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강좌 제8회) 예수 부활사건과 성령 세례/ 임의진
최근 노벨문학상 소설가 한강의 삼촌 한충원 목사가 조카에게 공개 편지를 썼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에게 보내는 삼촌의 편지'라는 글입니다. 큰형 한승원 소설가와 절교하고 사는 사이임을 드러나는 서문부터 시작됩니다.
“조카의 전화번호나 주소를 전혀 몰라 불가피하게 공개편지를 보낸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자 복잡한 감정에 빠졌다. 솔직히 말해 기쁨에 앞서 적잖은 충격과 놀라움과 걱정에 빠졌다. 노벨상 수상으로 인해 오히려 형님(한 작가의 부친) 집안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더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조카의 작품에 대한 평가로 한국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노벨문학상의 권위는 물론 조카의 작품에 대한 외설성 비판과 청소년 유해성 시비가 일어나고, 5.18 민주화운동과 4.3 사건에 대한 평가 시비가 새삼 일어났으며,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노벨문학상 취소와 한림원 규탄 시위까지 벌어졌다. 조카의 작품을 비판했던 어떤 작가가 특정시민단체에 의해 고발되는 상황을 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가 심히 걱정됐다. 제주 4.3 사건과 6.25 한국 전쟁은 이념 대립의 비극적 산물이고, 5.18은 독재정권 재탄생에 반대하다 확대된 비극적 사건이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건을 한쪽의 관점만으로 평하는 듯한 시각을 작품에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조카는 마치 이 대한민국이 정의롭지 못해 살 만한 나라가 아닌 것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작품을 몇 편 쓴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김대중 선생이 한국에 없었다면 5.18은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내용이 길어 다 소개할 수 없으나 이 삼촌이라는 목사의 글을 통해 볼 때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보수 목사로 보이며, 이 가정의 비극이 누구 때문인지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뒤에는 이 목사의 부인에게서 또 편지가 당도했는데 내용은 한술 더 뜹니다. 아무튼 이 일을 보아 <채식주의자>등에 등장하는 가정폭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게 되는 장면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때는 추수감사절이고, 우리 신앙강좌는 결국 <부활과 성령세례 편>에 이르렀습니다. 이 셋이 다르지 않고 같은 개념이라 흥미롭습니다. 역사의 왜곡, 궤변, 정신적 타락, 죽임과 살해의 동조, 추수를 가로막고 망치는 태풍 같은 노릇을 누군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훈풍을 싸늘하게 만들고, 기도의 말문을 막는 사람들. 아무튼 부활의 방해꾼, 교회의 방해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은 부활신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때문에, 세상의 권력에만 맛을 들이고 세상의 부귀영화가 정의로 판단되는 안타까운 정신적 미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이 사실 한국교회에 팽배해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지 않고 폭력적 제국의 자본주의 악령에 사로잡힌 결과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살다 죽는 것, 장례를 치르는 것은 인간이 ‘관혼상제에서 상제를 통해 성사를 치르며 사는 몸’ 임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죽으면 영이 산다는 말도 반부활적 사고입니다. 영생을 추구했던 이집트 미라도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이 암매장당한 수많은 불쌍한 여인들도 그 억울함에서 살아나지 못합니다. 시체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우리 기독교의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부활을 믿는 것은, 부활이란 단어가 아니라 <부활의 삶>을 믿는 것일 때 놀라운 신비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카더라’ 통신을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내 생에서 경험되는 신비속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자리잡게 됩니다.
이 가을의 열매는 다시 겨울을 맞이한 뒤 나타나지만, 같은 열매이나 같은 목숨은 아닌 것처럼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에 전제해야 할 것이 바로 수난이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그 사랑이 전제되지 않는 부활은 없어요. 이 부분이 너무나 중요한데, 아무도 이 부분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부활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들을 합니다. 보통들 ‘후다닥 믿는’, ‘대충 믿는’ 신앙이 쉬우니 부활도 쉬운 것으로들 착각해요.
