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미래포럼-김두규 전주 우석대 교수
풍수학사전
김두규
比峰出版社, 2005 - 808페이지
저자 정보 (2005)
독일 뮌스터 대학교에서 독문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후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강사를 거쳐 현재 우석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자는 독문학을 전공하였으면서도 현재 대학과 외부 공공기관에서 풍수 강의를 주로 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한국학의 하나로서 한국 풍수의 학적 체계화를 위해 풍수고전 번역, 현장 답사를 통한 대중적 글쓰기, 국내외에서의 학술 논문 발표 등을 병행하고 있다.
행정수도 건설 추진위 자문위원(2004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추진위 자문위원(2005년), 행정중심복합도시 장사(葬事)대책 T/F(2005년),
혁신도시 입지선정위원(2005년) 등으로 활동하면서 국토개발과 관리에 풍수적 지혜가 활용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전통적으로 보면 다섯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명(命)과 운(運), 풍수(風水), 넷째는 적음덕(積陰德), 공부(讀書)
등이다.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풍수와 인맥쌓기 뿐이며 나머지는 내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김두규 교수는 한국외대 및 동 대학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에서 독문학, 사회학, 중국학을 수학한 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해 1994년부터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0년에 공식적으로 독일 문학에서 풍수지리로 전공을 바꾸었다.
[김두규 칼럼]
새 대통령 집무실 용산과 대통령 풍수론
서기 1101년 고려 숙종 때의 일이다. 최사추(崔思諏)·윤관(尹瓘) 등이 왕에게 보고한다. “신들이 노원·용산 등에 가서 산수(풍수)를 살펴보았는데, 도읍지로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북악) 남쪽이 산의 모양과 물의 형세가 옛 문헌에 부합합니다. 남향하여 형세를 따라 도읍을 건설하기를 청합니다.”
‘용산’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윤관과 최사추는 청와대·경복궁 일대를 용산보다 높게 평가했다. 청와대 터 길흉론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그 길흉 논쟁사는 조선왕조 개국과 더불어 시작하기에 책 한 권 분량이다.
좋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이를 방증할 풍수서가 수없이 많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용산터 또한 그러하다. 여기서는 터의 길흉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풍수상 두 곳의 특징과 제왕풍수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청와대터는 주산(主山) 북악산(北岳山) 바로 아래에 있고,
용산(龍山)은 주산인 남산(인경산·仁慶山)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풍수 고전 ‘금낭경(錦囊經)’은 이를 ‘고산룡(高山龍)’과 ‘평지룡(平地龍)’으로 구분한다.
고산룡(高山龍)의 터 ‘청와대·경복궁’은 삼각산 높이 솟은 데서부터 내려오는데, 생기(生氣)가 드러나 흩어지기 쉬우므로 바람이 두렵다. 이 단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바로 북악산·인왕산·낙산·남산이다. 사방을 산으로 감싸주어 길지가 된다. 이런 형국을 ‘장풍국(藏風局)’이라 한다.
평지룡(平地龍) 터는 평지에서 솟은 것인데, 생기는 땅속으로 가라앉으므로 바람 부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방에 산이 없더라도 좋다. 다만 이때 기의 흐름을 멈춰줄 수 있는 큰 물이 필요하다. 용산이 바로 그러한 평지룡의 터이며, 이때 필요한 물은 한강이다. 따라서 용산은 한강이 있음으로써 길지가 된다. 이와 같은 형국을 ‘득수국(得水局)’이라 부른다.
장풍국(藏風局)인가 득수국(得水局)인가에 따라 기(氣)가 다르다.
기(氣)는 인간과 사회에 영향을 끼쳐 그 결과 역사가 달라진다.
‘산은 인물을 키우고, 물은 재물을 늘려준다(山主人水主財)’는 풍수격언이 있다.
장풍국(藏風局)이 인물·권력·명예·명분의 땅이라면, 득수국(得水局)은 재물·예술·문화의 땅이다.
장풍국은 폐쇄적이며, 득수국은 개방적이다.
일본과 조선의 도읍지 풍수를 비교하면 쉽게 이해된다.
교토와 에도(도쿄)는 물 중심으로 터를 잡았으나, 조선왕조는 산(山)을 고집하였다.
산은 사람을 고립시키지만, 물은 사람을 모이게 한다. 그 결과 일본과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다. 일본은 19세기에 이미 해상강국이 되어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진입하였다. 반면 조선은 끝까지 성리학(性理學)이란 계급독재에 매몰(埋沒)되어 쇄국(鎖國)을 고집하다가 망했다(김두규,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왕이 산에서 물가로 가고자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光海君)의 ‘파주(坡州)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이 그것이다.
당시 풍수학인 이의신(李懿信)의 상소를 수용한다.
일찍부터 조선 풍수학인들은 ‘一漢·二河·三江·四海’론을 펼쳤다. 조선의 미래 도읍지로 물가를 지목했다. ‘홍길동’의 저자 허균은 이를 “조선의 수도는 처음에는 漢(一漢), 두 번째는 河(二河), 세 번째는 江(三江), 네 번째는 海(四海) 순서로 바뀔 것”이라고 정리했다.
