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군읍지(長興郡邑誌)
장흥군읍지(長興郡邑誌)
<長興郡地圖>
◆ 장흥군읍지(長興郡邑誌)
⊙서명 : 장흥군읍지(長興郡邑誌), 001책 20면, 1899년경(광무3) 편찬된 전라남도 장흥군 읍지
원자료제목 표제 : 長興郡邑誌
⊙ 목차
長興郡地圖
長興郡 : 建置沿革, 郡名, 山川, 結摠, 民戶, 學校, 壇廟, 佛宇, 道路, 橋梁, 堤堰, 場市, 宦蹟, 人物
⊙상세내용 내용 및 특징
1899년 경에 편찬된 전라남도 장흥군 읍지이다.
정확한 편찬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본 읍지의 표제에 ‘장흥군’이라는 표현이 쓰였다는 점을 통해 대략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시대에 장흥 지역은 본래 ‘장흥부(長興府)’로 존재했는데, 1896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전국의 군현이 군(郡)으로 통일됨에 따라 ‘장흥군’이 되었다. 또한 본 읍지의 책 크기, 종이 재질, 판식이 1899년 편찬된 읍지들과 유사하며, 대한제국기 의정부(議政府) 참사관실(參事官室)의 인장이 찍힌 것도 1899년 편찬된 다른 읍지들과 동일하다. 따라서 본 읍지는 1899년 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본 책은 필사본이며, 1책 8장으로 되어 있다. 본문 앞에 채색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본 읍지는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산천(山川), 결총(結摠), 민호(民戶), 학교(學校), 단묘(壇廟), 불우(佛宇), 도로(道路), 교량(橋梁), 제언(堤堰), 장시(場市), 환적(宦蹟), 인물(人物)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치연혁에 따르면, 장흥은 본래 백제때 오차현(烏次縣)이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후에 신라가 오아(烏兒)로 이름을 바꾸고 보성군(寶城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시대에 정안(定安)으로 개칭하고 영암군(靈巖郡)에 소속시켰으며, 인종대에 인종비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장흥으로 이름을 바꾸고 부(府)로 승격시켰다. 원종 6년(1265)에 회주(懷州)로 개명하고 목(牧)으로 승격시켰으며, 충선왕 2년(1310)에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강등하였다. 이후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치소(治所)를 내지(內地)로 옮겼는데,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이르러 수령현(遂寧縣)의 중령산(中寧山)에 성을 쌓아 치소로 삼았다.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를 두었으며, 이듬해 성이 좁다하여 다시 수령현의 옛터로 치소를 옮겼다.
장흥군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장흥군의 장흥읍, 관산읍, 대덕읍, 부산면, 안량면, 용산면, 유치면, 장동면, 장평면과 보성군의 웅치면, 회령면, 완도군의 금당면, 생일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邑治)는 장흥군 장흥읍의 남동리에 있었다.
19세기말 장흥군의 토지결수 및 호구수 정보는 각각 결총(結摠)과 민호(民戶)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장흥군의 경작중인 밭은 총 2,158결(結) 78부(負) 4속(束), 논은 총 4,433결 63부 3속이었다. 전체 민호는 총 4,102호였으며, 인구 중 남자가 7,508구, 여자가 5,822구였다.
도로 항목의 기록에 따르면, 장흥군은 동쪽으로 보성(寶城)까지 48리, 남쪽으로 강진(康津)까지 12리, 북쪽으로 나주(羅州)까지 50리, 동북쪽으로 능주(綾州)까지 50리, 남쪽으로 해안까지 15리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서울과의 거리는 886리, 광주부(光州府)와의 거리는 150리였다.