우리 예수신앙은 어쩌면 잘 사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 죽는 일을 가르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생을 통해 우리를 비추며, 우리가 대체 저렇게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타자를 위한 기꺼이 드리는 삶에 대해 우리가 고백하는 순간, 부활의 길에 접어든 것입니다. 이 부활은 마침내 예수에게서 성령으로 연결되는, 영적 삶의 길로 접어드는 첩경입니다.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데, 어떤 귀신이 나타나 공동체를 부흥시킨 일이 아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한 구절처럼 ‘산자여 따르라’ 산자들이 함께하는 열정적 신심과 공동체적 부활사건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
더 깊은 대목은 로마서에 나오는데, 이미 우리는 죽고 산 몸이라는 고백입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6, 3)
육체의 부활이란 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소중한 고백입니다. 그 말은 역사를 지닌 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한 인간의 역사가 부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몸도 수많은 흉터와 잔금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부활을 믿는 사도신경은 우리로 하여금 ‘그노시스 영지주의’, 이원론적 허무주의와 결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육체를 하찮게 여기며 고행을 일삼는 그런 가르침과 결별한 것입니다. 이원론적 그리스 철학은 육신의 부활에 대해 부정적이고, 오직 영의 세계만을 이야기합니다. 육신은 죽으면 묻혀 썩고, 영만 부활한다는 것도 예수님의 부활사건과는 무관한 소리입니다. 예수 부활사건은 총체적이며, 통전적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체 예수는 인간의 가장 장엄한 쾌거인 ‘용서’를 이루어 냅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 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요한 20, 23)
부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용서와 평화를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우리는 부활한 사람이라고 믿게 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대목의 예수님은 곧장 하느님을 용서하며 수긍합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를 죽인 이들까지도 용서하십니다. 그 용서는 예수를 죽인 자들의 웃음을 부끄러움으로 바꾸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개 부분으로 나뉩니다. 1은 부활 명시(마태 25), 2(사도행전 2)는 성령 임재,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의 그만큼 거리에서 부활신앙은 분명히 싹을 틔우게 됩니다. 1은 갈릴리라는 장소.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을 천사가 가르쳐줍니다. 2는 성령세례를 통한 다른 언어의 말. 이전 가치관으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그러니까 이 광기의 분단과 전쟁의 시대에 ‘통일이나 용서, 화해 협력’도 다른 언어의 말이지요. 다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 성령에 휩싸여야 가능합니다.
예수 신앙, 부활 신앙은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무엇이어야지 고작 ‘소비사회 탐욕의 욕망을 채워낸 축복의 가치’를 논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살아서도 부자, 죽어서도 부자의 길을 가르치는 진리가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어부들은 가장 ‘뻥’, 구라가 셉니다. 성경의 어부들 이야기도 뻥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낚시꾼들의 뻥은 세상에서 다들 알아줍니다. 잡은 물고기 이야기를 하자면 크기가 손바닥을 넘어서 팔목까지 금세 자라납니다. 그런 재주로 붕어가 잉어로 돌변하게 되죠. 우리가 세상에 살며 행복하고 가치를 담아내는 일이 어쩌면 낚시꾼의 이런 재미난 행태나 다름없다면, 인생의 자랑은 그저 한편의 해프닝일 뿐입니다.
이 가을 ‘너부대대한’ 누렇고 큰 호박을 만드신 이도 하느님요 팔뚝만한 큰 붕어를 기르신 이도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요,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 만큼씩 주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 하는 계산적인 하느님도 아닙니다. 수확하다(쎄리조), 수확(쎄리스)하는 이 가을, 이 붉은 열매를 주시어 먹고 마시게 하신 삶은 통째로 은총입니다.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언제나 함께’ 동행하십니다. 농부이신 하느님(게오르고스 데우스) 농부 하느님은 우리를 사계절의 인생을 느끼게 하십니다.
또 인간의 탐심(플레어넥시아)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나눔의 은혜를 끌어안게 하십니다. 노동하는(코포스)하는 인간에게 해방의 자유를 안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영생부활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영생은 총체적이고 통시적인 시간, 노동과 쉼의 신비, 우주의 평화를 산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지금을 살지만 모든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부활의 체험학교, 부활체험이 바로 우리 인생의 서사라는 고백이며, 위로와 용서의 성령에 휩싸인 사람 임의 고백입니다.
정의와 평화의 승리를 확신하는 고백의 말씀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부활과 성령의 임재 신앙이 여러분에게 깨달아지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이 찾아오신 이곳은 갈릴리(갈릴라이아)입니다. “갈릴리에서 만납시다~”가 우리의 숱한 약속의 인사여야 합니다.
저는 지난 한 달 이태원 그 골목, 세월호 단원고 동네 안산을 찾아갔습니다. 그 유가족분들을 뵙고 마음가득 오히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영생과 부활이, 위로하시는 성령 하느님이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눈물 흘리는 곳, 갈릴리에 찾아갈 때면 예수님 당신은 그곳에 항상 먼저와 계셨습니다. (*)
첫댓글 오늘은 추수감사예배로 겸하여 드렸습니다.
구례에서 초등학생 아드님과 함께 예배에 참여해주신 신xx님 환영하고 감사드립니다.