조의 난으로 흔들리는 요동 중부의 낙랑군과 현도군을 축출한 역사이다.
요동 한사군 낙랑군과 한반도 서북의 최씨 낙랑국은 엄연히 다르다. 낙랑국은 『삼국사기』의 기사에서 보듯이 B.C. 28년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서기 313년까지 백제, 신라, 고구려와 대등한 힘으로 맞서 싸운 강국이었다. 서기 32년에 고구려에 한 번 항복한 적이 있지만, 다시 국력을 회복하여 나라를 유지하였다. 최씨 낙랑국은 B.C. 195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508년 동안 한반도 북부 지역을 영역으로 한 나라였다.
단군세기와 북부여사에 등장하는 최씨 낙랑국은 마한 중에서 남한의 마한과 함께 북한 지역의 강국이었다. 서기 100년부터 400년까지 북한 지역에는 서부 평양 지역에 낙랑국, 중부 춘천-원주 지역에 말갈국, 함경북도 지역에 북옥저, 함경남도 원산-함흥 지역에 동옥저, 강원도 동해-삼척 지역에 동예가 존재했다. 삼국사기에는 낙랑과 말갈, 동예가 백제, 고구려, 신라와 전투를 한 기록이 계속 이어진다. 말갈은 백재와 고구려에 밀려 함경도 쪽으로 북상했다.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 평안북도 동부와 원산을 잇은 선 위 지역은 말갈의 영역이었다. 이 말갈이 조선 세종 때 정복되면서 일부은 귀화하고 일부는 북으로 이동하여 연해주-만주 동북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이 후일에 여진족-만주족이 됐다.
중국의 사서의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을 점거하여”와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으며, 평주자사가 동이교위(東夷校尉)를 겸임하였다.”를 보면, 낙랑군이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있을 수가 없다. 평주자사가 동이교위를 겸임했다는 말은 평주 옆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에 고구려가 이미 압록강 하류와 요동 동부 지역을 장악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따로 낙랑군 태수를 둘 일이지 왜 겸임시켰겠는가. 바다를 건너서 겸임 통치할 수가 없다.
고구려는 한사군인 현도군과 임둔군에 이어 요동 낙랑군을 공격하여 기원전후에 정복하여 요동을 확보한 다음에 계속 영토를 확장하여 결국 유주까지 도달했다. 한나라는 기원전 86년 고두막 단군의 공격으로 임둔군과 현도군을 기원전 82년에 통폐합했다. 남은 낙랑군을 기원전 58년에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 그냥 두었을 리가 없다. 서기 32년에 1차 최씨 낙랑국을 공격하기 전에 한사군 낙랑군을 먼저 공격하여 섬멸했을 것이다. 한사군 낙랑군을 배후에 두고 남쪽의 최씨 낙랑국부터 공격할 수 없다.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 서북부에 있었다면, 중국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쉽게 멸망시킬 수 없었다. 신라가 끝까지 저항한 압독국과 대가야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해버렸듯이 고구려도 끝까지 저항한 최씨 낙랑국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하여 버렸다. 그러나 왕릉에 묻힌 유물들은 남아 낙랑국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로써 『삼국사기』에 왜 ‘낙랑’의 멸망 기사가 세 번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북부여기]를 기준으로 여러 고사서의 사료들을 비교, 검토하여 종합하면 역사의 실체를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다. 최씨 낙랑국은 313년까지 평양에 존재했고, 한나라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가 고구려 세력의 확장에 따라 철폐됐다.
역사는 가설이 아니라 사실이다. 선입관과 아집을 버리고 객관적인 관점과 시각으로 연구해야 한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사실에 근접한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
나 역시 봉사가 코끼리를 더듬듯이, 뚜렷한 역사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를 바탕으로 하고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중국의 여러 고사서를 참고하여 얼기설기 ‘낙랑’의 실체와 역사를 추론해 보았다. 고사서의 기록을 근거로 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중국의 사서 『후한서』와 『자치통감』이 상충되는 부분도 있었으므로 모든 고사서가 정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류 또는 조작이 곳곳에 있을 수 있다.
또한 비록 “~~일 것이다”의 가설화법이 아니라 “~~이다”라는 단정 화법을 썼지만, 그것은 글을 이어가기 위한 방편들로서 쓰인 화법일뿐이다. 그러므로 내리는 결론은 추론과 상상에 따른 가설이지 정설은 아니다.
또 하나의 가설이지만, 여러 사료를 종합하여 정리해 보면, 기원전 195년에 ‘최씨 낙랑국’이 요동에서 한반도 서북부로 이동하여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에 요서에서 요동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낙랑국의 요동 옛땅에 낙랑군을 설치했다. 평양 ‘최씨 낙랑국’이 서기 30년에 고구려군의 침략으로 항복했다, <낙랑국 정벌>. 그러나 재기하여 고구려에 저항했으나 서기 37년에 완전히 토평당하였다, <낙랑 멸망>. 그러나 최씨 왕이 한나라에 망명했다가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서기 44년 후한(後漢)이 해로로 군을 보내 살수(청천강) 유역의 낙랑군을 회복했다. 이때부터 최씨 ‘낙랑국’은 후한의 ‘낙랑군’으로 격이 낮추어져서 종속되었다. 이후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을 멸망시킴으로써 최씨 낙랑국이 끊어지고, 중국 세력이 완전히 철수하였다, <낙랑군 침략>.
후학들의 더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최씨 낙랑국]과 한무제의 [낙랑군]의 실체가 뚜렷하게 규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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