장흥군 소재 산천(山川), 학교(學校), 단묘(壇廟), 불우(佛宇), 교량(橋梁), 제언(堤堰), 장시(場市) 관련 정보도 읍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산천 항목에는 수인산(修仁山), 장원봉(壯元峯) 등 9곳의 산을 비롯해 예양강(汭陽江), 학천(鵲川)의 위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학교 항목에는 향교(鄕校) 1곳, 단묘 항목에는 사직단(社稷壇), 성황사(城隍祠), 여단(厲壇), 천관산신사(天冠山神祠) 4곳, 불우 항목에는 보림사(寶林寺), 천관사(天冠寺), 일림사(日林寺) 3곳, 교량 항목에는 예양강교(汭陽江橋), 감천교(甘川橋) 등 5개 교량의 위치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제언 항목에는 보문사제언(普門寺堤堰), 조암제언(槽巖堤堰), 동백정제언(冬栢亭堤堰), 어배곡제언(於背谷堤堰) 등 제언 4곳의 위치 뿐 아니라, 각각의 둘레와 길이, 너비, 수심(水深)까지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장시 항목에는 7개 장시의 이름과 각각의 개시일이 자세히 적혀 있다. 군내장(郡內場)은 2, 7일, 대흥면장(大興面場)은 1, 6일, 고읍면장(古邑面場)은 3, 8일, 안량면장(安良面場)은 5, 10일, 유치면장(有治面場), 4, 14일, 장동면장(長東面場)은 1, 6일, 웅치면장(熊峙面場) 3, 13일에 열렸다.
본 읍지는 지역 인물 관련 정보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읍지 전체 분량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환적(宦蹟) 항목은 역대로 장흥 지역에 부임했던 지방관들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다른 읍지들의 선생안(先生案)에 해당한다. 조선초기 인물인 안종약(安從約)부터 19세기말 박헌양(朴憲陽), 홍우석(洪祐晳)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장흥을 다스렸던 이들의 이름이 총망라되어 있다. 인물 항목에는 역대로 장흥 지역에서 배출한 저명 인물들의 이름과 관력(官歷),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 인물로는 임의(任懿), 임원후(任元厚) 등 10인, 조선시대 인물로는 태종조 좌명공신(佐命功臣) 마천목(馬天牧)부터 병자호란 당시 선전관(宣傳官)으로 활약했던 위산보(魏山寶)에 이르기까지 총 25인이 포함되어 있다. 장흥 지역 효자와 열녀 명단은 뒷부분에 따로 정리되어 있다. 효자로는 양인(良人) 백두철(白斗喆) 등 6인, 열녀로는 허씨(許氏) 등 5인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는데, 열녀들의 경우 대부분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순절한 이들이다.
장흥 읍지는 현재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6세기 전반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수록본, 19세기초에 편찬된 『장흥부읍지(長興府邑誌)』, 1871년에 제작된 『호남읍지(湖南邑誌)』 수록본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읍지와 비교하면 본 읍지는 전체적으로 내용이 소략한 편이다. 다른 읍지들에 나오는 방리(坊里), 관직(官職), 성씨(姓氏), 풍속(風俗), 성지(城池), 형승(形勝), 고적(古蹟), 공해(公廨), 창고(倉庫), 누정(樓亭), 관방(關防), 물산(物産), 군액(軍額), 조세 내역 관련 항목들이 빠져 있다. 그러나 장시(場市) 항목은 앞서 언급한 다른 장흥 읍지들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부분으로 특히 주목된다. 한편 구체적인 내용면에서 비교해보면, 토지결수나 호구수 등 통계수치가 이전 읍지들의 기록과 상이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에 제작된 장흥 읍지에 기록된 수치에 비해 토지결수와 호구수 모두 확연히 감소한 점이 눈에 띈다. 본 읍지가 기본적으로 기존 읍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간 변화가 생긴 부분을 조사하여 기존 읍지를 수정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본 읍지는 비록 소략한 분량이지만 다양한 항목을 설정하여 19세기말 장흥군의 여러 면모를 잘 전해주고 있다. 이전에 제작된 장흥 읍지들의 기록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여타 읍지들에 기재된 내용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당시 장흥 지역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자료이다.
주기사항
참고문헌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1~7(솔, 1996), 『국역 여지도서』1~50(디자인흐름, 2009),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양보경,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박사논문, 1987), 『전라도읍지』18(서울대학교 규장각, 2008)
집필자: 김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