이의신(李懿信)은 이를 바탕으로 광해군(光海君)에게 상소를 올린다.
조선 풍수학인들은 늘 ‘풍수의 법은 물을 얻음이 으뜸이고, 장풍(藏風)은 그 다음이다(風水之法, 得水爲上, 藏風次之)’란 금언(金言)을 준용(準用)했다.
그러나 당시 유학 문신들에게 배척당한다.
용산은 ‘한강(漢江)’에 있다, ‘삼강(三江)’의 시대일까.
조선풍수 전통은 도선국사(道詵國師)로부터 시작한다.
도선풍수 목적은 ‘삼한통일(三韓統一)‘이었다. 그 풍수전통은 불교와 풍수를 국교로 채택한 고려에서 ‘비보진압풍수(裨補鎭壓風水)’로 나타난다.
땅마다 달라지는 지기와 권력의 강약을 파악하고,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부추기는 억강부약(抑强扶弱)론이다.
윤 당선자가 내세우는 ‘국민통합과 상생 그리고 여야 협치’도 같은 맥락이다.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은 고려·조선·대한민국 역사에서 큰 사건이다.
고려·조선에서도 ‘왕의 집무실 이전’을 시도했다. 공민왕과 광해군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실패했다. 실패 원인을 여기서 논하지 않는다. 풍수학 밖의 일이다.
더 이상 터가 불길하여 대통령의 말로가 안 좋았다는 말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
대통령이 불행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불행이지 국가의 불행은 아니었다. 그들은 본래 ‘역사의 하수인’이었다.
“이성(Vernunft)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역사 속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공물로 삼지 않고 정열과 야망을 지닌 개인을 활용한다(헤겔·Hegel).”
그들은 때가 되면 용도 폐기된다. 역사가 진보하는 과정 속에서 겪어야 할 지도자 운명이다.
한 나라 지도자가 되려는 정열을 가진 이들이라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최근 출간한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에서 대통령 실패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그는 대통령들에게 비스마르크를 경청할 것을 조언한다. “신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가 지나갈 적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투자락을 잡아채는 것이 정치인의 책무이다.”
부디 ‘대통령 집무실 이전’도 신의 외투자락을 잡아채는 계기이길 기원한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풍수학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
2022-03-22 00:00
[용산의 미래]
김두규 교수 "용산은 '부자가 되는 터'
…상업의 도시로 개발해야"
'풍수리지 전문가' 김두규 우석대 교수 인터뷰
'배산임수 지형' 용산, 전형적 명당 입지
"물, 끊임없이 변화…생산활동 민첩"
한남동 공관촌, '좌청룡' 위치…명예·벼슬 상징
"용산 개발 통해 서울 더 큰 도시로"
서울 용산은 풍수지리에서 대표적인 명당이다.
북쪽에 산이, 남쪽에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을 갖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이 좋아야 인물이 좋고 물이 있어야 재물이 늘어난다’고 본다.
용산은 남산이 차가운 겨울 북서풍을 막아주고 한강이 가까이 있어 식수와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좋은 땅이었다.
국내 풍수지리 전문가인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는 특히 ‘물’에 주목한다.
용산은 과거 배가 주요 이동 수단일 때 배들이 정박하던 곳으로, 전국 각지로 이동하고 물류를 운반하기에 최적화된 입지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역세권이다. 그는 "용산은 명당의 핵심 요건인 ‘접근성’을 갖추고 있으며 현대적 개념에서도 좋은 터"라고 평가했다.
오랜 시간 외국군이 주둔한 역사를 갖고 있는 것도 이런 입지적 영향이 컸다.
용산은 고려 말에는 몽골군 병참기지로, 임진왜란 때는 왜군 기지로 이용됐다.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주둔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지배의 중심축인 조선 주차군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기지가 들어섰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도읍지가 될 뻔했던 역사도 있다.
고려 숙종 때 최사추(崔思諏), 윤관(尹瓘)이라는 두 대신이 한양(청와대 터), 노원, 해촌(도봉구 일대)과 함께 용산을 도읍지 후보로 올렸다.
하지만 숙종은 외적의 침입을 우려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했다.
김 교수는 "한강이 흘러 개방적인 용산이 고려와 조선의 도읍지였다면 국운이 상승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용산은 ‘부자가 사는 터’라기보다는 ‘부자가 되는 터’다. 이 역시 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강 주변으로 농경지가 형성돼 일터를 가까이 둘 수 있었고 집이 안정된 땅에 있어 주변 신뢰와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실용적 차원을 넘어 정서적으로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김 교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의 성질을 따라 변화를 민감하게 바라보게 되고, 생산 활동에도 적극적이고 민첩해져 자연스럽게 잘살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달리 성북동과 평창동은 권력의 상징인 사대문과 가까워 ‘부자가 사는 터’였다.
용산은 과거만 해도 산비탈로 주거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이후 도로·상하수도가 정비되면서 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다.
그가 생전에 거주했던 한남동 승지원은 용산 중심 맥(남산-그랜드하얏트호텔-승지원-녹사평역-둔지산-국립중앙박물관)에 위치해 있다.
이 회장은 풍수지리를 중시해 기업 경영에도 적극 활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